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부인이 급히 뜰에 내려 왕대비전을 맏아 통곡하며 불행을 위로하고 계화에게 명하여 용골대를 석방시키니, 계화가 박씨의 명을 받고 나와서 용골대에게 말하기를,
"너를 여기서는 용서한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의주에서 또 한 번 죽을 고비를 당할 것이니, 의주에 도달하는 즉시로 의주 부윤 임경업 장군에게 배례하고 이 글을 보여 드려라. 그러면 임장군이 너를 용서하고 돌려 보내리라."
용골대가 의주에 이르자 임경업이 비호같이 달려들며 벽력 같은 소리로 용골대를 질타했다.
"이 무도한 오랑캐 장수야.어서 내 칼을 받아라!"
용골대는 황망히 말에서 내리며,
"장군은 노기를 풀고 잠깐 이 글을 보시오."
하고 이시백 부인 박씨의 편지를 올렸다.
'이번 우리 조국의 국운이 불길하여 이런 일을 당하였으나 하늘이 호국과 조선 두 나라가 종속 관계가 되라고 정하신 운수여서 용골대가 상감의 항서를 가지고 세자 대군 삼형제분을 모시고 귀국하는 것이니, 장군은 분한 마음을 진정하시고 이 일행을 무사히 가게 하여 삼 년 후에 세자를 무사히 환국하시게 함이 상책입니다. 장군은 부디 이 말씀을 믿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상감은 산성에서 항서와 함께 왕대비전하와 세자군은 호국에 보내시고 침식이 불안하던 중 하루는 공중에서 선녀 한 명이 내려왔다.
"신첩은 광주 유수 이시백의 처 박씨로소이다."
"경의 지략을 매양 탄복하던 중 이제 경의 신형을 보게 되니 과인의 마음이 매우 기쁘오."
임금은 이시백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로 향발하여 환궁하셨다.
그 후에 상감은 이시백에게 의정부 우의정에 대광보국을 제수하시고, 부인 박씨도 충렬 정경 부인으로 봉하시고 부부의 충성을 항상 칭찬하여 마지않으셨다.
어느덧 세자가 호국에 잡혀간 지도 삼 년이 되었으므로 왕대비전과 상감이 주야로 근심하고 계시던 중 임경업이 자원하여 발정한 후 두 달 만에 호국에 이르러 왕자 삼형제를 모시고 귀국하니 이 때 전임 영의정 김자점이 이시백과 임경업을 시기하여 어명이라는 거짓말로 먼저 임경업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이에 이시백이 김자점의 음모를 폭로하니 상감이 노하여 김자점의 목을 베고 그 처자도 목도 베어 죽이게 하고, 가장집물을 몰수해 버리셨다.
그 해 가을 구월 초순에 상감이 승하하시고 세자가 19세로 즉위하니 연소한 임금을 보필하는 이시백 재상의 높은 이름이 일국에 진동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하나는 평안 감사를 하였고, 하나는 송도유수를 지냈는데 각각 애민의 정사를 하여 청렴하였다.
그 후 삼부자가 함께 조정에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자손을 교훈하여 부귀를 더하며 가문의 영광을 빛내니 세월이 흘러 이시백공의 나이가 팔십이 지났다.
어느 해 가을 구월 보름께 달빛이 휘황하게 밝으므로 공이 부인과 더불어 완월대에 올라서 남녀 자손을 좌우에 앉히고 즐거운 잔치를 베풀던 중 공이 손수 잔을 들어 두 아들에게 주면서 뜻밖의 유언을 했다.
"내 소년 시절의 일이 어제 같은데 어느 사이 팔십이 지났으니 세상 일이 일장춘몽이로구나. 우리 부부는 세상 명분이 다 하였으니, 너희들과 영결코자 한다. 금후로 너희들 형제는 조금도 슬퍼하지 말고 자손을 거느리고 길이 영화를 누려라."
그리고 모든 손자를 일일이 어루만지고 상을 물린 뒤에 부부가 나란히 누워서 자는 듯이 운명하였다.
상감이 이시백공의 별세 소식을 들으시고 또한 비감하시며 예관을 보내어 영전에 조알하게 하고 부의를 후히 내리시는 한편 시호를 문충공이라 하고 박씨 부인에게는 충렬비를 봉하여 추증하셨다. 박씨 부인의 시비 계화도 상전을 따라서 역시 병없이 자는 듯이 죽었으므로 이판서 형제는 더욱 비감하였으나 상례를 존절하여 입관 성복하고 길일을 택하여 선산에 안장하고 *여막을 짓고 살면서 조석 곡읍으로 삼년 상례를 지성으로 모셨다.
상감이 이러 형제의 충효를 아름답게 여기시고 다시 중임을 맡기시니 형제가 더욱 극진한 충성으로 임금을 섬겨서 작위가 일품에 이르고 자손이 계계승승하여 대대로 충성을 다하였다.
박씨가 임경업에게 어떤 얘기를 했는지가 나와 있지? 결국 박씨의 계략이란 건 임경업이 지금 당장 적장을 징계하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따라 일단은 적장에게 퇴각할 길을 열어 주고 3년을 기다린 다음에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지. 3년 후에 임경업은 청에 가 세자를 비롯해서 볼모로 잡혀갔던 사람들을 데려오는 역할을 하니까.
하지만 여러 곳에서 작가의 한계가 드러나지? 아까 수업 시간에 얘기했던 것처럼, 실제 일어났던 역사를 각색하다 보니 우리 역사와 어긋나는 듯한 부분은 적당이 "시운"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을 써서 얼버무려 버린 것... 그리고, 박씨가 활약하는 데 대해 작가가 일관성을 보여주지 못한 것... 앞뒤가 좀 맞지 않지? 왕비는 데려가면 안 되고, 세 왕자는 시운이 그러니 운에 따라 데려가도 되고...
아마도 시대적 한계, 그리고 작가의식의 한계일 거야.
이제 궁금증이 풀렸니?
첫댓글 윤정이 덕분에 수능셤때 3점 벌었네~ ㅋㅋㅋ 선생님 감솨합니다~! ㅋㅋㅋ
선생님고맙습니당^-^유후~ㅋ
샘~ 오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