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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호(金興浩, 1919~2009) 목사 이야기. 아미산
<김흥호(金興浩, 1919~2009) 목사 이야기>
김흥호 목사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인 영성가이자 구도자인 김흥호 목사는 유교, 도교, 불교를 모두 넓은 품에 안은 ‘기독교 도인’이다.
그는 유교, 도교, 불교 등 동양의 전통 종교를 섭렵한 개신교 사상가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 선생의 제자였다. 그의 영향을 깊게 받아 기독교적 입장에서 타 종교를 이해하고 해석했다.
이런 공부를 바탕으로 1965년 이화여대 대학교회에서 일요강연을 시작했다. 기독교는 물론 불교, 유교, 서양철학까지 다양한 경전과 고전을 넘나드는 ‘연경반(硏經班)’이었다. 일반인에게도 개방된 연경반 강연은 2009년 12월 ‘마지막 수업’까지 무려 45년간 이어졌다. 여기에는 수십 년간 참석한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김 목사는 1919년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기독교 목사였다. 평양고보,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했고,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와 교목실장, 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 등을 지냈다.
35세 때인 54년 김 목사에게 닥친 ‘시간제단(時間際斷)’ 체험, 즉 시간이 끊어지는 체험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인은 신앙인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기독교든 불교든 자신에게 맞는 종교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활활 타는 스타일은 기독교로, 맑고 청정한 상태를 좋아하는 사람은 불교로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적 체험은 깊게 들어가면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확신이 있어 가능한 말이었다.
불교 경전을 강의하는 이유에 대해 “기독교보다 불교가 이론적으로 잘 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사람은 누구나 사명을 갖고 태어나는데, 거듭나는 체험을 해야 그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사명은 가르치는 일이라는 자각에 따라 강연을 하고 책을 썼다. 특히 55년간 일일일식(一日一食), 하루에 한 끼씩만 먹으며 강연에 매달린 이력은 유명하다.
-----김흥호 목사가 남긴 말----
• 동양인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체(體) 받아 하나님의 도를 체득하는 것이다. 체득이 없으면 그리스도교는 동양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체득의 종교이다. 율법을 체득하는 것이다.… 복음은 체득이지 체득이 아니면 복음은 지식에 불과하다.” (설교집 <영원을 사는 사람> 중)
• “진리를 깨달아야 인간이 된다.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아직 인간이라 말할 수 없다.”
• “성인(聖人)의 특징은 자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 “무아(無我)는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내 힘으로 무아가 되면 그것은 유아(有我)가 되는 것이다.”
• “기독교의 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교의 생로병사를 벗어나는 것이다.” (김흥호 목사 연구모임 ‘현재학회’ www. hyunjae. org에서 발췌)
• “한 끼 먹는다는 것은 한 번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먹는다. 그런 뜻이다. 일식이 영식(靈食)이 돼야 한다. 한 번 먹는다는 것에 매달리면 율법주의가 된다.” (숭실대 교수신앙수양회 강연 중)
• 일반적으로 불경은 석가 사후 400년 내지 500년만에 나왔다. 석가의 사상을 이어받아서 그 당시 글 잘 쓰는 사람들, 사상가들이 그것을 문학적으로 하나의 작품을 만든 것이다.
‘논어’는 제자와 스승이 질의응답을 한 내용이다. 그런데 불경은 석가가 죽은 지 500년 후에 제자들이 문학적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러니까 불경은 하나의 작품이지 석가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경전이 많은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렇게 많을 수 있겠는가.
성서에서 예수님은 늘 하느님의 나라를 말했지만 하느님의 나라가 어떠하다고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세계는 말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가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의 요한계시록 같은 것도 모두 문학작품이지 사실은 아니다.
<화엄경>은 부처의 이야기가 아니다. 달리 말해서 이것은 인간의 이야기다. 더 다르게 말하면 인격의 이야기요, 더 다르게 말하자면 이것의 나의 이야기다. 내가 인격이지 나를 떠나서 어디에 인격이 있겠는가. 우리가 그것을 내 인격 속에서 느꼈을 때 <화엄경>이 이해되는 것이지 내 속에서 그 인격을 느끼지 못하면 <화엄경>이라는 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
김흥호 목사님은 도인이자 철학자. 35세 때 주역(周易)을 묵상하다 문득 견성한 동양적 기독교인이다. 하루 한 끼, 새벽 찬 목욕으로 몸과 정신을 단련해 온 김흥호 교수는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하고, 그 깨달은 바를 이웃에게 전해온 사람이다.
그는 좋은 스승을 만나 귀를 뚫었고(聲聞), 각고의 노력으로 눈을 뚫었으며(緣覺), 자기를 이김으로써 코를 뚫고(菩薩), 평생을 대학강단과 고전연구 모임에서 강의하며 입을 뚫었다(佛陀).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했다는 말은 그가 곧 ‘본(視)’ 사람이란 것을 뜻한다. 그는 견성(見性)을 했기에 관(觀)을 갖게 된 눈 밝은 사람이었다.
김흥호의 사람됨을 깊게 이해한 네 사람이 있다.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1890~1981), 지기(知己) 안병무와 변선환, 그리고 일본인 선승(禪僧) 마쓰나가다.
먼저 다석은 김흥호의 생명의 은인이다. 함석헌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다석 선생은 병상에 누운 청년 김흥호의 병이 마음의 번뇌에서 비롯된 것임을 꿰뚫고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었다.
‘계시’라는 뜻의 김흥호의 호 현재(鉉齋)는 다석이 내려준 것이다. 여러 차례 공동묘지 입구까지 실려 갔던 김흥호는 다석을 만난 지 6년 만에 깨달음을 얻은 이후 45년간 병치레를 해본 일이 없었다.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자인 안병무와 변선환은 김흥호의 득음(得音)을 알아차린 친구들이다. 평양고보 동창인 안병무는 김흥호가 나이 40이 넘어 미국으로 유학 간다고 하자 적극적으로 말렸다. 이미 깨쳤는데 뭘 고생스럽게 나가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기어이 떠나는 친구에게 안병무는 ‘이 세상에서 제일의 죄인은 목사이니 제발 목사가 돼서 돌아오지는 말라’고 했다. 그러나 김흥호는 미국에서 감리교 목사가 돼 돌아왔다.
“自性을 보았는가?”
선불교를 세계에 알린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의 제자로 미국 시카고 선(Zen)센터 소장으로 있던 마쓰나가(松永)는 1970년대 초에 한국의 선사들을 만나보려고 내한했다.
그는 자신을 안내해줄 사람을 수소문하다가,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버틀러대(Butler University) 대학원에서 종교사학을 공부해 일어와 영어가 능통한 김흥호를 소개받았다.
전국의 각 사찰을 일주하며 고승들을 만나보고 서울로 돌아온 마쓰나가는 한국을 떠나기 전 동국대에서 한국의 식자들을 상대로 강연할 기회를 가졌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과 질의응답을 하는데, 청중석에서 선문답식의 난해한 질문을 던졌다.
그 동안 전국 각지를 함께 다니며 숱한 대화를 나누면서 김흥호의 깨달음의 경지를 잘 알게 된 그는 김흥호에게 대신 대답해줄 것을 요청했다.
즉석에서 입을 연 김흥호의 거침없는 법담은 좌중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마쓰나가는 돌아가는 길에 일본의 저명한 불교신문에 한국의 선불교 순례 경험을 기고했다. 그 글에서 그는 한국에 가보니 뜻밖에도 기독교 목사인 김흥호가 구경각(究竟覺)의 경지를 소요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적었다.
그 기사는 한국 불교계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어느 날 한 수좌가 김흥호를 찾아왔다. 김흥호를 점검할 요량으로 대뜸 이렇게 물었다.
“자성(自性)을 보았소?”
김흥호는 대답했다.
“그렇소. 보았지요.”
놀란 승려가 되물었다.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김흥호가 대답했다.
“석가모니는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말문이 막힌 그 승려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 돌아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돌아가서 어느 불교지에다 김흥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적었다. 하지만 김흥호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평한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의 말처럼, 수십 년 간 여러 후학에게 말씀의 성찬을 베풀어온 그도 이제 붉고 동그란 단감이 돼 뭇사람의 먹이가 되고 있다.
인생의 문제는 해답이 있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숙해져서 문제 자체가 문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풀린다. 1948년 봄 김흥호는 처음으로 유영모의 성경 강의에 참석했다. 그는 첫날 이런 질문을 했다.
“하나, 둘, 셋이 무엇입니까?” (후에 이 삼재사상(三才思想)은 김흥호의 ‘동양적 기독교 이해’에 핵심을 이룬다.)
김흥호는 다석에게서 무서운 힘을 느꼈다. 말씀엔 인격의 무게가 실려 가슴으로 바로바로 육박해 들어왔다. 다름 아닌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실천하는 힘이었다. 김흥호가 본 다석은 한 번 앉으면 몇 시간이고 정좌를 하고, 평생 걸어만 다녔으며, 하루 한 끼만 먹는 참사람(眞人)이었다. 다석(多夕)이란 호에는 하루 세 끼를 저녁에 합쳐 먹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겨울 아침, 바다에 뛰어들다.
김흥호가 파악한 다석의 실천(道)은 ‘일좌(一坐) 일인(一仁) 일식(一食) 일언(一言)’의 ‘하루살이’이다.
즉, 새벽에는 일어나 꿇어앉아 공부하고, 낮에는 열심히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저녁에는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며, 밤에는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아침은 ‘봄’이요 따라서 꿇어앉아 동서의 고전을 ‘보며’, 낮은 ‘여름’이요, 따라서 열심히 ‘열음질(농사)’을 하고, 저녁은 ‘가을’이요, 따라서 겸허하게 ‘갈무리(추수, 즉 식사)’를 하고, 밤은 ‘겨울’이요, 따라서 깊은 잠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다석은 하루를 곧 일생처럼 살았다. 밤마다 십자가에 달리고, 아침마다 부활했다. 그는 그의 정신일기[다석일지(多夕日誌)]에 하루하루를 셈해 기록했다. 그에게 있어 ‘오늘’은 언제나 ‘오!(감탄사) 늘(영원)’이었다.
김흥호는 스승이 실천해 보인 그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걸어갔다. 심지어 새벽에 냉수마찰을 하는 스승을 본받으면서도 또한 지지 않기 위해, 제자는 피난지 부산과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겨울에 아침마다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 특별한 사제관계였다.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도인(道人)의 삶이라면, 김흥호의 삶은 바로 그 전범이라 할 수 있다. 김흥호는 훗날 다석의 도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한 후 이렇게 요약했다.
일식주야통(一食晝夜通) 일언생사통(一言生死通)
일좌천지통(一坐天地通) 일인유무통(一仁有無通)
그는 스승 다석의 사상을 이렇게 요약해 일일일생(一日一生)의 삶을 살고 갔다고 했다.
김흥호는 다석을 따라 다닌 지 3년 만인 어느 날 북한산 구기동 계곡 폭포가 있는 곳에서 요한복음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에 대한 다석의 설명을 듣고 귀가 뚫리는 경험을 한다.
그 후 다석은 본인이 67세 되는 날 세상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스승의 말을 철석같이 믿던 김흥호는 그 다음날 스승의 장례를 치르려고 댁으로 찾아가던 도중에 길에서 다석을 만났다.
그 순간 김흥호는 세상을 떠난 것은 다석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심신이 지극히 쇠진해 있던 김흥호는 어머님의 간절한 권유로 결혼을 생각한다. 그러나 다석은 한사코 제자의 결혼을 반대했다. 너무나 병약하던 김흥호는 오로지 쉬고 싶어 스승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한다. 이때 그는 신촌에 있던 천막교회를 인수받아 대신교회를 세운다.
그러나 결혼을 했어도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 <주역>에 몰두했다. 매일 한 괘씩 종이 위에 그려놓고 종일 들여다보다가 35살 되던 해 3월17일 오전 깨달음을 얻는다.
평소 다석은 한국인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구약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도 함께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동양의 유ㆍ불ㆍ선(儒佛仙) 삼교와 서양에서 유입된 기독교의 근본 오의(奧義)를 회통한 후 그 견처(見處)를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으로 남겼다.
단단무위자연성(斷斷無爲自然聲) - 자신을 텅 비웠을 때 자연과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즉심여구토성불(卽心如龜兎成佛) - 마음의 본체를 깨치면 만물이 부처다
삼위부활영일체(三位復活靈一體) - 부활한 정신에 성부 성자 성신이 하나의 영으로 빛난다.
천원지방중용인(天圓地方中庸仁) - 하늘과 땅의 진리는 중용지간에게서 구현된다.
김흥호도 이날부터 일식(一食)에 들어갔다. 그리고 석 달 뒤 ‘대학’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스승을 찾아가 보여드렸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중용’을 우리말로 옮겨 스승에게 보였다.
그때 마침 다석의 집에는 훈민정음을 연구하던 이정호 전 대전대 총장이 찾아와 있었다. 김흥호는, 다석이 이정호 교수에게 자신이 번역한 ‘대학’을 보이며, “이 글은 공자께서 번역하셔도 이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는 김흥호를 향해 “이것은 김군이 쓰기는 했지만 김군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호를 지어주었다.
이후 김흥호는 연세대, 이화여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면서 유ㆍ불ㆍ선, 기독교의 주요 경전을 3년간씩 총 12년 동안 읽어나갔다. 1963년 44세 되던 해에 위에서 말했듯이 친구 안병무 등의 만류를 무릅쓰고 미국으로 교환교수 겸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2년 뒤, 동 대학에서 종교사학 석사학위를 받는 한편 웨슬리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전 미국 감리교단의 비숍(감독)이며, 한국 감리교 명예 감독이었던 레인즈 목사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인디애나주 감리교회의 정목사로 등록된다.
“다석 사상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혼합종교 아니냐고도 하고 다원주의 아니냐고도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차라리 일원다교(一元多敎)라고나 할까요? 겉으로는 무슨 종교를 표방해도 결국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것이 선생님의 사상입니다.” 김흥호의 말이다.
“모든 종교의 기본은 에고(ego-자아)를 죽이는 것이잖아요. 기독교의 ‘날 버려라’, 불교의 고집멸도(苦潗滅道), 공자의 극기(克己), 노자의 무사(無私)가 다 에고를 죽이라는 말인데, 나는 천안농장에서 어지간히 그 연습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려면 에고를 죽일 수밖에 없어요. 에고는 거짓 나죠. 그게 죽는 자리에 ‘참나’가 들어서는 겁니다.
천안역 앞에서 행인에게 손을 벌리는 거지가 천사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 손이 하늘나라 시민증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손을 내밀면 천국시민이고 외면하면 아닌 거죠. 김용옥은 하버드 나온 걸 자랑하지만 나는 똥 푸면서 큰 가르침을 얻은 거예요.” 이것은 김흥호의 친구 박영호의 말이다.
이것이 바로 스승 유영모와 제자 박영호의 신관이다. 그들이 모두 이런 식이다. 보수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를 수밖에 없다. 종교간의 구분이 무의미하며 어느 종교든 결국 다 같다는 것이니 다원주의니 혼합종교니 하며 비난받기 일쑤다. 그러나 종교계 내부에서도 서서히 그들의 생각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늘고 있다.
“아마도 21세기에는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기독교의 좋은 점과 불교의 좋은 점을 제대로 가려내서 저렇게 매치시켜 놓으신 분이 다석 선생님이죠.”
김흥호 목사의 저서에는
노자의 <도덕경>을 해설한 아홉 권,
<장자>를 해설한 10여 권,
<주역강해>
<화엄경강해>, <법화경강해>, <원각경강해>
요한복음 강해집 <빛, 힘, 숨> 전 5권
설교집 <사람 삶 사랑>, <하루를 사는 사람>, <영원을 사는 사람> 등이 있다.
<화엄경 강해>는 불교경전 중에서 우리나라 불교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화엄경> 80권에 대한 김흥호 목사의 해설이 <화엄경 강해> 3권으로 출간된 책이다.
<화엄경 강해>는 3년여에 걸친 김흥호 목사의 강의를 그대로 우리말로 풀어서 쓴 책이기 때문에 읽기도 쉽고 이해도 쉬워 처음으로 <화엄경>을 접하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화엄경강해> 서문에서 김흥호 목사는 "부처님은 자신을 안 사람이다. 노자도, 공자도, 예수님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들의 경전을 읽는 것은 그 속에서 남이 아닌 바로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김 목사가 동서양의 경전과 종교서적을 두루 섭렵하는 것은 '종교와 종파, 철학과 학파를 초월해 개개인이 내면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눈 뜬 사람'으로 표현한다. 진리에 눈 뜬 사람이란 뜻이란다.
"불교에선 ‘피안(彼岸)’이라 하고, 기독교에선 ‘하늘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김흥호 목사께서는 학자답게 ‘이상 세계’라고 말한다. 이상 세계는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세계다. 눈 뜬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가 이상 세계요. 눈 뜬 사람이 되기 위해선 눈 뜬 사람을 만나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원각경 강해>는 불교경전 중에서 중국 불교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원각경>에 대한 김흥호 목사의 해설이 <원각경강해>로 출간된 책이다.
원각(圓覺)을 유교식으로 번역하면 ‘대학(大學)’이나 ‘중용(中庸)’이다. 원(圓)은 대(大)와 같으며, 각(覺)은 학(學)이다. 또한 원각(圓覺)을 중용(中庸)이라 번역하면 원(圓을 중(中)으로 각(覺)을 용(庸)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도교에서는 원각(圓覺)을 도덕(道德)으로 본다. 원(圓)이 도(道)이며, 각(覺이) 덕(德)이다.
모든 종교나 철학은 다른 종교나 학문을 수용해야 살지 그렇지 못하면 죽고 만다. 중국의 종밀(圭峯宗密, 780~841)이란 선사가 선과 화엄의 대가가 된 뒤 유교와 도교를 다시 연구해 재해석하여 불교 속에 유교와 도교를 다 수용함으로써 결국 당나라를 불교 일색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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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
유영모 목사
한국의 개신교 사상가이며, 오산학교의 교육자이기도 했던 다석 유영모는 우리말과 글로 철학을 했던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는 1959년 <노자(老子)>를 순수 우리말로 완역하고,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교, 불교, 노장사상을 넘나들며 동서고금의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독파했다.
특히 그는 유ㆍ불ㆍ선(儒佛仙)이 살아있는 한반도의 토양 위에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한국적 기독교’를 연구한 비교종교학 연구가이자 수행적 실천가였다.
유영모에 의해 수용된 기독교 사상은 자연에 대한 우주론과 ‘무(無)’ ‘공(空)’과 같은 개념을 포함한 동양적 사상과 결합됐다.
때문에 제의적이며, 도그마적이고, 종말론적 인식을 담고 있던 서구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와 석가가 말한 ‘니르바나’가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얼 사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재해석했다. 때문에 그가 보는 기독교는 한 개인이 그것을 수용하는 의미를 넘어서 그 땅과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 중요했다.
근대화를 겪으면서 서구 제국주의적 기독교가 선도적 위치에 서게 되고, 다른 모든 문화는 ‘주변 문화’로 간주되며, 계몽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유영모는 그 속에서도 토착신앙과 기독교의 결합을 고민하며 독자적인 종교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 기독교 내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다른 종교나 각종 사회문제 등 기독교 밖의 문제는 등한시하거나 배타적 태도로 일관하는 2016년 대한민국 종교 현실에서 다시금 그를 떠올려 보게 된다. - 안혜숙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대부분 옮겨온 글입니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자신이 한 없이 한 없이 작아짐을 느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못난 불자임을 한 없이 한 없이 부끄러워했습니다.
<화엄경 강해>와 <법화경 강해>를 접하고 많이 놀랐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모든 종교는 하나임을 깊이깊이 깨달았습니다. 부처님도 궁극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