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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공 변종인 신도비(부천 향토유적 1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공장공 변종인선생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변종인 묘역은 신도비와 비각이 서 있는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약 8m 거리에 위치한다. 묘는 정부인(貞夫人) 이천 안씨(利川 安氏)와 쌍분이며,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다. 묘역은 2단으로 조성되었으며 하엽형의 묘비와 상석, 장명등, 문인석 2기를 갖추고 있다. |
▲ 먼저 변종인선생 묘역에 가기 위해서 약간의 언덕을 오릅니다. |
묘비의 전면 상단부에 우에서 좌로 ‘유명조선국(有名朝鮮國)’이라고 횡서(橫書)로 음각하였으며 그 바로 밑에서는 위에서 아랫방향으로 ‘자헌대부공조판서변공지묘(咨憲大夫工曹判書卞公之墓)’라고 음각하였다. 묘비 상단 부분 일부가 결실되어 있다. |
▲ 언덕에 올라서면 묘역들이 보이고 안쪽에 변종인선생 신도비가 있습니다. |
변종인(卞宗仁) 신도비는 백색의 대리석제이며, 비좌하엽(碑座荷葉)의 양식이다. 개석부(蓋石部)가 하엽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하엽형이란 연꽃을 형상화하여 음각한 것으로 화관석(花冠石)이라고도 한다.
비좌는 방부(方趺)형이며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표현되어 있다. 마모가 심하여 비문의 판독은 어려운 실정이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성현(成俔)이 지었다. 비신은 높이 155.5cm, 폭 75.5cm, 두께 20cm이다. 비좌는 높이 67.5cm, 너비 107cm, 두께 56cm이다. |
▲ 변종인선생 신도비 모습. 신도비의 머릿돌은 묘갈과 같고, 받침돌은 단이 높은 것이 특징입니다. |
현재 신도비의 위치는 처음에 세워졌던 장소에서 벗어나 있다고 전해지는데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변종인의 신도비가 세워진 직후부터 고강리 일대에 원인모를 화재가 빈발하여 많은 재산상의 피해를 초래하였던바, 주민들의 공론으로 이것을 옮기자 거짓말과 같이 화재가 진정되었다고 한다.
변종인 신도비는 1986년 4월29일 부천시 향토유적 1호로 지정되었으며 비문의 훼손을 방치하기 위해 1996년 2월 비각을 설치하였다. 비각은 3.5평의 익공식 비각이며 맞배지붕에 겹처마 양식이다. 비각 전면에는 신도비 설명문이 오석제 사각비석에 새겨져 있으며 기단석에는 부천시장 명의의 향토유적 지정서가 화강암판에 새겨져 있다. |
▲ 신도비 우측에 변종인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
조선 전기 무신인 공장공(恭莊公) 변종인(卞宗仁, 1433~1500)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자원(子元)이다. 1460년(세조 6) 무과에 급제,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당상관이 되었다. 1473년(성종 4) 오랑캐가 북변을 침범하자 조전장(助戰將)으로 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오르고, 그 공으로 1478년 은성도호부사(銀城都護符使)가 되었다. 1481년 공조참판을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 ㆍ영안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
▲ 변종인선생 묘역에 올라서서 바라 본 모습 |
▲ 변종인선생 묘역 전경 |
1486년 영안북도병마절도사로서 오랑캐의 침입을 방어하지 못하고 태만하였다는 이유로 장형에 처해져 변방으로 충군(充軍)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이어 공조참판 ㆍ영안남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다시 영안북도병마절도사를 거쳐서 1494년 지중추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
▲ 변종인선생 구 묘비와 신 묘비 모습 |
1496년 (연산군 2)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이어 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하여 전후 12회에 걸쳐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공헌하였다. 1498년 65세의 고령임을 들어 수군절도사직을 사임하였으나 다시 공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그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겼으며, 지중추부사로 재직하다가 죽었다. |
▲ 묘역 측면에서 바라 본 모습 |
시호는 공장(恭莊)이다. 공장(恭莊)의 시호는 “일을 조심스럽게 하고 임금 섬기기를 공손히 하여 공(恭)이고 적을 이기고 뜻이 강했으므로 장(莊)이라”하여 내려진 시호라고 한다. 연산군일기, 성종실록 등에 변종인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
수주 변영로선생 묘 |
▲ 묘역 뒤편 좌로부터 변영로(卞榮魯),변영태(卞榮泰),변영만(卞榮晩) 3형제 묘역 |
변영로(卞榮魯, 1898~1961)는 시인이자 영문학자이다. 아호는 수주(樹州). 정상(鼎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 姜氏)이다. 서울에서 출생. 중앙 학교를 중퇴하고, 1913년에 중앙 기독교 청년 회관 영어반을 수료하였다. 1914년에<청춘>지에 영시 [코스모스]를 발표했으며, 1918년에는 중앙 고보 영어 교사가 되었다. 3.1 운동 당시에는 YMCA의 구석진 방에서 <독립 선언서>를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였다. |
▲ 변영로선생 묘역 입구 표지석 좌측으로 오릅니다. |
▲ 전방에 기념비가 있고 윗단에 변영로 형제 묘역이 있습니다. |
1920년에 <폐허>의 동인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감상적인 낭만시를 쓰기도 했으나, 1922년 이후에는 <개벽>을 통해 계속 해학이 넘치는 수필과 발자크의 작품 등을 번역하여 발표하였다. 1924년에 발간된 첫 시집 <조선의 마음>에는 우리말의 순화에 기여하는 높은 시정신과 함께 일제하의 민족적 울분과 저항 의식이 짙게 깔려 있는데, 명시 <봄비>와<논개>가 여기에 실려 있다. |
▲ 묘역 전방 하단에 위치한 수주 변영로선생 기념비 |
▲ 전면 좌로부터 변영만, 변영태, 변영로 묘역 |
1933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산 호세 대학을 수료하고 귀국,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신가정>의 편집장이 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했다. 광복 후에는 성균관 대학교의 영문과 교수와 해군 사관 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55년에는 한국 펜클럽 회장이 되었다. 1948년에 제1회 서울시 문화상(문학 부분)을 받았다. 시집 <수주 시문선>, 수필집<명정 40년> <수주 수상록>등이 있다. |
▲ 수주 변영로선생 묘역 전경 |
변영로의 묘에는 상석, 향로석, 혼유석 등의 석물들과 신, 구2기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 앞쪽에는 수주기념비가 위치하고 있는데 기념비의 기단부에는 ‘수주변영로선생기념비’라는 음각이 있으며 비신 전면에는 ‘생시에 못 뵈올 님을 꿈에나 뵐까 하여 꿈가는 푸른고개 넘기는 넘었으나 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 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 …’라는[생시에 못뵈올 임을]의 전반부가 기록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일석 이희승이 짓고 일중 김충현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
▲ 변영로선생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 변영로선생 묘역 좌측에 위치한 밀양 변씨 종중 묘역 |
변종인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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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상단의 좌측 묘역이 변영로선생 묘, 하단의 우측 묘역이 변종인선생 묘입니다. 소재지 : 경기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산63-7 |
지도 좌측 상단의 화살표 위치에 변종인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신월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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