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에 일어나 배낭을 챙기고 취사장에서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 4시에 ^동이 트는 새벽 꿈에 고향을 본 후~^ 어쩌고, 속으로 힘차게 군가를 부르며 법계사를 지나 천왕봉으로 향했다. 뒤에서 비춰주는 불빛에 기대어 가파른 돌길을 50분쯤 치고 올라가니 벌써 동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현명했고 용감했다. 반팔차림으로 나서는 건 나뿐이었고 몸이 더워지자 다른 사람들은 중간에 옷을 벗어야 했다. 회심의 미소를 띄었는데 천왕봉에 점차 가까워지면서 바람이 불고 추워졌다. 바람막이를 꺼내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리숙한 용기가 선견지명에 크게 한방 당했다.
철쭉이 피었고 고사목이 된 주목이 보이기 시작했다. 끝까지 계속 오르막이 이어졌다. 천왕봉 바로 아래에서 동녘이 밝아 오는 걸 감상했다. 해돋이를 보러 다닌 게 한 두번이랴. 찬란, 황홀, 이란 말로는 부족하다. 보고 느껴야 한다. 건강한 체력에 감사하고 평온한 앞날에 대한 소원을 빌지는 않았지만 풍광에 취했다. 대피소에서 같이 잔 사람들은 일찌기 출발하여 천왕봉 위에서 일출을 기다리고, 보고, 내려 오고 있었다. 바위 봉우리 천왕봉(해발1,915미터) 정상석 뒷면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힘있는 필체로 쓰여 있다. 15년 전 한 번, 이번까지 두 번을 밟았다. 이번이 더 활기찼다. 심장과 허벅지나 장딴지에 무리가 없어 그동안 단련된 덕임을 체감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장터목 연하선경 세석대피소를 거쳐 백무동으로 길을 잡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방을 둘러보며 ^지리산은 크다^란 말을 되뇌였다. 너울진 푸른 산맥을 둘러싼 운해와 산그림자를 보고 감탄하며 걸었다. 지금에서야 피는 진달래와 철쭉의 빛깔은 여기가 청정한 곳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얼레지를 비롯한 고산식물들의 자태를 눈여겨 보기도 했다.
장터목은 지리산을 둘러싼 산청 함양 하동 구례 등지의 물산을 교환하던 곳이다. 지금은 등산객이 쉬는 곳이지만 조상들이 다른 고장 사람들과 이곳까지 봇짐을 지고 이고 올라 와, 교류했다. 연하봉에서 바라보는 안개와 노을이 기가 막혀 연하선경(煙霞仙境)이란 이름까지 얻었다. 신선이 놀던 곳이다. 세석평전(細石坪田)은 일대에 펼쳐진 평원 지형이다. 즉, 잔돌이 많은 넓은 평원이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고산 초원과 습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지금도 습지가 둘러쳐져 보존되고 있었다. 여기서 라면을 끓여 먹고 시장기를 떼웠다. 지리산 산줄기를 오르내리며
가까이 보이는, 실제로는 멀리에 있는 반야봉을 바라보며 작년에 왔던 노고단쪽 지리산을 상기했다. 천왕봉과 노고단을 완주해야 지리산 종주를 했다 할텐데 끊어서 했고 그 중간에 있는 벽소령쪽을 빠뜨렸으니 백두대간 1코스도 다 하지 못했다. 걸어 오는 동안 반달곰의 습격을 방지하려고 달아 놓은 반달곰 종(Bear bell)이 기억에 남는다. 종소리를 내 봤다. 인기척을 내어 곰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용도다. 함양 백무동으로 내려 오는 길, 한신계곡이 무척 힘들었다. 가팔랐고 돌길이었고 길었다.(6.5km) 내가 제일 싫어하는 너덜길이다.
무릎이 상할까봐 조심스럽게 걸어 꼴찌로 내려 왔다. 오늘 하루 11시간을 넘게 걸었다. 백무동 내려 오는 길에선 1000ml통의 물을 모두 마셔도 입술이 탔다. 우리 일행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힘있게 빨리 걷는 젊음이 부러운 나는 흰 머리가 성성하다. 장도를 마치곤 막걸리를 들이켰다. 네 시간이 걸린 차 안에서 골아 떨어졌다.
영국의 전설적인 산악인으로, 에베레스트산 등정 초창기 원정대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지 맬러리는 말했다.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Because it is there)^ 기자가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하느냐?”고 묻자, 그가 한 유명한 대답이다. 누가 내게 왜 산을 타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거다. ^건죽을 위해.^ 도전하지 않으면 성취가 없다.
힘들었던 기억은 어느새 사라지고 오는 길에 곁에 앉은 친구에게 다음엔 어디로 갈까하고 상의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망각이다. 집에 들어 오니 아내가 하는 말, ^미쳤다.^ 내 무용담을 들을 자세가 아니었다. 캔맥주 하나를 들이켰다. ^너들이 게맛을 알아^라는 광고 문구가 생각났다.
첫댓글 짝짝짝 모두에게 존경의 박수를보냅니다. 아! 지리산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