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디렉토리에는 일종의 천주교인 게토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아서 어지간하면 답변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질문이라고 적어놓으신 걸 보니 그간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설득력 없는 호교론적 질문들에 비해 도를 지나치는 것 같아 몇자 적게 되었습니다. 질문하신 분은 아마 개신교 교회에 다니시면서 실망과 회의를 많이 하셔서 위와 같은 질문을 하신 것 같은데,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잘 못 배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들 대개가 무식하여 잘 못 가르치고 있거나 전혀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겠지만요.
1. “개신교인들은 마루틴 루터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종교개혁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신적 영감에 의한 위업으로 말하는 것은 아마 종교적인 문법에 의해서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종교적 문법이 뭔지는 아시죠? 어떤 일이든 종교적인 의미와 연관시켜 생각하려는 종교인 누구나 가진 의식적 노력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종교개혁은 루터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이상한 주장이지는 않겠죠. 자기의 사적인 이익과 관련해서는 종교적 의미를 묻는 것은 정당하고 세계사적 사건에 대해서 종교적 의미를 묻는 것은 문제가 된다면 어폐가 있겠죠. 사족입니다만, 미국 남북전쟁시절 남군과 북군이 모두 신이 자기네 편이라고 쓴 깃발을 사용했다거나, 마라도나가 골을 넣고 난 후 무릎을 꿇고 성호를 긋는다거나 하는 이런 것들이 모두 종교적 문법에 의거한 행동들이죠.
2. “성서원리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성서에 없는 종교개혁주일까지(작년까지의 제 개신교 생활에 비추어 볼 때) 만들어 내서 지키고 있습니다.”
성서원리주의, 보다 정확히 전문적인 용어로 말해서, 성서축자주의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종교개혁정신에 반하여 신성의 이름을 가진 억압적 권위구조를 세계 내에 주입하는 마성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주일이 있는 것이 무슨 문제라고 지적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성탄절은 성경에 명시된 날이라 지키는 것일까요? 기념일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지켜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어떤 기념일도 직접적인 성경적 명령에 의해서 지켜지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질문하신 분은 소위 ‘성서원리주의’마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축자무오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성경에 나오지 않는 모든 기념일을 거부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대개 각 교단 총회에서 연중 기념주일을 정하고, 각 교회에서는 그에 따라 기념주일을 지키거나 교회형편에 따라 일부는 지키지 않거나 하죠. 각 교회 나름대로 기념일을 만들어 지키기도 합니다. 자기 교회 창립기념주일이라던가 하는 것들이죠.
3. “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사상까지 생겨나 성서에는 전혀 근거도 없는 추수감사절이란 절기까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성경적 근거가 물론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성경적 근거를 언급하시는 건, 본인이 혹시 스스로 ‘성서원리주의’자라서 그런건가요? 앞선 문장에서는 성서원리주의의 자기모순임을 지적한다고 이해했는데, 이 문장에서는 질문자가 무의식적으로 그 변태적인 축자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약간 의심이 되는군요. 어쨌든, 추수감사절은 하나의 기념일로서 미국교회에서 지켜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교회 전통에서 생긴 기념일이라는 것이죠. 삼일절 기념주일이나 어버이기념주일 등 우리나라 교회에서만 행해지는 기념주일이 있는 것처럼 미국교회에서만 정해서 기념하는 주일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그 중 가장 오래된 미국교회의 기념주일입니다.(언제 어떻게 추수감사절이 시작되었는지는 상식이니까 아시겠죠?)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미국교회에서 만들어진 기념일을 따라서 지키는가? 그건 우리나라 교회가 미국교회의 선교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좋게 말하면, 복음을 전해준 교회에 대한 예우랄까… 보다 솔직히 말하면, 복음을 전해받는 처음 입장에서는 뭐가뭔지 잘 몰랐을 겁니다. 그런 연고로, 개신교 교회 일각에서는 추수감사절을 지키지 않고 추석에 추석기념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추석이 한해 추수를 감사하는 날이었으니까요. 이런 경향은 앞으로 보다 더 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경향이라는 점은 일정정도 가능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실제 나이든 보수적인 교인들 중에는 스스로 미국 선호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물론, 이건 개신교 교회만의 문제라기보다 우리나라 전반에 걸쳐있는 문제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되겠죠.
4. “그럼 예수님께서 친히 천주교를 세우시면서”
예수님이 천주교를 세웠다는 건 천주교의 주장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예수님이 기독교를 세웠다는 건 기독교의 주장입니다. 신앙이고 뭐고 다 접어놓고, 역사적 객관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현상학적 판단중지라도 하고 성경을 읽어보시면 예수님이 뭔가를 세웠다고 말할 수 있는 주장이 정당하지 않다는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유대교의 신앙전통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세운 것이 아니라 유대교 혁신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합니다. 그건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일부에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예수 자체를 복음의 내용으로 주장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기독교가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그때로부터 예수가 기독교를 세웠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죠. 예수의 기독교 제정을 정당화시키는 일부 구절들은 후대의 삽입으로 평가를 합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이 기독교를 세운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예수에 의해 세움을 받았다고 해석을 하면서 기독교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천주교도 예외가 아니죠. 예수님이 천주교를 세운 것이 아니라, 천주교가 예수님이 자신을 세웠다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5. “"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인 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 사도전승이라는 것도 천주교의 자기해석 장치 중 하나일 뿐입니다. 우선, 사도전승이란 표현은 2세기 이후에 이단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교회가 고안한 이념입니다. 당시 이단들 중에는 ‘비밀전승’이란 표현을 통해서, 자신들이 예수로부터 직접 신비한 것을 비밀리에 전수받았다고 주장을 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래서 공식 제자계보보다 자신들의 주장이 보다 예수에 가깝고 진리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당시 교회들을 위협할 정도로 이들의 주장이 먹혀들었다고 합니다. 이때 기존 교회들은 만약 어떤 전승이 있다면 그건 사도전승밖에 없는 것이 보다 설득력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방어를 했습니다. 이때 사도전승은 베드로 전승이 아니라 보편적 12사도들로 전해진 전승을 의미했습니다. 보편, 즉 카톨릭이란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든 사도들의 가르침에의해 양육된 교회라는 의미에서 각지에 흩어져 있지만 보편적인 교회이고 하나의 교회라는 의식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후, 그러니까 4세기 이후에 로마를 중심으로한 교회권력이 형성되면서 다시 사도전승과 보편/카톨릭 개념을 변용하여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로마 천주교의 기원입니다.
언급하신 성경구절과 관련하여 두 가지 모순을 지적하겠습니다. 첫째로, 설령 베드로 수장권이란 것이 있다고 해도, 로마 교회는 베드로가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로마 교회는 기독교가 발생한 후 초기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때는 식민지 시골에서 태어난 베드로가 로마구경도 한번 해본 적 없던 때였을 겁니다. 로마교회는 자생적인 교회였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로마교회는 베드로뿐 아니라 어떤 사도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썼던 것은 사도없이 자생적으로 세워져 유지되고 있는 로마교회에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이것도 로마교회가 사도전승과 무관하게 세워진 교회임을 증거합니다. 실제 초대교회 시절에는 사도들이 대개 예루살렘교회에 머물렀고, 예루살렘교회가 사도적 정통성을 담보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기 때문에 로마교회가 베드로의 사도권을 계승했다는 주장은 분명한 논거가 아닙니다. 열쇠 이야기를 하는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정말로 진짜 열쇠를 주었는데,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가 그 열쇠를 잃어버렸고 로마교회가 그걸 주웠다거나 베드로가 순교직전 로마 교회에 위탁을 했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면 로마교회가 물리적 수장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증거는 없습니다. 오직 간접적으로만 확인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은 예루살렘교회의 몰락이후 각지의 교회 중 로마교회가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건 로마교회의 수장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객관적 증거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바르게 검토하면, 그 어떤 자료도(심지어 로마교회에서 로마교회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쓰여진 자료에서도, 최소한 4세기 전에는) 오늘날과 같은 수장권 개념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교회를 세웠다고 믿는 것이 앞서 언급한 종교적 문법에 의한 것 수준이라면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이 경우에는 최소한 자기를 상대화할 수 있는 자세를 전적으로 잃어버리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며 우기기 시작하면 그건 광신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6. “개신교인들의 주장대로 루터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교회를 세우고 사분오열하여 오늘날과 같은 3만 종파가 넘어 1교회 1종파가 되었다면 "내가 1500년 후에 새로운 교회들을 세우겠다"라고 목수형으로 말씀 하시지 않고 단수형으로 "내 교회를 세우겠다" 라고 하신 말씀은 다른 교회를 인정하시지 않겠디는 말씀이 되지 않겠습니까?”
‘종교개혁’이라는 표현은 공식적인 표현이니까 거기서부터 출발하겠습니다. 서양어권에서는 그냥 ‘개혁’이라고만 말합니다. 개혁이란 말의 의미는 변화를 추진하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완만하며, 추구하는 변화의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고, 변화를 추진할 때 동원하는 강제력 장치가 구체제의 강제력 장치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혁명과는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혁이란 변화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루터가 개혁을 했다고 평한다는 것은 루터가 전적으로 다른 교회를 창조하려한 것이 아니라 기존 교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서양어에서는 reformation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즉 form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루터가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고 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도 아니고 기존 역사적 평가와도 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거나 기존 교회에서 분리된 새로운 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왜? 그건 천주교에서의 수구적 반동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트렌트 공의회를 천주교 개혁 공의회라고 주저없이 말하시던데, 그건 무분별한 호교론적 발언 이상은 아닙니다. 트렌트 공의회는 그 내용에 있어서나 의도에 있어서나 결과에 있어서 안티개혁이었습니다. 개혁에 저항하는 수구적 반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루터의 문제제기 이후 교황청이 취했던 일관된 입장이었습니다. 그렇게 교황청에서는 루터의 문제제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출교시켰습니다. 하지만 당시 루터의 문제제기는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같이 일어나는 사회적 요구를 교황청이 폄하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교황청의 루터출교결정 이후에도 당시 유럽의 경건한 기독교인들은 루터의 문제제기가 정당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해서 교회가 분열된 것입니다. 루터가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에 분열된 것이 아니라 교황청의 수구반동적이고 권위적인 태도에 의해서 분열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문제제기=분열”이라고 말씀하신다면, 그건 천주교 정신이 얼마나 권위에 대해 굴종적인가를 보여줄 뿐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논리라면, 지금하시는 문제제기 자체도 분열책동 이상은 아니죠)
개신교 내의 교파분열은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종교개혁 정신이 추구한 양심의 자유의 성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교회들이 힘을 합쳐 일을 해나가는데 장애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외부의 객관적 권위보다 모든 사람이 가진 양심적 판단과 신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입장은 그 후 현대 사회의 형성과 민주 의식 고취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습니다. 반면 종교개혁 전통의 교회들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지 특정 권력 조직이나 인물을 우상시하지 않아서 하나의 통일체를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천주교식의 획일화된 교권주의에 대한 의도적 거부였을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그 긍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일치운동 등 구체적인 노력들을 하고 있고, 역사적으로 어떤 개신교 교회도 교회는 하나이고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기독교의 근본적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도 비록 교회들이 데살로니카다 에베소다 지역적으로 흩어져 독자적 조직의 교회를 형성하고 각기 상당 부분 상이한 전통을 만들어갔지만 그 다름 속에서도 일치를 놓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개신교 교회들이 교회의 보편성을 고백합니다.
7. “그럼 과연 루터의 인간적인 욕정(16세 연하의 수녀를 꼬셔 나가서 결혼), 욕심(새로운 교회창립으로 잇권획득) 이나 시기심(텟첼신부에 대한 루터신부의 질투심)으로 인한 성서를 마음대로 빼버리고(야고버서와 제2경전 7권) 제 멋대로 교회를 만들어낸 종교개혁이란 과연 '성공한 종교개혁'입니까? '실패한 종교분열'입니까?”
루터에 대한 인신공격은 루터시대부터 천주교에 팽배한 일이라 그걸 앵무새처럼 반복하시는 것이 그리 이상할 건 없다고 봅니다. 당시 교황청에서는 한 신학자의 정당한 문제제기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인신공격을 통해 그 문제제기의 효력을 떨어트려보려고 노력했던 속좁은 인사들이 상당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인사들의 근시안적 태도덕분에 결국 기독교의 분열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발생한 측면도 있고요. 루터에 대해 행해졌던 비열한 인신공격 중 빠트리신 것이 하나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건 루터가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이었다는 비난입니다. 한마디로 제대로된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서 공연한 시비를 일삼고 분열을 책동했다는 비난이죠. 저는 천주교인이 아니라서 여전히 목에 핏대를 올리시며 그런 인신공격을 하시는 분들을 볼 때 그럴수록 천주교가 얼마나 건강한 종교가 아닌지 드러난다는 걸 모르신다는 것에 대해 별로 안타깝지 않습니다. 단지 그런 분들이 사회적 인사입네 하며 직간접적으로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보기 답답합니다. 몇가지 문제를 빼면 천주교가 그리 나쁜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분들이 지도자로 있는 종교라면 인간 삶에 앞으로 뭔가 긍정적인 기여를 할 종교로는 기대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첫번째로 지적하신 인간의 욕정 문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난 후 루터에게 수녀원에서 도망친 몇 명의 여자들이 보호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보호’가 뭔지 아셔야 할텐데, 당시에는 수녀원에 들어갔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그만두고 나올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삼엄한 감시를 뚫고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나와도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는데 다시 잡히면 죽임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마녀 머 이런 거 잘 아시겠죠? 그렇게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양심적 판단을 사회질서와 교권수호를 위해 능멸하던 사회 분위기에서 그 여자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루터였던 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루터는 초기에 했던 몇가지 문제제기들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지적하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성직제도의 문제였습니다. 루터가 보기에 성직제도란 그릇된 제도였습니다. 단지 성경에 나와있지 않다는 식의 유치한 문제제기가 아니었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성직제도는 기독교 신앙을 비기독교화시키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성직제도는 희생을 중심 내용으로 합니다. 성직제도를 통해서 미사가 성립되며, 미사는 곧 희생입니다. 미사를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희생을 드린다는 건 루터가 볼 때 반기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루터의 말을 따르자면, 인간은 어떤 희생도 신에게 드릴 수 있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희생을 드린다는 것은 단지 인간의 오만일 뿐 아니라 나아가 신성모독이라는 것이 루터의 주장입니다. 성직제도는 이런 신성모독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기본조직이기 때문에 타파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둘째, 성직제도는 인간을 양분하는 그릇된 제도입니다. 모든 사람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의식은 성직제도 속에서는 근본적으로 정당하게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양분은 제도화되고 교리화되면서 주술적이 된다는 것이 루터의 평가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그렇지만 중세이래 주류의 주장은 사제가 되면 신적인 힘이 그 사람에게 새겨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사라지지 않는 각인’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새겨진 신적인 힘은 영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가 보기에 합리적으로 그런 어떤 신적인 힘이 현실적으로 그것도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주장은 정당한 것 같습니다. 사제가 무당이 아니라면요. 물론 사제는 무당이라고, 엄밀하게는 박수무당이라고 보신다면 루터의 합리적 주장이 틀렸다고 말씀하실 수 있겠죠. 더 나아가, 인간을 양분할 때 생기는 문제는 성경이 양분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중윤리라고 합니다. 인간을 양분하고 난 후에는 성경 중 어떤 구절은 일반인에게 어떤 구절은 사제에게로 분할시켜 적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볼 때 이렇게 성경 구절을 임의 적용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라’는 말씀은 이웃에게만 적용하고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여라’라는 말씀은 자기에게 적용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씀들을 분할시켜 적용하는 것은 말씀의 통전성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말씀에 대한 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중윤리 문제는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해하시는데 지장은 없으시리라 믿습니다.
루터는 이런 입장에서 성직제도를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표현으로 하자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볼 때 특수직이 아니라 전문직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보다 공식적인 표현을 따르자면 만인제사장설 혹은 만인사제설이라고 합니다. 이런 루터의 입장은 물론 당시 루터의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루터의 개혁을 지지했던 사람들이란 당시 독일의 일반 사람들 뿐 아니라 수도사거나 사제들도 포함합니다. 루터는 성직제도를 타파하기 위해서 독신인 사람들의 결혼을 독려했고 주선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루터가 보호하던 도망친 수녀들도 모두 루터가 중매해서 지인들과 맺어지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터는 여전히 마음의 거리낌 때문에 스스로 결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들은 다 결혼했는데 루터만 마지막까지 독신으로 남았다고 합니다.(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루터가 종교개혁 때문에 너무 바빴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쫓겨 다녀야 할 불안한 상황이어서 그랬다고 하기도 하던데, 그건 좀 루터라는 사람을 과장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여, 주변에서 루터도 결혼해야 한다고 성화였고, 루터 자신도 스스로의 개혁 정신에 부합하여 실천하기 위해서는 결혼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결국 루터는 자기가 보호하던 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늦게 결혼한 역사적 사실은 인간적 욕정에 의한 파계라는 인신공격이 얼마나 정당성이 없나를 입증합니다.
길어지니까, 마지막에 언급하신 정경에 대한 루터의 입장에 대해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루터가 성경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중세 성서주의처럼 혹은 인문주의처럼 성경을 대한 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은 중요한 것이지만, 성경에 대한 합리적인 태도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이 부분은 시대적 한계도 고려해야 하고 루터 자신에게서도 간간히 혼선이 나타납니다만) 다시 말해 루터는 성서 문자들에대한 숭배를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터는 성경의 정경화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이란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의식 속에서 선별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과거에 이루어진 성경의 정경화에 대한 비판적이고 객관적 입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판단에서 잘못된 정경화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종교개혁 전통의 교회라고 말할 때 전통이란 무조건적으로 수호되어져야할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 종교개혁 전통입니다. 한마디로 현대적인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우리나라 전통을 계승하자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말이 곧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조선시대 왕정으로 돌아가고, 청바지 대신 한복을 입고, 경운기를 폐기하고 쟁기질을 하며, 가요를 금지하고 민요만 부르자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전통적인 형식을 유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 포함하는 내용과 삶의 질, 그 정신과 혼을 이어 발전시키자는 것일 겁니다. 종교개혁 전통의 교회는 그런 정신 속에서 종교개혁 전통을 계승합니다. 그렇게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 현실에서 자기 해석을 따라 전통을 계승하다보니 통일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하지만 통일성이 각자의 양심과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위적이고 권위적인 통일성이 시급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 더 있었는데 까먹었음.^^;;)
아.. 그리고 저 광신도나 교역자 아닙니다. 쪽지 보내거나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