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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영국 방문
←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랜시 대주교와 함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요한 바오로2세(앞쪽).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1982년 5월 28일 로마교황으로선 처음으로 근5세기 만에 영국을 방문했다. 영국과 로마 교황청은 1534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8세의 이혼문제 이후 4백48년 동안 단절상태에 있었다.
교황은 첫째 날 영국 버킹검궁의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을 방문, 영국국교회와 가톨릭교회와의 화해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6일간의 방문 일정을 시작했다. 이튿날 교황은 4백48년 간 분리된 가톨릭과 영국국교회 관계에 획기적 전환점을 이루게 될 기독교통합을 위한 역사적인 합동예배 참석차, 영국국교회의 본산인 캔터베리대성당을 방문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특별승용차에 로버트 랜시 캔터베리대주교 겸 성공회 수장과 나란히 타고 도착, 수천 군중으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요한 바오로2세는 TV로 영국전역에 중계된 강론을 통해 기독교 통합을 강력히 호소하고 이번 합동예배가 사랑을 통해 열매 맺게 되기를 기도했다. 이번 교황의 영국 방문은 기독교 통합을 위한 양대 교단 지도자들의 열망을 상징적으로 과시한 것이었다.
한편, 1980년 10월 17일.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로마교황청을 방문, 로마교황에게 영국방문을 환영한다는 의사를 전한 바 있다.
[1972년] 영국왕 에드워드 8세 사망
← 에드워드 8세와 윌리스 심슨 부인.
‘심슨 부인과의 사랑’으로 유명한 영국왕 에드워드 8세가 1972년 5월 28일 파리 근교 뇌유쉬르센에서 76세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8세는 조지 5세의 맏아들이자 엘리자베스 여왕의 큰아버지다.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에드워드 8세가 심슨 부인과의 결혼을 위해 1936년 왕위를 동생 조지 6세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조지 6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이다.
‘세기의 사랑’을 선택한 탓에 에드워드 8세의 재위기간은 고작해야 1년이 채 안된다. 1936년 1월 20일부터 12월 10일까지가 그의 재위기간이다. 독신으로 즉위한 그가 대영제국의 왕위를 포기하고 윈저공으로 돌아간 것은 미국인 이혼녀 심슨과의 결혼을 왕실도, 내각도, 국민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리스 위필드 스펜서 심슨 부인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 듯, 스펜서는 첫 남편의 성이고, 심슨은 두 번째 남편의 성이다. 영국인들은 이혼녀도 윈저공도 환영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심슨 부인이 왕비는커녕 공작 부인이 되는 것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윈저공은 심슨 부인과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에서 결혼해야 했고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조국을 등진 채 파리에서 살았다. ‘세기의 사랑’을 추구한 그였지만, 재위 기간중 보인 정치적 식견은 좋은 평판을 받지 못했다. 공개적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찬사를 보내곤 했기 때문이다.
[1989년]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1989년 5월 28일 전국 교사들의 노동조합단체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이 결성되었다. 4·19혁명 직후 대한교원조합연합회가 일시적으로 조직되었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불법화되었다. 학교교육이 철저히 통제되었던 유신체제에서 교사들은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초등교육자협회, YMCA 중등교육자협회,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사우회, 흥사단 교육문화연구회 등 사회단체를 통해 활동을 전개했다. 1986년 교육민주화선언이 발표되었고, 1987년 6·29선언 직후 전국 규모의 교사협의회인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이는 참교육운동 등을 목적으로 한 전교조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1999년에 비로소 합법화되었다.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결성
← 아라파트
1964년 5월 28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결성되었다. 1967년 6일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에 패배한 후 PLO는 팔레스타인인의 대변자로서 외부에 부각되었다. 파타(Fatah),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 팔레스타인 해방인민민주전선(PDFLP) 등의 단체와 테러 조직 검은구월단(Black September)이 PLO와 연관되어 있다. 1969년 PLO 의장으로 임명된 파타의 지도자 야시르 아라파트는 1974년부터 PLO가 국제 테러리즘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는 대신 국제사회가 PLO를 팔레스타인 국민의 정당한 대표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93년 아라파트의 지도 아래 PLO는 이스라엘과의 평화정착을 위한 비밀협상에 들어갔으며, PLO는 이스라엘로부터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유일한 대표권을 인정받았다.
[1759년] 영국의 정치가 피트 William Pitt the Younger 출생
1759년 5월 28일 태어남 / 1806년 1월 23일 죽음
← 피트, John Hoppner가 그린 유화(부분)
피트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기간 총리로 재직하면서 총리직 강화에 큰 영향을 미친 영국의 정치가이다. 유명한 정치가인 채텀 백작 1세 윌리엄 피트의 아들로, 14살에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법률에 종사했다. 22세에 의회에 들어갔으며, 1783년 24세의 나이로 영국 의회 역사상 가장 젊은 총리가 되어 재정 분야의 개혁에 공을 세웠다.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일어난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했으며, 1800년 영국과 아일랜드의 통합을 선언했다. 1801년에는 아일랜드 문제를 두고 국왕 조지 3세와 마찰이 일어나 사임했으나 3년 후 다시 기용되었다. 프랑스 혁명 후 1793년부터 갈등관계에 있게 된 나폴레옹에 대항해, 1804년 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과 제3차 동맹을 맺었으나, 이 동맹은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한 후 붕괴되었다. 피트는 근대적인 의미의 총리는 아니었으나, 장기간의 재임으로 영국의 총리직 강화와 상공업의 육성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1934년] 디온 다섯 쌍둥이 (캐나다 쌍둥이) [Dionne quintuplets] 출생
1934년 5월 28일 캐나다 온타리오 주 칼렌다 근처에 살고 있는 올리비아와 엘지르 디온 사이에서 미숙아로 다섯 쌍둥이 자매 에밀·이븐·세실·마리·아네트가 태어났다.
이들의 부모는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가운데 9명은 쌍둥이가 아니었다.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서 이십세기폭스사는 이들에 대한 특집영화를 3번이나 제작했고, 간유 광고 모델에서부터 타이프라이터와 자동차 모델에 이르기까지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며, 북부 온타리오에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주치의였던 앨런 로이 대포(1941 죽음)도 유명해졌으며, 1935년 온타리오 주는 그들을 주정부 보호 아래 있도록 했으나 1941년 아버지에게 되돌려보냈다.
그 이전에 태어난 다른 다섯 쌍둥이들은 1명도 며칠 이상을 살지 못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의학 및 유전학적으로 확인된 첫번째의 살아남은 다섯 쌍둥이였다. 이들은 본래 여섯 쌍둥이였으나 임신 3개월째에 1명이 유산되었는데 이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토론토에 있는 소아병원의 도움이 컸다. 이 소아병원은 다섯 쌍둥이에게 모유를 먹이고 주치의 대포에게 현대식 인큐베이터와 기타 병원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토론토대학은 이들 다섯 쌍둥이에 대해 생리학적·정신적·치의학적 연구를 했는데, 생리학적 연구 결과 이들이 하나의 수정란에서 나왔으며 하나의 배(胚)가 분열하면서 생겨났기 때문에 6개의 배 중에서 생존한 5명이 같은 유전적인 특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들 중 3명이 결혼했는데 아네트는 아들 셋, 마리는 딸 둘, 세실은 아들 넷, 딸 하나를 두었으며, 세실만 쌍둥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 가운데 1명은 15개월 때 죽었다. 에밀은 1954년 8월 6일 퀘벡 주에서 간질발작으로 죽었고 마리는 1970년 2월 27일 몬트리올에서 죽었다.
[1932년] 여성운동가·정치가 박영숙(朴英淑) 출생
1932. 5. 28 평남 평양~.
1955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958년 필리핀 파이스트대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수학했다. 1963년 기독교여자청년회연합회 총무, 1984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장, 1985년 아시아 기독교협의회 여성분과위원장, 1987~88년 평화민주당 부총재, 1988년 평화민주당 총재권한대행, 제 13대 국회의원(전국구·평화민주당), 1990년 녹색의 전화 대표 등을 지냈다. 1991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1992년 민주당 최고의원, 환경정책연구소 이사장, 2002년~2003년 대통령자문기구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
[1930년] 군인·정치가·사격인·체육행정가. 박종규[朴鍾圭]출생
1930. 5. 28 경남 창원~1985. 12. 3 서울.
1952년 건국대학교 정치학과, 1972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했고 타이완문화대학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대장으로서 5·16군사정변에 깊이 관여했다. 1964년 육군대령으로 예편해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부임한 뒤 박정희대통령저격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직을 맡았다. 1971년 마산대학교를 인수해 경남대학교를 설립했다. 1979년 10대 마산·창원·진해 지역구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0년 5·17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 이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정계에서 은퇴했다. 군 시절부터 사격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권총사격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격인으로 인연을 맺게 되어 1970년 대한사격연맹 회장, 아시아 사격연맹 회장과 1979년 세계사격연맹 부회장을 지내면서 태능국제사격장 건설과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의 서울 개최에 큰 역할을 했다. 1979~80년에는 대한체육회장을 지냈으며 1982년 아시아 경기총연맹(GAASF)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83년 김택수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한국 IOC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집행위원·부위원장 등을 지내다가 1985년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다.
[1917년] 북한 작곡가 김순남[金順男] 출생
1917. 5. 28 서울~1983 함남.
작곡가·피아니스트.
월북 작곡가로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기여했고 많은 해방가요를 작곡했다.
생애와 활동
상인인 아버지 김종식과 국민학교 교사인 어머니 이보경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교동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 음악부에 다니면서 작곡을 시작했다. 그후 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왕성한 작곡활동을 했다. 1937년 일본 도쿄 음악학교 작곡부 교수인 시모후사 간이치[下總皖一]로부터 작곡을 배웠고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입학했다. 22세 때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 조직부장이었던 하라 다로[原太郞]의 지도를 받다가 1940년 학교를 자퇴하고 도쿄 제국음악학원 기악부로 전학했다. 당시 일본현대작곡가연맹 주최의 작곡발표회에서 일본 중진작곡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942년 귀국하여 1944년 문세랑과 결혼한 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음악강사로 일했다. 조선음악협회 주관의 양악대연주회에서 경성합창단을 지휘했고 곧바로 경성합창단 이사로 취임했다. 또 당시 음악의 지하운동 서클인 성연회에 가담하여 신막·강장일·이범준 등과 8·15해방 이전까지 활동했다.
1945년 8월 16일 강장일과 공동발의로 음악가대회를 소집하여 조선음악건설본부를 결성했다. 이때 지은 노래가 〈건국행진곡〉이다. 같은 해 9월 15일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이 조선음악가동맹으로 흡수·통일되면서 더욱 많은 활동을 하여〈해방의 노래〉·〈인민항쟁가〉·〈농민가〉등을 작곡했다. 경성방직에 들어가면서 민족음악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고 그해 5월 해방가요발표 대연주회를 주도했으며, 관련 문화단체의 음악강의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연극에도 많은 관심이 있어 〈님〉·〈3월 1일〉 등에서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1946년 남기옥과 남로당에 입당, 1947년 미군정의 좌익색출 때 〈인민항쟁가〉를 지었다는 이유로 체포령이 내려 도피하다가 강장일 등과 함께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해주음악전문학교 임시 작곡교수로 있으면서 한시형·장일남 등을 가르쳤다. 북한에서〈인민항쟁가〉의 작곡가인 그의 등장은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1948년 박은용의 독창회에서〈산유화〉·〈진달래꽃〉등을 발표했고 그해 8월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로 선출되었다.
6·25전쟁 이후〈빨치산의 노래〉·〈인민유격대의 노래〉·〈승리의 깃발〉·〈개선행진곡〉등 많은 곡을 작곡했다. 1951년 3월 조선음악동맹 부위원장과 작곡분과·평론분과 위원직을 맡았다. 소련 차이코프스키 음악학원에서 1952년부터 2년 동안 작곡과 교수인 하차투리안에게 사사받았다. 1953년 남로당 숙청작업에 따라 북한으로 귀환당하여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창작활동을 금지당했다. 1960년경 신포기업소에서 노동자생활을 하면서 창작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민요를 발굴하여 악보로 출판하기도 했다. 이때 작곡한 노래가〈놀아라, 사랑하는 기대야〉이고 바이올린 협주곡〈이른 봄〉도 이때 작곡했다. 1970년경 폐결핵에 걸려 요양하다가 1983년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탄생 80돌인 1998년에는 그가 1945년 초에 작곡한 〈자유의 노래〉를 비롯해 〈해방의 아침〉·〈농민의 노래〉·〈독립의 아침〉 등 21곡이 러시아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그는 50여 곡의 해방가요 외에 〈산유화〉 등 뛰어난 가곡과 기악곡을 썼으며, 현대음악적 기법을 전통음악과 결합한 세계적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음악세계
그의 작품은 하라 다로의 영향을 받았는데, 해방직후 조선음악가동맹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에 반영되었다. 좌파의 성향이 짙었으나, 음악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 작품성을 떨어뜨린 적은 없었다. 음악 자체의 민족성 추구에 관심을 기울였고 사실주의 내용에 알맞는 표현기법을 써서 내용을 분명히 했다. 특히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은 정치성보다는 민족성을 중요시하여 작곡했다. 음악가의 집을 운영하면서 음악의 발전을 꾀했으며 국악원에서 국악을 공부하여 민족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많은 해방가요를 작곡했는데 전통장단과 음계를 쓰는 노력을 보였다. 많은 가극작품을 썼고 임화 등의 시인의 시를 노래화했다. 그가 소련을 방문했을 때 그의 악보를 본 쇼스타코비치는 "조선에도 이런 작곡가가 있었느냐"고 감탄했다고 한다. 1953년 북한으로부터 부르주아 음악작법이며 반인민적 형식모더니즘이라는 비판을 받고 창작활동을 금지당했으나 1960년경 노동자생활을 하면서 "좋은 곡이란 음역이 좁아야 하며 선율이 쉽고 도약이 없어야 한다"는 수기를 쓰기도 했다.
말년에 이런 기조와 함께 대곡의 합창곡, 독창곡, 바이올린 독주곡 등을 쓰면서 새롭게 창작활동을 했으나 투병생활로 더이상 창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가곡집으로 〈산유화〉(1947)·〈자장가〉(1948) 등이 있고, 기악곡으로〈피아노 소나타 2번〉(1944)·〈피아노 3중주〉(1945)·〈관현악과 성악을 위한 바라아테〉(1946)·〈제1교향곡〉(1947) 등이 있으며, 해방가요로는〈남조선형제를 잊지 말아라〉와 그밖의 노래로〈조(朝)·중(中) 친선의 깃발〉·〈고향의 어머니〉·〈탱크병의 노래〉등이 있다.
[1908년] 영국의 작가 플레밍[Fleming, Ian Lancaster] 출생(100주년)
1908. 5. 28 런던~1964. 8. 12 잉글랜드 켄트 캔터베리.
국제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스릴러물 소설가이다. 유행을 추구하면서 부유하게 사는 영국 첩보원 007 제임스 본드가 그의 작중 인물이다. 제임스 본드는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로 20세기 여러 인기소설의 주인공으로 수없이 모방되었다. 영국·독일·스위스에서 공부했고 모스크바에서는 언론인(1929~33), 은행가, 증권업자로(1935~39),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해군의 고위 장교로, 종전 후에는 〈선데이 타임스 Sunday Times〉 런던 지사의 간부로 일했다. 〈카지노 로얄 Casino Royale〉(1953)은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한 12편의 연작소설의 첫편이다(→ 007 시리즈). 폭력, 숨가쁜 탈출, 국제 첩보조직, 공포, 음모로 가득 차 있는 이 소설들은 1,800만 부나 팔렸으며 11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도박과 스포츠 카를 좋아하는 본드는 1950, 1960년대를 통틀어 잘 생기고, 영리하고 여자 좋아하는 영웅적인 남성상이었다. 본드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모두 영화로 만들어졌고, 특히 〈러시아에서 애인과 함께 오다 From Russia, with Love〉(1957)·〈닥터 노 Dr. No〉(1958)·〈황금 손가락 Goldfinger〉(1959)·〈선더볼 Thunderball〉(1961)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00년] 한국 천문연구원 김승리 박사팀, 국내에서 두번째로 소행성 발견
국내 연구진이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새로운 소행성(小行星)을 발견했다. 한국천문연구원은 7월4일 "지구접근천체연구팀 김승리 박사팀이 5월28일 밤 9시20분쯤 경북 영천 보현산천문대에서 반사경 지름 1.8m짜리 반사망원경을 이용, 소행성으로 추정되는 천체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번 소행성 발견은 지난 98년 한국천문연구원이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에 의뢰해서 발견한 '소행성 1998 SG5'이후 국내에서는 두번째. 김박사는 이 소행성 발견을 국제천문연맹에 보고했으며, 임시로 '소행성 2000 KJ4'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이 소행성이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소행성이라는 사실을 공인받기까지는 2-3년간의 검증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만약 '소행성 2000 KJ4'가 국제천문연맹으로부터 새로운 소행성으로 판정받으면, 발견자인 김박사가 소행성 이름을 지을 권한을 부여받는다. '소행성 2000 KJ4'는 5년9개월 주기로 태양을 공전하며, 현재 지구로부터 약 3억6000만km(지구-태양간 거리의 2.4배) 떨어져 있고 크기는 약 4km 정도인 것으로 연구팀은 추정하고 있다.
[1998년] 태양계 밖 행성 첫 촬영
태양계 밖 행성이 사상 처음 우주망원경 렌즈에 잡혔다. 또 지구 전체를 다이너마이트로 덮어 폭발시킨 것과 같은 태양표면 폭발현상도 관측됐다. 미항공우주국(NASA)은 허블우주망원경을 통해 태양계 외부에 있는 목성 2∼3배 크기의 행성 사진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고 1998년 5월 27일 발표했다.
천문학자들은 수년전 태양계 외부 행성들의 존재사실을 처음 발견해냈으나, 실제로 그 모양이나 크기를 관측하지는 못했었다. 이번 사진촬영 성공은 허블망원경이 이룩한 업적 중 가장 위대한 것이며, 천문학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NASA는 1996년 7월 태양의 핵열 폭발로 인한 태양진도 처음 관측됐다고 발표했다. 유럽의 태양-태양권역(SOHO) 우주위성에 의해 관측된 이 태양진은 분출 에너지가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때 발생한 것의 4만배. 리히터 규모 11.3의 지진이며 전지구 표면에 다이너마이트를 1야드 높이로 덮은 뒤 한꺼번에 폭발시킨 에너지에 버금가는 것이다.
[1843년] 미국의 사전 편찬자 노어 웹스터(Webster, Noah, 1758~1843) 사망
코네티컷주 웨스트하트퍼드 출생.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뒤, 한때 변호사로 활동하고 신문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783년 《영어문법제요 Grammatical Institute of the English Language》를 저술하였는데, 그 1부인 《표준 철자 교과서 Elementary Spelling Book》는 미국의 표준 영어교과서로 널리 쓰여 영어 교육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사서 편찬에 있었고, 그 최초의 성과는 《영어 간이 사전 A Compendious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1806)으로, 이것은 백과사전의 성질을 겸비하고 있고, 영어 철자가 간이화되어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예:honour를 honor, axe를 ax 등).
그후 수록 낱말이 7만 규모인 《미국 영어사전 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1828)을 출판하여, 뒤에 미국의 사서계(辭書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1년] 국풍81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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