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예불시간이다. 몸과 마음을 가벼이 하고 불전으로 향하였다. 무심코 시선이 벽에 닿았다. 이상한 물체가 시야에 들어온다. 뭘까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리마였다. 그리마. 이 말은 생소하고 돈벌레가 익숙한 말이다. 그리마는 습하고 따듯한 곳을 좋아하여 부잣집에 자주
등장하여 돈벌레라고 불리우게 된 듯 하다. 그리마의 속력은 대단하여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진다. 그러던 녀석이 오늘은 어찌 한가로이
수직의 벽에 붙어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지 궁금하다.
예불을 마치고 다시 보아도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방금 축원문에 모든 미물과
영혼까지도 피안의 언덕에 이르기 바란다는 준동함령등피안(蠢動含灵登彼岸)을 체득한 것일까. 더욱 궁금증이 유발하여 며칠 째 시선이 가곤 했다.
평소에 그 민첩함은 어디가고 며칠 동안 그대로 있느냐. 손가락으로 건드려보니 그제서야 마른 솔가지마냥 바닥에 툭 떨어지고 말았다. 말하자면 길을
가다 죽은 것이다. 조문객의 애도의 위안 한 마디 듣지 못하고 가버렸다.
도인들의 열반 모습은 때로는 세상에 큰 경종을 울리기도
한다. 좌탈입망(坐脫立亡) 했기 때문이다. 앉아서 열반이 아니라 정원을 걷다가 나뭇가지를 잡고 열반에 든 승찬 스님도 있다. 스님은 수행의
경지를 ≪신심명(信心銘)≫에 담아 냈다.
돈벌레는 길을 가다 가버렸다. 평지도 아닌 절애(絶崖)에서 간 것이다. 한 세상 수행을
했다하여 내놓을 만한 것이 무엇일까. 빈약하기 그지없다. 돈벌레의 일생과 견주어 보면 더욱 위축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일까. 대중 앞에서
초연한 듯 하지만 스스로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있었을 것이기에 그렇다. 오늘 새벽에는 돈벌레가 바닥에 누워 가 버렸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서 말이다. 그 날렵했던 발도 몸통에서 완전 분리가 된 채 생을 마감한 것이다. 비록 미물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에게 유익한
삶을 살았던 생명이기에 경외심이 생긴다.
바퀴벌레와 모기, 파리를 독니로 제압하여 모조리 씹어 먹어 버리고 심지어는 알까지 샅샅이
먹어치워 버리는 용사이다. 인간에게 직접ㆍ간접으로 도움을 주는 헌신적인 익충(益蟲)이다. 익충이라면 꿀벌이나 누에나방, 잠자리 등을 떠올린다.
돈벌레가 빠지는 것은 생김새가 흉물스럽다는 이유에서이다. 겉모양으로 예단하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에게 단연코 금물이다. 속단은 가치를 흐리게 할
수 있고 종국에는 진위를 뒤바뀌게 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나무만 해도 그렇다. 소나무는 태어나면서부터 벼슬을 한 나무라 한다.
소나무 송(松)이라는 글자가 나무 목(木)에 귀인 공(公)을 합하여 형성된 글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버드나무는 어떤가. 벼슬은 하지 않았어도
헌신을 아는 나무이다.
신이 내린 3대 명약이 있다. 페니실린, 모르핀, 아스피린을 꼽는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연상되는 약이
아스피린이다. 아스피린 하면 바이엘 아스피린이라고 떠오른다. 독일 바이엘사(社)의 화학자 페릭스 호프만(Felix Hoffmann)이
살리실산에서 물질을 추출하여 진통 해열제로 상용화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야외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도시락을 먹으면 쓴맛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쓴맛을 내는 물질이 아스피린의 핵심 성분인 살리실산이다. 버드나무가 두통에 시달리는 인류를 구한 것이다.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도 버드나무와 깊은 인연이 있다. 우물가에서 가던 발길을 멈추고 물을 청하던 이성계에게 급히 마신 물에 사레들리지
않도록 물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준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 속 깊은 뜻을 헤아린 이성계는 후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다. 한 여인을
왕후가 될 수 있도록 한 매개체가 흔한 버드나무 잎이었다는 사실이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여인의 작은 배려가 인생을 바꿔 놓았다. 작은 것이
큰일이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지천에 널려 있는 버드나무가 인류를 질병에서 구하고 인생역전의 전기를 마련하다니 엄청난
일이다.
어느 기업에서 사원의 창의성을 헤아리기 위해 과제를 냈다. 스님에게 나무 빗을 팔라는 것이다. 아니, 삭발한 스님에게
어떻게 파느냐고 하며 다수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 가운데서 세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실적을 내어 결과를 보고 했다.
1개를 판
사원에게 어떻게 팔았느냐고 묻자 “머리를 긁적거리는 스님에게 팔았습니다.”라고 답했다. 10개를 판 사원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신도님들의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기 위해 절에 비치해 놓으라고 설득했습니다.” 1,000개를 판 사원에게
물어보니, 그는 “빗을 머리를 긁거나 단정히 하는 용도로 팔지 않았습니다.” 주지 스님에게 “이곳까지 찾아오는 신도님들에게 부적과 같은 뜻
깊은 선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빗에 스님의 필체로 “선을 쌓는 빗(적선소, 積善梳)”을 새겨 주면 더 많은 신도님이 기뻐하며 찾아 올
것이라고 간곡히 말씀드렸더니, 나무빗 1천 개를 일시에 구입하여 선물하니 신도님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 많은 빗을 납품해
달라는 추가 주문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모든 일이 순일해진다. 행복은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마음먹기에 따라 밤과 낮 같이 교차될 뿐이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속담은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잠언이다. 학교 경영에 책임
있는 소임자들은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현안 문제는 개인의 영달이나 득실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따라 백설이 난분분하여 마음이 더욱
착잡하다. 기력이 쇠잔해진 김건중군의 모습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김군이 말을 시켜도 아무 반응이 없어 병원에 긴급 이송되었다는 급보가 더욱
암울하게 한다.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 수행정진했고, 동국대학교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장, 정각원장, 한국선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정년 후에도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겸 동국역경원장을 지내며 불교학계 발전과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현재 동국대 명예교수로 정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선학의 이해』, 『선어록 산책』, 『선문선답』, 『선문보장록』, 『선 사상론』, 『선 수행론』, 『한국선론』,
『벽암록의 세계』, 『한국을 빛 낸 선사들』, 『선심으로 보는 세상』 연보로 구성된 『최현각 선학전집』(전11권), 『내 사유의 속살들』,
『현각스님의 마음 두드림』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