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역사 소설 “ 잃어버린 왕국 제3권”
“백제여, 백제여,”
백제인인 다신부(多臣夫)-오드미.
그의 아버지 다신장부(多臣藏璷)가 왜(倭국)에서 깊은 병환이 들어 문병 갔다 돌아오는 오는 길.
의자왕의 아들 풍왕자와 다신장부 여동생이 혼인을 맺게 해준 게 계백 장군이었다.
귀국하며 아버지가 만든 명검(名劍) 한자루를 계백 장군에게 바친다.
국조 온조 (國祖 溫祖) 가 기원전 18년 위례성에서 건국 700여 년 만에 의자왕 19년 2월부터
왕국 백제의 말년은 괴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낮이나 밤이나 술과 환락에 젖어 있는 의자왕.
암탉과 참새가 교묘하고, 괴목이 곡하여 울고, 두꺼비와 개구리가 나무 위에 모였으며,
개들이 울부짖고 서로를 물어뜯었으며, 귀신이 울면서 정확히 세 번 말하였다.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660년 5월 26일, 신라의 국왕 김춘추는 오만의 정병을 거느리고 신라 왕도인 금성을 출발한다.
당나라 소종방은 13만 대군을 범선에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온다.
의자왕은 그가 젊어서는 용맹한 싸움과 전쟁으로 인생을 즐기지 못했다고 갑자기 술과 쾌락에 젖어들었다.
이때 좌평 성충이 극간하였으나 왕이 만나주지도 않고 후에 혈서를 쓰고 피를 토하고 죽는다.
경국지세 ( 傾國之色 ),
김유신은 젊어 한 시절 황음에 빠져 취생몽사(醉生夢死)하면서 살았던 그 경험으로 백제 의자왕을
황음에 빠지게 할 수 있는 미녀 금화(錦花)를 백제로 보낸다.
왕은 금화를 만난 이후로 낮과 밤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옛 사람 노자가 우리에게 이르기를
“아름다운 색채는 사람의 눈을 현란케 하고, 아름다운 음악은 사람의 귀를 어지럽게 하고,
맛있는 음식은 사람의 입을 버려놓는다. 말을 달리고 사냥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열광시키고,
얻기 어려운 보배는 사람의 행동을 정상에서 벗어나게 한다.”
김유신은 잘 알고 있었다.
나라가 망할 때는 반드시 사치와 환락과 부패가 싹트기 마련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은 도덕적, 윤리적 무질서라는 것을.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현실이 대조가 된다. 우리나라의 현재가 이런 상황이 아닌가 하고.
이재명이 일파들의 행위들을 보면 바로 이런 상태이다. 그들의 조직이 망할 징조임에 틀림없다.
백제의 의자왕 말기가 이러하니 백제는 곧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계백은 젊어 싸움터를 전전할 무렵부터 의자왕의 부장으로 매우 욕망스럽고 싸움에 앞서 물러서지 않던
백전노장의 용장이었다.
계백은 58세의 나이 든 늙은 무사이지만 이 전쟁으로 백제가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라 좌장군 품일의 아들 어린 소년 관창이 계백한테 두 번이나 붙잡혔다.
한 번은 어린 나이라 돌려보냈고, 다시 붙잡혔을 때는 처형을 하고 머리만 신라군에게 보낸다.
계백은 명검(名劍)으로 신라군과 싸우다 열세로 인해 신라군에 대패하여 자결을 하였다.
다신부도 함께 전사한다.
다신부의 아내는 전쟁 시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먼 훗날 태안만려(太安萬侶) 라고 부르게 된다.
오늘날 일본의 역사의 바이블인 “고사기”와 “일본 사기”를 편찬한 일본인 역사의 아버지 안만려(安萬侶)이다.
일본의 나리분지 대화고원(大和高原)에 묻힌 것을 1979년 1월 22일 차밭을 일구던 다케니시(竹西栗夫)란
농부에 의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일본서기(日本書記) 천지천왕(天智天皇) 3년(663년) 9월 7일 조(條)에 보면
“백제의 주유성 (州柔成) 이 비로소 당(唐)에 항복하였다.
이때 국민들이 서로 일러 가로되 주유성이 항복하였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백제의 이름이 오늘날 끊겼으니 어찌 선조의 무덤과 묘사에 오갈 수 있으리오.”
백제의 왕 의자가 태자 효(孝)를 데리고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것이 660년 7월 18일.
이로써 백제는 31대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이 무렵 왜(倭)는 제명천황(齊明天皇)이라는 여제(女帝)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제명천왕은 백제의 왕도인 사비성에서 의자왕 부친인 무왕의 41명 자식 중 의자왕 다음 둘째로 태어난 여자였다.
황녀로 태어난 제명여제는 백제인으로서 왜(倭)에 건너가 두 번 결혼하였는데 두 번째 남편이
조메이( 舒明) 천왕이었다. 남편이 죽고 본의 아니게 여제(女帝)의 위(位)에 오른 여인이다.
제명천왕 7년 (661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한 그 이듬해 정월 6일 제명여제가 군사를 일으켜 백제 구원
출정을 한다고 왕도까지 이전시키며 출범했으나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운명하였다는 소식에
제명여제는 실신하고 쓸어졌다.
죽기 전에 아들인 중대형에게
“내가 죽은 후라도 내 원수를 갚아 이승의 한을 풀어달라, 당대에 못 이으면 그대의 아들에게도 이 위업을
계속 이어져 내려가게 하거라“ 하는 유언을 남긴다.
제명천왕이 죽는 날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 7월 27일 천왕이 조창국에서 죽다. 이날 밤 조창산장에서 귀신 하나가 나타나서 큰 갓(笠)을 쓰고
상의(喪儀)를 임시(臨視)하니 뭇 사람이 탄식하고 괴이하게 여기더라.”
작가는 일본 천황가계가 백제인 이란 사실을 확인하고자 제명천왕의 무덤을 찾아간다.
아스카의 능선에 있는 무덤을 찿아가니
제명천황월지강상능(齊明天皇越智岡上陵)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제명여제는 자신의 고향, 자신의 모국, 자신의 친정인 백제를 구원하고 이를 부흥시키기 위해 오만의
대군을 일으켜 천도까지 단행하였던 것이 그녀였다.
오늘날 일본 역사가들은 제명여제의 파병을
“왜국이 백제를 위해 오만의 군사를 보낸 것은 백제를 구원하여 이로부터 해마다 받아오던 조공을
계속 받기 위한 것” 이었다고 왜곡시키고 있다.
그들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서 조차 백제가 망한 걸 슬퍼하고 서로 울었다 썼는데도 이런 왜곡에
열을 올린다니.
우리는 다만 미개인 왜인들에게 문자와 문화를 전파해 주었다.
담징은 호류지에 그림을 그려 주었으며, 왕인 박사는 천자문을 건네주고, 아좌태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성덕태자의 초상을 그려주었다.
일본은 당시 파병이 민족적 자부심에 손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하여 애써 은폐시키려 하는 것이다.
몇 년전인가 일본천황이 자신의 뿌리는 백제인이라고도 말 한 바가 있다.
최인호 작가의 이런 역사탐구에 의해 우리가 알지못하는 역사를 헤쳐보임으로서 사실을 사실대로
알수가 있게 가르쳐야 된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