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what, monks, is right concentration?
Here, monks, a monk, quite secluded from sense desires, secluded from unwholesome things, having thinking, reflection, and the happiness and joy born of seclusion, dwells having attained the first absorption.
With the calming down of thinking and reflection, with internal clarity, and one-pointedness of mind, being without thinking, without reflection, having the happiness and joy born of concentration, he dwells having attained the second absorption.
With the fading away of joy he dwells equanimous, mindful, fully aware, experiencing happiness through the body, about which the Noble Ones declare: “He dwells pleasantly, mindful, and equanimous,” he dwells having attained the third absorption.
Having abandoned pleasure, abandoned pain, and with the previous passing away of mental happiness and sorrow, without pain, without pleasure, and with complete purity of mindfulness owing to equanimity, he dwells having attained the fourth absorption.
This, monks, is called right concentration.
<DN 22 대념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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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samma samadhi)에 관한 경의 설명을 다시 올려봤습니다.
흔히 전형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나무 밑에 앉아서만 할 수 있는 것이냐에 대해
저는 회의적입니다.
불교는 지혜를 통해 해탈하는 종교지 신비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악한 일이 아닌 어떤 일이라도 집중해서 도모하는 것은 바른 삼매라고
봅니다.
반드시 출가자만 할 수 있고 나무밑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일상으로부터
이반된 것이고 특정환경에서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특정의 소수집단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고 보편적 진리의 실천에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부처님이 소수 승려집단만의 전유물로서 정정을 제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그렇게 만든 것은 특권을 누리려는 승려들의 아전인수식의
경전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독경을 하건 사업을 하건 바르게 집중하면 팔정도의 바른 삼매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4선을 할 수 있느냐가 출/재가자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마음을
비웠느냐가 척도라고 봅니다.
첫댓글 무엇이 둑카의 거룩한 진리인가? 태어남은 둑카다. 늙는 것은 둑카다. 병드는 것은 둑카다, 죽음도 둑카다.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한 마디로 오온을 취착하는 것이 둑카다.
색취온은 색온을 취착하는 것이요 수취온은 수온을 취착하는 것이요 상취온은 상온을 취착하는 것이요 행취온은 행온을 취착하는 것이요 식취온은 식온을 취착하는 것이니 이들 다섯 취착들은 곧 행온이니 그러므로 행온을 오온을 만드는 동력이라 칭하는 것이다.
(SN 22. 79)
수온을 삼빠자나하지 않고 따라서 하나가 되는 것은 수취온이요 상온을 삼빠자나하지 않고 따라서 하나가 되는 것은 상취온이요 행온을 삼빠자나하지 않고 따라서 하나가 되는 것은
행취온이니 그러므로 오취온은 사띠/삼빠자나와 정반대가 된다. 사띠가 없는 것, 곧 오취온은 그러므로 둑카라 칭한다.
둑카의 일어남은 무엇인가? 둑카를 벗어날 생각을 않고 둑카를 사랑하는 것이 둑카의 쌍둥이 형제인 둑카의 일어남의 진리라 한다.
반대로 둑카를 벗어날 생각으로 둑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둑카의 멸진의 진리이다. 둑카의 멸진의 진리의 쌍둥이 형제가 둑카의 멸진의 길을 걷는 진리이다. 즉 8정도를 걷는 것 자체가 둑카의 멸진이다. 여기서 둑카의 멸진은 둑카가 당장 없어진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둑카와 결별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둑카에 대한 태도여하에 따라 사무다야와 니로다가 판가름나는 것이다.
아마 여기서 부처님의 딜레마가 드러났을 것이다. 누가 과연 이것이 둑카임을 자각하고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노력을 할 것이냐?
과연 이런 설법이 통하기나 할 것이냐? 세상은 꿀을 빠느라 정신이 없는데 그것은 둑카니 거기서 벗어나시요 하면 나를 미친 자라고 여기지 않겠는가? 3계화택의 비유가 거기서 나온 듯 싶다.
먼 얘긴 것 같다. 어쩌면 비현실적인 얘기다. 비현실적이란 말이 딱 맞는 표현같다. 현실에 타협이 안되는 얘기, 출현실적인 얘기.
그게 불교의 추구하는 바라고 말하고 싶다. 현실은 불교를 담기에는 너무나 좁고 작다.
대념처경 앞에서 하는 것을 좌념 즉 앉아서 할때는 SATI를 지속적(SAMADHI) 으로 하는 것이예요 (바른 삼매). 그러나 일상적으로 할때는 바로 뒤절에 나오는데 행주좌와어묵동장을 SAMPAJANNA 하라고 되어 있음. 그리고 SAI SAMPAJANNA 쌍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음
ㅡ()ㅡ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