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은 창작활동이 왕성했던 30대 후반 무렵 자신의 세딸들을 위해 '어린이를 위한
앨범'을 작곡했습니다
모두 43곡으로 된 피아노 소품곡집인데 그중 10번째 곡이 '즐거운
농부'입니다
하루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들의 경쾌한 발걸음을 묘사한 곡이라고 합니다
슈만의 즐거운 농부
슈만 어린이를 위한 앨범, 슈만 즐거운 농부
슈만의 즐거운 농부는 '어린이를 위한 앨범'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곡으로 가사는 우리나라에서 붙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곡입니다.
특징으로는 밭에서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음악으로 경쾌하게
표현을 한 것인데요.
이 작품은 1848년에 완성이 된 곡으로서, 농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즐거운
농부들의 모습이 바장조로 4/4박자로 잘 표현을 하고 있는 곡이랍니다.
슈만은 어떤 음악가일까요?
슈만은 독일의 작곡가이자 낭만주의음악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출판업자의 아들로서 법률을 배우면서 자라다가 나중에 음악으로 바꿔서 피아노
와 작곡을 배웠는데요.
하지만 오른손에 통증이 오게 되자 작곡에 전념을 하고 평론가로도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슈베르트의 영향을 받아서 가곡과 피아노 독주곡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사육제, 피아노협주곡, 어린이를 위한 앨범같은 작품들을 남겼다고 합니다.
음악의역사
로베르트알렉산더슈만
Robert,AlexanderSchumann
요약 슈만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최대 작곡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부친은 문학을 지망하여 저술과 출판을 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로베르트의 음악상의 재능은 어머니에게서 이어받았다고 하나, 그의 음악문학에 통한 면과 그가 평론면에서 남긴 큰 업적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그는 40년 남짓한 생애를 한 번의 외국여행 이외에는 독일 국내에서 보냈다. 그것은 고난에 찬 일생이었으며, 마지막에는 2년 가량의 정신병원 생활 끝에 세상을 마쳤다.
출생 - 사망
1810. 6. 8. ~ 1856. 7. 29.
출생지
쯔비카우
직업
작곡가
사조
독일 낭만파
가족관계
배우자 : 클라라
쯔비카우 태생인 독일의 작곡가. 부친은 저작가이며 서적상, 모친은 유명한 의사의 딸로서 교양이 높았다. 8세 때부터 오르가니스트 쿤취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1세 때에 작곡하게 되어 크게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부친의 책방에서 음악 서적을 읽고, 또 바이런, 리히터 등의 문학이나, 칸트 등의 철학을 연구하여 문학적인 교양을 쌓았다. 피아노는 11세 때에 학교나 가정의 살롱에서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실력을 갖추었으나, 부친이 사망한 뒤, 1828년에 모친의 뜻으로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고, 1830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전학했다. 이 무렵부터 음악을 전공하려는 희망이 특히 강해져서, 가을에 라이프찌히에 돌아가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배우는 한편, 작곡을 도른에게 공부했다. 그러나 피아노의 무리한 연습 때문에 손가락을 다쳐, 그 이후로 작곡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초기의 작품은 모두 피아노곡으로 되어 있다.
1834년에는 친구와 음악 신보를 발간하여, 진보적인 음악 운동의 변호를 위해 가공적인 ‘다비드 동맹’을 결성하여, 슈만 자신이 플로레스탄 혹은 오이제비우스라는 필명으로 평론의 필치를 날렸다. 1836년에 은사인 비크의 딸이며 여류 피아니스트로 유명해진 클라라와 사랑에 빠졌으나, 비크의 맹렬한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1840년에 소송 사태까지 이르는 장애를 거쳐 마침내 결혼했다. 이 결혼한 해에 예나 대학에서 철학 박사의 학위를 받았고, 또 수많은 가곡을 써서 소위 가곡의 해를 실현시켰는데, 이 해만으로 133곡의 가곡을 썼다. 결혼한 후 창작 분야는 더욱 확대되어,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작곡에 손을 대게 되었다. 1843년에 라이프찌히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으나, 본래가 신경질이었던 슈만은 정신 착란증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1844년에 클라라와 함께 러시아를 여행했을 때부터 병세가 악화되었고, 드레스덴에 정주하여 개인 교수와 창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1850년에 뒤셀도르프에서 지휘자로 초청되었으나, 정신 착란증이 심해져 그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으며, 클라라의 극진한 간호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맡은 직책을 중도에서 사직했다. 1853년에 청년 작곡가 브람스를 발견하여, 세상에 알리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이듬해인 1854년 2월 6일에 갑자기 라인 강에 투신 자살을 꾀하여, 구조된 후 엔데니히의 정신 병원에 수용되었다. 그 뒤 이 병원에서 치료받는 나날을 보내다가, 2년 후인 1856년에 46세로 애석히도 세상을 떠났다. 슈만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은 피아노곡과 가곡으로, 시정과 환상성이 음악과 적절히 연결되고 있다. 교향곡과 같은 대곡에서는 구축성의 부족과 관현악법의 역량 부족 때문에 진가가 발휘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가곡과 피아노곡에 있어서는 전기 낭만주의 시대는 물론이려니와, 독일 정신을 표현한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독일 낭만주의의 화려한 시대의 특징 있는 작곡가로서, 또 그 지도자적인 존재로서 손꼽히고 있다.
[주요 작품] 4곡의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첼로 협주곡, 피아노곡 《나비》(1832), 《사육제》(1835), 《환상 소곡집》(1837), 《교향적 연습곡》(1834), 《어린이의 정경》(1838), 《크라이슬레리아나》(1838), 가곡집 《리더크라이스(9곡)》(1840), 《미르테의 꽃(25곡)》(1840), 《여자의 사랑과 생애(8곡)》(1840), 《시인의 사랑(16곡)》(1840) 등.
쯔비카우
쯔비카우는 당시 겨우 인구 5천의 고을이었다. 슈만은 이 고향의 자연을 무척 사랑하여, '나는 외로울 때면 고향을 그린다. 진심으로 사랑한다. 어린시절의 그 꽃피던 낙원 같은 들판이 생각난다'고 편지에 썼다. 지금은 살 풍경한 탄광도시.
슈만의 소년 시절
소년 시절의 슈만
슈만은 1820년 9살 반에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의 수기에 의하면 재주는 없지 않았으나 근면하지는 않았다. 자택이 출판사여서 서가에 문학책이 많아 그는 스코트, 바이론을 읽었고, 특히 장 파울에 심취했다. 중학 시절에 그가 쓴 시, 극, 소설도 약간 있으며, 시낭독을 즐겼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작곡을 하는 것이 일과였다. 그는 이 시절부터 문재(文才)와 악재(樂才)를 동시에 드러냈던 것이다.
슈만과 비크
《어린이 정경》
슈만의 첫사랑
슈만의 첫사랑과《사육제》 Op. 9
1834년은 슈만이 음악신보라는 잡지를 창간한 해로서 의의가 있는데, 그의 첫사랑이 실연으로 끝나 슬픔을 맛본 것도 이 해다. 이 무렵 비크가(家)에는 아시에서 온 남작 집안의 아가씨 에르네스티네가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18세이던 천진스런 이 여성과 슈만은 사랑을 이야기 하고 은밀히 결혼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안 비크는 이 사실을 양가에 알리어 그녀는 부모에게로 불려갔던 것이다. 이 때의 그녀에 대한 사모와 달콤한 추억이 Op. 9인 《사육제》가 되었다. 이곡은 20곡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거의 전부에 에르네스티네의 고향 아시의 이름이 A, As, C, H와 Es, C, H의 음으로 숨겨져 있다.
클라라 비크
클라라와의 결혼
클라라가 장성함에 따라 두 사람의 우정은 사랑으로 바뀌었고, 필연적으로 결혼을 전제로 하여 열렬하게 타올랐다. 아버지 비크가 이 사실을 알고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었다. 한편 두 사람은 자식으로서 본분을 다하며 간청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슈만과 클라라는 법에 호소하여 시비를 가리기로 하였다. 슈만과 클라라는 비크를 상대로 라이프찌히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 뒤에도 클라라는 아버지에게 한 번 더 졸랐지만 그는 더 강경해질 뿐. 그러나 이 재판에서 1840년 9월에 슈만의 주장이 받아 들여져, 그해 9월 12일 클라라가 21세가 되기 전날을 기해서 세네펠트 교회에서 조촐한 식을 올려 두 사람은 결혼생활로 들어갔다.
신혼부부가 살던 집은 라이프찌히 시 인젤스트라세 18번지의 집이다. 이 집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드레스덴
뒤셀도르프
슈만의 뒤셀도르프 시절
1850년에 슈만 일가는 드레스덴을 떠나 뒤셀도르프로 이사했다. 이 곳에는 시립 오케스트라가 있었는데, 슈만이 그 상임 지휘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슈만에게 제시된 조건은 1년에 정기연주 10회와 4 회의 교회음악을 지휘하면 되었고, 거기에 대하여 1년에 700탈레르의 급여가 지급되게 되었다. 그리고 슈만 부부에게는 빌커 가에 있는 널찍한 주택이 주어져서 클라라는 딴 방을 차지하여 결혼후 처음으로 거리낌없이 마음껏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객실로 쓰던 큰 방에서는 이따금 음악가들을 초대하여 하우스 콘서트를 열었다. 슈만의 교향곡 《라인》 이외에 첼로 협주곡 등 중요한 작곡이 여기서 이루어졌고, 브람스의 재능을 발견하여 기사를 써보낸 것도 여기서였다.
슈만의 투신과 입원
슈만은 드레스덴 시절부터 이미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뒤셀도르프에 온 뒤 관현악단과의 사이가 좋지 못하여 그것도 원인이 되어 정신이상이 생겼다. 그는 투신하기 며칠 전에 슈베르트한테서 주제를 받아 《주제와 변주》를 작곡한다고 말했었다.
2월 27일(1854년), 그는 식구한테 말도 않고 집을 나가 라인강 다리 위에서 몸을 던졌다. 요행히 뱃사람이 구해서 집으로 데려갔는데, 그는 자기가 한 짓을 변명하지도 않고 자기 방에 들어가 하고 있던 작곡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본 교외의 엔데니히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2년 반 가량 요양에 힘썼지만, 1856년 7월 29일에 아무도 없는 자기 병실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 병동은 예정되었던 철거를 면하여 지금은 슈만 박물관이 되어 있다.
슈만 박물관
클라라 슈만
클라라의 만년
클라라는 슈만이 죽은 뒤 일곱 남매를 거느리고 40년을 더 산 다음 1896년 5월 20일에 프랑크푸르트에서 77년의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남편을 여읜 뒤에는 요아힘, 브람스 등과 친교를 계속하여 그 힘으로 그녀의 예술을 다할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