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00원으로 누리는 '地空居士의 화려한 하루'
"돈과 권력은 애초에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것인가"
영화 ‘Midnight in Paris’를 관람했다. 우리의 영원한 ‘왕 PD’ 임강호 동문의 영화평을 듣고 나서다. 영화는 우디 알렌 (Woody Allen) 감독 작품이다. 영화귀재로 평판이 나 있는 우디 알렌(그는 우리나라 출생의 입양아 ‘순이’의 남편으로도 유명하다)의 작품답게 오늘의 파리와 1920년대의 파리를 타임머신을 타고 오가듯 번갈아 보여 주면서 얘기를 전개한다.
미국인 드러머 작가인 영화 주인공은 약혼자와 함께 파리에 여행 왔다가 어느 날 자정에 골목길에서 우연히 ‘정체불명’의 리무진을 얻어 타게 되고 그 길로 1920년대의 파리 속으로 들어가 ‘과거기행’을 하게 된다. 정확히는 그 시절의 파리 골목 카페 속으로... 파리 체류 기간 내내 그에게는 그런 꿈같은 체험이 이어진다.
1920년대는, 말하자면 前衛예술(아방가르드:avant-garde)의 연대였다. 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상실의 무력감과 퇴폐적 쾌락이 함께하던 시대였다.그 시절의 파리로 돌아간 영화 주인공은 훗날 20세기 藝術史에 큰 이름으로 남게 되는 이른바' 잃어버린 세대'의 예술가들을 담배연기 자욱한 카페에서 매일 밤 조우한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랄드,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등...
영화가 묘사하는 21세기 초의 드라머 작가와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예술가들의 일상적 교감은, 그것이 초현실적 판타지라고 해도 우리와 같은 ‘올드 관객’에게는 묘한 향수를 자극한다. 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의 내 느낌은 그랬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 삶 자체를 ‘부러워’해 왔던 헤밍웨이의 젊은 날 일상을 가까이서 보는듯한 감회가 각별했다.1920년대는 내가 태어나기 20여 년 전, 實相을 알 수 없은 과거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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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은 ‘라페스타’라는,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일산 도심 상가 3층에 자리 잡고 있다. 집에서 20분 정도의 거리다. 영화 관람을 끝내고 천천히 걷다가 간단히 목을 축이고 싶어 편의점에 들렀다. 캔 냉커피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카운터 종업원이 겹겹이 진열된 팩들을 가리킨다. 자세히 보니 갖가지 이름의 팩 커피들이다.
어? 팩 안에 냉 커피? 내 의문은 곧 풀렸다. 얼음이 담긴 투명 컵이 냉동고에 따로 있었다. ‘헤이즐럿’이라고 표기된 팩 하나를 뽑아들고 얼음 든 투명 컵을 냉동상자에서 찾아 든 후 값을 물었다. 얼마죠? 천원 인데요!! 천원? 내 상식으로는 엄청 싼 가격이다. 그러니 편의점에서 냉커피를 주문한 나의 ‘탁월한’ 결정이 스스로 대견했다.
편의점 앞 인도에는 각각 의자 4개의 플라스틱 탁자 두 세트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곳 한쪽에 앉았다. 때마침 微風이 무더위를 식혀준다. 밤늦은 시간인데도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아름다운 인공 '호수공원'이 코 앞인 도심 거리에서 의자에 앉아 '국제가격' 표준으로 1달러도 안 되는 냉커피 한 잔을 음미!-어떤가. 파리의 노상 카페가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그 날 나의 하루는 ‘화려’했다. 지하철 3호선으로 일산 정발산역~ 종로 3가~(5호선으로 갈아타고) 마포역까지 교통비 ’‘꽁짜’, 사무실에서 컴퓨터 열어보며 오전시간 보내다가 가까운 소규모 중국집에서 4,500원짜리 짜장면 점심(직원들이 젊어 혼자 점심을 먹는 경우가 자주 있다), 오후 이른 시간에 다시 꽁짜 지하철로 집에 돌아와 소주 한 병 곁들여 조금 빠른 저녁식사. 그리고 8시 20분부터 상영되는 영화를 관람.4,000원에!
개인당 GDP가 2만 수천달러라는 나라에서 그날 그 시간까지 내가 소비한 ’현금‘은 정확히 9.500원이다. 나는 생각했다. “70 ‘어르신’이 이 정도의 돈으로 이만큼 ‘화려한 하루’를 누릴 수 있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그러나 기분 좋은 생각은 거기까지. 헤이즐럿 냉커피가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1/3쯤 남았을 때 내 의식에는 엉뚱하게도 두 사람이 불현듯 떠올랐다. 신명수와 노태우다. 두 사람과의 개인적 인연 때문일 터였다.(나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기 전 위원장으로 있었던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홍보전문위원으로 한동안 일했었다). "두 사람이 과연 나와 같은 소시민이 오늘 하루 느긋하게 누리는 이런 일상의 '悅樂''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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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무엇에 집착했는가. 무엇을 탐욕했는가. 돈과 권력- 한 시절 그것들의 '결합'이라는 상징성을 지녔던 두 사람의 관계가 이제는 널리 알려진 대로 서로의 멱살을 잡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싸늘한 시각으로 보면, 권력의 겁박으로 불법 조성된 臟物일 뿐인 거액의 돈을 놓고 법정 싸움까지 가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장물을 취득한 꼴인 한 쪽의 경우 어쩐 일인지 수십억대의 소유 저택이 국가 기관의 강제 경매로 넘어갔다. 그는 이제 경제 사회적으로 사실상 몰락한 것인가. 모를 일이다. 그들의 세계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헐 값'이지만 내 입맛에 아주 잘 맞은 1000원 짜리 편의점 냉커피를 한 방울 남김없이 마시고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에 조금 전 관람한 영화 속 1920년대의 헤밍웨이, 피츠제랄드, 피카소, 달리의 일상적 면모가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저런 신파조의 상투적 상념이 계속 오락가락!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예술가는 예술행위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순수한 영혼만이 위대한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는 '해석'은 오늘에도 ‘진실’인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들을 가질수록 어째서 더 많이, 혹은 두 가지 모두를 한꺼번에 향유하려 하는 것일까. 상징적 의미로서는 예술의 반대편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돈과 권력은 애초에 그것 자체로서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것인가. 때마침 현직 최고 권력의 ‘형님’도 돈이 화근이 되어 결국 구치소에 갇혔다. 장마철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첫댓글 편의점 앞 탁자에서 1000원 짜리 냉커피 마시면서도 파리장 몾지 않은 낭만을 떠 올릴수 있는 뒷메의 순수한(?) 감성이 부럽소...ㅋㅋㅋ
그나 저나 이번 기회에 그 영화(Midnight in Paris)는 꼭 보아야겠네...
순수한? 감성? 아니지. 아직도 철이 안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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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그날 용돈을 좀 과용ㅋㅋ한 셈이지! 사진 올려주면 拙文이 빛나겠네ㅋㅋㅋ
뒷메님의 행복한 하루 ! 바로 이게 천국인데 _ 부럽습니다 !
(언젠가 어디를 가며 비행기 안에서 쭈구리고 앉아 "Midnight in Paris"를 본 기억은 있는데,
지금은 깜깜하니 . . . Hemingway, Gertrude Stein, James Joyce, Scott Fitzgerald, . . . ?
Simon de Beauboir 도 거기 있었던다 ? 임강호 동문의 설명을 듣고 보았어야 했는데 ! )
영화속에서 두 남자(헤밍웨이, 피카소)의 애인으로 묘사되는 여자의 눈길이 아주 신비했는데...기억하시나?
주어진 조건에 아름답게 어울리면서 초탈한 심성으로 소박한 삶을 즐기는 뒷메가 신선같이 보이는데............권력과 부의 노예가 되여 눈먼 삶을 살다가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을 남기는 미련한 인간상들이 가련할 뿐 !
무기력한 '노인'의 일상인 것을...
어제 중앙일보 일요판에 시인 김지하와의 인터뷰가 실렸던데... 김 시인 가라사대' "지금은 '五賊'의 시대가 아니라 '五百賊'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