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해
원준연
그곳에 가고 싶었다. 아니 그 섬에 가고 싶었다.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다는 환상의 보라섬 말이다. 그런데 하필 잡은 날짜가 3월 중순이라 꽃들이 아직 기지개를 켜기도 전이니 그 참모습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아쉬움의 크기가 그만큼 더 커졌다.
언뜻 입구의 커다란 사각형 조형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화강암에 뚫어진 삼사오각형의 구멍은 섬의 모양을 나타내고 10여 개 뚫어 놓은 것은 천 개가 넘는 많은 섬을 뜻하고 있었다.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가 처음으로 선정한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Best Tourisin Village)의 상징으로, 이 마을의 이정표이기도 하다. 영광의 수상 패를 30배 확대한 것이란다.
섬의 모양이 반달을 닮았다고 해서 반월도라고 이름 지어진 섬에 가기 위하서는 부교를 지나야 한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그 높이에 따라 다리도 들어 올려지는 구조다. 그런데 부교를 거의 건널 무렵에 사다리꼴로 된 경사진 곳이 있었다.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일정 부분을 높게 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는지 추를 달아서 다리의 상판이 들어 올려 질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나의추억이 서려 있지는 않지만, 부산의 명물 영도대교와 같은 이치다. 큰 배가 다리 밑을 지날 수 있도록 상판을 드는 이엽식(二葉式) 도개교인데, 이곳에서는 한쪽만 열리는 일엽식(一葉式)으로 운영한단다. 그나마도 바다의 수심이 낮아서 통행을 꺼리는 선주들이 많은 바람에 실제로는 거의 사용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다리야 열리든 닫히든 걸어서 육지를 건너고 싶다는 한 할머니의 소박한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보라섬의 주섬인 반월도에 들어서면서도 감탄사가 흘러나오지 않은 것은 순전히 시기 탓이었다. 좀 이르게 찾다 보니, 꽃도 아직 꿈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섬도 깨어 있지 않았다. 섬은 이제야 꽃이 물을 빨아올리듯 다리나 건물 등의 색상을 보완하고 있었다. 지붕, 목교, 의자, 조형물, 쓰레기통 등 눈에 띄는 대부분의 사물이 보라색을 입고 있었지만, 정작 보라섬의 유래가 된 도라지나 오동나무, 라벤더는 여름에 꽃을 피우지 않던가. 보라 꽃은 차치하더라도 그 흔한 노랑 개나리꽃도 볼 수 없으니 화창한 봄날이 결코 화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퍼플섬을 찾은 느낌이 반감하는 듯하였다.
서툰 우리말을 하는 이국인이 찾아올 방문객을 위해서 열심히 목교의 색을 새롭게 칠하고 있다. 검은 듯한 그들의 얼굴에서 보랏빛이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보라색 페인트의 영향일 것이다. 색이 바랜 희끄무레한 보라색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보라색이 더해지고 있다. 어느 부분에서는 투톤을 이루고 있는데,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예쁘다는 일행도 있다.
사실 우리 일행을 빼고 나면 사람 구경도 쉽지 않을 정도로 섬은 고요에 잠겨 있다. 전동카트를 기다리기까지는 시간이 남아서 잠시 걷기로 하였다.
길가 자작나무의 보호를 위해서 줄기를 감싼 보라색 천에는 물방울 모양의 하얀 점무늬가 박혀 있다. 잠복처 유살법(Banding)이라고 해서 해충의 주촉성을 이용하여 해충을 제거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효과도 있겠지만 이맘때쯤에 섬을 찾는 관광객에게는 하나의 눈요기가 되고 있다.
온통 보라색의 섬에 유일하게 컬러풀한 무지개색의 걸터앉는 돌(?)의자를 만났다. ‘I PURPLE You’라고 쓰인 포토 존이다. 그 옆의 안내판에는 BTS(방탄소년단)의 ‘뷔’ 가 만들어낸 말로 일곱빛깔무지개의 마지막 색처럼 「끝까지 함께 사랑하자」라는 의미라고 쓰여 있다. ‘보라해’라는 말이 그렇다는 뜻이다. 젊은 친구가 참 가상한 아이디어를 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끝까지 함께 사랑하자'라는 문구를 마음에 간직하며 나무다리를 걷는다. 썰물 때라 물이 빠진 벌 위에 드러난 목교를 걷는 것은 안심되었지만 긴장감이나 박진감은 많이 떨어졌다. 다리의 견고성을 위해서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문틀 모양이 설치되어 있다. 겹쳐 보이는 그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인데, 생뚱맞게도 일본의 어느 신사에 갔을 때 도리이(鳥居)가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연상된 것이다. 속(俗)의 세계에서 성(聖)의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곳에는 애잔하고 고결한 전설이 숨겨져 있었다.
목교가 생기기 훨씬 전의 반월도에는 비구가 사는 암자가 있었고, 부르면 들릴 듯 마주 바라다 보이는 박지도에는 비구니가 머무르는 암자가 있었다. 아무리 속세를 떠나 정진하는 스님일지라도 외로움은 참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서로 마음이 통한 것인지 두 스님은 바다를 건너 만날 요량으로 돌을 날라서 길을 내기로 하였다. 그 길이 완성되어 드디어 만나는 날 차오르는 바닷물에 그만 휩쓸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그때 스님들이 만든 돌둑 길이 썰물 때에는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하고 있다. 아마도 두 스님은 끝까지 함께 플라토닉러브를 구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보라색은 독신생활을 하는 성직자를 상징한다는 말과도 잘 맞는 퍼플섬 만이 간직한 전설이다. 극락에서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꼭 이루어지기를 소원해본다.
퍼플섬을 떠나면서 '보라해'라는 말이 계속 따라온다. 보라색은 우아, 화려,고독, 추함 등의 느낌이 담겨있다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사랑에는 우아함이 담겨있을지 고독함이 담겨있을지…
《그린에세이》 23. 5~6월호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