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9 장
베푸는 미덕에 대하여(9)
「왜 그대들이 나의 월계관을 잡아채려 하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나를 존경한다.
그러나 어느 날 그대들의 존경심이 몰락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너지는 석상이 그대들에게 떨어져서 죽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대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왜 중요하겠는가?
그대들은 나의 신자이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왜 중요하겠는가?」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은 신자들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신자들로 가득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전체적으로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원한다.
신앙은 그 누구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기억의 일부분이 될 뿐 존재에 가닿지 못한다.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삶에 새로운 요소를 부여하지 못하고, 초인을 탄생시키지 못한다.
그의 말은 옳다.
“나를 신봉하지 말고 나를 이해하라!
그 이해를 통해서 그대 안에 혁명이 일어나도록 하라.”
《신앙은 너무나 값싼 기만일 뿐이다.
세상 전체가 기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왜 중요하겠는가?
오직 위대한 중요성을 지닌 사람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대들은 나의 신자이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왜 중요하겠는가?
세상은 수천 년 동안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해왔다.
과연 신앙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들과 연계하는 다른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그대는 붓다를 믿고, 예수를 믿고, 모하메드를 믿어 왔다.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믿어왔다.
그러나 그 신앙은 그대 안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앙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내면에 진정한 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대가 그를 이해한다면, 그대는 신봉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진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내면에서 삶과 사랑의 원천을 찾을 것이다.
그대가 차라투스트라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그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초인을 이 대지에 가져오고, 인간이 사라진 자리에 초인을 창조함으로써 그의 꿈을 실현시킬 것이다.
《모든 신앙들이 해온 첫 번째 일은 사람들에게 거짓된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십자가형을 받지 않고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오랜 명상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불교도가 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신자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영적은 성장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했다고 믿으며 자신을 속이면 된다.
신앙이 해온 두 번째 일이 있다.
이 대지에 너무나 많은 살육을 자행해온 것이다.
이 세상에 더 많은 사랑을 가져다주는 대신에 더 많은 증오를 뿌려 놓았다.
초인을 창조하는 것 대신에 인간보다 더 추락한 하위 인간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대들이 나를 찾아왔을 때 그대들은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차라투스트라를 만남으로써 자기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면, 그때 비로소 차라투스트라가 그대에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는 그 이외의 방식으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대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있지 않았다.
그대가 나를 찾았을 때 그대 자신을 찾던 것이 아니다.
신앙으로 안락해진 상황에서 과연 언제 그대 자신을 찾으러 나설 것인가?
이제 차라투스트라와 그의 말은 걸림돌이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그대에게 구도이자 도전이자 모험이 되기를 바란다.
「모든 신자들이 그렇다.
따라서 믿음은 모두 사소한 것이다.
이제 나는 그대들이 나를 잊고 자신을 찾기 바란다.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정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대들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그는 그대들에게 중대한 약속을 하고 있다.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정하고 자기 자신을 찾게 되었을 때 나는 그대들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진정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다른 눈으로 나의 잃어버린 형제들을 찾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랑으로 나는 그대들을 사랑할 것이다.」
그대는 어떤 변화를 확인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의미로 그들을 형제라고 부를 것이다.
그 자신이 스승인 것처럼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스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똑같지만,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처음에 그 말은 형식이자 사실에 입각한 호칭이었다.
이제 그것은 높은 차원의 현실이 될 것이다.
스승이 자신의 제자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그대가 깨달았다는 것을 스승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눈으로 나는 그대들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한 번 더 그대들은 나의 벗이나 내 희망의 아이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들과 세 번 함께 하게 될 때 나는 그대들과 위대한 정오를 축복할 것이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위대한 희망이다.
그는 그것을 위대한 정오라고 부른다.
「이것은 위대한 정오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의 중간에 서 있게 되고, 최고의 희망으로써 저녁을 향한 여정을 축복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아침을 위한 여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날, 새로운 탄생, 초인의 탄생을 위한 여정을 말한다.
「그때 아래로 향하는 인간은 스스로 축복할 것이다.
그는 초인을 향해 나아갈 것이고, 그의 지성의 태양이 정오에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모두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살아나기를 바란다.”
어느 날 위대한 정오에 이 말이 우리의 최후의 의지가 되게 하라!」
이것은 단지 차라투스트라만의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몽상가들, 모든 공상가들, 인간의 추한 현실을 볼 수 있으면서도 추한 현실 속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숨겨진 잠재성을 볼 수 있고, 동물을 볼 수 있고, 그대 안에 숨겨진 신을 볼 수 있는 모든 위대한 영혼들의 희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봉하기 시작한다.
신앙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행동이 필요하고,
자신의 추한 특성을 버리고 죽을 준비를 하고,
진정한 미덕인 진리, 사랑, 연민, 창조성을 탄생시킬 수 있는 작은 행동이 필요하다.》
과거는 세상을 창조한 신에 의해 통치되었다.
미래는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탄생한 신, 즉 초인의 창조가 통치하도록 하라.
이것은 정오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차라투스트라가 꿈꾸는 위대한 정오이다.
이것이 언제일지 예측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언젠가 그 날은 분명히 올 것이다.
동물의 사촌지간에 불과한 인간이 영원한 추한 존재로 남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득히 멀리 떨어진 별에 도달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뛰어 넘어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 초월을 통해서 진정한 종교가 탄생할 수 있다. 끝.
오쇼의 차라투스트라 1
오쇼 강의/박형진 옮김. 젠토피아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