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란사 법당 내에는...]
법당안의 구조는 6벌대로 쌓은 높은 화강석 기단 위에 방형과 원형, 그리고 복련판이 조각되어 있는 부재들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물론 이러한 부재들의 일부는 백제시대의 초석을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의 것을 전용한 것들로 여겨진다. 공포는 무출목 이익공 계통이나 앙설형으로 뻗은 초익공의 상단에는 연꽃이, 수설형으로 뻗은 이익공이 아래에는 연봉우리 등의 조각이 되어 있어서 장식적 경향이 매우 심하다. 건물의 외곽에는 오색빛 영롱한 단청을 칠하여 법왕의 거처를 화려하게 장엄하고 있다. 내부의 성보유물은 아미타삼존불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 밖에 산신탱화 등 근대에 제작된 탱화 3점도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의 바깥 추녀 아래에는 백제를 추억하는 시인묵객들이 남긴 글들이 여러 편의 편액에 담겨 전해지며, 그밖에 1903년에 고란사를 고쳐 지은 중수기문 등 많은 현판들이 걸려 있다.
[고란사 영종각...]
고란사의 범종각은 근래에 지어졌는데, 영혼을 올리는 종소리를 기원하여 영종각이라 부른다. 영종각의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정자형 건물이다. 깎아지른 암벽 위 한쪽 구석에 의지하여 위태롭게 서 있다. 낮은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얹은 민도리집인데, 오래되어 색이 바랜 단청이 고색창연한 느낌을 더해준다. 전각 안쪽에는 근래에 조성된 범종이 걸려 있다.
[새로이 단장중인 고란사 삼성각...]
[고란사 약수터인 고란정...]
[고란약수에 대한 전설...]
[우리가 탈 배가 들어오고 있는데...]
[이수중암이 조룡대(釣龍臺)라고...]
[조룡대(釣龍臺) 라고 빨간 글씨가 보이는데...]
조룡대(釣龍臺) 는 백마강(白馬江) 가운데 있는 사람 하나가 겨우 앉을 만한 크기의 바위 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중국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킨 뒤, 어느날 대왕포(大王浦) 하류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 바위나루〔窺巖津〕를 지나 낙화암(落花巖)까지 잇대어 있던 수백 척의 당나라 병선이 순식간에 뒤엎어지고 말았다. 소정방은 이 돌연한 괴변이 왜 일어났는지를 일관(日官)에게 물었다. 일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제를 지켜온 강룡(江龍)이 화를 낸 것이라고 하였다.
강룡을 퇴치할 방법을 소정방이 다시 물으니 일관은 용이 좋아하는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낚는 것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쇠를 두들겨 낚시를 만들고 굵은 철사를 낚싯줄로 하여 백마를 미끼로 강 가운데 바위 위에 앉아 용을 낚기로 하였다. 그러자 용은 미끼인 백마를 삼켜서 잡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하여 뒷날 사람들이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고 하는 이 바위를 조룡대라 하고,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은 강이라 하여 금강(錦江)의 줄기인 부여 부근 일대의 강을 백마강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여현(扶餘縣) 고적조(古蹟條)에 나온다. 그런데 ‘물고기’를 한자로 적을 때 ‘어룡(魚龍)’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소정방이 어룡을 낚은 것을 뒷날 잘못 전하여 용을 낚았다고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고 전한다.
[승선후 저 멀리 백마강교가 흐미하게 보이고...]
[세찬물결을 일구며 유람선은 구드래 선착장을 향하여...]
[배가 한 바퀴 돌아나가며 선착장과 작별을 고한다. 편도이기에...]
[고란사 종소리가 울리는 듯 아쉬운 아듀를...]
[선착장과 조룡대, 그리고 우측으로 10여미터나 되는 절벽 낙화암이 또렷이...]
[낙화암(落花岩)이라고 빨간 글씨로 새겨 놓아...]
문화재자료 110호로 1984년 5월 백화정과 같이 지정된 낙화암(落花岩)은, 충남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낙화암은 역사를 머금고 아무 이야기도 해주질 않는데...]
[고란사가 아스라이 ...]
이곳을 지나며 고란사와 낙화암을 지나치니 꿈꾸는 백마강이란 노래가 생각이 난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 버린 옛날을 애닳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서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면은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데, 그누가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낙화암 달빛만 옛날 같구나....
[물결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해주는 것 같아...]
[일국의 흥망성쵀가 이렇게 허무할 수가...]
[구드래 선착장이 코앞에...]
이번기회에 금강이 왜 백마강으로 불리우는지 알 게 되었는데, 확실이 알아보면 사자하(四河)·백강(白江)·마강(馬江)이라고도 한다. 그 범위는 정확하지 않지만 청양군 장평면과 부여군 규암면 경계를 따라 흐르는 금강천(錦江川:또는 金剛川)이 금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부터 부여군 석성면 위쪽까지를 백마강이라 부른다. 부소산(扶蘇山)을 끼고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심하게 곡류하는 사행하천이다. 부소산의 북쪽 사면을 침식하여 절벽을 이루고 부여읍 남부 일대에 넓은 퇴적사면을 발달시켰다.
공격사면인 부소산에는 낙화암이라 하는 높이 약 10m 가량의 침식애(浸蝕崖)가 있으며, 낙화암 상류 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강 가운데 조룡대(釣龍臺)라 하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적을 쫓아 금강을 건너려 할 때 강물 속에 교룡(蛟龍)이 방해하므로 교룡이 좋아하는 흰 말을 미끼로 조룡대 바위 위에서 잡아올렸다고 하여 강 이름을 백마강, 낚시했던 바위를 조룡대라 했다고 한다.
663년(문무왕 3)에 백제와 나당연합군과 일본의 수군이 격전을 벌였던 백촌강(白村江)의 싸움터가 백마강이라는 설이 있다. 백마강의 남부에는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으나 하상이 높아 범람이 잦은 홍수 상습지역이다. 따라서 홍수피해를 막고 경지의 효율성을 증대시켜야 하며, 백마강의 자연경관은 백제권의 문화관광자원과 함께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라고 백과사전에 적혀있다.
[멀리 한 바퀴 돌아 구드래 선착장으로 골인...]
왼지 괜히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백제 멸망의 아픔을 느끼고 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배를 타고 고란사와 낙화암을 직접 물에서 봐서 더욱 애절함이 느껴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에서 내려 구드래 조각공원까지 가는 동안 백마강만 바라보게 되어 우선 둑방으로 올라가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을 하염없이 보았다. 옛 도읍지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한강유역이라면 공주를 거쳐 이곳까지 도읍을 옯겨가며 쇠퇴한 백제의 혼은 무엇을 이야기 해주는지 우리는 지금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서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