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저물녘에
낡아빠진 경운기 앞에 돗자리를 깔고
우리 동네 김씨가 절을 하고 계신다
밭에서 딴 사과 네 알 감 다섯 개
막걸리와 고추장아찌 한 그릇을 차려놓고
조상님께 무릎 꿇듯 큰절을 하신다
나도 따라 절을 하고 막걸리를 마신다
23년을 고쳐 써 온 경운기 한 대
야가 그 긴 세월 열세 마지기 논밭을 다 갈고
그 많은 짐을 싣고 나랑 같이 늙어왔네 그려
덕분에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고맙네 먼저 가소 고생 많이 하셨네
김씨는 경운기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준 뒤
폐차장을 향해서 붉은 노을 속으로 떠나간다
경물 할 줄 모르는 자는
경천도 경인도 할 줄 모른다는 듯
물건에 대한 예의가 없는 세상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가 남아 있을 리 없어
사람을 쓰고 버릴 때 어떻게 하더냐고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아픔도 없이
돈만 알고 경쟁력과 효율성만 외치는 자들은
이미 그 영혼이 폐기처분된 지 오래라는 듯
- 박노해, <경운기를 보내며>
2024년 일지 쓰듯 365일 안빠뜨리고 일기를 썼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2025년
뒤늦은 폐차를 기록 함
박웅현의 강독회 원고를 모은 책을 보며 꽂힌 박노해의 시에 맘 먹었는데
정리하면서 보니
작품의 형식을 무시했고 심지어 전문도 아닌데 전문이라고 적었다 ㅉ
내가 모르는 전문의 뜻이라도 있나 긁적인다
박웅현의 강독회 원고 모음
시적인 순간, <곽재구의 포구 기행>
<길귀신의 노래>에 나오는 이야기, 어느 봄날, 시인이 남도의 반월, 반달마을 입구에 핀 도라지 꽃밭을 보고 있을 때, 경운기를 몰고 가던 이역에서 온 듯한 구리빛 얼굴의 아낙이 멈춰 서서 묻습니다. “꽃이 이쁘오?”
시인은 하마터면 ‘도라지 꽃도 예쁘지만 댁도 참 예쁘오’ 할 뻔
<바닷가 마을> 이라는 시를 짓고, 시의 순간이라고 명명함
박노해 <경운기를 보내며>
보고 듣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서둘러서는 안 된다. 서두르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다
나는 성급함과 초조함과 서두름을 극복했다 (카잔차키스)
돈키호테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인간 본성이란 말은 참 무거운 단어예요. 그래서 그동안의 소설은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 탐구하겠다는 목표 없이 그저 이야기만 했어요.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는게 소설의 전부였죠. 그러나 필딩은 소설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얘기를 해주고자 했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의미한 소설을 썼습니다
그의 소설을 무의미하다고 비판했던 사람들은 올바른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필딩이 말한 바를 되새겨 보자 … 우리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 중 하나가 무의미 아닌가?
죽음을 생각했다가도 맛있는 음식이 있고 찬란한 햇살을 만나면 죽음을 잊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모순적인 내면의 모습입니다
두 가지 미학적 태도의 충돌. 키치를 유난히 참지 못한 사람이 천박함을 유난히 참지 못하는 사람과 부딪혔던 것이다
쿤데라는 키치를 못 참으니까 거기에서 재치라는 황산을 뿌렸어요. 하지만 프랑스 지식인들 입장에서는 그의 이야기가 천박했던 거죠. 아닌 지금 민중의 투쟁을 얘기하고 있는데 섹스 얘기라니 저런 천박한 놈. 이렇게 된 거죠
어른이 되어서 거리를 볼 때에야 방황이 방황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이렇게 거리를 둘 때에만 방황의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미래의 어느 날 지나간 젊음을 향해 어떤 시선을 던지게 될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지 못하게 때문에, 인간의 확신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이미 경험한 어른들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옹호한다
어느 날 밤 사람은 사랑 없이도 행복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과 싸우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비밀을 깨닫고 그녀는 경악하며 산책길에서 되돌아왔다
<세상의 끝 The end of the world> 가사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사랑이었는데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졌어요 … 사랑 때문이 아니라 뱃멀미 때문에 밤을 새운 거죠
서로 혈연관계도 없고 거의 알지도 못하며, 성격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데다 심지어는 성기도 다른 두 사람이 갑자기 함께 살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며 어쩌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결정지어졌을지도 모르는 두 개의 운명을 공유하기로 약속하는 것은 모든 과학적 법칙에 위배된다는 입장이었다
요즘 비혼이란 말들을 많이 하죠? 결혼에 관심 없는 분들이 푯말을 만들어서 들고 다니고 싶은 문장일 것 같아요. 다음은 결혼하신 분들이 푯말을 만들면 좋을 것 같은 문장인데요
공적인 생활의 과제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부부 생활의 과제는 지겨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 루비와 다이아몬드, 피와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