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상정(閔祥正)은 충렬왕 27년(1301) 과거에 급제하고 이듬해 또 전시(殿試)에 급제하였다. 석주(碩州)·보성(寶城)·강화(江華)의 지방관을 역임했고 또 서해도(西海道)와 양광도(楊廣道)의 안렴사(安廉使)가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그가 양광도안렴사로 있을 때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이들에게 주는 뇌물이 그의 관내에서 역마를 갈아탄다는 말을 듣고 아전으로 하여금 찾아내어 압수하고 공문[牒]을 국신소(國贐所)로 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세도가[豪强]들이 가슴을 졸였고, 감히 법령을 어기지 못하였다.
충숙왕(忠肅王) 때 사헌장령(司憲掌令)이 되었는데, 일찍이 어떤 일로 인해 탄핵을 받았다가 사면되어 사헌부[臺]에 나갔는데 규정(糾正)이 두 번이나 소리치기를, “사면 받은 장령.”이라고 하였다. 또 내서사인(內書舍人) 복기(卜祺)는 술에 취해 조정에서 민상정에게 모욕을 주며 말하기를, “풍헌관(風憲官)이 사면을 받아 복직했다는 것은 옛날에는 들은 바가 없으니 그대는 또 탄핵하고 규탄하는 일을 그만두라.”라고 하니, 듣는 이들이 웃었다.
〈민상정은〉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윤석(尹碩)과 손기(孫琦)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왕은 원에 있었는데 민상정과 조염휘(趙炎輝)·장백상(蔣伯祥)·인수(仁守) 등을 보내 그들을 국문하게 하였다. 그들 무리가 상국(上國)에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더니 〈원에서〉 사신을 보내 다시 문초하였다. 장백상 등은 모두 뇌물을 받고 법을 어겼다는 것으로 논죄하여 헌사(憲司)로 보내졌으나, 민상정만은 〈뇌물에〉 연루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감찰(監察)의 수장이 될 것을 명하여 영예롭게 하였다. 관직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전주(銓注)를 총괄하였는데 관직을 줄이고 옛 제도를 복구하였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 죽으니 나이는 72세였다.
〈민상정은〉 품성이 굳세고 곧아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납하지 않았으니 비록 골육(骨肉)이라 하더라도 허물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아들은 민유(閔濡)·민숙(閔琡)·민선(閔璿)·민수(閔琇)·민현(閔賢)이다. 민유는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언(代言)이 되었다. 민상정은 민유가 불효(不孝)하다고 하여 감찰사(監察司)에 고발하여 국문하자 민유는 모두 자복한 뒤 곧 도망갔다. 민숙·민선·민수·민현은 죄를 지어 섬에 유배되었는데 방자하게 굴며 섬에 들어가지 않자 곤장을 치고 다른 곳으로 옮겨 유배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