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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法喩의 合
佛子야菩薩摩訶薩이應知如來智海無量이니 從初發心으로 修一切菩薩行不斷故며 應知寶聚無量이니 一切菩提分法과三寶種이不斷故며 應知所住衆生無量이니 一切學無學聲聞獨覺의所受用故며 應知住地無量이니 從初歡喜地로 乃至究竟無障礙地히 諸菩薩所居故니라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爲入無量智慧하야 利益一切衆生故로 於如來應正等覺境界에 應如是知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여래의 지혜 바다가 한량없음을 알지니, 처음 마음을 낼 적부터 모든 보살의 행을 닦아서 끊이지 않는 연고이니라. 마땅히 보배덩이가 한량없음을 알지니, 모든 보리의 부분법과 삼보의 종자가 끊이지 않는 연고이니라. 마땅히 머물 바 중생이 한량없음을 알지니, 일체 배우는 이와 배울 것 없는 성문과 독각이 얻어서 사용하는 연고이니라. 마땅히 머무는 땅이 한량없음을 알지니, 처음 환희지로부터 내지 끝까지 장애가 없는 자리에 이른 모든 보살들이 사는 데인 연고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한량없는 지혜에 들어가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기 위하여 여래 응공 정등각의 경계를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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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유(法喩)의 합(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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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은
응지여래지해무량(應知如來智海無量)이니 : 마땅히 알지니 무엇을? 여래 부처님의 지혜 바다가 한량이 없음을 알지니, 그러니까 우리의 본심, 부처님과 같은 마음이 한량없음을 알지니, 우리는 ‘옹졸하게 인연에 묶여서 살 내가 아니다’이 말이다. 거기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발심, 발보리심을 하게 되는데
종초발심(從初發心)으로 : 초발심시변정각, 초발심으로부터, 사람이 정직해지면 그다음에는 어질어진다.
어질어지면 그다음에는 거룩해지고 거룩해지면 사람이 점점 무심하게 된다. 욕심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수일체보살행부단고(修一切菩薩行不斷故)며 : 모든 보살의 행을 닦아 끊이지 않는 연고이다.
보살행은 오직 중생을 위한 것이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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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보취무량(應知寶聚無量)이니 : 마땅히 알지니라. 어떠한 연고로 보배 덩어리가 보취, 보배 무더기가
일체보리분법(一切菩提分法)과 : 한량이 없음을 알지니. 일체보리분법과, 일체 모든 수행, 보리분법,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쪼가리 쪼가리 깨달음의 자비와 지혜가 충만한 법인
삼보종(三寶種)이 : 세 가지 보배 종자가
부단고(不斷故)며 : 끊어지지 않는 연고이니라.
불종(佛種)은 무종(無種)이라고 한다. 불종은 본래 종이 없다. 이것을 진공이라 하고 진심이라 하고 진여라고 한다. 여래종자, 여래의 종(種) ‘여래의 종자를 끊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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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소주중생무량(應知所住衆生無量)이니 :마땅히 머무르는 바 중생이, 중생도 한량없고 보배도 한량없다.
저 앞에 했던 것을 설명한다.
일체학무학성문독각(一切學無學聲聞獨覺)의 : 모두 배우고, 배우는 것, 유학(有學)은 성문이다.
소수용고(所受用故)며 : 무학(無學)은 아라한까지다.
성문을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유학에서 무학까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까지이고 그다음에 십이연기를 뚫어서 깨친 사람을 독각이라고 한다.
소승경전에는 서각(犀角)이 나온다. ‘무소의 뿔처럼’이라고 나오지 않는가. 독각을 서각, 뿔이 하나뿐이라고 무소의 뿔이라고 한다.
경전에 그대로 나온다.
‘비구는 혼자 있는 것을 외로워하지 않는다. 저 하늘의 태양이 혼자이고 달이 혼자라서 짝이 없더라도 반려가 없더라도 외로워하지 않는다. 비구가 가는 길은 그러하다.
마치 홀로 가면서도 외로워하지 않는 저 태양처럼 만중생을 비추고 무소의 뿔처럼 그렇게 간다.’
라고 해놓았다.
경전인데 너무 시적이고 좋아서 한참 보고 서각, 무소 서(犀)자를 다듬어보았다. 다듬으면 나도 다듬어질까 싶어서 글자를 써보았다.
‘무소의 뿔처럼 아 여기 나오는 말이구나’ 무소의 뿔을 상징하는 말이 누구냐 하면 십이연기를 꿰뚫어버린 독각을 말한다.
독각의 각은 깨달을 각자인데 그 각자를 시적으로 표현해서 뿔 각자로 써 놓았다.
원효스님도 <금강삼매경론> 해석에서 시각과 본각을 소뿔의 양쪽으로 표현했다. 깨달을 각자인데 뿔 각자를 썼다.
한문에서는 동음(同音)은 동의(同意)라, 같은 음은 같은 뜻을 나타내고, 이음(異音)은 이의(異意)라, 글자를 똑같이 써놓고도 음을 다르게 읽으면 뜻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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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주지무량(應知住地無量)이니 : 마땅히 머무는 경지가 한량이 없음을 알지니, 여기서 주지라고 하는 것은 어떤 지위, 실제경지, 수행의 경지를 말한다.
종초환희지(從初歡喜地)로 : 처음 환희지로부터 이 환희지는 원효스님 얘기를 빌려서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다.
이 환희지가 ‘색수상행식, 식온이 끓어지는 오온개공을 환희지라 한다’라고 기신론 해석에서 원효스님은 탁월하게 해석했다. 그래서 기신론에서는 환희지를 정심지(淨心地)라 하는데 이 지위부터는 사람의 아만이 서서히 손아귀에 들어오고, 분별심이 바깥으로 탐진치가 싹 나가떨어져서 환희스럽다.
탐진치가 버글버글 끓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환희지가 안 된다. 이 환희지로 들어가면 오온이 개공한다.
그러니까 사대각리여몽중(四大各離如夢中) 육진심식본래공(六塵心識本來空)에 들어가는 것이 환희지부터 들어간다.
들어갔다 하더라도 여전히 안쪽에서는 아만이 계속 독사처럼 우리한테 남아 있다. 독극물이 남아 있다.
능엄경에도 그렇게 나온다. 독이 묻은 그릇을 갖다가 한 번 대강 씻어내고 그다음에 세척제로 제거해서 양잿물로 씻어내고 몇 번씩 헹궈내고 맑아진 상태를 우리는 무생법인이다, 그때는 그 그릇에 아무리 넣어도 하자가 없는데 그때를 감로라고 한다. 감로가 되기 전까지는 독극물이다.
경전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게 써놓았을까 싶다.
제가 별로 신청도 안 해놨는데 그 말을 자세하게 해놓으면 기분이 좋다.
어떤 때는 한참 보다가 이런 생각을 한다.
‘누가 해놓기는 누가 해놔? 내가 해놓고 내가 보는 거지’
그런 오만방자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여기 계신 스님들도 다 마찬가지다. 스님들께서 하신 걸 다시 스님들이 보고 즐기다가 간다. 우리가 해놓은 것이 아닐 것 같으면 이렇게 좋아하지도 않을 것 같다. 서울에서 어디에서 그 멀리서 여기까지 모여와서 공부하는데, 제 강의 들으러 온 것이 아니잖은가. 각자의 강의를 들으러 온 것이다. 남의 것 같으면, 남의 집 잔치는 잘 안 가지 않는가?
여기는 좀 모자라시는 분들이 아니고 좀 많이 모자라시는 분들만 오늘 오신 것이다.
내지구경무장애지(乃至究竟無障礙地)히 : 내지는 구경무장애지, 무장애, 그 어떤 번뇌가 흔들 수 없는, 구경무장애지를 말한다. 우리는 구경열반이라고도 한다.
업식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 분별사식이 무너지고 업식이 완전히 꺼져버리는 구경무장애지를 다른 말로는 구경지라고 한다.
소집장과 번뇌장이 다 사라졌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장애가 없기때문에 그것을 구경이라고 하고 구경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구경각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는 시성정각이라 한다.
제보살소거고(諸菩薩所居故)니라 : 그런 경지가 보살이 사는 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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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어디에 들어가느냐?
위입무량지혜(爲入無量智慧)하야 : 무량지혜에 들어간다는 말은 확실하게 증입해서, 증득해서, 깨달았다 이 말이다.
곡식을 다 거둬서 내 창고에다가 저장해버린 것을 입(入)이라고 한다. 완전히 내 것이다.
밥을 한 숟가락 떠서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밥그릇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입에다 딱 집어넣어서, 소화시켜서 내 핏속까지 들어가 버리면 입(入)이다.
부처님의 진리 속으로 싹 들어가버렸을 때 무량지혜에 들어갔다, 라고 하는 것이다.
입실제자다.
그래서 내 창고가 든든하기 때문에, 무량지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어떻게 하는가?
이익일체중생고(利益一切衆生故)로 :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무량지혜에 들어가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한 까닭으로
어여래응정등각경계(於如來應正等覺境界)에 : 여래응정등각의 경계를
응여시지( 應如是知)니라 :응당히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4) 法과 譬喩의 重頌
爾時에 普賢菩薩摩訶薩이 欲重明此義하사 而說頌言하사대
如心境界無有量하야 諸佛境界亦復然하며
如心境界從意生하야 佛境如是應觀察이니라
如龍不離於本處하고 以心威力澍大雨하나니
雨水雖無來去處나 隨龍心故悉充洽인달하야
十力牟尼亦如是하사 無所從來無所去로대
若有淨心則現身하야 量等法界入毛孔이로다
如海珍奇無有量하며 衆生大地亦復然하니
水性一味等無別이나 於中生者各蒙利인달하야
如來智海亦如是하사 一切所有皆無量하니
有學無學住地人이 悉在其中得饒益이로다
그때에 보현보살마하살이 그 뜻을 거듭 밝히려고 게송을 설하였습니다.
마음의 경계가 한량없듯이
부처님의 경계도 또한 다시 그러해
마음의 경계 뜻으로부터 났듯이
부처님의 경계를 이와 같이 관찰할지니라.
용왕이 본고장을 떠나지 않고
마음의 위력으로 큰 비 내리니
빗물은 오고 가는 곳이 없어도
용왕의 마음 따라 흡족히 적시듯이
열 가지 힘 모니(牟尼)도 그와 같아서
오는 데도 없으며 가는 데도 없으나
깨끗한 마음 있으면 몸을 나타내어
법계처럼 큰 것이 모공에 들어가도다.
바다의 진기한 보물이 한량없거든
중생과 땅덩이도 그와 같으며
물의 성품 한 맛으로 차별 없으나
그 속에 사는 것은 이익이 각각이듯이
여래의 지혜 바다도 그와 같아서
일체 모든 것들이 한량이 없어
배우는 이, 다 배운 이, 지위에 머문 이
모두 다 그 가운데서 이익 얻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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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과 비유(譬喩)의 중송(重頌)
*
이시(爾時)에 : 그때에
보현보살마하살(普賢菩薩摩訶薩)이 : 보현보살마하살이
욕중명차의(欲重明此義)하사 : 욕중명차의라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게송을 말씀하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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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심경계무유량(如心境界無有量)하야 : 마치 마음의 경계들이 한량이 없듯이, 앞에 나온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제불경계역부연(諸佛境界亦復然)하며 : 부처님의 경계도 또한 그와 같고, 한량이 없고
여심경계종의생(如心境界從意生)하야 : 마치 마음의 경계가 뜻으로부터, 이 뜻이라고 하는 것은 심(心) 마음이라고 해도 된다. 마음의 경계가 분별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듯이
불경여시응관찰(佛境如是應觀察)이니라 : 부처님의 경계도 또한 그와 같은 줄 응당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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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용불리어본처(如龍不離於本處)하고 : 용이 본래의 자리,본처를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화엄경은 본처를 떠나지 아니하고 9처에서 설법을 했다고 한다. 문수사리의 발밑을 떠나지 아니하고 시방세계의 선지식을 친견했다 하기도 하고, 보리수하를 떠나지 아니하고 이항처차보리좌라.
불신(佛身)은 충만(充滿)해서 어법계(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라,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라.
이심위력주대우(以心威力澍大雨)하나니 : 이심위력으로 큰 비를 내리니
우수수무래거처(雨水雖無來去處)나 : 빗물이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지만
수용심고실충흡(隨龍心故悉充洽)인달하야 : 그러나 용왕의 마음 따라 흡족히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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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력모니역여시(十力牟尼亦如是)하사 : 부처님 여래께서도 이와 같아서, 여래출현도 이와 같아서
무소종래무소거(無所從來無所去)로대 : 무소종래며 무소거라, 금강경을 꼭 빌리지 않더라도 여래의 출현은 무엇이냐?
오시는 바도 없고 가시는 바도 없다.
굳이 이 대목을 화엄경에서 참고하시려면 제 79권 미륵보살장에 보면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다’라고 나온다.
‘보살은 어떻게 옵니까?’ ‘오는 바 없이 온다’ 그렇게 설명을 하는 대목이 있다. 오는 데도 없고 가는 데도 없다.
화엄경 79권을 참고해 보시면 이런 대목들이 잘 이해가 될 것 같다.
약유정심즉현신(若有淨心則現身)하야 : 깨끗한 마음이 있으면 곧 마음을 나타난다.
이것을 법신이라고 한다.
정심(淨心)에서 나타나는 것이 법신이다.
그래서 앞서 환희지(歡喜地)가 있었지 않는가?
환희지를 다른 말로 기신론 같은 데서는 환희지라고 하지 않고 정심지(淨心地)라고 한다.
연각경(緣覺經) 같은 데는 극희지(極喜地)라고 하고 화엄경에서는 환희지라고 십지품 타화자재천에서 이야기한다.
양등법계입모공(量等法界入毛孔)이로다 : 양이 법계와 동등해서 입모공이라. 법계처럼 큰 것이 어디에 다 들어간다? 털구멍에 다 들어간다.
이것을 화엄경 십현문에서는 ‘광협(廣狹) 넓고 좁은 것이 자재(自在)해서 자유자재해서 넓고 좁은 것이 없다, 광협이 자재해서 무애문(無礙門)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흔히 우리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 하지 않는가?
그것이 전부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礙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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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진기무유량(如海珍奇無有量)하며 : 저 바다에 그 진기함에 보배가 한량이 없거든. 바닷물도 한량이 없지만 보배도 한량이 없으며
중생대지역부연(衆生大地亦復然)하니 : 중생과 대지도 또한 그러하다.
중생은 중생기시(衆生起始)라고 한다. 일어날 기(起)자 시작할 시(始)자, 대지는 뭐라고 하는가? 세계기시(世界起始)라고 한다. 중생한테서 또 올라오는 것이 무엇인가? 업과기시(業果起始)다. 업보기시(業報起始)라고도 한다.
수성일미등무별(水性一味等無別)이나 : 수성의 일미가 등무별하나 이것도 저 앞에서 그릇을 들어 설명했다. 금그릇에 물을 담거나 은그릇에 담거나 쇠그릇 흙그릇에 담아도 물은 다 똑같지만 그러나 그 담긴 그릇의 비중은 좀 차이는 있다고 했다. 마음의 씀씀이가 작용에서는 좀 차이가 있다.
물이라는 본체에서는 차이가 없다. 물의 성품은 한 맛으로 차별이 없다.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좀 더 짜지겠는가?
어중생자각몽리(於中生者各蒙利)인달하야 : 그 속에서 나는 이익이 각각이듯이 그것은 비중이 조금 다르다.
물의 비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릇의 비중이 있잖은가? 법기가 될 만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플라스틱 바가지에 용광로 한 사발을 받아버리면 바가지에 빵구가 나버리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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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지해역여시(如來智海亦如是)하사 : 여래의 지혜 바다도 그와 같아서
일체소유개무량(一切所有皆無量)하니 : 일체 소유와 일체의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한량 없어서
유학무학주지인(有學無學住地人)이 : 유학 무학,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주지인이 자기 수준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실재기중득요익(悉在其中得饒益)이로다 : 실제 그 가운데 있어서 다 이익을 얻는다.
이런 것을 의상스님이 뭐라고 했는가?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그렇게 했다.
여래출현의 경계는 끝났고 다음으로 여래출현의 행, 여래가 출현하면 어떠한 행을 할까 하는 내용이 나온다.
6. 如來出現의 行
(1) 如來의 無碍行과 眞如行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行고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知無礙行이 是如來行이며 應知眞如行이 是如來行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의 행(行)을 알아야 하는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걸림 없는 행이 여래의 행임을 알아야 하며, 진여의 행이 여래의 행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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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출현(如來出現)의 행(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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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如來)의 무애행(無碍行)과 진실행(眞如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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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의 경계는 경계는 끝났고 여래의 행이 나왔다.
여래행은 일단 두 가지 행이 있다.
하나는 무애행이고 하나는 진여행이다.
무애행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고, 진여행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애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즉리즉사(卽理卽事)행이다. 이(理)에 즉(卽)한 사(事)의 행(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진여행은 즉사즉리(卽事卽理)행이라. 사에 즉한 이치의 행이다, 라고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바깥으로 나오는 행동 하나하나가 사건 사물을 바라보는 격물, 사건 품격을 대하는 것이 즉리, 반드시 진리에 맞춰서 하는 것을 무애행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애행이라고 해서 아무나 망작무애(妄作無碍)해 버리면 골치아프다. 허망하게 그냥 ‘아 무애행’인데 해서 막행막식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거지 노릇을 하든지 똥을 밟든지 욕을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무애행을 하더라도 안쪽에는 즉리에 딱 부합해야 된다.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사명연무분별은 부처님만 가능하다.
여래출현을 이사명연무분별이라고 한다.
이에 즉해서 사가 나온다고 하는 것을 쉽게 말씀드리자면 요즘 낙엽이 지고 단풍이 드는데, 보이는 것이 사(事)다. 봄에 새싹이 돋아나고 여름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가 가을에 다 떨어져서 겨울에는 앙상하게 되는 것은 사다.
사실이 그렇게 보이는데 안쪽에서는 이실(理實)이 안쪽에서 돋아났다가 꺼졌다가 이실이 움직였다가 왕성하다가 잠잠하다 하잖는가? 그러니까 이수사변(理隨事變)이라, 사득이융(事得理融)이라고 한다. 이치는 사가 변하는 데 따라서 그 크기만큼 나오는 것이다.
따뜻해지니까 안쪽의 이(理)도 더 크게 쭉 밀어내지고 바깥이 추우니까 사가 추우면 어떤가? 오그라든다. 그래서 이(理)도 안쪽으로 조금 오그라들어가 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 보면 어떤가? 나무 키가 코스모스도 작다. 사(事)가 작다. 그런데 이(理)가 ‘나는 니가 아무리 작더라도 내 혼자 크고 싶다’ 해서 막 밀어내버리면 코스모스는 열 받아 죽어버린다. 자기가 사는 환경만큼 안의 이(理)가, 사와 이가 받쳐주게 되어있다.
그래서 사가 이렇게 혼자 자기 혼자 설 수는 없다.
바깥에 잎사귀든지 뭐든지 안에 사람도 이렇게 왕성해져서 말소리가 크다면 ‘아 저 사람은 안쪽에 지금 기운이 넘치는구나’ 알 수 있다.
아픈 사람한테 가서 ‘목소리 좀 크게 내라’고 하면 앓는 소리를 하면서 ‘아 아파 죽겠는데’ 한다. 그러면 ‘아 이사람은 안쪽에 받쳐주는 이(理)가 시원치 않구나, 법신이 조금 맛이 갔구나’ 이렇게 보는 것이다.
색신이 활발발하지 못하는 것은 법신이 찌그러져 있다는 것이다.
이(理)라고 하는 건 도저히 보려야 볼 수는 없지만 사(事)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이(理)를, 원리를 보는 것이다.
안쪽으로 뭉쳐 있는 걸 정(精)이라고 하고, 이 정신이 바깥으로 신명이 나서 쫙 펼치는 걸 신(神)이라고 한다.
정과 신, 체와 용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 우리가 여래출현품을 공부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행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사로 나오느냐 이로 나오느냐. 이런 내용은 좀 심각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한데 우리처럼 계속 글을 보던 사람은 굉장히 수월하다.
‘글자 이도 모르고 사도 모르겠는데 왜 저렇게 골치 아프게 하나?’ 이러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읽고 넘어가기 바란다.
언젠가는 알아질 날이 있을 것이다.
젖도 덜 떨어질 아기한테 대놓고 ‘자 이리 와봐라. 이게 위스키 30년짜리야, 이게 20년짜리야’ 이래봤자 젖맛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상황이 아니다.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응운하지여래응정등각행(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行)고 : 부처님을 어떻게 알아야 되는가? 여래 응정등각행 부처님의 정등각의 행을 어떻게 알아야 되는가? 부처님의 행은 어떤가? 부처님의 행은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이다, 라고 했다. 무애행과 진여행이 있다. 부처님은 허망한 행, 분별심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즉리즉사행을 이치에 딱 부합해서 바깥으로 그 사를 갖다가 인절미를 만들어내든지 시루떡을 만들어내든지 절편을 만들어내든지 쑥떡을 만들어내든지 반드시 이에 맞춰서 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상에 올리는데 거기에다가 팥떡을 해서 올려서 될 일도 아니고, 신중단에 가야 될지 이치에 맞춰서 해야 된다.
요즘은 무슨 떡을 먹어야 되는가? 겨울쯤 되면 모두배기, 여름에는 기주떡 술떡 있잖은가. 두툼하게 여름에 쉬기 쉬우니까, 봄에는 쑥떡, 요즘은 두텁떡을 먹을 차례다. 고물을 뭉치든가 안에 넣을 것인가 바깥에 넣을 것인가 이런 것들이 그 이치를 생각해서 사를 드러내놓는 것이다.
또 그 계절에 맞춰서 사의 공간에 맞추는 것이다. 잔치떡인지 그냥 막 먹을 떡볶이를 해먹을 떡인지 그 사에 맞춰서, 사건에 맞춰서 그 이치를 적당히 심는 것, 그것을 사득이융(事得理融)이라고 한다.
사라고 하는 건 저혼자 버틸 수가 없으니까 무엇이 와야 융통이 되겠는가? 이를 갖다 붙여줘야 된다. 적당한 이를 갖다 붙여줘야 되고 이수사변(理隨事變)이라,이는 혼자 고집 피우면 안 되고 어떻게 변해야 되는가? 사(事), 현상이 흘러 시절이 흘러가는 대로 거기에 수준을 맞춰줘야 되는 것이다.
쪼잔한 사람이 오면 같이 쪼잔하게 고스톱 쳐주고 거룩하신 분이 오면 거룩하신 분하고 맞춰서 법문을 같이 법담을 주고받고 해야지, 쪼잔한 사람한테 법문을 해버리면 사람이 머리가 터져 죽어버릴 수가 있다. 그때는 먹을 거 주고 짜장면 사주고 이렇게 해야 되잖는가. 그런 것이 지금 이 대목들이다.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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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응지무애행(應知無礙行)이 :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애행이
시여래행(是如來行)이며 : 여래의 행이다.
응지진여행(應知眞如行)이 : 또 응당히 알아라. 진여행이
시여래행(是如來行)이니라 : 여래행인 줄 알아야 한다.
(2) 如來의 眞如行
佛子야 如眞如가 前際不生이며 後際不動이며 現在不起인달하야 如來行도 亦如是하야 不生不動不起니라
佛子야 如法界가 非量非無量이니 無形故인달하야 如來行도 亦如是하야 非量非無量이니 無形故니라
佛子야 譬如鳥飛虛空에 經於百年하야도 已經過處와 未經過處를 皆不可量이니 何以故오 虛空界가無邊際故인달하야
如來行도 亦如是하야 假使有人이 經百千億那由他劫토록 分別演說호대 已說未說을 皆不可量이니何以故오 如來行이 無邊際故니라
“불자여, 마치 진여는 앞에서 나지도 아니하고, 뒤에서 동(動)하지도 아니하고, 현재에 일어나지도 않듯이, 여래의 행도 또한 그와 같아서 나지도 않고 동하지도 않고 일어난 것도 아니니라.
불자여, 마치 법계가 한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량이 없는 것도 아니니 형상이 없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행도 또한 그와 같아서 한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량이 없는 것도 아니니 형상이 없는 연고이니라.
불자여, 비유하면 마치 새가 허공에 날면서 백 년을 지냈다 하여도 이미 지나간 곳이나 지나지 못한 곳이나 모두 측량할 수 없나니, 왜냐하면 허공계가 끝이 없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행도 또한 그와 같아서 가령 어떤 사람이 백 천억 나유타 겁을 지내면서 분별하여 연설하였다 하여도 이미 말하였거나 말하지 못한 것을 모두 측량할 수 없나니, 왜냐하면 여래의 행은 끝이 없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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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如來)의 진여행(眞如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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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생(不生), 부동(不動), 불기(不起), 생했다, 움직였다, 일어났다,이것은 글자만 바뀌었지 다 똑같은 뜻이다. 생자나 동자나 기자나 같은 말이다.
금강경에서는 그것을 통일적으로 묶어서 이야기했다.
‘과거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이것은 인도의 산스크리트가 먼저 온 원문 소스 같다. 중국에서 번역을 했으면 이렇게 한다. 전제불생 현재불기 후제부동 이렇게 해야 된다. 구마라지바는 그렇게 번역을 한다.
그런데 현장법사는 그렇게 번역을 안 한다. 산스크리트 순서대로 과거 미래 현재, 라고 번역한다. 구마라지바는 중국의 형편에 맞게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고 했다.
그런데 화엄경에 보면 심불망취과거법(心不妄取過去法) 역불탐착미래사(亦不貪著未來事) 불어현재유소주(不於現在有所住)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산스크리트어 인도에서 보는 현실이다.
현재를 제일 뒤에 두고 과거 미래를 먼저 두는 것은 인도 방식이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이 이해하기 편하게 번역해 놓은 구마라지바도 상당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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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진여(如眞如)가 : 진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반야심경에 갖다 붙이면 무엇인가?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구(不垢) 부정(不淨) 부증(不增) 불감(不減) 허공이 더이상 불어날 것도 없고 허공이 쪼그라들 것도 없고 부증불감, 공(空)인데 추접하게 때묻을 것도 없고, 때 벗길 것도 없다. 불구부정, 아 그걸 진여라고 하는구나.
능엄경 구절에서 장수자선(長水子璿) 선사가 이렇게 해놨다.
삼제(三際) 과거 현재 미래, 구심(求尋) 마음을 찾아봐라, 심불유(心不有)라 진짜 마음은 없다. 진공이다. 삼제구심(三際求尋)에 심불유(心不有)라.
마음이 본래 없기때문에 일체법이 있을 수가 없다.
심불유고(心不有故)로 망원무(妄原無)라.
기신론에는 어떻게 나오는가?
일체법(一切法) 개유망념(皆由妄念)으로 이유차별(而有差別)이다. 일체법, 법이라는 법은 유위법 무위법은 전부 다 망념으로 말미암아서 차별이 일어난다고 했다.
금강경에는 어떻게 했는가?
일체현성(一切賢聖)은 망념이 없으니까, 일체현성, 삼현십성, 삼현보살, 십지보살은 개이(皆以) 모두 다 무위법(無爲法)으로 이유차별(而有差別)이라. 부처님의 불생불멸로써 차별한다, 이렇게 해놓았다. 무위법으로 이유차별이라.
이것이 능엄경의 삼제구심(三際求尋)에 심불유(心不有)라, 장수자선선사는 송나라 때 스님인데 화엄경이든지 기신론이든지에 공부에 대해서 많이 해석해놓았다. 과거 현재 미래 아무리 찾아봐라. 마음은 없다. 심(心)이 불유고(不有故)로 마음이 있지 않기 때문에 심불유고로 망원무(妄原無)라. 망상이 붙을 자리가 없다. 망상은 어디에 붙어 있는가? 마음에 붙어서 일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기신론 같은 데 ‘의여래장(依如來藏)하야 여래장을 의지해서 유생멸심(有生滅心)이라, 생멸심이 일어났다. 불생불멸을 의지해서 생멸이 일어났다. 생멸과 불생불멸이 화합된 것을 우리는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라고 하였다.
심불유고로 망원무라. 망심 자체도 일어나지 않는다. 망심무처(妄心無處)다 망심이 사라진 그 자리가 즉보리(卽菩提)다.
망심무처즉보리(妄心無處卽菩提)니 망심무처, 망심이 사라진 그 자리가 즉 불이다. 망신무처 즉보리다.
허망한 분별 망상이 없는 자리가 원리전도몽상 해버린 자리가 구경열반이다. 그 자리가 우리 견성성불의 자리다. 그래서 생사 열반이 본평등이다.
생멸법과 열반, 불생불멸의 법이 본래부터 평등해서 둘 다 없는 것이다.
장수자선선사가 말했던 대목들이 이런 데 다 해당되는 것이다. 옛날 어른들은 아주 치밀하게 해 놓았다. 진여는
전제불생(前際不生)이며 : 앞에서 나지도 않고
후제부동(後際不動)이며 : 뒤에서 또 나지도 않고, ‘나지도 않고’라고 계속 하겠다.
현재불기(現在不起)인달하야 : 현재 나지도 않는다.
생이나 동이나 기는 단어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다르게 쓴 것이다.
여래행(如來行)도 : 부처님의 행동은
역여시(亦如是)하야 :그래서 역여시 하야
불생부동불기(不生不動不起)니라 : 나지도 않고 동하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부처님 행은 본래 없다, 이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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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법계(如法界)가 : 마치 법계가
비량비무량(非量非無量)이니 : 한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량이 없는 것도 아니니
무형고(無形故)인달하야 : 형상이 없는 연고이니라.
여래행(如來行)도 : 여래의 행도
역여시(亦如是)하야 : 그와 같아서
비량비무량(非量非無量)이니 : 한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량이 없는 것도 아니니
무형고(無形故)니라 : 형상이 없는 연고이니라.
묘체(妙體)는 담연(湛然)하여 무처소(無處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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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비여조비허공(譬如鳥飛虛空)에 : 비유컨대 마치 새가 허공을 날면서
경어백년(經於百年)하야도 : 백년을 지냈다 하더라도
이경과처(已經過處)와 : 이미 지나온 곳과
미경과처(未經過處)를 : 지나오지 못한 곳이나
개불가량(皆不可量)이니 : 모두 헤아릴 수 없으니
하이고(何以故)오 : 왜냐하면
허공계(虛空界)가 : 허공계가
무변제고(無邊際故)인달하야 : 무변제인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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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행(如來行)도 : 여래의 행도
역여시(亦如是)하야 : 그와 같아서, 여래의 행은 어떤가?
가사유인(假使有人)이 : 어떤 사람이
경백천억나유타겁(經百千億那由他劫)토록 : 백천억 나유타겁 숱한 세월을 지내면서
분별연설(分別演說)호대 : 분별하여 입이 닳도록 혀가 빠지도록 연설한다 하더라도
이설미설(已說未說)을 : 이미 말하고 앞으로 말하지 못한 것을
개불가량(皆不可量)이니 : 측량할 수 없나니
하이고(何以故)오 : 왜냐하면
여래행(如來行)이 : 여래의 행은
무변제고(無邊際故)니라 : 끝이 없는 연고이다.
앞에서는 여래의 행이 깊은 것, 넓은 것, 이런 것을 쭉 설명 하고 있다.
그다음에 여래의 무애행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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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해요
心不見心...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먹을 거 주고
짜장면 사 주고
이렇게 해야 되잖는가
ㅎㅎㅎ
딱 맞는 말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