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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뮌헨 가슈타익 필하모니 / 83분 / 한글자막>
=== 프로덕션 노트 ===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바이에른 방송합창단 연주 / 크리스티안 틸레만 지휘
크리스틴 쉐퍼(sop) / 크리스티안 게르하허(br)
크리스티안 틸레만, 거장시대의 향수를 재현하다
브람스 최고의 합창 걸작인 <독일레퀴엠>은 '레퀴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통적인 라틴 텍스트의 가톨릭 전례음악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독특한 성격의 작품이다. 브람스는 예배의 목적보다는 콘서트를 위해 이 작품을 계획하였고, 루터의 독일어 성경에서 죽음 및 위로와 관련된 내용들을 발췌하여 텍스트로 삼았다. 본 공연은 2007년 뮌헨 가슈타익 필하모니에서 있었던 콘서트 실황을 수록한 것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정통 게르만 마에스트로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뮌헨 필 재직 시절 남겼던 콘서트들 중에서도 하이라이트의 하나로 꼽히는 명연이다. 틸레만이 만들어내는 여유롭고도 묵직한 흐름은 과거 거장 시대에 만들어졌던 이 작품의 여러 명연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정상급 소프라노 크리스틴 쉐퍼의 잘 다듬어진 가창과 인기 절정의 바리톤 크리스티안 게르하허의 풍부한 성량도 틸레만의 중량급 해석과 근사한 궁합을 이룬다.
=== 작품 해설 === <2011년 11월 30일자 발행 네이버캐스트 / 황장원 글>
브람스 <독일 레퀴엠> Op.45
브람스가 루터교 성경에서 직접 고른 구절들로 작곡한 독일어 레퀴엠
1868년 가을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1869년 2월 18일 카를 라이네케의 지휘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초연
"가장 순수한 예술적 수단, 즉 영혼의 따스함과 깊이, 새롭고 위대한 관념, 그리고 가장 고귀한 본성과 순결로 일궈낸 최고의 작품이다. … 바흐의 [b단조 미사]와 베토벤의 [장엄미사]를 제외하면, 이 분야에서 이 곡에 비견될 만한 작품은 없다."
당대 최고의 비평가인 한슬릭이 극찬했던 [독일 레퀴엠]은 브람스가 1856년부터 1868년까지, 장장 10년이 넘는 시간을 소요하며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노작이다. 그 발단은 1856년 여름에 일어난 은사 슈만의 죽음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신중한 브람스는 데트몰트 궁정음악가 시절인 1859년에 가서야 그 구상을 표면화했다. 그리고 중간에 소강기를 거친 다음, 1865년에 닥친 그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작업을 재개하여, 이듬해 6악장 구성의 형태로 일단락 지었다. 하지만 1868년 4월 브레멘에서 초연을 가진 후 불만을 느낀 브람스는, 고심 끝에 지금의 제5악장을 추가하여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성시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독일어 가사에 의한’ 레퀴엠이라는 점이다. 통상 ‘진혼곡’으로 번역되는 ‘레퀴엠’은 기독교에서 행해지는 ‘망자(亡者)를 기리는 미사’를 위한 음악이다. 전례(典禮)의 식순에 따른 일정한 라틴어 가사에 의존하는 통상적인 ‘레퀴엠’들과는 달리, 이 [독일 레퀴엠]의 가사는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브람스 자신이 선별한 구절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기독교 전래의 의식에서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것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가지지 않는 ‘연주회용 종교곡’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곡은 모두 일곱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곡. Selig sind, die da Leid tragen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합창)
마태복음과 시편에서 가사를 취한 곡. 합창이 세상의 슬픔에 위로가 주어질 것임을 노래한다. 관현악에는 바이올린, 플루트, 클라리넷 같은 화려한 악기들이 배제되고, 저현부는 다시 몇 개의 성부로 나뉘어 사뭇 어둡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2곡. Denn alles Fleisch, es ist wie Gras /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합창)
가장 먼저 작곡된 곡으로, 일종의 장송행진곡이다. 베드로 전서에서 취한 가사는 엄숙하고 비통한 표정에 실려 모든 생명체의 필멸을 이야기하고, 야고보서에서 취한 가사는 한결 밝고 온화한 빛을 드리우며 인내와 기다림을 권유한다. 그리고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의 힘찬 외침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종결부는 이사야서에서 취한 가사로 시온의 영원한 희락을 노래하며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 마무리된다.
제3곡. Herr, lehre doch mich /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어떠함을 알게 하사 (바리톤 독창과 합창)
가장 인간적이며 전곡의 핵심을 이루는 곡. 바리톤 독창이 고통스런 어조로 시편에서 취한 가사를 읊조리고 합창이 그 뒤를 따른다. 삶에 대한 회의와 이 세상의 허무, 인간의 고뇌가 절절하게 토로된다. 그에 대한 응답은 ‘올바른 영혼은 주의 손 안에 있어 고통 받지 않으리’라는 신념이다. 외경의 ‘솔로몬의 지혜’ 편에서 취한 이 후반부의 가사는 흔들림 없는 확신을 나타내는 낮은 D음의 오르간포인트 위에서 펼쳐지는 경이적인 푸가에 실려 끊임없이 반복된다.
제4곡. Wie lieblich sind Deine Wohnungen /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합창)
가장 짧은 곡. 시편에서 취한 가사로 신의 사랑과 천국의 평안을 화사하고 청명하게 찬미한다.
제5곡. Ihr habt nun Traurigkeit /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소프라노 독창과 합창)
마지막 단계에 추가된 곡. 요한복음, 이사야서, 외경 등에서 가사를 취한 이 곡에 브람스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초상을 투영했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과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라.’ 소프라노 독창과 그 뒤를 따르는 합창이 신의 약속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제6곡. Denn wir haben hie keine bleibende Statt / 우리가 영구히 머물 도성은 없고
(바리톤 독창과 합창)
라틴어 레퀴엠의 ‘진노의 날(Dies irae)’에 상당하는 곡. 우선 히브리서와 고린도 전서에서 취한 가사가 노래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다 변화하리니, 마지막 나팔소리에 홀연히 그렇게 되리로다.’ 바리톤의 묵시적 선언과 함께 심판의 날에 대한 공포가 무섭게 일어난다. 그러나 여기서도 브람스는 요한계시록에서 취한 가사로 다시 한 번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노래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궁극의 평안을 향해 나아간다. 힘차고도 우아한 고딕식 대푸가가 전곡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제7곡. Selig sind die Toten, die in dem Herrn sterben /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합창)
마침내 죽음의 공포는 사라지고, 망자는 승천하여 영원한 안식을 취하며, 그 뒤에 남겨진 자들도 위로를 얻는다. 요한계시록 제14장 13절이 장중하면서도 차분하게 울려 퍼지다가, 마지막에는 온화하고 조용하게 마무리된다.
[독일 레퀴엠]의 작곡 배경
1856년 7월 29일, 엔데니히의 요양원에 도착한 브람스의 눈에 약 한 시간 전 비극적인 생애를 마감하고 조용히 누워있는 슈만 선생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난 몇 년간 선생이 겪었던 고통을 줄곧 지켜봐왔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자세는 비교적 담담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죽음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곳에는 남편을 떠나보내고 비탄에 젖은 클라라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브람스가 평생 동안 숙고했던 ‘죽음’이라는 명제가 그의 뇌리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신중한 브람스는 우회로를 택했다. 그 명제에 곧바로 달려드는 대신, 평소 즐겨 읽던 성경을 더욱 가까이 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죽음에 관한 상념들을 차곡차곡 쌓아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죽음’을 다룬 첫 작품인 [매장의 노래(Op.13)]를 완성한 것은 1858년의 일이었다. 이 작품이 이듬해 함부르크에서 성공을 거두자, 그는 보다 큰 규모의 작품을 쓰고 싶은 마음을 내비쳤다. 비로소 [독일 레퀴엠]에 대한 구상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불씨는 데트몰트에서 피어올랐다. 그 곳에서 궁정음악가로 일하는 동안 브람스는 케루비니의 [레퀴엠]을 연구하면서, 바이올린 파트가 침묵하는 깊고 어두운 음색의 오케스트라로 자신의 ‘레퀴엠’을 시작하리라는 착상을 떠올렸다. 그 착상은 훗날 제1곡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작곡된 부분은 지금의 제2곡이었는데, 그 기원은 뒤셀도르프에서 클라라와 함께 즐겨 연주하곤 했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로 거슬러 올라간다. 얼마 후 이 곡의 상당 부분이 d단조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개작되는데, 그 때 제외된 완만한 스케르초 악장이 제2곡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1860년 여름, 고향인 함부르크로 돌아온 브람스는 1857년에 착수했던 ‘두 개의 모테트(Op.29)’를 완성한다. 바흐를 정점으로 하는 모테트의 전통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드러낸 이 작품에서 그는 ‘신의 자비에 의지하여 위안을 얻는다’는 생각을 확립했다. 그리고 슈만의 사망 5주기를 맞이한 1861년, 작곡은 큰 진전을 보게 된다. 단악장에서 출발한 악곡의 규모가 네 개의 악장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독일 레퀴엠]의 구상은 서서히 구체화되어 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슬픈 사건
하지만 그 이듬해, 작곡은 갑작스레 소강기로 접어든다. 음악가로서 함부르크에 정착하고자 했던 소망이 좌절되자 빈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음악의 본고장에 진출한 그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낸다. 새로운 활력으로 넘치는 빈에서 예의 ‘무겁고 어두운 작품'에 대한 생각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한 동안 분주한 일상에 쫓기며 지내던 그를 다시금 ‘레퀴엠’의 작곡 테이블 앞에 끌어 앉힌 것은, 또 하나의 슬픈 사건이었다.
1865년 초, 불길한 전보 한 통이 날아들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 부랴부랴 함부르크로 달려갔다. 그러나 고향집에 도착한 그를 맞이한 것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어머니의 주검이었다. 사랑하는 노모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한 브람스는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에 잠겼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머니를 땅에 묻고 나서도 좀처럼 그칠 줄 몰랐고, 빈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피아노를 통해 북받치는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슬픈 해가 다 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계속 더 그리워하게 될 겁니다…."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탄식으로 가득 찬 편지를 띄웠다. 그제서야 그는 9년 전 클라라가 느꼈던 슬픔과 두려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홀로 이 세상에 남겨진 심정, 생전에 그 사람에게 보다 충실하지 못했다는 후회, 그리고 죽음이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 그 모든 것이 이제 그 자신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은 어느새 서랍 속 깊숙이 넣어두었던 슬픈 음악의 악보를 다시 꺼내고 있었다.
압도적인 성공과 영예
브람스는 ‘레퀴엠’의 작곡에 몰두함으로써 위로를 얻고자 했다. 작업은 노모의 사후 9주가 지난 1865년 4월에 재개되었고, 그는 어디를 가건 악보를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며 작곡에 매달렸다. 그 해 ‘바리톤 솔로와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여섯 개의 악곡’이라는 작품 전체의 설계를 확정했고, 이듬해 2월부터 4월에 걸쳐 카를스루에에서 제3곡을 푸가의 앞까지 쓴 후, 5월에는 같은 곡의 유명한 푸가를 완성했다. 계속해서 여름에는 스위스에서 제1곡과 제4곡을, 8월에 바덴바덴에서 나머지 곡들을 완성하여 작업을 일단락 지었다. 마침내 여섯 악장으로 구성된 장대한 작품, [독일 레퀴엠]이 탄생했던 것이다.
완성된 작품은 1867년 12월 1일, 빈 악우협회가 추진한 슈베르트 기념 음악회에서 요한 폰 헤르베크의 지휘로 첫 선을 보였다. 이 때는 전반부 세 곡만 연주했는데, 제3곡의 푸가에서 팀파니 주자가 무분별한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여섯 곡 전체가 공개된 것은 1868년 4월 10일 브레멘에서였다.
성금요일에 진행된 이 공연은 악보를 미리 받아본 그 곳 교회의 음악감독 카를 마르틴 라인탈러가 성심을 다해 준비해준 덕택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브람스 자신이 지휘를, 친구인 슈톡하우젠이 바리톤 독창을 맡은 것도 주효했다. 객석에는 클라라와 요아힘 등 그를 아끼는 많은 친구들은 물론이고 그의 부친과 계모도 앉아 있었다. 그의 동료 알베르트 디트리히는 이 날의 공연에 대해 “한 마디로 압도적이었다.”라고 증언했고, 그 누구보다 감격한 클라라는 편지로 찬사를 보냈다.
“저는 당신의 ‘레퀴엠’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 곡이 지닌 이상한 힘은 듣는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고야 맙니다. 그것은 보기 드물게 훌륭한 작품입니다. 장엄하면서도 시적인 그 음악에는 사람들을 흥분하게도 하고 차분히 가라앉게도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브람스는 불만을 느꼈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건만, 그에게는 아직 어딘지 부족해 보였던 것이다. 고심하던 그는 얼마 후 온화하고 감미로운 악곡 하나를 첨가하게 된다. ‘근심과 고통에 잠긴 영혼에 대한 위로’를 내용으로 하는 이 곡에 등장하는 소프라노의 음성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지금의 제5곡인 이 곡에 브람스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그녀에 대한 추억을 담고 싶었던 것이리라. 마침내 일곱 악장으로 완결된 [독일 레퀴엠]의 초연은 1869년 2월 18일, 카를 라이네케의 지휘로 라이프치히에서 치러졌다. 그리고 그 후 10여 년, 이 작품은 독일어권에서만 100회 이상이나 무대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전 유럽에서 브람스의 명성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죽음 뒤에 남겨진 이들에게 주어지는 위로
그런데 이 작품에서 브람스가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 자신이 직접 고른 성경 구절들을 가지고 브람스는 일종의 ‘죽음에 관한 명상록’을 작성했다. 평소 브람스는 교회에 나가는 일은 별로 내켜하지 않았으나 늘 성경을 가까이 하며 스스로를 ‘루터교인’이라고 칭했다. 루터교인들은 죽음에 관해 어떤 기도도 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생명에 관해 연구하고 죽은 이들을 애도하며 스스로의 운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브람스 역시 이 작품을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로 채색했으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서 밝은 빛을 이끌어내며 궁극적으로는 희망을 노래했다. 따라서 [독일 레퀴엠]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를 위한 음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슈만의 죽음 뒤에 남겨진 클라라와 어머니의 죽음 뒤에 남겨진 자신. 소중했던 두 사람의 죽음에 직면한 브람스가 다음 순간 응시했던 것은 ‘죽음 뒤에 남겨진 자들의 고뇌’였으리라. 사실 ‘죽음의 의미'에 대한 묵상과 깨달음은 산 자들의 덕목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결국 모든 인간을 포용한다. 브람스가 '작품의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라인탈러의 지적에 대하여, 제목에 쓰인 ‘독일의’라는 단어 대신 ‘인류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는 고백으로 답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독일 레퀴엠]의 작곡을 마친 후, 브람스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마음은 이제 위로받았네. 결코 극복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장애를 이겨내고 높이, 아주 높이 비상중이라네…."
글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 교양강좌 전문강사
클래식음악 감상실 ‘무지크바움’ 실장과 한국바그너협회 사무간사 역임. 무지크바움, 부천필 아카데미, 성남아트센터, 풍월당에서 클래식음악 교양강좌를 맡고 있다. <객석>, <스테레오뮤직>, <그라모폰>, <라무지카> 등에 칼럼을 기고했고 현재 서울시향 프로그램 노트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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