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교 시인
1977년 7월 24일 경북 영주 출생
2010년 <사람의문학> 등단.
대구 북구 대현2동 502-3 3층
풍년정미소
- 정훈교
바람이 한참만에야 다 익었어 간혹 지나다보면 헬기에서 투하되는 최루탄이라고 생각했어 생뚱맞지만 눈물이 사납게 달려들어도 까끌한 웃음 정도로 대충 버무려 먹었지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둬야 돼 설익은 눈물은 감잎처럼 떫으니까
바람에도 물렁뼈가 있단 얘길 듣긴 했지만 이렇게 스치기만 해도 살꽃 필 정도로 센 놈인 줄은 몰랐어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메스꺼워 느티나무에 매단 할아버지 할아버지 적 방앗간 얘기는 이제 끝난 거야 쌕쌕 울어대는 컨베이어벨트 위로 머리가 딸려 들어갈 것만 같아 벽은 금이 가다 못해 가랑이를 활짝 벌렸어 난 이제 눕기만 하면 돼 넓적다리엔 왕겨의 가는 속살만 잔뜩 쌓여 있어 쌀 찧는 일이 업인 줄 알았는데 방아로 찧고 빻아야 되나봐 칠 타(打) 고운 가루가 되겠지 그런데 쳐서 넘어지면 뭐 하게?
녹슨 맨발이 양철지붕 위에서 울고 있어 이제 그만해
불타는 꿈
- 정훈교
불타는 꿈을 꾸었지 바위에 컹 내려앉은 북두칠성 데리고, 송아지 뒷발에 차인 어린 기억 데리고 저녁노을 갈대 물들이며 고개를 넘어 가고 있었지, 환웅의 핏줄인 노을도 불이 붙은 게야 산이 발에 닿지 않고 울렁거렸어 말쑥한 유년을 차려입고 뽀얀 젖가슴 드러낸 소녀 소발자국 굵게 누르며 지나는 거 보였어
다시 붉은 밤 지새운 어느 날이었지 산이 용으로 변하더니 입에서 흰 구름을 피워댔어 현기증 느낀 사람들은 구름을 타고 별안간 반대편 산으로 옮겨 붙더라고 급히 지나온 날 발바닥과 허리를 아프게 누르며 지나갔지, 용은 상서로운 것이라 했는데 얼마 있다, 허리가 자꾸만 아파왔지 그때 누군가 전화를 했어, 여보세요, 뜨거운 여름 소금 간 밴 사내의 음성이 목구멍을 힘들게 빠져 나오고 있었지 그는 한 팔 깁스하고 다릴 절룩거렸지, 용달차에 실린 그의 봄 같은 날과 뜨거운 날이 바싹 타들어갔어 초라한 멍게처럼 바다를 조금씩 밀어내는, 그의 이마엔 어느새 무지개가 피었어, 뜨거운 5월이야
왼편부터 박선주, 정훈교, 김용락, 김은령, 박경조, 김성찬
늑대의 호기심이 비둘기를 훔쳤다*
- 정훈교
콩팥과 신장을 사주세요
뇌사판정을 받은 고양이가 소리쳤어요
일기장엔 만성적자를 겪고 있는 주인의 수익곡선이 직각보행을 하고 있어요
위험한 경영학은 실패도 조작할 수 있다나 봐요
도박사들은 생을 마감할 때가 오면 히말라야로 길을 떠난다고 해요
고결하게 마감하고 싶다는 뜻이래요
레시피에 따르면 붉은 고추가 매달리는 계절이 곧 온다고 해요
한쪽 팔을 잘라낸 후에도 오랫동안 팔이 있는 것처럼 느끼듯 말이야 -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며 떨면서 얘기했어요
떨어져 나간 씨앗이 주인의 자궁에서 꽃을 틔울 때, 잊지 말고
콩팥과 신장을 사주세요
주인과 고양이는 이제 꿈을 꿀 수 없어요
이별을 누가 알아줄까요(노래할까요)
레시피에 따르면 이별의 해독제는 달콤한 축농증이래요
긴 혀로 호흡하는 숨 막히는 절규 뒤에 오는 잔잔한 악어의 눈물,은
주인이 햇빛에 말려둔 짧은 시간이래요, 잊지 말고
콩팥과 신장을 사주세요
무지개가 뜬 히말라야엔
수염으로 말하는 바다고양이가 살고 있대요
검은 에메랄드로도 불리는 그녀의 말은
언제나 우수에 젖은 먹구름이였구요, 잊지 말고
액자에 걸린 엄마의 고양이가 건반 위에서 춤을 춰요
검은 건반 검은 건반 하얀 건반 하얀 건반
부조리하게 튀어 오르는 운율은
탈선한 호기심은
쉽게 놓지 못하는 독사의 꿈같은 건가 봐요
만성적자 위험한 경영학 레시피 이제, 잊지 말고
콩팥과 신장을 기증할게요
뇌사판정을 받은 고양이
* 1989년 개봉한 송영수 감독의 영화 제목.
구석기시대
- 정훈교
결국 막장으로 치닫는 드라마가 대세야 봄부터 가을까지 물론 그 전에도 비극의 3막 3장 같은 일은 많아 물빛 자욱한 밤 가로등 아래 파닥거리며 마지막 밤을 증오하기도 하지 한 마리 유충처럼 연한 초록빛 갈매나무속 나뭇잎을 먹고 살던 시절도 있었지 그만하고 얼굴빛이 온통 탄(炭)빛이 된, 그의 속사정이 검게 익었을 때야 연탄아궁 위엔 매일 밤 비극이 고봉밥 돼 올라갔지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은 아니어도 푹푹 눈 나리는 탄광촌이었어 발파공 아빠를 둔 아이들의 발가락이 두툼한 솜이불 아래 꼼지락거리고 엄마는 밤새 초조하여 양말을 깁고 있었지 엄마 각시멧노랑나비가 더듬이를 세우면 요술처럼 새벽이 왔어 양말은 밤새 두툼해졌고 빨랫줄에 널린 하얀 아빠의 옷이 점점 푸른 멍으로 익어갔지 아무도 봄을 찾는 더듬이를 생각하지 못했어 새벽 검은 빛깔 낯선 사내가 아빠였단 걸, 그게 고둥의 살점을 파내 집으로 삼는 고둥게의 가슴이었단 걸 안 건 한참 후였지
결국 즐겨보던 막장 드라마는 시시하게 끝나버렸지
아라한 연못
- 정훈교
한낮 햇살이 벌처럼 날았어 느티나무 아래 밤꽃이 흐드러지게 폈지 평상에 핀 노란 할미꽃은 밀려오는 꿈을 쫓고 있었어 혜성의 꼬리엔 별이 주렁주렁 열려 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별을 세다 보면 눈꺼풀이 두꺼워진 꿈은 할미꽃을 하얀 무지개다리로 끌어당기지 중간쯤 건너면 희미한 경계가 보일 거야 아라한(阿羅漢) 연못이지 붕어(崩御)가 선명하게 보이면 2g 영혼이 빠져 나간거래 천연향료를 만들려면 2g 꽃 한 송이가 필요해 모든 것을 불살라 초연히 향이 되는,
별꽃
내가 알던 그도 모든 걸 불살랐지 팔년을 병실에서 살다 마지막 섬광을 섬뜩 보지 영혼은 깃털처럼 가벼워 굳이 무게가 필요 없었던 거야, 남겨진 설움도 없이 깔끔하게 가버렸지 그는 정말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을 믿었어, 밤별을 보고 밤달을 보고 컹컹 짖기도 했어 그의 전생이 보였을까 때가 되면 한 줌 재도 아닌 것이 한 접시 꽉 채운, 寂滅, 그는 가는 곳 알고 있었을까
멀뚱한 새벽이 쳐다보고 있어 눈곱 낀 눈은 아직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지 난 화분에 물을 주고 있어
눈빛이 일제히 와그르르 쏟아졌지, 아니 물빛이
청거북
- 정훈교
손가락을 물었어요 청거북은 6번 형성 인을 생성할 때마다 달팽이처럼 자기의 촉수를 잘랐어요 자기 혈족에 대한 숱한 구설수를 견디지 못했다 하고 새끼를 낳지 못하는 자학의 연장선이란 설도 있어요 난 4번째 운명선을 지켜보다가 물렸는데 그 이빨자국이 오래도록 들끓었어요 병원에서 당신을 씻어 내리던 일 우물가에서 당신을 길어 올리던 일 이젠 잠잠해졌어요 청거북이 봄밤 흐느적흐느적 꽃잎을 밟고 가는데요, 감나무 포곤한 짚단 위로 하양하양 나오는 속내를 들키고 만 것인데요, 홧홧한 황혼이 이미 저물고 생식의 반을 써버린 청춘이 감나무 아래 웅크리고 있고 비가 올 것 같은 밤이고 깜깜하다며 아부지가 고래고래 고함칠 것 같은 밤이에요 이런 밤이면 청거북이 아부지를 업고 멀리 가길 바랐어요 이불 아래 옹기종기 모인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고(당신)잃어버린 촉수같이 들뜬 달이어요 이제 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