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본부장 정영하)가 지난 1월 30일 시작한 170일 간의 싸움을 17일 잠정중단하고 현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사측과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한 YTN, 파업 가능성이 높아진 부산일보를 제외하면, 이로써 지난해 말 국민일보 노조의 투쟁으로 시작해 반 년 넘게 이어진 언론노동자들의 파업은 일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국민일보, MBC, KBS, YTN, 연합뉴스 등에서 동시에 이어진 파업은 한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처럼 큰 언론사들이 동시에 일어선 건 세계사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왜 언론노동자들은 그렇게 긴 시간 길거리로 나와야 했을까. 각 언론사 파업이 남긴 의미를 네 차례에 걸쳐 짚어 본다. <편집자 주>
ⓒ프레시안(최형락)
파업 복귀, 투쟁의 시작
각 언론사 노조는 파업 복귀 과정에서 동일한 의견을 밝혔다. 이제 시작이라는 것. 정영하 MBC 노조위원장은 17일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이어오던 투쟁 수단을 파업에서 현장 투쟁으로 바꾸는 것 뿐"이라며 "이제 일상적인 업무를 통해 김재철 사장 퇴진 목표를 마무리하고, 동시에 MBC의 실추된 경쟁력을 회복하고 공정성을 복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노조는 지난 달 22일 복귀 당시 성명에서 "파업 결의 때 다졌던 각오로 업무복귀 이후에도 국민이 주인인 진정한 국가기간통신사, 새로운 연합뉴스로 거듭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엄경철 전 KBS 새노조위원장은 지난 3월 16일 서울영등포구여의도공원에서 열린 '방송 낙하산 동반퇴임 축하쇼' 무대에서 "지금도 '방송이 뭐가 문제냐'는 사람들이 KBS에 많다. 우리가 들어가서 지난하게 싸워야 할 과제가 많다"고 강조했다.
파업 복귀가 언론인들의 투쟁 종료를 선언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사측과 협상을 이루지 못한 MBC를 제외하면, 복귀를 결정한 KBS, 연합뉴스, 국민일보 노조는 모두 사측과 공정방송을 담보할 수단을 복귀 조건에 내걸었다. 이는 그만큼 한국 언론에서 보도 공정성을 담보하기가 힘든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MBC의 한 조합원은 "이제 업무에 복귀하지만 당분간은 간부들과의 신경전이 불가피할 것 같다"고 우려했다.
실제 이들 파업 언론사들은 복귀와 동시에 보도 공정성 문제로 사측과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연합뉴스>가 대표적이다. 연합뉴스 노조는 지난 11일 성명을 내 전날(10일) 대권 도전을 선언한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 관련 자사 보도가 지나치게 '띄워주기'로 일관했다며 "공정보도를 향한 조합원들의 열정과 욕구를 안은 103일 간의 파업이 언제 있었냐는 듯 분별없는 행태가 되풀이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조는 "박 의원 프로필 기사는 당장 분량만 다른 대선주자 기사의 두 배에 달했고, 내용 역시 균형감을 잃었다"며 "'드레스코드'까지 별도 기사로 처리하면서, 너나없이 '독재자의 딸'을 제목으로 뽑은 외신은 단 한 줄도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가 노조 파업 복귀 후에도 공정성에서 균형감을 잃었다는 지적이 내부에서 제기된 셈이다.
KBS에서도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당장 시사프로그램 <추적 60분>이 MBC 파업을 다루는 과정에서 PD들과 간부 사이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국민일보 노조는 사측의 잇따른 대기발령 조치에 흔들리고 있고, 노골적인 지면 사유화와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서울지방검찰청이 조민제 회장을 기소한 후, 국민일보 '특별취재팀'이 검찰을 공격한 보도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MBC 노조는 사측과 제대로 된 협상조차 갖지 못했다. 이용마 MBC 노조 홍보국장은 "기존 단협 안에 명시된 공정방송협의회를 사측이 잘 준수하도록 압박할 것"이라며 현재로선 딱히 새로운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김현석 KBS 새노조 위원장은 "결국 '공정 언론'이라는 개념이 완성된 형태로 제시된 건 아니"라며 "복귀한 후에도 끝없이 싸워야 하는 게 언론인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공병설 연합뉴스 노조위원장도 "지금도 이어지는 사측의 훼방 때문에 파업을 지지해주신 시민들을 뵐 면목이 없다"며 "지지해주신 시민들을 위해서라도 안에서 더 열심히 싸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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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파업이 옳았다
다만 어려운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파업으로 얻은 성과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공병설 연합뉴스 위원장은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연합뉴스 보도에 고마움을 표하셨다"며 "그래도 파업 이후 기자들의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다는 점은 큰 수확"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언론계에서는 파업 이후 연합뉴스 보도의 변화가 눈에 띈다는 의견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박근혜 보도와 같은 문제가 일부 있지만, 보도 태도에서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진 점이 포착된다는 것이다.
화물연대 파업 보도가 대표적 사례다. <연합뉴스>는 지난 달 25일 '연합시론'에서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입장을 전하면서도 "문제는 화물연대 총파업이 이미 몇 달 전에 예고됐었다는 점"이라며 "강경 대응만이 최선의 해결책인지는 깊이 자문해 볼 일"이라고 사실상 정부 비판에 무게를 실었다.
'연합시론'은 사실을 건조하게 전달하는 <연합뉴스>의 일반 보도와 달리, 이 매체 입장을 전하는 일종의 사설이다. 화물연대 파업을 두고 <연합뉴스>는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정부 측 입장을 균형 있게 전달한다는 평을 받았다.
공 위원장은 "100일이 넘는 파업 이후 현장에 복귀하는 기자들 사이에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공유됐고, 이 생각이 취재현장에서 반영된다고 본다"며 "따끔한 지적 못지않게 꾸준한 칭찬도 해 달라"고 당부했다.
MBC 파업을 두고 데스크와 다소간 마찰을 빚었던 KBS의 교양 프로그램 제작진은 결국 관련 프로그램을 모두 방영하기로 했다. 한 방송사에선 드물게 <미디어 비평>과 <추적 60분> 등 복수의 프로그램이 MBC 파업사태를 취재했고, <취재파일 4321>은 복귀 후 첫 아이템으로 희망버스 사태를 다뤘다. <시사기획 창>은 파업 복귀 후 민간인 사찰 문제, 노동 문제를 다뤘다.
KBS의 한 기자(새노조 소속)는 "노조가 파업 당시 중점적으로 다뤘던 민간인 사찰 문제를 한 시간짜리 탐사보도로 내보낸 걸 보고 힘을 얻었다"며 "실력있는 탐사보도 기자가 투입된 건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김현석 위원장은 "분명히 조합원들의 자신감이 커졌다"며 "파업 이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취재에 반영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아직 '만족스럽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조합원들의 제작 자율성이 파업 이전보다 높아졌다는 점을 실감한다"며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 예전에 하지 못했던 제 역할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 파업의 최대 성과"라고 말했다.
이남표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는 "이번 파업이 남긴 의미는 한 번에 정리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며 "무엇보다 가장 효과적인 건 미디어에 대한 국민의 감시라는 점이 입증됐다"고 말했다.
전규찬 언론연대 대표(한예종 교수)는 MBC 노조의 파업 복귀식에서 "여러분의 현장 복귀를 원치 않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그들에 맞서 여러분이 MBC를 반드시 국민 품에 돌려드려야 한다"며 "여러분 노동의 주권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부터 더 굳건히 싸워가 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