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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7 - 아르타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 전쟁를 종결했으나 분열로 쇠락하다!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직접 그리스와의 충돌을 꺼린 대신에 교묘한 방법을 썼으니
바로 아테네와 다른 그리스 도시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는데.... 플라타이아이 전투
에서 승리하며 페르시아에 대승을 거둔 그리스는 기원전 479년 부터는 역으로 페르시아를
공격해 키프로스와 트라키아 지방,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 도시들을 뺏는등 공세로 전환했습니다.
아테네는 기원전 478년 키프로스를 공격해 약탈했고 직후에 비잔티움까지 빼앗으며 흑해 무역권을 틀어
쥐었는데.... 하지만 여기서 부터 그리스 군대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니 스파르타는 더이상
원정을 하기 싫어했으니, 굳이 그리스 본토를 넘어 저 페르시아 까지 진격해야 하냐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스파르타는 이미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모든게 다 끝났는데 더이상 전쟁을 벌일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반면에 확장주의와 해외무역을 추구했던 아테네는 이오니아 지방의 식민도시들 까지
모조리 탈환하고자 했고, 결국 스파르타가 원정군에서 빠지면서 아테네가 완전한 주도권을 거머쥡니다.
스파르타와 그에 동조하는 그리스 도시들이 원정군에서 빠져버리자 아테네는 새롭게 동맹군을
재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니..... 애초에 페르시아 라는 공통의 적 때문에 잠시 뭉쳤을
뿐이라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니 해서 새로 창립된 동맹이 델로스 동맹 입니다.
델로스 동맹의 표면적 목적은 '페르시아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는 그리스인들의 해방' 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이었지만 실제로는 아테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확장주의적인 목적이니 델로스 동맹군은
키몬의 지휘하에 기원전 470년대에 트라키아와 아에기나 지방 페르시아 도시들을 공격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사기가 하늘까지 치솟았던 델로스 동맹은 가는곳마다 승리를 거두며 기원전 466년에는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승을 거두었고, 눈에 보이는게 없던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핵심 세원이자 식민지인 이집트
해방 시키기를 시도하니 마침 이나로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자 지원해 200여척 대함대를 파견했던 것입니다.
이집트에 도착한 아테네 함대는 나일강에서 50여척의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이집트에 상륙했으며
페르시아 육군은 아테네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해...... 멤피스로 도망쳐서 문을 굳게 닫아 걸었습니다.
아테네와 이집트 원주민들은 멤피스에 틀어박힌 페르시아 군대를 무려 4년 동안 공성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으며, 그러던 중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2만 5천의 진압군을 모아 메가비주스에게
맡겨 이집트로 파견했고, 메가비주스는 기원전 455년 아테네 포위군을 쫓아내고 멤피스를 구원합니다.
아테네군은 나일 삼각주 프로소프티스섬으로 패주해 진을 쳤지만, 뒤를 쫓아온 메가비주스의 공성전에
당해 18개월 만에 대부분이 사로잡히거나 겨우 도망치는 치욕을 겪으니, 아테네 본국에서는
50여척의 트리에레스를 파견해 구원토록 했지만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프로소프티스가 함락되었습니다.
이집트의 도시 프로소프티스가 함락되었다는 것을 듣지 못한 아테네 구원군은 이집트에
도착하자 마자 멘데시움 전투에서 페니키아 해군에게 처참하게 패하는데.....
이로 인해 아테네 핵심 전력 상당수가 무느졌으며 5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집트 원정에서 국가가 흔들릴만한 피해를 입은 아테네는 더이상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할만한 상태가
못됐고 게다가 페르시아 전쟁 이래 갈수록 스파르타와의 갈등도 심해지며 이들과도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라는 두 막강한 세력을 동시에 상대할 형편은 더더욱 못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키프로스 섬을 공략하던중 아테네의 지도자 키몬이 병에 걸려 세상을 뜨자 아테네는 더이상
패권 전쟁을 멈추고 본국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하니..... 페니키아 함대로 구성된 페르시아
군대가 키프로스를 뜨려는 아테네 군대를 공격했지만 실패한지라 아테네 함대의 귀환을 막지는 못합니다.
키프로스에서 출발한 아테네 함대는 이집트에서 허겁지겁 도망쳐온 패잔병들과 합류해
아테네로 돌아갔으니, 이렇게 아테네가 이집트 원정 실패로 치명타를 입고 페르시아
도 그리스와의 추가적 충돌을 꺼리면서,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기원전 449년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에서 칼리아스 평화조약이 체결되며 페르시아 전쟁이
마침내 그 마침표를 찍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는 에게해를 아우르는
깡패 패권국으로 성장했고, 반면에 페르시아는 꽤나 큰 금이 가면서 조금씩 흔들리게 됩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마지막 중흥을 이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기원전 424년 세상을 떠나니 장자
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했지만 45일 만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서자 소그디아누스가
크세르크세스 2세가 취해있는 틈을 타 죽여버렸는데, 하지만 이복형을 죽이고 제위를
차지한 소그디아누스도 6개월 15일만에 또다른 이복 형제 다리우스 2세에게 목숨을 빼앗기게 됩니다.
다리우스 2세는 적국 아테네를 견제하기 위해 교묘한 술책을 썼으니 아테네가 시라쿠사에서 패배하며 흔들리는
듯 보이자 대군을 보내 아테네를 침공했고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어 이간계를 사용했으며, 기원전 407년에
아들 키루스를 직접 소아시아로 파견해서 아테네와의 전쟁에 힘을 보탰고 스파르타에 보내는 지원도 늘립니다.
페르시아가 보내준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은 스파르타는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결국
아테네를 꺾어버렸고..... 그리스 도시들이 서로 제살 깎아먹기 식 경쟁을 하는 덕에 페르시아는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었으며, 아테네를 몰락시키고 패권을 잡은 스파르타는 아테네만큼
에게해 패권을 유지할 능력도 없었으니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나타날 때까지 서서히 쇠락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사후의 혼란을 잠재운 다리우스 2세는 기원전 404년 바빌론
에서 죽는데..... 황후 파리사티스가 키루스 왕자를 다음 황제로 세우자고
간청했지만, 다리우스 2세는 끝끝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다음 황제로 지명합니다.
소아시아의 장군 티사페르네스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키루스 왕자가 황제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키루스를 저 먼 리디아의 사트라프로 보내 버립니다.
앙심을 품은 키루스 왕자는 스파르타 장군 클레아르코스 (Clearchus) 휘하 10,400명의호플리테스
(Hoplite ; 그리스의 중장보병) 와 또 2,500명의 페르타시스(Peltast ;
그리스 경장보병) 로 이루어진 그리스 용병대를 모집하여 아르타크세르크세 황제와 싸우러 갑니다.
키루스는 그리스인 용병 1만 3천명 팔랑크스 부대등 반란군을 일으켜 황제를 공격했지만 기원전 401년
쿠낙사 전투에서 대패하고 키루스 본인도 전사하며 무위로 돌아갔으며..... 그리스군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해 그리스로 돌아오는데, 그리스인 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 (진군기) 라는 책에서 기술했습니다.
크세노폰은 그리스의 철학자, 군인, 역사가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인데..... 아테네 출신
으로 말을 끌고 참전했으며 승마술에 뛰어났다는 점, 그가 부유하면서도
귀족 인사들과는 가깝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제2 계급인 기사 계급 출신으로 봅니다.
아테네와 적국 페르시아 내전에서 그리스 용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크세노폰은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용병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라고 묻자, 소크라테스는 말리면서, 정 가려고 한다면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아오라고 하니..... 크세노폰은 '어떻게 하면 무사히 돌아 오겠냐' 라는 질문으로 신탁을
받아내자 어처구니가 없어진 소크라테스가 "가도 되는지 부터 물었어야지!" 라고 크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아나톨리아 서부 리디아의 사트라프 (총독) 인 키루스는 다리우스 2세의 아들이자 황제 아르타
크세르크세스 2세의 동생으로..... 그리스 용병을 고용해 왕위 계승 반란을 일으킨
것이니, 크세노폰은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전투를 시작해 기원전 401년 쿠낙사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키루스의 부대와 마주치고는 싸울 생각이 없는듯 짐짓 후퇴를 거듭하다가 키루스군이
긴장이 풀어지고 호위가 소홀해지자 기습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루스군은 우익의 그리스 용병대
가 페르시아 군의 좌익을 격파하며 우세를 차지하자 중앙 부대가 적을 몰아붙이기 위해 점차 흩어지게 됩니다.
그에 고무되어 키루스는 숫자가 줄어든 본인의 부대와 함께 신중하지 못한 움직임을 취하게 되니... 아르타
크세르크세스의 중군이 많이 전진한 그리스 용병대를 앞뒤로 끊어버리려는 기동을 직접 저지하게 됩니다.
그 저지 마저도 지나치게 성공하여 왕자 키루스군의 본대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눈 앞까지
전진하게 되었으며..... 키루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직접 목격하자
그만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그를 죽이기 위해 손수 돌격했지만 실패하여 전사했던 것입니다.
그리스 용병들은 명분없는 전쟁에 끼어들고, 적지에서 보급을 기대할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지만
지휘관들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항복 강요에도 넘어가지 않고 버티면서, 자신들이 페르시아
샤한샤와 싸울 생각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주장해서 평화로운 퇴각을 허락받습니다.
그러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마음이 바뀐건지 원래부터 그런 생각이었던 건지, 부하들의 독단이었는지 열흘
넘게 평화롭게 퇴각하던 그리스 용병대는 함께 돌아가던 페르시아 태수의 만찬에 초대되는데..... 윤관이
화의를 한다며 여진족 추장들을 성안으로 불러들여 술에 취하게 한후 죽였듯 적의 계략에 걸려 모두 살해됩니다.
고려의 윤관은 무려 17만 대군을 거느렸으면서도 나라를 세우지도 못하고 부락 단위로 생활하던
수천명에 불과한 여진족과 떳떳하게 정면 승부를 하지 않고 저리도 비열한 술책을 썼으니
이후 여진족들이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는지라 일껏 쌓은 9개 성 중에 2개 성이 함락되자
결국에는 나머지를 돌려주고 철수했던 것인데... 페르시아 태수도 비열한건 윤관과 똑 같습니다?
페르시아 태수에게 속아 술자리에서 모든 그리스인 지휘관들이 몰살된지라 살아남은 그리스 용병 만여명
이 절망에 빠진 상황에서 크세노폰이 나서 임시로 지휘를 맡게 되고, 적지 한복판에
고립된 용병들의 기나긴 탈출이 시작되는데 크세노폰과 그리스인들은 지옥같은 처절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크세노폰은 후퇴하면서 페르시아군의 매복이 우려되는 서쪽 평야 지대인 유프라테스강이
아닌...... 그리스와는 반대 방향이라 매복이 없는 티그리스 강으로 부대를 이끌게 됩니다.
1600년 18만 대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하자 1500명 사쓰마의 시마즈씨 군대는 고향인
서쪽으로 달아나지 않고 반대 방향인 동쪽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진을 공격하는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가고시마까지 돌아온게 떠오르는데 물론 추격군에 1,400여명이 차례로 죽고 돌아온 자는 70명에 불과했지만?
이때 겨울 날씨로 동료들이 동상을 입게 되고 높은 산지에서는 말을 끌수 없어서 두 발로 걸어서
흑해로 가야했는데..... 용병들은 페르시아군에게 쫓기고, 도망간 산악 지역 부족들의
저항에 부딪혀 전투를 치르는등 퇴각 도중에 죽고 낙오하는 자가 속출해 8000여명으로 줄어듭니다.
크세노폰은 퇴각 과정에서 다양한 음모론에 휘말리고 각종 비난을 들으며 용병들이 각자의 이유로 부대를
이탈하면서 6000여명이 됐지만 그의 전략과 필사적인 노력에 힘입어 천신만고 끝에 흑해
연안에 도착했으니 결국에는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의 도움으로 그리스로 돌아올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환영이 아니었으니 그리스인들은 탈출에 성공한걸 보고 거대한 군세를 유지한채
파플라고니아나 이오니아에 식민 군사도시를 건설해 지배자가 되려 한다거나, 그리스 도시를 치려
한다는등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반대로 용병들은 크세노폰이 그들을 선동해 해산시키려 한다며 비난합니다.
반년 동안 적지에서 생존을 위해 싸워온 용병 6천여명은 지구상에서 이미 최정예 그 자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인데..... 이들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던 스파르타왕 아게실라오스 2세는 용병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그리스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흑해를 건너 페르시아로 쳐들어가는 원정대로 보냅니다.
페르시아의 다릭 금화는 페르시아의 적들한테 뿌리는 뇌물로도 사용되었으니 그리스 스파르타의 국왕
아게실라오스 2세가 이끄는 스파르타 군대가 페르시아를 침략했을 때, 페르시아는
다릭 금화 3만닢을 그리스 본토 도시 국가들한테 뇌물로 뿌리고 그 대가로 스파르타를 공격하게 합니다.
그래서 스파르타 본국이 위험해지자 아게실라오스는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에서
철수하면서 "나는 페르시아 궁수 3만명의 화살에 쫓겨났다." 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다는데..... 다릭 금화에 “활을 쏘는 초상” 이 새겨져 있어서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누린 풍요와 부는 엄청났으니 곡창지대인 아나톨리아,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이란고원, 인더스강 유역을 모조리 차지했기 때문인데 유럽은 로마제국이 탄생하지도
않아 프랑스 옥토는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여 있었고, 독일은 게르만족이 사는 위험한 산림지역 이었습니다.
중국은 황하강의 중원을 제외하면 밀림이 우거져 경작지가 부족했으며 훗날 곡창지대 강남, 양호, 사천등
장강은 아마존 같이 정글인 곳인데다가 이민족들이 우글대는 위험하고 미지의 땅이었던 시대니, 이런
상황에서 페르시아는 오랜시간 개간하고 관개시설 개발을 마친 부유한 지역 여러곳을 독식하였던 것입니다.
크세노폰은 이때 부대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용병들이 다시 페르시아로 건너가 어떻게 되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데..... 다만 이때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전쟁 양상은 크세노폰의 다른 저작인 헬레니카에 실려 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기원전 394년에야 그리스 땅에 돌아온 크세노폰은 코린토스 전쟁에 참전해
스파르타 진영에서 테베와 아르고스를 상대로 싸웠는데, 아테네의 적인
스파르타를 도운 탓에 고향으로 돌아갈수 없고, 궐석재판을 통해 아테네에서 추방당합니다.
결국 크세노폰은 기원전 391년 부터 스파르타의 엘리스에서 거주하며 책을 쓰기 시작했으니 크세노폰의
저작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371년 스파르타가 테베를 상대로
레욱트라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목숨이 위험해지자 다시 코린토스로 이민을 갔고 기원전 355년에
죽는데.....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그가 페르시아에 있을 때인 기원전 399년에 독배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페르시아라는 대제국의 지방 영주에 용병으로 가서 적의 수도 근처에서 닥친 최악의 상황에서도 총지휘를
임시로 맡아 반 이상의 병력을 살려내는 과정을 보면, 확실히 명장의 기질이 있는데 적지
한복판에 포위된 상황에서 병력을 수습하고 전멸을 막으면서 안정적으로 퇴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탈출기 책인 '아나바시스' 의 의미는 '올라감' 인데, 해안에서 내륙으로 올라간다는 의미
이기도 하고, 평지에서 산지로 올라간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책의 내용은
대부분 "내륙으로 올라갔던 우리가 어떻게 해안으로 내려와서 복귀했는가" 에 할애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무려 45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나름 제국을 평화롭게 통치했으니,
수도를 다시 페르세폴리스로 천도해 확장한 다음 엑바타나의 궁전을 새로 신축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 조로아스터교 사원들을 짓는 등 소아시아 지방에 조로아스터 신앙 전파에 큰 역할을 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도 선대 황제들 처럼 이간계로 그리스를 갈라놓는 데에 열심
이었으니,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가 압도적인 그리스 세계의
패권국으로 등극하자 이번에는 반대로 아테네와 테베 등을 밀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1만 다릭에 달하는 거금을 아테네와 테베 정계에 뿌려대면서 스파르타의 경쟁국
들을 밀어줬고..... 덕분에 스파르타는 소아시아로의 확장을 멈추고 내부 단속에 나설수 밖에 없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옛 적국이던 아테네와 함께 펠로폰네소스 해안가를 약탈하고 다니기도 했으니 이걸
코린토스 전쟁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옛 페르시아 전쟁의 악몽이 뿌리깊게 남아
있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자칫하다가는 오히려 아테네가 지나치게 성장할 것을 우려합니다,
결국 페르시아는 아테네와 테베를 다시 배신하고 스파르타와 평화 협정을 맺어버렸는
데.... 이 협정으로 이오니아와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다시 페르시아의 손에 들어가는 대신 그리스 본토는 확고히 스파르타의 영향권이 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아테네의 뒷통수를 치면서 그리스를 다루는데는 성공적
이었을지 몰라도 이집트에서는 처참한 쓴맛을 봐야만 했는데, 원래
이집트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부터 가장 반페르시아 감정이 강한 나라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집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재위 초반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해 나가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4년간의 준비 끝에 20만 대군을 모아 기원전 373년 이집트를 진압하려
시도했지만...... 아테네의 도움을 받은 이집트의 넥타네보 1세가 철저하게 페르시아 군대를 막습니다.
주둔지 인근에 거대한 해자를 파놓고 나일강에 제방을 쌓아 페르시아 해군의 진입도 막았으니 결국
패하는데, 원정이 실패하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다타메스를 시켜 재원정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다타메스는 정적들이 페르시아 중앙 정계에서 권력을 잡은데다가 이집트 원정에 부담을 느끼고는
그만 반란을 일으키니, 부유한 이집트의 독립과 다타메스의 반란으로 기원전 372년 부터
서부 지방의 사트라프들도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이집트 재정복의 꿈을 잠시 접어둬야 했습니다.
다타메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이집트를 평정하라고 내린 엄청난 수의 대군들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의 카파도키아로 들어가자 신이 난 이집트의 넥타네보 1세는 다타메스와 피르기아의
사트라프 아리오바르자네스에 아르메니아의 사트라프 오론테스등 반란군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퍼부었습니다.
다타메스가 아들에게 배신당한후 살해되고 기원전 360년 수뇌부가 포로로 잡히면서 사트라프들의 반란은 7년
만에 진압되는데, 한편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끝없는 갈등을 중재하며 노골적으로 테베의 편을 들어주었고
불만을 품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사트라프들의 반란을 뒤에서 지원해주기도 했지만 결국 반란군은 진압됩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기원전 358년 죽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황제로 즉위하는데, 장자 다리우스 왕자는 오래 사는 아버지를 쫓아내고 빨리 왕위에 오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려다 잡혀죽었고, 차남 아리아스페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술수에 말려서 죽었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아르사메스 왕자를
새 황태자로 세웠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아르사메스 왕자
마저도 죽이고 새 황제에 등극했으며 페르시아 제국은 이때 부터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아버지 시절 소아시아의 사트라프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고는
더이상 저들에게 맡길 수가 없다고 여겼지만 사트라프들이 순순히
받아들일리가 만무했고, 특히 피리기아 지방의 아르타바조스 2세는 대놓고 황명을 거부했습니다.
아르타바조스 2세는 아테네에 구원 요청을 해서 아테네와 다른 그리스 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기원전 354년 페르시아 진압군 마저 물리쳤지만 기원전 353년에
끝내 진압군에 패하니 필리포스 2세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도망쳐 몸을 의탁합니다.
소아시아를 일시적으로나마 평정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선대 시절에 독립해 떨어져나간
이집트로 눈길을 돌렸으니 이집트는 2대인 넥타네보 2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워낙에
이집트의 부와 재화가 압도적이다 보니 페르시아로서는 도저히 포기할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기원전 351년 대군을 일으켜 이집트를 침공했지만 넥타네보 2세의 전술
에 말려 패배하니 안그래도 뒤숭숭하던 제국은 페니키아, 아나톨리아, 키프로스 등에서 동시에
반란이 일어나 독립을 선포했으니.... 이는 페르시아 제국의 장악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카리아의 왕자 이드리에우스에게
키프로스 정복을 맡겼고 시리아의 사트라프 벨레시스에게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 시돈을, 킬리키아의 사트라프 마자에우스에게 페니키아 안정을 맡깁니다.
그러나 페니키아를 진압하라고 보낸 벨레시스와 마자에우스 모두 이집트에서 4만의
지원을 받은 시돈의 왕 테네스에게 격파당하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직접 33만이라는 전대미문의 대군을 이끌고 페니키아로 원정해서 시돈을 몰아칩니다.
엄청난 대군에 경악한 시돈의 왕 테네스는 항복했고 시돈의 고위 시민 500여명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왔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으니..... 시돈은 불타 무너져내렸고 테네스 역시 살해당합니다.
시돈의 반란을 꺾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집트로 2차 원정을 떠났는데, 넥타네보
2세는 2만명의 그리스 용병대를 포함한 10만명의 군대를 데리고
페르시아에 맞섰지만 33만명의 대군을 거느린 페르시아군을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습니다.
잘하면 지류들이 빼곡한 이집트의 지형을 이용해 시간을 끌수도 있었겠지만 넥타네보 2세에겐 계책도,
실행할 유능한 장군도 없었으며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넥타네보 2세의 군대에서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고 페르시아는 펠루시움 전투 승리로 이집트를 빠른 속도로 재점령합니다.
넥타네보 2세는 에티오피아로 도망쳐 행방불명됐고 페르시아는 다시 이집트를 식민지로
되찾는데 성공했는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잔혹할 정도로 이집트를 수탈했습니다.
옛날 다리우스 1세가 관용을 베풀었던 것과는 천지차이로 모든 신전들을 약탈했고 이집트 종교도
탄압했으며 세율도 극악할 수준으로 올렸는데, 이렇게 기를 꺾어놔버린 덕에
이집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들어올 때까지 다시는 페르시아에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공포 정치를 펼치면서 지중해 세계를 장악했으니 강력한 군사정책과 특유의
초토화 작전으로 반란의 싹을 잘랐고, 덕분에 페르시아 제국은 외형상으로는 지중해 최강 대국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환관 바고아스는 이집트 원정의 성공과 뛰어난 능력 덕에 제국의 행정을 책임집니다.
페르시아군은 여세를 몰아 이오니아와 리키아 지방의 옛 그리스 식민도시들을 모조리 재점령했고 아테네의
해상 식민지들도 다시 뺏어왔는데, 페르시아가 옛 영토들을 야금야금 먹어치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도시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후 자기들끼리 치고받느라 힘이 빠져 페르시아에 대항할 생각을 못합니다.
그나마 아테네에서 페르시아를 공동으로 막자는 의견이 나오긴 했지만 무시당했으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재위 말년 동안 페르시아는 그럭저럭 평화기를 구가했고 더이상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황제가 가장 경계하던 세력은 필리포스 2세 아래서 빠르게 성장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왕국이 급속도로 커지자 페르시아는 트라키아 지방에 지원을 퍼부어 마케도니아에
흡수되는 것을 막으니...... 격분한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와 함께 페르시아를 치고자
했으나 마케도니아를 난폭한 야만족으로 보던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 호응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