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근대적 상상력의 임계들』 차승기 지음│푸른역사│2009
‘근대’라는 보편성과 ‘일본’이라는 특수성 사이에서 ‘근대일본’을 탐사해 들어가는 작업은 퍽 흥미롭다. 예컨대 “개국이라는 의미에는 자신의 바깥, 즉 국제사회에 여는(開) 동시에 국제사회에 대해서 자신을 국가(國)=통일국가로 선을 긋는(劃) 양면성이 있다.”(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의 사상』)라는 진술을 보자. 이때 보편성과 특수성은 몸 하나에 머리 둘 달린 뱀, 양두사처럼 자리한다. 즉 보편성과 특수성을 반대되는 것으로만 파악해서는 곤란하고, 이를 한 쌍의 긴장 관계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이라든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등은 이러한 전제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연구 경향이 일본에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이해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법을 '근대한국'에 도입해 보는 것은 어떨까. 차승기의 『반근대적 상상력의 임계들』(푸른역사, 2009)은 마치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써 내려간 것처럼 읽힌다. 가령 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을 두고 다음과 같이 진술해나갈 때, 그러한 입지는 뚜렷하게 부각된다. “과거 시가 양식에서 독자성의 원천을 찾고자 하는 최남선의 시도는 반근대적 지향을 내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시조를, 특히 시조의 견고한 정형성을 문학적·형식적 완전성과 등치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세계문학의 일반성이 자명한 규범으로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식민지 상태로 전락했으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민족(국가)과 변별되는 지표를 마련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편성과 특수성의 긴장 관계를 전면에 배치한 것이 『반근대적 상상력의 임계들』의 첫 번째 특징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긴장 관계는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게 구성된다. 전통에 대한 관심이 똑같이 부각됐더라도 1930년대 후반 이후 상황을 1920년대와 똑같이 이해해서는 곤란한 이유가 여기서 발생한다. 1930년대 중반이라면 이제껏 지향해오던 근대가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뒤집어지게 된 시기이다. 근대문명과 제도가 발원한 유럽에서 파시즘이 창궐함으로써 근대가 부정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에 따라 동양이 서양의 반대편으로 설정돼 부각되는 가치 전도가 펼쳐졌던 것이다. 이렇게 전도되는 양상을 『반근대적 상상력의 임계들』은 꼼꼼하게 정리해 내고 있다. 이러한 단절이랄까 전도를 전제하지 않고 1920년대에나 가능한 관점을 식민지 말기까지 적용해 나간 연구가 아직까지도 많이 쏟아져 나오는 실정이다. 그러니 이를 분명하게 정리해냈다는 점을 두 번째 특징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제5장 ‘새로운 질서로서의 동양적 세계’였다. 첫째, 전향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전통은 무엇이었던가. 그들이 보편(자본주의 극복)과 특수(동양)를 사회과학의 맥락으로 끌어안는 양상은 꼼꼼하게 따라 읽을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계급과 민족을 하나의 관점으로 묶어낸 임화와 김남천의 ‘민족문학론’의 형성 맥락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식민지 지식인들은 일본 전향 좌파들이 내세웠던 ‘세계사의 철학’이라든가 ‘동아협동체론’에 대해 어떻게 비판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었던가. 철학자 서인식이나 소설가 김남천의 예를 보면 제국의 지식인들보다 한결 조심스러웠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목.
“‘동아협동체론’이 ‘서양적인 것’의 일소를 과제로 제시했다면, 서양에서 발원해 보편적인 원리로까지 확장된 자본주의를 극복할 때에만 그 과제가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민지시대 말기 작가 연구가 주로 일제의 논리를 내면화해 나간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저자의 섬세한 접근은 당대 작가의 비판적 거리 두기에 배어있는 조심스러움을 발견해 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이 책의 세 번째 특징으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은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할 덕목이다. 그렇지만 평가하는 입장에 따라 아쉬운 대목이 없을 수는 없으니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일본이란 창문을 매개하지 않는 관점은 배제돼 있다. 근대를 하나의 제도 차원에서 파악해 접근한 시도들은 그 시선이 비유컨대 남행열차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반면 근대 자체와 전면 대결을 선택한 부류는 북행열차를 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일찌감치 계급(보편성)과 민족(특수성)을 통일시켜 파악해 나간 이육사, 백신애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이 근거를 두었던 당시 대구, 경북의 특성을 염두에 둔다면 성리학과의 관련 양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학사상을 仙의 관점으로 끌어들여 이해했던 김동리 또한 여기에 묶을 수 있을 성싶다. 단군을 민족의 원형으로 설정하는 데는 근대 차원의 욕망이 개입해 있지만, 神人哲學에 값하는 인간의 재규정은 면밀한 이해를 요구한다.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넘어 새로운 르네상스를 모색해 나가는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동리가 사상적 지주로 삼았던 凡父는 만주의 대종교 방면과 선이 닿아 있었다.
둘째, 이태준에 대해서는 논리를 보강해야 할 듯하다. 저자는 <문장>에서의 이태준을 노스탤지어, 즉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발생시키는 시간의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고완품과 생활」(1940)이나, 「영월영감」(1939)을 보면 노스탤지어에 빠져드는 데 대한 경계가 나타난다. 반면 저자가 예를 들고 있는 「패강랭」(<삼천리문학>, 1938.1), 「고완」(<조선일보>, 1938.7.8~9)과 같은 글은 <문장> 이전에 씌어졌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의 지점을 좀 더 천착해 논의의 초점을 바꿨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태준을 둘러싼 논의가 분분한 만큼 이러한 대목의 미비함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더욱 크게 남는다.
‘책머리에서’를 보니 이 책은 저자가 2003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1930년대 후반 전통론 연구』를 손질해 펴낸 결과물이다. ‘탈식민주의’라는 이름으로 외국이론을 내세워 그 틀에 당대 작가, 작품을 끼워 넣어 넘치는 부분은 잘라내고, 모자란 부분은 잡아 늘리는 경향이 횡행하는데, 이를 넘어서는 모습을 확인하게 되니 반가운 느낌이다. 아마 여기에 쏟아 넣었던 공력이, 정종현과 함께, 두 권의 『서인식 전집』(역락, 2006)을 펴내는 데로 이어졌을 터이다. 모쪼록 이러한 노력 위에서 생산적인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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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돈 가톨릭대·국문학
필자는 중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론집으로 『페르세우스의 방패』, 『인공낙원의 뒷골목』등이 있다. <작가세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