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곡 양동판당숙님의 신도비 제막행사를 가족들이 모여 간소하게 치루었습니다.
<청곡 양동판> 김대중대통령도 인정한 교육자 동판당숙이 목포상고를 다닐때 김대중대통령이 반장을 하시고,동판당숙은 부반장을 하셨다. 학교성적도 나란히 1,2등을 하셨다. 이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김대중대통령이 국회의원시절에 국회에서 만난 진도출신 박귀수국회의원에게 동창생인 동판당숙의 안부를 물었다. 그 물음에 동판당숙이 진도에서 교육청 장학사를 하고있다 하였더니,김대중대통령깨서 삐긋이 웃으시며 "그 친구한테 딱 맞는 직업이네"라고 하셨다고 한다. 김대중대통령은 목포상고 동창생인 동판당숙이 학창시절 책을 좋아하셨던 것을 기억하시고 학자풍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동판당숙은 목포상고를 나와서 서울상대로 진학하라는 주위의 권고를 뿌리치고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하셨다.
동판당숙은 광주에서 오랜기간 교사생활을 하시고,화순천태초등학교 교장에 이어 진도군교육청 장학사를 지내시며 바른 교육에 힘을 쏟았다. 특히 평교사시절 조도면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동판당숙은 낙도교육의 어려운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분교의 어려움을 해소하고,각종 행사부담을 줄여주는데 역점을 두었으며,교직생활 내내 뇌물과 멀리하며 공평무사한 공직관을 견지하셨다. 풍파속에 낙도 출장을 강행하시다 바다에 떨어져 죽을 고비를 맞은 경우도 있어 교육계의 화제가 되었고, 현지인들의 사랑도 듬뿍 받으셨다.
교직을 그만두시고는 가업인 주조장을 경영하시며,진도읍선거구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2기 연속 선출되셨다. 전라남도 도정자문위원 시절에는 의신면 접도에 공해업종인 석유화학 관련 탈황시설의 설치를 막았으며,진도농협 감사를 지내시며 지역일에 사심없이 헌신하여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동판당숙의 인간적인 면은 이웃 홍주가게와의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동판당숙의 신흥주조장 바로 옆에서 진도홍주의 명인 고 허화자여사가 홍주를 만들어 팔았다. 당시 홍주는 밀주로 밀주단속이 심하던 시절이라 주조장옆에서 홍주를 만들어 판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뿐 아니고 신흥주조장 인근에서 홍주를 몰래 만들어 파는 집이 여러곳 더 있었다. 주조장에서 맘만 먹으면 언제건 밀주를 단속할 수 있었는데 밀주인 홍주를 취급하는 집이 신흥주조장을 중심으로 성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엔 인간 양동판의 온정이 있었다. 동판당숙은 모두 함께 먹고 살아야한다며 밀주단속을 요청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밀주단속이 있을 것임을 미리 알려주고 단속에 대비토록 해 주었다. 이래서 신흥주조장 인근 골목의 많은 부녀자들이 홍주를 생업으로 하여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가르치며 살았다. 홍주명인 허화자여사는 생전에 동판당숙에 대힌 고마움과 양씨집안에 대한 정을 잊지못하셨다. 밀주단속에 걸리면 집안이 망하던 시절 허화자여사가 밀주단속에 걸려 관에 잡혀갔을 때 자기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서 풀려나게해준 분이 양동판씨라며 공언하셨고,우리 어머님 49제에 오셔선 "성님 성님"하고 우시면서 뒷일을 봐 주셨다. 어찌보면 동판당숙은 진도홍주 전승의 큰 공로자시다.
동판당숙의 진면목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2기 대의원선거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정권시절 대통령선출기관으로 대통령선거가 끝나면 특별한 역할이 없었던 애매한 헌법기관에 불과했으나,선거구민들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대한 기대수준은 매우 높았다. 박정희대통령정부는 장기집권의 명분을 쌓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지역의 명망가들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출마하도록 적극 권유하였다. 동판당숙도 진도군고육청의 현직 장학사를 그만두고 무보수 명예직인 통일주체국민희의 대의원에 출마해야 했다. 동판당숙은 제1기 대의원 임가가 끝나고 제2기 대의원 선거에 또다시 출마했다. 제2기 선거는 현직 대의원에게 아주 불리했다. 제도적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장기집권으로 이어진 유신정권에 대한 염증까지 현직 대의원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대의원이 그동안 지역에 한 일이 무엇이고 지지자들을 챙겨준게 뭐 있느냐며 유권자들은 여기저기 수군뎄다. 유세장은 싸늘했고,선거판은 매우 불리했다. 그러나 선거 막판 이변이 일어났다. 진도읍 5일장 유세에서 동판당숙의 꾸밈없는 한마디 "그래도 동판은 동판입니다" 라는 솔직한 이 한마디에 유세장은 돌변했다. 유권자들은 박수로 환호했다. 동판당숙의 인간적인 면이 큰 파도를 일순 삼켜버린 것이다. 선거는 역전 드라마였다.
동판당숙은 모두와 잘 어울리셨다. 애주가이시고 미식가로 취미활동도 중시하셔 모든이가 가까이하고 따랐다. 주위에는 늘 사람이 모였다. 진도 식당가에선 좋은 안주감이라도 나오면 동판당숙을 제일 먼저 시식에 초대하여 자기 음식의 평판을 듣는걸 자랑으로 여겼다. 낚시와 운동으로 젊은이들과 여가생활도 즐기셨다. 인생 마지막 운명하신 그날도 진도 라이온스 송년모임에 나가셔서 젊은 후배들 앞에서 열창하시고 세상을 하직하셨다. 당숙의 장례식엔 많은 호상객들이 나와 진도읍 동외리 마을 끝까지 따랐다. 지금도 주위에선 지역어른으로 우리 동판당숙을 말한다. 아니 인간 양동판같은 분을 갈구한다. 조카 양진열 인천지방법원 법정관리기업(회생회사) 감사 전 신한은행지점장,재경 진도읍향우회장,관악진도향우회장
생전 동판당숙부부(왼쪽 세번째,네번째)와 일본에서 온 고모(맨 왼쪽) 그리고 우리 어머니(왼쪽 두번째) 아버지 양동술(맨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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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와노라 원문보기 글쓴이: 나와노라
첫댓글 양진열형님 진도에 다녀 오셨군요^^ 제가 스므살땐가 친구집에 놀러가 양동판 어르신을 자주 뵛던기역이 납니다.. 그분의 업적을 흔적으로 남기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집안일도 보고, 사는 동네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재미로 사네.
워메워메 가운데 흑백사진에 돌아가신 우리 작은아부지, 작은어머니가 계시네,,돔밖에 웃동내 우리 아부지,어머니 살아계실때 자전거타고 자주 오셨던 작은 아부지
뵈니 눈물날라고 하네,,진도 버스터미널앞에서 아들이 파리바케트를 운영하는 고모도 보이고, 희복이 성님, 진열이, 오랜만에 봅니다.
형님!! 큰어머니 닮은 누님이 이른 새벽 제사음식 이고 우리집에 오시던 모습 지금도 선합니다. 그때가 참 좋았죠. 이제 우리도 선산일좀 보다가 어른들 곁으로 가야죠.
동네ᆞ통정리 골목에서 생전에 자주 뵙던 분이
셨는데 고인의 일생을 윗글로 접하니 감회가
새롭군요 ㅡㅡ편한 곳에 기시길 빕니다ㅡ
언젠가 집안 생활사를 발간할라고 정리해두었던 것을 한번 올려 봤네. 집안일을 밖에 알리는게 좀 쑥스럽기도 하네만 용기를 내서 저질렀지. 우리 집안이 의신 원두리에서 읍으로 와 처음 정착한 곳은 동외리지만 번창한 곳은 자네 동네 그 골목이네. 나도 새뱃돈 많이 받던 거기 그 골목이 그립고 또 그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