제주 해비치호텔 李民 총주방장과 피자
工高 졸업후 들어간 이탈리아 레스토랑, 감자 800개 깎고 학원갈 때 한 판 먹고 힘내…
美 소문난 피자는 6년간 도전끝에 비결 알아내…
각계 명사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간절한 맛을 풀어내는 '내 인생의 맛'. 여덟 번째 주인공은 제주 해비치호텔의 이민(李民) 총주방장입니다. 피자에 대한 추억을 나눈 이씨와의 인터뷰를 이야기하듯 독자들께 들려드립니다.
첫사랑은 못 잊는다고 하죠. 그렇다면 첫사랑을 다시 만나 또 사랑에 빠지고, 잊은 줄 알았다가 또 만나 사랑하게 되면 그건 어떤 사랑일까요. 제게는 피자가 첫사랑이자 현재의 연인이고 미래의 애인입니다. 24년 요리 인생 동안, 결정적 순간에는 언제나 피자가 곁에 있었으니까요.
원래부터 요리사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공고에서 기계를 공부했죠.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졸업할 무렵에 어머니께서 지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접어야 했어요. 3년 후에 아버지마저 고혈압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제가 21살 때였죠. 그때 포장마차를 시작했어요. 동생 둘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까요. 서울 강남 고속터미널 옆에 차렸는데 닭똥집하고 순대국밥을 팔았어요. 2년 정도 지날 무렵 롯데호텔 다니던 친구가 호텔에 자리가 났다고 알려줬어요. 혹시나 해서 지원했는데 3차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정식 학교에 다녀야겠다, 해서 들어간 곳이 경주의 호텔학교였죠. 졸업하고 첫 실습 나간 게 웨스틴조선호텔이었고, 그곳이 저의 23년 직장이 됐지요.
- ▲ 제주도의 파란 하늘을 향해 동그란 피자가 핑그르르 돌았다. 서귀포 해비치호텔 이민 총주방장이 바다를 바라보는 호텔 잔디에서 자신의 요리 인생과 함께해 온 피자 반죽을 높이 던져 올렸다. /서귀포=이종현 객원기자 grapher@chosun.com
호텔학교 졸업할 때 목표는 오직 하나, 총주방장이 되겠다는 거였어요. 그러려면 양식을 통달해야 하니까 자원해서 웨스틴조선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예스터데이'로 갔죠. 아침반에 넣어 달라고 했어요. 밤엔 공부해서 대학에 가려고요. 오전 6시에 출근해서 식자재 타오고 감자 깎는 게 임무였죠. 서너 시간 걸려 감자 10포대 분량을 깎았죠. 800개쯤 됐을 거예요. 오후에 퇴근하면 영어학원이며 대학입시 학원에 다녔죠. 자정 무렵까지 공부했어요. 어떻게 버텼느냐고요? 제 배를 채워줬던 그녀, 피자가 있었으니까요. 퇴근 직전에 한 판씩 먹었거든요. 요즘은 건강에 안 좋다고 쓰지 않는 쇼트닝, 그걸 듬뿍 바른 팬 위에 구워낸 피자였어요. 주린 배를 채워주던 피자 한 판이 제 젊은 날을 버티던 힘이었죠.
2년 후에 프랑스 식당으로 옮겨가면서 피자를 잊었어요. 하지만 1990년 다시 나의 연인 피자를 만나게 됐죠. 예스터데이가 개·보수를 하면서 주방장으로 승진해 다시 갔거든요. 피자 반죽에 으깬 감자를 넣었는데 쫄깃하다고 유명했어요. 피자와 다시 살갑게 지내다 3년 만에 다시 프랑스식당으로 발령을 받았죠. 그 후로 6년간 그녀, 피자와 소식을 끊다시피 지냈어요. 총주방장의 꿈을 이루기 위해 프랑스 음식에만 몰두했으니까요.
다시 만나게 된 것은 2000년 미국 출장 때입니다. 로드 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에 '알 포르노'라는 끝내주는 피자집이 있다는 얘길 들었죠. 어떤 피자냐 싶어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못 먹어본 맛이었어요. 그릴에서 구운 얇고 바삭한 피자였죠. 게다가 소스와 치즈의 궁합은 하늘에서 맺어준 짝인 양 절묘했어요. 알고 보니 치즈만 해도 4가지를 쓰고 '며느리에게도 안 가르쳐주는' 치즈 배합 비율이 있더군요. 비밀을 캐내려고 며칠 동안 삼시 세끼 그 피자만 먹으면서 연구했어요. 숙소에 싸와서 엎어보고 뒤집어보고 눌러보고 잘라보고 갈라봤어요. 전신사진, 부분사진, 토핑 벗긴 '누드사진'까지 찍고 기록했죠. 가게에서 파는 조리법 책도 샀죠.
귀국해서 만들어봤는데 영 그 맛이 아니에요. 비슷하긴 한데 뭔가 부족한, 어딘지 모자란….
2003년에 다시 가서 먹어보고 만들어봤는데, 역시나.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되죠. 2006년에 또 찾아갔어요. 구원투수로 뉴욕에서 유학 중이던 전 직원을 시켜서 미리 부탁 또 부탁해놓고 찾아갔죠. 주방에서 피자 만드는 장면을 봐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의 감격이란…. 그때야 알았죠. 우리는 그릴에서는 색깔만 내고 소스와 치즈를 뿌린 후에는 화덕에서 구웠는데 거기서는 전 과정을 그릴에서 끝냈어요. 그래야 바삭하고 얇은 그 맛이 났던 거죠. 그 방법을 들여와서 선보였고 손님들께 칭찬 많이 받았습니다.
- ▲ 금귤 피자
처음 맛보고 6년간 3번 도전 끝에 이뤄낸 거죠. 궁극의 맛을 빚어내기 위해서는 타협도 포기도 없는 것이니까요. 작년에 이곳 해비치호텔로 온 후 첫 작품도 피자였어요. 제주도 특산품 금귤을 넣었죠. 고르곤졸라 피자의 쫀쫀한 맛이 달착지근한 금귤 맛과 어우러지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 여름이 지나면 '3일 숙성 피자'를 선보이려고 열심히 연구 중입니다. 오늘도 저는 바삭하고 쫄깃한 저의 연인 피자와 함께 제주도의 푸른 밤을 즐기고 있답니다.
●李民 총주방장은…
1962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인덕공고 기계과를 거쳐 경주관광교육원 조리과를 졸업했다. 1986년 웨스틴조선호텔에 입사했다. 2005년 신세계그룹에서 조리사 출신으로는 최초로 임원(상무)에 올랐다. 지난해 11월 23년간 일한 웨스틴조선을 떠나 제주 해비치호텔 총주방장으로 옮겼다. 1995년 서울국제요리경연대회 금상, 2003년 서울 세계음식박람회 금상 등을 받았다. 은퇴한 후에는 요리사를 꿈꾸는 고3 아들과 함께 자그마한 레스토랑을 하나 내는 게 꿈이다.
●피자는… 18C 나폴리 서민들이 먹던 음식, 2차대전 이후 전 세계로 퍼져
피자의 원형(原形)이라 할 수 있는 음식은 신석기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특별한 토핑 없이 얇게 구워먹는 빵이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의 병사들이 달군 방패 위에 피자를 구워 먹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토마토 토핑을 기본으로 하는 요즘의 피자는 18세기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시작됐다. 가난한 주민들이 쉽게 구할 수 있던 토마토를 뿌려 먹었다. 나폴리 최초의 피자가게가 문을 연 것은 1783년.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1830년 "나폴리의 서민들이 겨울을 날 유일한 음식은 피자"라며 "그들은 치즈와 토마토, 앤초비로 피자의 맛을 낸다"고 기록했다.
피자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세기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시카고·뉴욕 등 대도시에서 이탈리아계 주민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주로 이탈리아 후손이 즐기던 피자를 전 세계인들이 먹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미군이 이탈리아에 주둔했다가 피자 맛을 보게 된 것. 귀국한 후에도 그 맛을 계속 찾게 됐으며, 1958년 캔자스에서 피자헛이 탄생하면서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는 1985년 피자헛과 피자인이 차례로 문을 연 후, 불과 25년 만에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