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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수지독송하시고
살아서는 즉신 성불하시고
극락왕생하여 지이다~
2편 초기경전
제1장 지혜와 자비의 말씀 #1
1. 네 가지 진리
부처님께서 파탈리풋타로 가시던 도중 라자가하에서 멀지 않은 왕원에서 쉬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닦는 이는 반드시 네 가지 진리를 알아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진리를 알지 못해 오랫동안 바른 길에서 벗어나 생사에 매여 헤매느라고 쉴 새가 없다. 어떤 것이 네 가지 진리인가. 첫째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이니 이것을 고라 한다. 둘째는 괴로움은 집착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집이라 한다. 셋째는 괴로움과 집착이 없어져 다한 것이니 이것을 멸이라 한다. 넷째는 괴로움과 집착을 없애는 길이니 이것을 도라 한다. 괴로움의 뜻을 알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므로 오랫동안 먼 길을 헤매어 생사가 쉬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임을 알 것이니, 괴로움이란 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번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구하는 것이 얻어지지 않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오온으로 된 이 몸이 모두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인 줄 알고 애욕의 집착을 끊으면 눈을 얻었다고 하리니, 이 생을 마치고는 뒤에 다시 괴로움이 없게 된다. 집착 때문이라 함은 애욕을 따라 생긴다는 것이니, 괴로움과 집착을 모두 없애고 그 길을 따라 진리를 행하여 눈을 얻으면 이 생을 마친 뒤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이미 진리를 보아 도의 눈을 얻은 이에게는 다시 나고 죽음이 없다. 그리고 도를 얻으려면 여덟 가지 행을 닦아야 한다. 첫째는 마음이 다하여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 둘째는 애욕을 버려 갈등을 없애며, 셋째는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 같은 것을 저지르지 않고, 넷째는 속이고 아첨하며 나쁜 말로 꾸짖는 일을 하지 않으며, 다섯째는 질투하고 욕심내어 남들이 믿지 않는 일을 하지 않고, 여섯째는 모든 것이 무상하고 고이고 공이고 무아임을 생각하며, 일곱째는 몸의 냄새나고 더럽고 깨끗하지 않음을 생각하고, 여덟째는 몸에 탐착하지 않고 마침내는 흙으로 돌아갈 줄 아는 것이다. 지나간 세상의 모든 부처님들이 다 이 네 가지 진리를 알았고, 앞으로 올 부처님들도 이 진리를 볼 것이다. 세속적인 은혜와 사랑을 탐하고 바라거나 혹은 세상의 부귀 영화와 명예와 오래 살기를 원하는 이는 끝내 세상에서 벗어나는 길을 얻지 못한다. 길은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마음이 깨끗해야 길을 얻을 수 있다. 그 마음이 청정하여 다섯 가지 계율을 범하지 않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만약 지옥, 아귀, 축생의 길을 끊으려거든 일심으로 여래의 가르침과 계율을 받들어 행해야 할 것이다. 이제 여래가 중생을 나고 죽는 데서 해탈케 하려고 바른 길을 열어 보였으니,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잘 생각해 보아라.”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나서 부처님은 아난다와 함께 파탈리풋타에 이르러 성 밖 어떤 나무 아래 머무셨다. 그 곳 바라문과 거사들은 부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오셨다는 말을 듣고 모두 부처님 계신 데로 모여들었다.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앉을 방석을 가지고 혹은 물병과 등잔을 들고 와서 예배하였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였다. “사람이 세속에서 함부로 탐욕을 즐기면 다섯 가지 소모되는 현상이 있다. 스스로 방종하므로 재산이 줄어들고, 몸을 위태롭게 하고 도를 잃게 되며, 사람들이 공경하지 않고 죽을 때에 뉘우치게 되며, 추한 소문과 나쁜 이름이 널리 퍼지고, 스스로 방종하므로 죽은 뒤에는 삼악도에 떨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음을 조복받아 방종하지 않으면 다섯 가지 덕을 갖추게 된다. 검소하고 절약하므로 재산이 날로 늘어나고, 도의 뜻에 가깝게 되며, 사람마다 우러러 공경하고 죽을 때도 뉘우침이 없으며, 덕망이 세상에 널리 퍼지고, 검소하고 절약하므로 죽은 뒤 천상이나 복된 곳에 태어난다. 사람이 방종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좋은 일이 있으니 잘 생각해서 행하여라.” 부처님께서 여러 사람들을 위해 가르침을 펴시니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장아함 반니원경>
2. 계, 정, 혜를 닦아라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와 함께 콜리성 북쪽의 한 나무 아래 머무르시며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청정한 계율을 지니고 선정을 닦으며 지혜를 구하여라. 청정한 계율을 지니는 사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따르지 아니하고, 선정을 닦는 사람은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되며, 지혜를 구하는 이는 애욕에 매이지 않으므로 하는 일에 걸림이 없다. 계, 정, 혜가 있으면 덕이 크고 명예가 널리 퍼지리라. 또 세 가지 허물을 떠나면 마침내 아라한이 될 것이다. 지금의 이 몸으로 삼매를 얻고자 하면 부지런히 깨닫기를 구해 이 생이 다하도록 청정한 도에 들어가라. 마땅히 실행할 것을 행하면 죽은 뒤에 다시 윤회하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아난다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제자들에게 세 가지 요긴함을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계를 지니고 선정을 닦아 지혜를 깨달으라. 이 세 가지를 잘 지키는 사람은 덕망이 높고 명예가 드날리게 될 것이다. 음란한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과 잡된 생각이 없어질 것이니, 이것을 일러 해탈이라 한다. 이 계행이 있으면 저절로 선정이 이루어지고, 선정이 이루어지면 지혜가 밝아지리니, 이를테면 흰 천에 물감을 들여야 그 빛이 더욱 선명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세 가지 마음이 있으면 도를 어렵지 않게 얻을 것이고, 일심으로 부지런히 닦으면 이 생을 마친 후에는 청정한 데에 들어갈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하면 스스로 이 몸을 버리고 다시 나지 않은 줄을 알리라. 만약 계, 정, 혜의 행을 갖추지 못하면 윤회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갖추면 마음이 저절로 열리어, 문득 천상, 인간, 지옥, 아귀, 축생들의 세상을 보게 되고, 온갖 중생들의 생각하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시냇물이 맑으면 그 밑에 모래와 돌자갈의 모양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이 맑으므로 보고자 하는 것이 다 나타난다. 도를 얻으려면 먼저 그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마치 물이 흐리면 그 속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마음을 깨끗이 지니지 못하면 세상에 나고 죽음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스승이 보고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마땅히 실행해야 할 것이다. 스승이라 할지라도 제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 생각을 잡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각과 마음이 청정한 사람은 도를 스스로 얻을 것이다. 여래는 청정함을 가장 즐거워한다.” <장아함 반니원경]>
3. 고행과 바른 수행
부처님께서 녹야원에 계실 때였다. 발가숭이 이교도 카샤파가 부처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당신은 온갖 고행을 싫어하고 고행자를 비방한다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카샤파여, 그것은 내 뜻이 아니오. 또 내 말을 바르게 전한 것도 아니오. 나는 천안으로써 고행자가 죽은 후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보고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봅니다. 이와 같이 고행자 중에는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 천상에 태어나는 이도 있는데, 어떻게 통틀어 고행을 싫어하고 고행자를 비방할 수 있겠소.” 카샤파는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알몸이라든가 공양을 받지 않는 일, 또는 쇠똥을 먹고 나무껍질이나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가리며, 항상 서 있거나 하룻밤에 세 번씩 목욕을 하는 것 같은 고행은 사문과 바라문에게도 알맞은 일이라고 합니다.” “카샤파, 아무리 그와 같은 고행을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계행과 선정과 지혜가 없으면 그것은 참된 사문이나 바라문과는 멉니다. 화내지 않고 남을 해칠 생각이 없으며 자비심을 기르고 번뇌가 없어 현재에 깨달아 있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사문이요 바라문이라고 할 것이오.” “부처님, 사문이나 바라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 어려움이 곧 고행을 닦는다는 뜻은 아니오. 고행쯤이야 물항아리를 나르는 하녀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화내지 않고 남을 해칠 생각이 없으며 자비심을 기르고 번뇌가 없이 현재에 깨닫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교도 카샤파는 다시 물었다. “부처님, 그러면 그 계행과 선정과 지혜의 성취란 어떤 것입니까?” “계행의 성취란 이런 것이오.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여 스스로 깨닫고 남을 가르칠 때에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듣고 신심을 내어 출가합니다. 그래서 계율에 따라 행동을 삼가고 바른 행동으로 즐거움을 삼으며, 조그마한 허물도 두려워하고 감관을 다스려 바른 지혜를 갖춥니다. 산 목숨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으며, 여자를 범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거나 거친 말을 쓰지 않으며 바른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오. 또 선정의 성취란, 눈으로 사물을 볼 때라도 감관을 잘 지켜 그 모양에 팔리지 않고 가나 오나 앉으나 누울 때에도 항상 마음의 눈을 밝히어 바른 마음과 바른 생각에 머뭅니다. 새가 날개밖에는 아무것도 갖지 않듯이 몸을 가리는 옷과 배를 채우는 밥으로 만족하고, 나무 밑이나 동굴 속, 숲이나 묘지 등 한적한 곳을 찾아 고요히 앉소.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게으름과 의심을 버리고, 건강하고 자유롭고 안온한 사람이 되어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오. 그리고 지혜의 성취란, 선정에 의해 고요하고 맑고 밝아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이 세상의 덧없음과 ‘나’라고 내세울 것 없음을 알며, 다섯 가지 신통을 얻고 네 가지 진리를 알아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을 얻어 해탈했다는 분명한 자각을 가지는 것이오. 카샤파여, 이보다 더 뛰어난 계행과 선정과 지혜의 성취는 없소. 계와 고행과 지혜와 해탈을 칭송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지만, 여래처럼 맑고 높은 계와 고행과 지혜와 해탈을 갖춘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한 자가 바로 여래입니다. 나의 이 말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사문 고타마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자후를 하지만 그것은 신념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대답한다 할지라도 만족시키거나 믿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신념을 가지고 사자후를 합니다. 많은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고 만족시키며 믿게 합니다. 카샤파여, 일찍이 라자가하의 영축산에서 당신과 같은 고행자 니그로다는 욕망을 없애는 최고 형식에 대해서 내게 물어 대답을 듣고 무척 기뻐한 일이 있소.” 이 가르침을 듣고 이교도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부지런히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남전 장부경전 8>
4. 신통을 금하다
부처님께서 나란다성 바바리암라 동산에 계실 때였다. 하루는 견고라고 하는 남신도 한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왔다. “부처님, 이토록 번화하고 잘 살고 있는 나란다 사람들이 부처님을 공경하고 믿고 있습니다.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어떤 비구로 하여금 신통 변화를 나타내 보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이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더욱 부처님의 법을 믿고 공경할 것입니다.” “나는 비구들에게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신통 변화를 나타내 보이라고 가르친 일이 없소. 다만 한적한 곳에 앉아 도를 생각하고, 공덕이 있거든 안으로 감추어 두고 허물이 있으면 몸소 드러내 놓으라고 가르칠 뿐이오.” 그러나 견고는 거듭거듭 부처님께 간청했다. 부처님은 그의 청을 거절하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 가지 신통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몸소 체득한 것이니 말해 보겠소. 신족통과 타심통과 교계통이 그것이오. 신족통이란, 한 몸으로 여러 몸을 나타내기도 하고 여러 몸을 합쳐 한 몸을 만들기도 하며 또는 나타내고 숨기기도 하오. 산과 장벽을 지나되 허공과 같이 걸리지 않고, 땅 속에 출몰하되 물 속에서처럼 자유로우며, 물 위로 다니되 땅 위와 같고 허공에 앉되 날개 있는 새와 같소. 큰 신통력과 위력으로 해와 달을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범천에 이르기도 하오. 어떤 신도가 비구의 이러한 신통을 보고 아직 믿음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이것을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저 비구는 간다리라는 주문을 외어 그러한 신통을 얻은 것이다’라고 할 것이오. 이것은 오히려 불법을 비방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소? 그러므로 나는 신통 변화 같은 것을 부질없게 여기어 비구들에게 금하도록 한 것이오. 그리고 타심통이란, 남의 마음을 관찰하여 ‘너의 뜻은 그렇고 네 마음은 이렇다’고 말하는 것이오. 이것을 보고 믿음을 얻은 이가 아직 믿음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저 비구는 마니가라는 주문을 외어 그런 신통을 얻은 것이다’라고 할 것이오. 이것은 오히려 불법을 비방하는 결과가 되지 않겠소? 그러므로 나는 이런 허물을 보고 신통 변화 같은 것을 부질없게 여기어 비구들에게 금하도록 한 것이오. 교계통이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여 사문이나 바라문들에게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는 생각하지 마라. 이런 일은 하고 저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내버리고 저것을 취해라.’ 이와 같이 가르쳐 훈계하는 것이오. 그들은 모두 어둠을 떠나 밝음을 찾고 죄악을 버리고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오. 이렇게 출가하여 정진 수행하므로 계행이 갖추어지고 선정이 갖추어지며 지혜가 갖추어져 아라한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오. 이 세 가지 신통은 여래가 스스로 체득하여 가르치는 것이오.” 견고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장아함 견고경>
5. 적을 막는 길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영취산에서 천이백오십 명의 비구들과 계실 때였다. 마가다의 왕 아자타삿투는 밧지국과 서로 좋지 않은 사이였다. 어느 날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밧지국은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많으며 땅이 기름지다. 해마다 풍년이 들고 진기한 것이 많이 나는 것만을 믿고 나에게 굴복하지 않으니 쳐들어가 정복하고야 말겠다.” 왕은 바라문 출신인 어진 신하 우사에게 자기 대신 부처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아 오도록 분부했다. 우사는 오백 대의 수레에 기마 이천 마리와 부하 이천 명을 데리고 영축산으로 향했다. 그는 부처님을 뵙고 공손히 꿇어앉아 여쭈었다. “마가다의 왕 아자타삿투는 부처님께 머리 숙여 거처가 편안하고 기력이 좋으신지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고맙소, 왕과 온 백성들과 당신도 평안하십니까?” 우사는 찾아온 뜻을 말했다. “임금님은 밧지국과 뜻이 맞지 않아 여러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그 나라를 정복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저를 보낸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일찍이 밧지국에 머무르면서 본 일인데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근엄합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일곱 가지 법을 말한 적이 있소. 만일 지금도 그것을 실행하고 있다면 날로 더욱 흥할지언정 쇠약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사는 합장을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여쭈었다. “그 일곱 가지 법을 들려 주십시오. 어떻게 실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 너는 밧지국 사람들이 자주 모임을 가지고 바른 일을 서로 의논하여 몸소 지킨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어른과 젊은이들은 서로 화목하여 갈수록 흥할 것이다. 그 나라는 언제나 안온하여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너는 또 밧지국의 임금과 신하가 화목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공경한다고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언제나 안온하여 갈수록 흥성하고 누구의 침락도 받지 않을 것이다. 너는 밧지국 사람들이 법을 받들어 삼가야 할 것을 알고 예의를 어기지 않는다고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또 밧지국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여 순종한다고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조상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너는 또 그 나라의 부녀자들이 정숙하고 진실하며 웃고 농담할 때라도 그 말이 음란하지 않다고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 나라 사람들이 수행자를 공경하고 계행이 청정한 이를 존경하고 보호하며 공양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른과 젊은이들은 서로 화목하여 갈수록 더 흥성할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는 언제나 안온하여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이 일곱 가지 법을 실행하면 어떤 적이라도 그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우사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밧지국 사람들이 이 일곱 가지 중에서 하나만을 지닐지라도 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일곱 가지를 다 지닌다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나라 일이 많으므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일어나 부처님께 예배하고 자리를 떠났다.<장아함 유행경>
6. 마음의 주인이 되라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견고한 것도 없으며 결국은 모두 흩어지고 만다. 망상 분별로 하는 일은 속임이 될 뿐이다. 세속의 인연으로 만나는 것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겠느냐. 천지와 저 큰 수미산도 결국은 무너질 것인데 이까짓 사람 몸 따위이겠느냐. 나는 석 달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니 놀라거나 슬퍼하지 말아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다 법으로 부처를 이룬 것이다. 이미 교법이 갖추어져 있으니 너희들도 부지런히 배워 실행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해탈을 얻도록 하여라. 분별하는 작용이 끝나면 죽지도 않고 다시 나지도 않을 것이며 다른 몸을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오온의 작용을 끊으면 배고프고 목마르며 춥고 더우며 근심, 슬픔, 괴로움, 번민 같은 것도 없어진다. 사람이 바른 마음을 쓸 줄 알면 천신들도 기뻐할 것이다 마음을 조복받아 부드럽고 순하고 스스로 텅 비어야 한다.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마음 가는 대로 한다면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도를 얻는 것도 또한 마음이다. 마음이 하늘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며 귀신이나 축생 혹은 지옥도 만들므로 모든 것은 다 마음에 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따라 온갖 법이 일어난다. 마음이 바탕이 되어 뜻하는 것이 행이 되고 행의 하는 일이 명이 되니, 어질고 어리석음이 행에 있고 오래 살고 일찍 죽음이 명에 달린 것이다. 대개 의지와 행과 명, 이 세 가지가 서로 관계되어 좋고 나쁜 짓을 하므로 스스로 그 과보를 받는다. 아비가 착하지 못한 짓을 했더라도 자식이 대신 받지 못하고, 또 자식이 옳지 못한 일을 했을지라도 아비가 대신 받지 못한다. 착한 일은 스스로 복을 받고 나쁜 짓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여래가 천상 천하에서 높이 공경받는 것도 그 뜻이 숭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른 마음으로 진리를 행동으로 옮겨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현세에서 휴식과 안락을 얻을 것이니, 잘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며 조용히 생각하여라. 그러면 곧 나의 깨끗한 법이 오래 머무를 것이며, 세상의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중생을 제도하여 편안케 하리라.” <장아함 반니원경>
7. 법이 쇠퇴하지 않으려면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는 말을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서 행하여라. 비구에게 일곱 가지 가르침이 있으면 법이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일곱 가지 가르침이란, 첫째는 자주 모여 경전의 뜻을 강론하며 외는 데 게을리하지 않음이다. 둘째는 화합하고 순종하며 서로 바르게 가르치며 돕는 일이다. 셋째는 남의 것을 가지거나 탐내지 않고 오로지 한적한 산천을 좋아하는 일이다. 넷째는 음욕을 끊고 어른과 어린이가 예의로써 서로 아끼고 섬기는 것이다. 다섯째는 사랑과 효도로 스승을 섬기며 가르침을 듣고 아는 것이다. 여섯째는 법을 받들어 교법과 계율을 공경하며 청정한 행을 닦는 일이다. 일곱째는 도를 만들어 행하고 성자들을 공양하며 어린이를 타일러 알게 하고, 와서 배우려는 이를 맞아 의복과 음식과 침상과 의약을 베푸는 일이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가르침 속에서 법은 오래 머물게 된다. 또 비구에게 일곱 가지 지키는 것이 있으면 법이 쇠퇴하지 않을 것이니 잘 생각해 실행하여라. 첫째는 청정함을 지켜 덧없는 유위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둘째는 욕심 없음을 지켜 탐내지 않는다. 셋째는 잘 참아 다투거나 소송하는 일이 없다. 넷째는 고요한 행을 지켜 번거로운 여러 무리들의 모임에 섞이지 않는다. 다섯째는 법의 뜻을 지켜 여러 가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여섯째는 한 마음을 지켜 고요히 앉아 생각을 한 곳에 모은다. 일곱째는 검소하고 절약하며 옷과 밥이 거칠며 풀자리로 침상을 삼는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법을 지킴으로써 법이 오래 가게 된다. 또 비구에게 일곱 가지 공경함이 있으면 법이 쇠퇴하지 않을 것이니 잘 생각해서 실행하여라. 첫째는 부처님을 공경함이니 착한 마음으로 예의를 갖추어 섬기고 다른 데 의지하지 않음이다. 둘째는 법을 공경함이니 뜻을 도에 두고 다른 곳에 의지하지 않음이다. 셋째는 승단을 공경함이니 의지해 가르침을 받고 다른 데 의지하지 않음이다. 넷째는 배움을 공경함이니 계 지키는 이를 섬기고 다른 데 의지하지 않음이다. 여섯째는 깨끗하여 욕심 없는 이를 공경하여 다른 데 의지하지 않음이다. 일곱째는 삼매를 공경함이니, 좌선하여 선정 닦는 이를 섬기고 다른 데 의지하지 않음이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법을 공경하면 법이 오래가게 된다. 또 비구에게 일곱 가지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법이 쇠퇴하지 않을 것이니 잘 생각해서 행하여라. 첫째는 경전의 뜻 생각하기를 부모 생각하듯 해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그 은혜가 한 세상에 그치지만, 법은 무수한 세상에 걸쳐 살면서 생사를 건지는 것이다. 둘째는 인생살이가 고통 아닌 것이 없는 줄을 생각함이니, 살아서는 처자 권속에 대한 걱정을 하다가도 한 번 죽어 뿔뿔이 흩어지면 흩어진 줄도 모른다. 이와 같이 인생의 덧없음을 생각하여 마땅히 도 닦기를 힘써야 한다. 셋째는 정진을 생각함이니 몸과 말과 생각을 단정히 하면 도를 이루기가 어렵지 않다. 넷째는 겸허하기를 생각함이니 교만하고 잘난 체하지 말며, 현명한 이를 섬기고 배우지 못한 이를 가엾이 여겨 가르쳐야 한다. 다섯째는 마음 조복 받기를 생각함이니 감정을 마음대로 놀아나지 못하게 하고, 음란하고 성내거나 어리석은 태도를 억제하여 사특한 것이 없게 하라. 여섯째는 이 육신이란 냄새나고 더럽고 피를 담은 것이므로 탐낼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라. 일곱째는 스스로 관찰하되 사람의 몸은 거름과 같아서 있은 이래 죽지 않는 이는 없다. 세상이란 꿈과 같은데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이 변하는 줄도 모르고 있으니, 알고 보면 허망한 꼭두각시 놀음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이 일곱 가지 법대로 하면 법이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 땅 위를 흐르는 여러 갈래의 물이 쉬지 않으면 마침내 바다로 들어가듯이, 비구들도 도 닦기를 그치지 않으면 구경의 해탈을 얻게 되리라. 여래의 교법을 서로 이어받아서 그 말씀을 외어 지니고 때때로 일깨우며 사부대중들이 서로 가르치면 이러한 가르침이 오래 이어질 것이다.” <장아함 반니원경>
8. 악인은 침묵으로 대하라
아난다는 부처님의 얼굴빛이 오늘처럼 빛나고 화평스러운 것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 금빛처럼 빛나는 얼굴을 보고 그는 꿇어앉아 여쭈었다. “제가 부처님을 모신 지 이십여 년이 되었지만 오늘처럼 얼굴빛이 빛나고 화평하신 것을 일찍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뜻을 알고 싶습니다.”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아난다여, 그것은 두 가지 인연으로 그러하다. 두 가지 인연이란 내가 바른 깨달음을 얻었을 때와 열반에 들 때이다. 내가 오늘 밤중에 열반에 들려고 해서 안색이 빛을 발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아난다는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찌 그렇게 빨리 열반에 드시렵니까? 세상에 빛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춘다에게 가서 걱정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하여라. 여래에게 공양한 인연으로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라고 위로해 주어라. 너도 잘 알아 두어라. 반드시 여래를 공경하고 교법을 배우고 섬겨야 한다.” 이 말씀을 듣고 아난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찬다카 비구는 성미가 급하고 괴팍하여 욕지거리를 잘하고 말이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열반하고 난 후에는 찬다카를 위해 대중들이 침묵을 지키고 그를 상대하여 말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그는 부끄러움을 느껴 저절로 뉘우치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마치고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자리를 깔게 하셨다. 그리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무릎을 굽혀 다리를 포개고 누워 성인의 바른 지혜를 생각하셨다.<장아함 반니원경>
9. 수행자와 여인
아난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아직 가르침을 받지 못한 세상 여인들은 출가 사문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서로 마주 보지 말아라.” “만약 서로 마주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불어 말하지 말아라.” “만약 더불어 말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라. 아난다여, 너는 여래가 열반한 뒤에 보호할 사람이 없어 혹시 닦아 오던 것을 잃지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을 하지 말아라. 내가 지금까지 말한 교법과 계율이 곧 너를 보호하고 또한 네가 의지해야 할 곳이다. 오늘부터는 비구들에게 사소한 계율은 버리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화목하여 마땅히 예절을 따르라고 일러라. 이것이 출가한 사람들이 공경하고 순종할 법이다.” <장아함 유행경>
10. 사성에서 뛰어난 사람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녹자모 강당에 계실 때였다. 바라문 출신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출가한 바셋타와 바르드바자에게 부처님은 물으셨다. “바라문 중에서도 뛰어난 너희들이 집을 버리고 출가 사문의 생활을 하니 바라문들이 혹시 너희를 보고 비난하지 않더냐?” 바셋타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 바라문들은 남을 멸시하는 버릇으로 저희를 비난하여 욕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로 비난하고 욕을 하더냐?”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 중에 바라문만이 가장 높은 종족이고 그 밖에는 다 하잘것없는 낮은 종족이다. 바라문은 살빛이 희고 다른 종족은 살빛이 검다. 바라문만이 오직 순수한 범천의 혈통을 받은 종족이다. 바라문만이 범천의 입에서 나왔고 범천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범천의 상속자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고귀한 계급을 등지고 미천한 계급의 사람들과 가까이 사귀고 있으니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머리 깎은 사문 가운데는 범천의 발에서 나온 천한 자들도 있지 않느냐.’ 이러한 말로 저희를 비난하고 욕합니다.” “바셋타여,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느냐. 바라문도 시집가고 장가가며 여인은 임신해서 아이를 낳고 있지 않더냐. 그들의 출생도 다른 사람과 꼭 같으면서 어떻게 바라문만이 최상의 종족이라고 범천의 입에서 나왔으며 범천의 상속자라고 남을 욕하고 업신여긴단 말이냐. 세상에는 왕족과 바라문과 평민과 노예 등 네 가지 계급이 있다. 그러나 왕족이라고 해서, 남의 생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거나 음란한 짓을 하고 거짓말과 이간질, 악담을 하며 탐욕과 성냄과 그릇된 소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도 또한 죄를 범하게 되며 그 갚음을 받게 된다. 바라문이나 평민, 노예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또 왕족이 남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약탈과 음행과 거짓말과 이간질, 악담, 탐욕, 성냄 등에서 벗어나 바른 견해를 지녔다면, 그것은 착한 일이며 착한 갚음을 받게 된다. 이것은 바라문이나 평민이나 노예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바라문만이 최상의 종족이요 나머지는 미천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네 가지 종족이나 계급은 그 사람의 혈통이나 신분으로서는 차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다. 누구든지 번뇌가 없어지고 청정한 계행이 성취되어 생사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완전한 지혜를 얻어 해탈의 도를 이루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사성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태생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고 성이 다르고 가계가 다르더라도 너희가 출가하여 집을 버린 수행자가 되었을 때 저 바라문들이 ‘너희는 무엇이냐?’고 묻거든 ‘우리는 사캬족의 자손이다. 사캬무니의 진정한 아들이다. 우리는 그의 입에서 나왔으며 법에서 났으며 법의 상속자이다’라고 대답하여라. 너희는 여래를 의지하여 새로 얻어 성취된 청정한 계행의 몸이요, 선정의 몸이요, 지혜의 몸이요, 해탈의 몸이요, 해탈지견의 몸이기 때문이다.”
11. 사문의 과보
부처님께서 많은 제자들과 함께 라자가하의 신의인 지바타 소유의 암라 동산에 계실 때였다. 마가다의 아자타삿투왕은 사월 보름날 밤에 재계하고 궁전 누각에서 밝게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곁에 있는 신하들을 돌아보며, 이 밤에 덕이 높은 사문이나 바라문을 모시고 설법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왕은 지바카의 말을 듣고 곧 암라 동산으로 갔다. 왕은 부처님께 공손히 예배드린 후 이렇게 물었다. “부처님, 이 세상 사람들은 여러 가지 기술과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보수로써 부모 처자를 부양하고 자기도 안락을 누립니다. 그런데 출가 수행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현세에서 어떤 과보를 받게 됩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여기 왕을 섬기는 한 사람의 종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왕을 위해 부지런히 일을 할 것이오.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자며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말씨도 공손히 하여, 왕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항상 애를 쓸 것이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을 돌이켜 출가를 합니다.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치고 몸과 말과 생각을 조심하고 변변치 않은 음식과 의복에 만족하며 세속을 떠나 고요한 숲에서 살게 될 것이오. 이때 어떤 신하가 숲에서 수행하고 있는 예전의 종을 보았다고 왕께 전하는 말을 듣는다면, 그 사람에게 예전처럼 돌아와 시중을 들라고 하겠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먼저 그에게 절하고 그를 맞아 가사와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며, 병이 나면 약과 필요한 물건을 대주면서 그를 보호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곧 눈앞에 보이는 사문의 과보가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사문의 과보입니다.” <남전 장부 사문과경>
12. 청정한 계행의 과보
아자타삿투왕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눈앞의 과보보다 더 뛰어난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어떤 귀족의 가장이나 자제나 혹은 천민의 자제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 믿음을 내어 장애 많은 세속 생활을 떠나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는 청정한 계행을 닦고 정진하여 조그만 허물도 두려워하고 깨끗한 몸과 말과 생각을 지니며, 모든 감관의 문을 잘 보호하고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두루 갖추게 될 것이오. 그러면 어떤 것이 계행을 갖춘 것인가. 살생을 하지 않고 모든 생물을 가엾이 여기며,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않고 남의 것을 가지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않으며, 떳떳하지 못한 음행을 하지 않고 밝고 깨끗한 행동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만 하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화합하고 친밀한 말을 하며, 거친 말을 하지 않고 누구나 들으면 기뻐하는 말을 하고 부질없는 말을 하지 않고 도리와 교법에 맞는 말을 합니다. 하루에 한 번 먹고 연극이나 노래, 춤, 오락 등의 유흥장에 가지 않으며, 몸을 꽃다발이나 향수로 치장하지 않고 높고 큰 침상이나 의자를 사용하지 않소. 금, 은 같은 귀금속과 곡식을 저장해 놓는 일도 없고 부인이나 소녀 또는 남녀의 노예를 받아 부리는 일이 없으며, 코끼리, 말, 소, 산양 등의 가축이나 토지 전답을 받는 일도 없소. 공사간의 심부름이나 중매 혹은 팔고 사는 행위를 하지 않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모든 그릇된 행위를 하지 않소. 이것은 또한 비구계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오. 비구가 이와 같은 계행을 두루 갖추면 이 계행의 위력으로 어느 곳에 갈지라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마치 사방의 적을 정복한 위력 있는 왕은 어디를 가나 두려울 것이 없는 것과 같소. 비구가 청정한 계행을 갖추면 마음속으로 티없이 깨끗한 평안을 누리게 되니 이것이 비구가 계행을 구족한 현세의 과보인 것이오.”
<남전 장부 사문과경>
13. 계행과 정진으로 얻은 자유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비구는 또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 감관의 문을 잘 지켜야 합니다. 마치 부자가 창고의 문을 단속하여 도둑의 침범을 막듯이, 비구가 눈으로 사물을 볼 때에는 어떤 현상이나 특수한 환경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생각을 다스리지 않고 그대로 놓아 둔다면 탐욕과 애착과 비애 등의 부정법에 흘러가고 말 것이오. 그러므로 눈을 잘 단속하여 감각 작용을 조절함으로써 보는 감각이 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고 항상 순결한 제자리로 돌아가게 해야 하는 것이오. 소리를 듣는 귀와 냄새를 맡는 코, 맛을 보는 혀, 차고 덥고 거칠고 부드러움을 느끼는 몸, 시비와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도 그와 같아서 어떤 현상이나 특수한 환경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의식하는 것이 모두 제 길을 벗어나지 않고 항상 순결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오. 이와 같이 모든 감관을 잘 단속하여 그 공덕이 갖추어지면, 마음속으로 티없이 깨끗한 안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오. 이것이 감관의 문을 보호한 공덕의 과보입니다. 또 어떤 것이 비구의 지족인가 하면, 그 몸을 보호하는 옷과 얻은 것에 만족하여 어디를 가든 한 벌 옷과 한 벌 바리때를 지니고 가는 것이오. 마치 새가 어디를 가든 날개만을 가지고 나는 것처럼. 비구는 이와 같이 청정한 계행과 감관과 만족을 갖추어 조용한 숲속이나 나무 아래, 동굴이나 묘지 등 세속을 떠난 한적한 곳을 선택해 한 그릇 밥을 얻어 먹은 뒤에는 단정히 앉아 바른 생각에 편안히 머무는 것이오. 그는 세속의 탐욕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에 머물며 남을 해치려거나 성내고 미워하는 생각을 여의고, 모든 생물을 가엾이 여기어 이롭게 하려는 마음에 머물며, 정신이 혼미한 데서 벗어나 산뜻하고 올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에 머뭅니다. 산란하고 헐떡거리는 생각을 쉬어 고요하고 차분한 마음에 머물며, 망설이고 의심하는 데서 벗어나 깨끗하고 의심하지 않는 마음에 머물러 그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남에게서 빌린 돈으로 처자를 부양하고 스스로도 만족하는 것과 같이, 비구도 계행과 정진으로 묵은 죄업을 청산하고 새로운 도업에 의해 스스로 평안을 얻어 만족하는 것이오. 또 한 가지 비유를 든다면, 남의 노예가 되어 마음대로 오고 가지 못하다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면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떳떳한 자유인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과 같이, 비구도 청정한 계행과 줄기찬 정진의 힘으로 세속적인 오욕의 노예에서 벗어나 독립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오. 이것이 비구가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갖추어 만족할 줄 알고 번뇌에서 벗어난 현세의 과보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니, 마가다의 왕 아자타삿투는 감격한 끝에 이렇게 여쭈었다. “거룩하십니다.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주고, 파묻혀 있던 것을 드러내놓으며,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보여 주고, 어둔 밤에 불을 밝혀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같이 온갖 방편을 들어 진리를 말씀해 주시니, 저는 지금부터 부처님께 귀의하고 교법에 귀의하고 승단에 귀의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이 목숨이 다하도록 삼보에 귀의하여 신도가 되고자 하오니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어리석고 무지하여 왕권을 얻기 위해 잔인하게도 덕이 많은 부왕을 살해하였습니다. 부처님, 앞으로 제가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저의 이 죄악을 죄악으로 인정하시고 저를 받아 주십시오.” “대왕, 참으로 당신은 어리석고 무지하여 큰 죄악을 저질렀소. 당신은 그처럼 덕이 많은 부왕을 살해하였소. 그러나 당신이 죄악은 죄악대로 인정하고 법에 따라 그 죄를 참회하겠다니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겠소. 누구든지 죄를 인정하고 법답게 참회하여 앞으로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계를 지키려 한다면 성자의 계율이 번창할 것이오.” 아자타삿투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왕이 물러간 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 아자타삿투왕은 진심으로 뉘우친 것이다. 만일 그가 부왕을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바로 이 자리에서 마음의 때를 벗고 청정한 법의 눈을 얻었을 것이다.” <남전 장부 사문과경>
14. 허물어진 탑에는 흙을 바를 수 없다
부처님께서 많은 비구들과 함께 파바에 있는 어떤 동산에 머무르고 계실 때였다. 부처님은 달이 밝은 보름 밤에 맨땅에 앉아 비구들에게 법을 설한 다음 사리풋타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사방에서 많은 비구들이 모여 함께 정진하면서 자지 않는다. 나는 등이 아파 좀 쉬고 싶으니, 네가 비구들을 위해 법을 설해 주어라.” 부처님은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깔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사자처럼 발을 포개고 누우셨다. 사리풋타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이 파바성은 이교도 니간타가 살던 곳인데 그는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그 후 제자들은 두 파로 갈라져 서로 잘잘못을 캐면서 시비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법을 잘 알지만 너는 그것을 모른다. 나는 바른 법을 가졌는데 너는 사견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말이 서로 얽히어 앞뒤가 없이 저마다 자기 말만을 참되고 바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니간타를 따르던 이 고장 사람들은 다투는 무리들을 싫어합니다. 옳다고 주장하는 그 법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법이 올바르지 못하면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허물어진 탑에는 다시 흙을 바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래의 법은 올바르고 참되어 해탈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탑은 장엄하게 꾸미기가 쉬운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마땅히 교법과 계율을 모아 그들과 같은 다툼을 막고 청정한 수행을 쌓아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해야겠습니다. 수행자는 반드시 안으로 살펴야 합니다. 만약 성냄과 원한을 가지고 저들처럼 대중을 어지럽힌다면 화합한 대중을 모아 널리 방편을 베풀어 다툼의 근본을 뽑아야 합니다. 맺힌 원한이 다했을 때는 그 마음을 거두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성냄이 뒤틀어지면 시기하고 교활하여 스스로 자기 소견에 말려들어 사견에 헤매고 치우친 편견에 떨어지고 맙니다.” 부처님은 사리풋타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셨다.<장아함 중집경>
제2장 지혜와 자비의 말씀 #2
1. 탐욕의 재앙
부처님께서 카필라성 밖에 있는 니그로다 숲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사캬족의 왕 마하나마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저는 오랫동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의 더러움이라고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감사히 받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와 같은 번뇌가 제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인가 제 마음에서 버려져야 할 것이 아직 버려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소, 마하나마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아직도 당신 마음에서 가셔지지 않았기 때문이오. 만약 마음속에 그와 같은 번뇌가 말끔히 가셔졌다면 당신은 가정에서 살지 않을 것이며, 또 갖가지 탐욕에 허덕이지 않을 것이오. 탐욕이란 어디를 가도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오. 탐욕은 고통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이오. 우리들을 절망의 구렁으로 떨어뜨리고 무서운 재앙을 불러들이오. 바른 지혜로써 그것이 그른 줄 알더라도 평안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탐욕에 쫓기고 마는 것이오. 그것이 그른 것인 줄 바르게 알고 탐욕을 떠나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탐욕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오. 이것은 내 경험이오만, 내가 깨달음을 얻기 전 탐욕이 우리를 절망으로 떨어뜨리고 무서운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임을 알기는 알았었소. 그러나 평안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탐욕에 쫓기면서 지내왔던 것이오. 그 후 그것이 그른 줄 바르게 알고 평안한 경지에 이른 그때부터 비로소 탐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오. 탐욕에는 즐거움과 재앙이 있소. 탐욕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마음에 드는 물건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이 그것이오. 이 다섯 가지 탐욕에 대해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데 이것이 탐욕의 즐거움이오. 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추위와 더위, 바람과 비, 벼룩, 모기, 뱀들에 시달림을 받고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을 받소. 그래서 낙담과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이오. 아니 그처럼 애쓰고 고생한 끝에 부자가 됐다 합시다. 이제 그는 부를 지키기 위해 전에 없던 걱정 근심을 겪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왕에게 몰수당하지 않을까. 도둑에게 빼앗기지 않을까. 불에 타지 않을까. 물에 떠내려 보내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귀찮은 친척들에게 뜯기지 않을까.’ 이와 같이 온갖 걱정을 하지만 마침내는 몰수당하고 빼앗기고 떠내려 보내고 뜯기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내것이었는데 이제 하나도 내것이 아니구나 하고 비탄에 빠지오. 이것이 탐욕의 재앙이오. 우리가 겪는 현재의 괴로움은 모두 탐욕에 기인한 것이오. 그리고 그 탐욕 때문에 왕은 왕과 다투고 바라문은 바라문과 다투며 부모는 자식과 다투고, 형제끼리 친구끼리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이오. 다투고 싸우고 욕질하다가 마지막에 몽둥이를 들거나 칼을 휘둘러 서로 죽이기까지 하니 이것이 탐욕의 재앙이오. 또 탐욕 때문에 사람들은 몸을 망치고 함부로 빼앗으며 간음을 행합니다. 왕은 이들을 붙들어 온갖 형벌을 가합니다. 채찍으로 갈기고 몽둥이로 치며 팔과 다리를 끊고 귀와 코를 자르오. 또 목에서 발끝까지 가죽을 벗기고 팔과 무릎을 쇠기둥에 못박아 불을 지르오. 끓는 기름을 몸에 부어 굶주린 개에게 주고, 몸을 말뚝에 매어 칼로 목을 베오. 이와 같은 고통이 모두 탐욕의 재앙인 것이오. 마하나마여, 사람들은 이 탐욕 때문에 몸과 말과 생각으로 갖가지 악을 지어 죽은 후에는 지옥에 떨어져 온갖 고통을 받소. 이것이 다 탐욕의 재앙으로서 미래의 고통 또한 탐욕을 원인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오.” 마하나마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돌아갔다.<중아함 소고온경>
2. 세속에서 뛰어나는 법
부처님께서 강가강을 건너 앙가국 아바나라는 마을 밖 숲속에 머물러 계실 때였다. 하루는 거리에 들어가 밥을 빌고, 숲으로 돌아오니, 장자 포타리야가 양산을 받고 신을 신은 채 숲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을 보자 가까이 와서 인사한 뒤 앉지도 않고 머뭇거렸다. 부처님은 그를 돌아보고 말씀하셨다. “장자님, 자리가 있으니 앉으시오.” 포타리야는 장자라고 불린 것이 못마땅해 잠자코 있었다. 부처님이 거듭 권하자 입을 열었다. “부처님 나를 장자라고 부른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장자의 차림을 하고 있지 않소?” “나는 처자와 살림을 버리고 세속을 떠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처자와 살림을 버리고 세속을 떠났소?” “나는 내 재산 전부를 아들에게 물려 준 뒤 아무 간섭 없이 다만 옷과 먹을 것만 받으면서 숨어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림을 버리고 세속을 떠났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세속을 떠났다는 것은 내가 말하는 세속을 떠났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세속을 떠났다는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내 가르침에서는 여덟 가지 법으로 세속을 떠나오. 그 여덟 가지란, 산 목숨을 죽이지 않고,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지 않고, 화합을 깨뜨리지 않으며, 탐욕을 버리고 성내지 않으며, 시기하지 않고, 그리고 교만을 버리는 일 등이오. 그러나 이것으로도 세속을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오. 세속을 완전히 떠나는 법은 따로 있소.” “그 법도 말씀해 주십시오.” “장자님, 이를테면 굶주린 개에게 살이 조금도 붙어 있지 않은 뼈를 던져 준다면 개는 굶주림을 달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뼈로 인해 피로와 고달픔은 더할 것이오. 내 제자는 이 뼈의 비유처럼 바른 지혜로 쾌락을 잘 살펴 그것은 고통과 불행의 씨라고 사실대로 알아 오욕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오. 독수리나 솔개 같은 날짐승이 고깃덩이 하나를 가지고 날아갈 때 다른 사나운 개가 쫓아와 그것을 덮치려 한다면, 새들이 그 고깃덩어리를 버리지 않는 한 서로 싸워 죽거나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될 것이오. 또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러 올라갈 때 그 횃불을 버리지 않는 한 손을 데거나 타 죽게 될 것이오. 향락은 꿈과 같아 깨어 보면 아무것도 없소. 무서운 독사를 보고 손을 내밀어 물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남의 돈을 함부로 빌려 쓰면 마침내는 빚쟁이에 몰려 곤란을 당할 것이오. 나무 열매가 익은 것을 보고 올라가 따먹고 있을 때 누가 도끼로 나무 밑동을 찍는다고 합시다. 그때 나무에 오른 사람이 얼른 내려오지 않으면 손발을 다치거나, 나무에서 떨어져 죽게 될 것이오. 이것이 모두 욕락에 대한 비유입니다. 내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이런 비유와 같이 욕락을 관찰하고, 그것은 고통과 불행의 씨라고 바른 지혜로써 사실 그대로를 알아 세상 욕심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있소. 내 제자들은 이렇게 해서 얻은 청정으로 이 세상에서 해탈을 얻소. 이것을 내 가르침에서는 세속을 완전히 떠나는 법이라 하오. 당신도 이와 같이 세속을 떠났습니까?” “부처님, 어떻게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전에 다른 가르침에 빠져, 모르는 것을 안다 하고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르는 것을 모르는 줄 알고, 아는 것을 아는 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사문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존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도가 되겠습니다.”
<남전 중부 포타리야경>
3. 백골로 돌아갈 육신
부처님께서 쿠루수의 서울 캄마싯담마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지며 고뇌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법을 얻게 하는 유일한 길이 있느니 곧 사념처법이다. 과거 모든 여래도 이 법에 의해 최상의 열반을 얻었고, 현재와 미래의 여래도 이 법으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비구는 그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 이 네 가지에 대해 똑바로 관찰하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바른 생각과 지혜로써 세상의 허욕과 번뇌를 끊어 버려야 한다. 어떤 것이 몸을 바로 관찰하는 법인가. 비구가 숲속이나 나무 밑 혹은 고요한 곳에서 몸을 바로하고 앉아 오로지 한 생각으로 호흡을 조절하되, 길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는 그 길다는 것을 알고, 짧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는 그 짧다는 것을 알아라. 온몸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아 마음을 다른 데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이 몸을 관찰하되 몸이 어디 갈 때에는 가는 줄 알고 머물 때에는 머무는 줄 알며, 앉고 누울 때에는 앉고 누웠다는 상태를 바로 보아 생각이 그 몸의 동작 밖에 흩어지지 않게 하여라. 어떤 사물에도 집착하지 말고 다만 이 몸 관찰하는 데에 머물게 하여라. 이와 같이 이 몸의 굴신과 동작의 상태를 사실대로 관찰하여 한 생각도 흩어지지 않게 되면, 몸에 대한 형상이 눈앞에 드러나 바른 지혜가 나타나며, 이 세상 어떤 환경에도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몸이 애초에 무엇으로써 이루어졌는지 사실대로 관찰해야 한다. 이 몸은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울려 된 것임을 밝게 보아야 한다. 솜씨 있는 백정이 소를 잡아 사지를 떼어 펼쳐 놓듯이 비구도 이 몸을 네 요소로 갈라 눈앞에 드러내 놓아야 한다. 숲속에 버려진 시체가 하루 이틀 지나면 부어 터지고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이 몸도 그렇게 되고 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형상이 눈앞에 역력하면 모든 허망한 경계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숲속에 버려진 시체의 백골, 한두 해 지나 무더기로 쌓인 백골, 다 삭아 가루가 된 해골을 보는 것과 같이 비구들도 그 몸을 주시하되, 이 몸도 저 꼴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관찰하면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구는 몸에 대해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때와 장소를 따라 그 느끼는 작용에 대해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 괴로움을 느끼는 작용, 즐거움을 느끼는 작용,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는 작용이다. 즐거움을 누릴 때는 즐거운 줄 알고, 괴로움을 당할 때는 괴로운 줄 알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을 때는 또한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사실대로 관찰하고 타인의 느낌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 그 느낌이 눈앞에 나타난다. 느낌이 시시로 변해 고정된 괴로움이나 즐거움, 고정된 불고 불락이 없음을 알아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가 느낌에 대해 관찰하는 법이다. 또 어떤 것이 마음을 관찰하는 법인가. 마음에 탐심이 일어나면 ‘이것이 탐심이구나’라고 알고, 탐심을 버리면 버린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뒤바뀐 마음, 넓은 마음, 좁은 마음, 고요한 마음, 산란한 마음, 해탈한 마음,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스스로 낱낱이 안팎으로 살피고, 그 마음이 일어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관하여 눈앞에 대하듯 하면 세상의 어떤 집착이라도 놓아 버리게 된다. 이것이 마음을 바로 관찰하는 법이다. 끝으로 어떤 것이 관찰하는 것인가. 안으로 탐욕이 있으면 있는 줄 알고 없으면 없는 줄 알며, 또 탐욕이 일지 않았더라도 일어난 것으로 관하고, 일어났을 때에는 없어진 것으로 관하며, 이미 없어진 것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내는 마음, 졸음, 산란함 마음, 의혹 등도 안팎으로 관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하여, 그것이 뚜렷하게 눈앞에 드러날 때에는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관을 단 한 달만이라도 법대로 닦으면 탐욕과 불선법을 떠나 성인의 길에 들게 될 것이다. 이 사념처관은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져내며, 고뇌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법을 얻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비구들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중아함 염처경>
4. 최상의 법륜
부처님께서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머물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곳 녹야원에서 일찍이 어떤 사람도 또 어느 곳에서도 굴린 적이 없는 최상의 법륜을 처음으로 굴렸었다. 그것은 네 가지 진리인데, 곧 고, 집, 멸, 도이다. 비구들이여,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를 잘 섬기고 받들어라. 그들은 지혜로워 청정하게 수행하는 이의 보호자가 될 것이다. 사리풋타는 너희들의 생모와 같고 목갈라나는 양모와 같으리라. 사리풋타는 처음 발심하여 수행하는 이를 잘 길러주고, 목갈라나는 그들을 이끌어 깨달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이제 사리풋타가 너희들에게 네 가지의 진리를 잘 가리어 말해 줄 것이다.” 하고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를 뜨셨다. 사리풋타는 모인 대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은 이 녹야원에서 일찍이 어떤 사람도 또 어느 곳에서도 굴린 적이 없는 최상의 법륜을 굴리셨으니, 그것은 곧 고, 집, 멸, 도의 네 가지 진리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고의 진리입니까.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고요, 원수를 만나게 되는 것이 고요, 사랑에는 이별이 있으니 그것이 고요,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니 고요, 걱정 근심과 번민과 슬픔이 고입니다. 한 말로 한다면 인생의 존재 그 자체가 고의 집합체인 것입니다. 나는 것을 고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중생들이 각기 그 종류를 따라 오온이 화합하여 목숨을 이룬 후 세상에 태어납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나와 그 생명을 보존하고 키워 가려면 천만 가지 고통을 겪게 되므로 이것을 태어남의 고라 합니다. 늙는 것을 고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머리털이 희어지고 이가 빠지며 얼굴이 쭈그러지고 등이 굽으며 기력이 쇠해집니다. 몸은 날로 무거워 앉으면 허리가 아프고 다닐 때는 지팡이에 의지하게 되니 이것을 늙음의 고라 합니다. 병드는 것을 고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온몸은 균형을 잃고 기혈이 순조롭지 못해 두통이나 치통, 요통을 앓으며 눈이 어둡고 귀가 먹습니다. 혹은 열병, 냉병, 풍병, 습병으로 사지가 뒤틀리고 온갖 고통이 엄습하니 이것을 병고라고 합니다. 죽음의 고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중생들이 그 몸의 기력이 다하고 목숨이 끝나려 할 때 아직 끊어지지 않은 잔명이 죽음의 막다른 길에 이르러 여러 가지 견디기 어려운 심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죽음의 고라 합니다. 또 원수를 만나는 고라 함은, 일찍이 서로 미워하며 원한을 품고 해치거나 죽이려 했던 자와 만나게 되는 고통을 말합니다. 사랑에 이별이 있는 고라 함은, 아무리 친하고 가까운 부모와 처자라도 언젠가는 서로 이별하게 되는 고통을 말합니다.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고라 함은, 모든 중생은 나지 않으려고 해도 업에 따라 나게 되며, 나거든 늙거나 병들어 죽지 말든지 죽거든 나지 말든지 해야 할 텐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는 동안 부귀영화를 원하고 온갖 재난과 슬픔이 없기를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그것이 또한 고통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일단 생명을 받아 태어난 것은 결국 모든 고통의 집합체인 것입니다. 이것이 고의 진리입니다. 다음 어떤 것이 집의 진리입니까. 그와 같은 고의 원인은 집착에 있습니다. 이 다음 생의 업보를 부르게 되는 애욕과 번뇌를 말합니다. 어떤 것이 멸의 진리입니까. 저 애욕과 번뇌를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것이 도의 진리입니까. 멸에 이르는 방법 즉 여덟 가지의 바른 길입니다.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선정입니다. 바른 견해란 네 가지 진리를 바로 보는 지혜요, 바른 생각이란 번뇌 망상을 멀리하고 성냄과 원한이 없는 생각이요, 바른 말이란 거짓말, 악담, 이간질, 부질없는 잡담을 떠난 도리에 맞는 참된 말이요, 바른 행위란 살생, 도둑질, 음행을 하지 않고 올바른 계행을 지키는 일입니다. 바른 생활이란 출가자의 생활 방법으로 부정한 장사나 점술 따위의 수단을 떠나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을 얻어 생활하는 것입니다. 바른 노력이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생각을 일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나쁜 생각은 없애버리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착한 생각을 일게 하고, 이미 일어난 착한 생각은 원만히 키워나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른 기억이란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여 몸과 마음과 진리를 바로 관찰하고 탐욕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선정이란 모든 욕심과 산란한 생각을 가라앉혀 선정에 들어감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진리입니다.<중아함 분별성제경>
5. 정견과 사견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이와 같이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세 가지 그릇된 견해를 가진 외도가 있는데, 슬기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밝게 가려내어 추종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러한 견해를 따른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부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세 가지 그릇된 견해란 어떤 것인가. 첫째,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괴롭든 즐겁든 모두 전생의 업에 의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둘째,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은 자재천의 뜻에 의한 것이다.’라고 한다. 셋째, 혹은 ‘인도 없고 연도 없다.’고 말한다. 나는 언제나 무엇이나 전생의 업에 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 의견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음행하고 거짓말하고 탐욕과 성냄과 삿된 소견을 갖는 것도 모두 전생에 지은 업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일은 해야겠다는 의지도 노력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자제력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정당한 사문 혹은 바라문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판했었다. 또 모든 것은 자재천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약 당신들의 주장대로라면 살생하는 것도 자재천의 뜻이고, 도둑질이나 음행이나 그릇된 소견을 갖는 것도 자재천의 뜻에 의한 것일 게다. 그렇다면 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일은 해야겠다는 의지도 노력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자제력도 필요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정당한 사문 혹은 바라문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판했었다. 그리고 인도 없고 연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당신들의 주장대로라면 살생하는 것에도 인과 연이 없고 그릇된 소견을 갖는 것에도 인과 연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에 인연이 없다고 한다면, 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일을 해야겠다는 의지도 노력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자제력도 필요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정당한 사문 혹은 바라문이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판했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주장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비판이다. 만약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부정되고 마침내는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이와 같이 그릇된 의견을 잘 가려내어 버림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이치로써 차근차근 설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릇된 소견을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셨다. 사리풋타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어떤 것이 부처님 제자의 바른 견해이며, 진리에 대해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통달할 수 있는 길이겠습니까. 불제자는 먼저 어떤 것이 불선법인지, 불선법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어떤 것이 선법인지, 선법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제자의 바른 견해로 그 보는 바가 올바르고 절대적인 신념으로 진리에 통달할 수 있는 길입니다 불선법이란 산 목숨을 죽이는 일,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일, 사음, 거짓말, 악담, 이간질, 꾸미는 말, 탐욕, 성냄, 그릇된 소견 등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불선법의 근본은 또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선법이란 산 목숨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으며, 사음을 하지 않고 거짓말과 악담과 이간질과 꾸미는 말을 하지 않으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 버린 것을 말하며, 이러한 선법의 근본은 탐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어리석지 않음에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들이 이와 같은 불선법과 그 근본을 알고 또 선법과 그 근본을 알면, 그는 탐욕과 성냄의 번뇌를 없애며 ‘나’를 내세우려는 아만을 버리고 무명을 끊고, 지혜의 등불을 밝혀 현실의 괴로움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제자의 바른 견해로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올바른 진리를 통달하게 되는 길입니다.” 비구들은 사리풋타의 말을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중아함 삼도경>
6. 뗏목의 비유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독수리 잡기를 좋아하는 아리카 비구는 나쁜 소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언젠가 말씀한 ‘장애’라는 법도 그걸 직접 실행해 보니 그렇게 장애가 되지 않더라고 말했다. 다른 비구들은 그릇된 그의 소견을 고쳐 주려고 토론도 하고 타이르기도 해보았지만 아무 보람이 없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부처님을 아리타를 불러 꾸짖으신 후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땅꾼이 큰 뱀을 보고 그 몸뚱이나 꼬리를 붙잡았다고 하자. 그때 뱀은 몸을 뒤틀어 붙잡은 손을 물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죽거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뱀 잡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여래의 교법을 배우면서도 가르침의 뜻을 잘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 진리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토론할 때 말의 권위를 세우려고 곧잘 여래의 교법을 인용하지만 그 뜻을 몰라 난처하게 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여래의 가르침을 들으면 그 뜻을 깊이 생각하여 진리를 바르게 알기 때문에 항상 기쁨에 싸여 있다. 이를테면 어떤 땅꾼은 큰 뱀을 보면 곧 막대기로 뱀의 머리를 꼭 누른다. 그때 뱀이 자기를 누르는 손이나 팔을 감는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그 때문에 물려 죽거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뱀 잡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또 너희들에게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들겠다. 어떤 나그네가 긴 여행 끝에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는 생각하기를 ‘바다 건너 저쪽은 평화로운 땅이다. 그러나 배가 없으니 어떻게 갈까? 갈대나 나무로 뗏목을 엮어 건너가야겠군.’ 하고 뗏목을 만들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갔다. 그는 다시 생각하였다. ‘이 뗏목이 아니었다면 바다를 건너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뗏목은 내게 큰 은혜가 있으니 메고 가야겠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뗏목에 대해 자기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느냐?” 비구들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해야 자기 할 일을 다하게 되겠는가. 그는 바다를 건너고 나서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뗏목으로 인해 나는 바다를 무사히 건너왔다. 다른 사람들도 이 뗏목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물에 띄워 놓고 이제 나는 내 갈 길을 가자.’ 이와 같이 하는 것이 그 뗏목에 대해서 할 일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뗏목의 비유로써 교법을 배워서 그 뜻을 안 후에는 버려야 할 것이지 결코 거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다. 너희들은 이 뗏목처럼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자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할 것 있겠느냐.” <남전 중부 사유경>
7. 네 것이 아닌 것은 버려라
뗏목의 비유를 말하고 난 부처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내 것이라는 잘못된 소견이 일어날 수 있는 다섯 가지 경우가 있다. 그것은 물질과 감각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이다. 무지해서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고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은 이 다섯 가지 경우에 대해서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나’다’라고 생각하여 그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많이 배우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며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그 다섯 가지에 대해서 그와 같이 생각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없어졌다고 하여 바른 생각을 잃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이때 어떤 비구가 물었다. “부처님, 어떤 외계의 사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고 두려움에 떠는 일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이것이 전에는 내것이었는데 이제는 내것이 아니다. 다시 내 소유로 만들 수는 없을까?‘ 그래서 그는 슬퍼하고 탄식하며 가슴을 치고 운다. 이것이 외계의 사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거나 두려움에 떠는 일이다. 그러나 슬퍼하거나 탄식하지 않고 가슴을 치고 울지 않는다면 그는 외계의 사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부처님, 그렇다면 마음속의 어떠한 것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고 두려움에 떠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 세계와 나 자신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나는 없다’고 하는 여래의 가르침을 들으면 슬퍼하고 탄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 것이다. 이것이 마음속의 어떠한 것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고 두려움에 떠는 일이다. 너희들은 영원히 변치 않고 지속되는 것을 가지고 있거나 본 일이 있느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실체도 없는 ‘나’에 집착하면 항상 근심과 고통이 생기는 법이다. 내가 있다면 내것이 있을 것이고 내것이 있다면 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내것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계와 내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소견이다. 이 가르침을 안 제자들은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들어서 물질과 분별을 싫어하고 욕망을 버리고 해탈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구를 가리켜 장애를 벗어난 자, 장애를 부순 자, 번뇌의 기둥을 빼어버린 자, 걸림이 없는 자,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자, 속박을 벗어난 성자라 부른다. 이와 같이 말한 내게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저 사문 고타마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없어져 버린다고 가르치는 자다’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이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현재의 고뇌를 말하고 그 고뇌를 끊어 없애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아무리 남들이 비난하고 욕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마음을 쓰거나 원한을 품지 않는다. 또 누가 칭찬하고 공경할지라도 나는 조금도 기뻐하거나 우쭐거리지 않는다. 비난하거나 칭찬하거나 나는 ‘그들이 내게 이렇게 하는 것을 이전부터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너희 것이 아닌 것은 모두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영원한 평안을 누릴 것이다. 너희 것이 아니란 것은 무엇인가. 물건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물질을 버려라. 감각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감각을 버려라. 생각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생각을 버려라. 의지 작용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의지 작용을 버려라. 의식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의식을 버려라. 어떤 사람이 이 숲속에 와서 풀과 나뭇가지를 날라다 불사른다고 하자. 너희들은 이때 그는 우리 물건을 날라다 마음대로 불사른다고 생각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나도 아니고 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것은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너희는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남전 중부 사유경>
8.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얻는 도
부처님께서 베사카라 숲에 계실 때 아니룻다는 파치나 숲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선정에 들어 생각하였다. ‘아, 이 도는 욕심이 없는 데서 얻는 것이고 욕심이 있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구나. 이 도는 만족할 줄 아는 데서 얻는 것이고 족할 줄 모르면 얻을 수 없다. 이 도는 군중을 멀리 떠남으로써 얻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번거로움 가운데서는 얻을 수 없다. 이 도는 바른 생각으로써 얻는 것이고 그릇된 생각으로는 얻을 수 없다. 이 도는 고요 속에서 얻는 것이고 시끄러운 속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 도는 지혜로운 사람이 얻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때 아니룻다의 생각을 아시고 아니룻다 앞에 나타나셨다. “착하다, 아니룻다. 너는 대인의 깨달음을 생각하고 있구나. 그 다음 한 가지는 부질없는 궤변을 하지 않는 일다. 너는 여덟 가지 대인의 깨달음을 생각해 수행하는 동안 욕심과 옳지 못한 것을 버리고 여기에서 일어나는 기쁨을 맛보아 초선을 거쳐 제이, 제삼, 제사 선의 경지에 들어갈 것이다. 네가 이 대인의 깨달음을 생각하고 제사선의 기쁨에 들어가면, 여인들이 여러 가지 옷을 옷장에 가득 채워 두고 즐거워하듯이 만족함을 느끼고 기쁨에 넘쳐 다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열반의 길을 가는 너는 남루한 옷도 마음에 들 것이고, 빌어먹는 밥도 맛이 있을 것이며, 나무 밑 풀자리에 앉아도 마음은 늘 즐거울 것이고, 병들어 누워 있을 때 썩은 거름으로 만든 약이라도 만족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신 뒤 다시 베사카라 숲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비구들에게 위에서 말한 여덟 가지 대인의 깨달음을 가르치고 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욕심을 적게 가졌다고 해서 나는 욕심을 적게 가졌다고 말하지 마라. 만족함을 알았다고 해서 나는 만족할 줄 알았다고 말하지 마라. 멀리 떠나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해서 나는 멀리 떠나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말하지 마라. 궤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궤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라. 이것이 욕심을 적게 가지는 법이다. 또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의식주나 약을 얻더라도 그것을 만족하게 여김이다. 멀리 떠나는 법이란 비구의 처소에 어떤 비구, 비구니, 신남, 신녀 혹은 왕이나 이교도가 오더라도 비구는 멀리 떠나는 것을 즐기는 마음에서 진실한 법만을 알려주는 것이다. 정진하는 법은 비구가 나쁜 법을 버리고 좋은 법을 얻기 위해 정진할 때에 확고하게 설법에 대한 책임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바르게 생각하는 법이란 비구가 바른 생각을 가지고 이전에 해 온 온갖 바르지 못한 말과 행동을 돌이켜보고 새로운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법이란 법의 흥성하고 쇠함을 지혜로 살펴 네 가지 진리의 도리를 잘 아는 것이다. 궤변을 즐기지 않는 법이란 그 마음이 궤변 없는 경지로 나아가 부질없는 이론이 끊겨진 경지에 이르러 마음이 해탈하는 것이다.” <중아함 팔념경>
9. 검은 업과 흰 업
용모가 뛰어난 가미니는 이른 아침 부처님을 뵙고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바라문은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하늘을 섬깁니다. 어떤 중생이 목숨을 마치면 바라문은 마음대로 죽은 이를 천상에 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원컨대 법의 주인이신 부처님께서도 중생들이 목숨을 마치거든 천상에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가미니여, 내가 너에게 물을 테니 아는 대로 대답하여라. 어떤 사람이 게을러서 정진하지 않고 게다가 산 목숨을 죽이며, 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사음을 행하며, 거짓말을 하고, 그릇된 소견을 가지는 등 온갖 나쁜 업을 지으면서 살았다고 하자. 그가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당신은 게을러 정진하지 않고 그러면서 악업만을 행했습니다. 당신은 그 인연으로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천상에 태어나십시오’라고 했다고 하자. 가미니여, 이렇게 여러 사람이 축원했다고 해서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 게으른 그가, 더구나 온갖 나쁜 업을 지은 그가 축원을 받았다고 해서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저쪽에 깊은 못이 하나 있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크고 무거운 돌을 던져 넣었다. 마을 사람들이 못가에 모여서 ‘돌아, 떠올라라’ 하고 축원을 하였다. 그 크고 무거운 돌이 축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소원대로 떠오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 없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나쁜 업은 검은 것이어서 그 갚음으로 저절로 밑으로 내려가 반드시 나쁜 곳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묘한 법을 실행하고 온갖 착한 업을 닦는다고 하자. 그가 목숨을 마칠 때 여러 사람이 모여서 ‘당신은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묘한 법을 실행하여 온갖 착한 업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은 그 인연으로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나쁜 곳에 가서 지옥에 떨어지십시오.’라고 저주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가 과연 그들의 저주대로 지옥에 떨어지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왜냐하면, 착한 업은 흰 것이어서 그 갚음으로 저절로 위로 올라가 반드시 좋은 곳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름병을 깨뜨려 못물에 던지면 부서진 병조각은 밑으로 가라앉지만, 기름은 물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이 목숨이 다한 육신은 흩어져 까마귀와 새가 쪼아 먹고 짐승들이 뜯어 먹거나 혹은 태우거나 묻히어 마침내는 흙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마음의 업식만은 항상 믿음에 싸이고 정진과 보시와 지혜에 싸여 저절로 위로 올라가 좋은 곳에 나는 것이다. 가미니여, 산 목숨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으며, 사음과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특한 소견에서 벗어나는 좋은 길이 있다. 이른바 팔정도가 위로 오르는 길이며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가미니와 여러 비구들이 다들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중아함 가미니경>
10. 설법과 침묵
부처님께서 어느 날 오후 아난다를 데리고 아지타바티강으로 가서 목욕을 하셨다. 목욕을 끝낸 후 부처님은 아난다의 청을 받아들여 바라문 람마카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 마침 람마카의 집에서는 많은 비구들이 모여 설법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문 밖에 서서 비구들의 설법이 끝나기를 기다리셨다. 이윽고 설법이 끝난 것을 안 부처님은 문을 두드렸다. 곧 비구들이 나와 문을 열고 부처님을 맞아들였다. 부처님은 자리에 앉은 뒤 물으셨다. “너희는 아까 무슨 이야기를 하였으며 무슨 일로 여기 이렇게들 모였느냐?” “부처님, 조금 전에 저희들은 법을 설하였으며, 그 법을 설하기 위해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착하다. 비구들이여, 너희는 모여 앉으면 마땅히 두 가지 일을 행해야 한다. 하나는 설법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중아함 나마경>
11. 독 묻은 화살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말룽캬 존자는 홀로 조용한 곳에 앉아 이렇게 생각했다.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한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부처님은 이러한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태도가 못마땅하고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씀한다면 수행을 계속하겠지만, 영원하지 않다면 부처님을 비난한 뒤에 떠나야겠다.’ 말룽캬는 해가 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로 갔다. 아까 혼자서 속으로 생각한 일들을 말씀드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부처님께서는 저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진실한 것인지 허망한 것인지 기탄없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은 물으셨다. “말룽캬, 내가 이전에 너를 위해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너는 나를 따라 수행을 하고 있었느냐?” “아닙니다.” “그 밖의 의문에 대해서도, 내가 이전에 너를 위해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다 허망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를 따라 도를 배웠느냐?” “아닙니다.” “말룽캬여, 너는 참 어리석구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일찍이 너에게 말한 일이 없고 너도 또한 내게 말한 일이 없는데. 너는 어째서 부질없는 생각으로 나를 비방하려고 하느냐?” 말룽캬는 부처님의 꾸지람을 듣고 머리를 떨어뜨린 채 말이 없었으나 속으로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부처님은 비구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따라 도를 배우지 않겠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도중에서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은 무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물푸레 나무로 되었는지, 화살은 보통 나무로 되었는지, 대로 되었는지를 알아야겠소. 또 화살깃이 매털로 되었는지 독수리 털로 되었는지 아니며 닭털로 되었는지 먼저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펴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어째서 내가 이것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하면,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수행인 동시에 지혜와 깨달음의 길이며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알고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말룽캬를 비롯하여 여러 비구들은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중아함 전유경>
12. 길을 가리킬 뿐이다
부처님이 사밧티의 녹자모 강당에 계실 때였다. 바라문 출신인 수학자 목갈라나가 부처님을 찾아와 말했다. “부처님, 여쭐 말씀이 있는데 들어 주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목갈라나, 마음대로 물어서 의문을 풀도록 하시오.” “부처님, 이 녹자모 강당의 층계는 일층을 오른 뒤에 이 삼사 층으로 오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층계를 따라 차츰차츰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코끼리를 다루는 사람도 순서를 따라 길들일 수 있습니다. 바라문들도 차례를 따라 베다를 배웁니다. 우리들이 수를 배우고 수학으로써 살아가는 것도 또한 순서에 따라 차츰차츰 이루어집니다. 부처님, 부처님이 법과 율에는 어떠한 순서가 있어 차츰차츰 성취하게 됩니까?” “목갈라나여, 바른 주장이라면 그것은 순서대로 차츰차츰 성취하게 될 것이오. 나는 이 법과 계율을 순서대로 성취하였소. 만약 나이 어린 비구가 처음으로 와서 도를 배우고자 하여 법과 계울에 들어오면 나는 먼저 이렇게 가르치오. ‘너는 와서 목숨을 다해 몸을 지켜 청정하게 하고 말과 뜻을 지켜 청정하게 하라.’ 그가 시킨 대로 하면 나는 다시 그 다음을 가르치오. ‘너는 홀로 멀리 떠나 나무 밑이나 숲속 혹은 무덤 사이 같은 한적한 곳에서 살아라. 그런 곳에 가서 단정히 앉아 원을 바로 세워 생각이 다른 데로 팔리지 않도록 하여라. 남의 재물과 가구를 보더라도 탐심을 내지 말고 마음을 깨끗이 가져라. 성냄과 수면에도 그렇게 하고 의심을 끊고 미혹을 막아 그 마음을 깨끗이 지켜라.’ 목갈라나여, 그러나 장로 비구나 학덕이 높은 바라문에게는 더 깊은 것을 가르치오. 구경에 가서는 모든 번뇌가 다하고 지혜를 얻는다고 가르치오.” “부처님, 그와 같이 가르치고 훈계하면 제자들은 다 구경의 지혜를 얻어 반드시 열반을 얻게 됩니까?” “누구나 한결같을 수는 없소. 얻는 사람도 있고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소.” “열반은 있고 열반으로 가는 길도 있으며 더구나 부처님은 현재 그 길을 가리키시는 분인데, 어째서 그들은 구경의 열반을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합니까?” “목갈라나여, 당신에게 묻겠소. 당신은 라자가하를 알고 거기로 가는 길도 알고 있소?” “예, 알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라자가하와 그 곳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면 당신은 아는 대로 가르쳐 줄 것이오. 그러면 그는 가르쳐 준 길대로 따라가면 거기에 도달할 것이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바른 길을 버리고 잘못 길을 들거나 게으름을 부린다면 끝내 그 곳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오. 라자가하가 있고 그 곳으로 가는 길도 있으며 그리고 당신은 그 길잡이였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은 가고 또 어떤 사람은 가지 못하오?” “부처님, 저는 그 일에 책임이 없습니다. 제 가르침을 따른 사람은 도달할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소. 나도 또한 책임이 없소. 열반이 있고 열반으로 가는 길도 있어 나는 길잡이로서 비구들에게 가르치고 훈계하였지만, 열반을 얻은 이도 있고 얻지 못한 이도 있소. 그러니 그것은 저마다의 행동에 달린 것이오.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고 그의 행동에 달린 것이오.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고 그의 행동을 보고 ‘마침내 번뇌가 다하였다’고 인정할 따름이오.” 수학자 목갈라나는 모든 의심이 풀렸다. “부처님, 저는 알았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승단에 귀의합니다. 원컨대 저를 받아 신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오늘부터 이 몸이 다하도록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수학자 목갈라나와 비구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중아함 산수목건련경>
제 3장 지혜와 자비의 말씀 #3
1. 괴로움을 없애려면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을 때, 혼자 고요한 곳에 앉아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었다. ‘세상에는 들어가기 어렵다. 생,노,병,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생,노,병,사와 그것이 의지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었다. ‘무엇이 있어 생이 있고 무엇을 인연하여 생이 있는가?’ 그렇다 취가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으며, 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다. 취는 사물에 맛들이고 집착하여 돌아보고 생각하여 마음이 거기에 묶이면, 애욕이 더하고 자라나게 된다. 그 욕망이 있기 때문에 취가 있고, 또 욕망을 인연하므로 취가 있다. 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생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노,병,사와 걱정 근심과 괴로움이 있다.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인다. 등불은 기름과 심지를 인연하여 켜지고 기름과 심지를 더하면 오래 가게 된다. 그와 같이 사물을 취하고 맛들이고 집착하며 돌아보고 생각하면 욕망의 무더기는 더하고 자라난다. 그때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없어야 노,병,사가 없어질까?’ 그렇다, 생이 없으면 노,병,사도 없을 것이다. 존재가 없으면 생도없다. 취가 없으면 존재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욕망을 떠나 마음을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아니하고 마음이 묶이지 않으면 욕망도 곧 멸할 것이다. 그 욕망이 멸하면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존재가 멸하고, 존재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노,병,사와 걱정 근심과 괴로움도 멸한다.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하는 것이다. 기름과 심지로 등불을 켜는 것이므로 기름을 더하거나 심지를 돋우지 않으면 등불은 오래지 않아 꺼지고 말 것이다. 그와 같이 모든 것은 덧없이 생명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여, 욕망을 끊어 버리고 마음이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않고 묶이여 집착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괴로움의 무더기도 멸해 없어질 것이다.” <잡아함 불전경>
2. 너무 조이거나 늦추지 마라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러 오도록 하셨다. 부처님은 소오나에게 말씀하셨다. “소오나여, 너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더냐?” “그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은 소오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아라.”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를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번뇌가 다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소오나는 아라한이 되어 마음으로 해탈한 기쁨을 지니고 부처님을 찾아가 뵈었다. “부처님, 저는 부처님의 법안에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모든 번뇌를 다하고 할 일을 이미 마쳤으며 무거운 짐을 버렸습니다. 또 바른 지혜로써 욕심을 떠난 해탈, 성냄을 떠난 해탈, 멀리 벗어난 해탈, 애욕이 다한 해탈, 성냄을 떠난 해탈, 멀리 벗어난 해탈, 애욕이 다한 해탈, 모든 취로부터의 해탈, 늘 생각하여 잊지 않는 해탈 등 여섯 가지 해탈을 얻었습니다. 부처님, 만약 조그마한 신심으로 욕심을 떠나 해탈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욕심을 떠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소한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써 자기는 성냄에서 해탈했다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성냄을 떠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양을 멀리 벗어나려고 닦아 익힌 것으로써 멀리 벗어난 해탈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멀리 벗어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가리켜 애욕이 다한 해탈, 모든 취로부터의 해탈, 생각하여 잊지 않는 해탈이라고 합니다.” 존자 소오나가 이 법을 말하였을 때 부처님은 기뻐하셨고 수행자들도 한결같이 환희에 젖었다. 소오나가 그 곳을 떠나자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음이 잘 해탈한 사람은 마땅히 그와 같이 말해야 한다. 소오나는 지혜로써 말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추켜세우지도 않고 남을 낮추지도 않고 그 이치를 바로 말하였다.” <잡아함 이십억이경>
3. 법을 보는 이는 여래를 본다.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성 밖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그 무렵 박칼리라는 비구는 라자가하에 있는 어떤 도공의 집에서 앓고 있었다. 병은 날로 위독해 회복하기 어려워졌다. 그는 곁에서 간호하고 있는 스님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스님, 미안하지만 부처님이 계시는 죽림정사에 가서 부처님께 제 말을 전해 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 내 병은 날로 더해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소원으로 저는 부처님을 한번 뵙고 예배를 드렸으면 싶은데, 이 몸으로 도저히 죽림정사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저의 뜻을 부처님께 좀 사뢰어 주십시오.” 간호하던 스님은 부처님을 찾아가 박칼리의 소원을 여쭈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부처님은 그 길로 성 안에 있는 도공의 집으로 오셨다. 박칼리는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앓는 몸을 뒤척이었다. 부처님은 박칼리의 머리맡에 앉아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 말씀하셨다. “박칼리여, 그대로 누워 있거라. 일어날 것 없다. 병은 어떠냐, 음식은 무얼 먹느냐?” 박칼리는 가느다란 소리로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고통은 심하고 음식은 통 먹을 수가 없습니다. 병은 더하기만 하여 소생할 가망이 없습니다.” “박칼리여, 너는 어떤 후회되는 일이나 원통하게 생각되는 일은 없느냐?” “ 부처님이시여, 저는 적지 않은 후회와 원통하게 생각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찾아가 뵙고 예배를 드리고 싶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후회되고 원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처님은 정색을 하고 말씀하셨다. “박칼리여, 이 썩어질 몸뚱이를 보고 예배를 해서 어쩌자는 것이냐!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는 사람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아라.” 부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형체를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형체는 덧없는 것입니다.” “감각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도 덧없는 것입니다.” “박칼리여, 덧없는 존재는 괴로움이다. 괴로운 것은 주체가 없다. 또 덧없는 것에는 나와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봄으로써 내 제자들은 형체와 감각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을 싫어하고 욕심을 떠나 해탈하고 해탈의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박칼리는 지혜의 눈을 떴다. <잡아함>
4. 복짓는 사람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많은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하고 계실 때엿다. 그 자리에는 아니룻다도 있었는데 그는 설법 도중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처님은 설법이 끝난 뒤 아니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여, 너는 어째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 괴로움이 싫어 그것을 버리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는 설법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졸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니룻다는 곧 자기 허물을 뉘우치고 꿇어않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제부터는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부처님 앞에서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뜬 눈으로 계속 정진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그에게 타이르셨다. “아니룻다여, 너무 애쓰면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룻다는 전에 부처님 앞에서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타이름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이 날로 심해진 것을 보시고 부처님은 의사 자바카에게 아니룻다를 치료해 주도록 당부하셨다. 아니룻다의 증세를 살펴본 자바카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아니룻다님이 잠을 좀 자면서 눈을 쉰다면 치료할 수 있겠습니다만, 통 눈을 붙이려고 하지 않으니 큰 일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아니룻다를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여, 잠을 좀 자거라. 중생의 육신은 먹지 않으면 죽는 법이다.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고, 귀는 소리로 먹이를 삼으며, 코는 냄새로, 혀는 맛으로, 몸은 감촉으로, 생각은 현상으로 먹이를 삼는다. 그리고 여래는 열반으로 먹이를 삼는다.” 아니룻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면 열반은 무엇으로 먹이를 삼습니까?” “열반은 게으르지 않는 것으로 먹이를 삼는다.” “부처님께서는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는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차마 잘 수 없습니다.” 아니룻다의 눈은 마침내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육안을 잃어버린 아니룻다의 일상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불편하였다. 어느 날 해진 옷을 깁기 위해 바늘귀를 꿰려 하였으나 꿸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말로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은 나를 위해 바늘귀를 좀 꿰어 주었으면 좋겠네.’라고 하였다. 이때 누군가 그의 손에서 바늘과 실을 받아 해진 옷을 기워 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부처님인 것을 알고 아니룻다는 깜짝 놀랐다. “아니, 부처님께서는 그 위에 또 무슨 복을 지을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룻다여, 이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법이란, 보시와 교훈과 인욕과 설법과 중생 제도와 더 없는 바른 도를 구함이다.” 아니룻다는 말했다. “여래의 몸은 진실한 법의 몸이신데 다시 더 무슨 법을 구하려 하십니까? 여래께서는 이미 생사의 바다를 건너셨는데 더 지어야 할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 아니룻다. 네 말과 같다. 중생들이 악의 근본인 몸과 말과 생각의 행을 참으로 안다면 결코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쁜 길에 떨어진다. 나는 그들을 위해 복을 지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힘 중에서도 복의 힘은 가장 으뜸이니, 그 복의 힘으로 불도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아니룻다, 너도 이 여섯 가지 법을 얻도록 하여라. 비구들은 너와 같이 공부해야 한다.” <증일아함 구품>
5. 바다의 진리
부처님이 사밧티의 녹야원에서 오백 명의 비구들과 같이 계실 때였다. 그때 부처님은 바다를 좋아한다는 젊은이를 만나 물으셨다. “바다 속에는 무슨 신기한 것이 있기에 너희들은 그렇게 바다를 좋아하느냐?” 젊은이는 대답했다. “바다 속에는 여덟 가지 처음 보는 법이 있으므로 저희들은 거기서 즐깁니다. 첫째, 큰 바다는 매우 깊고 넓습니다. 둘째, 바다에는 신비로운 덕이 있는데 네 개의 큰 강이 각각 오백의 작은 강과 합쳐서 바다로 들어가면 그것들은 본래의 이름을 잃어버립니다. 셋째, 바다는 모두 똑같은 한맛입니다. 넷째, 드나드는 조수가 그 때를 어기지 않습니다. 다섯째, 여러 중생들이 그 속에서 삽니다. 여섯째, 바다는 어떠한 것을 받아들일지라도 비좁아지지 않습니다. 일곱째, 바다에는 진주와 같은 여러 가지 진귀한 보석이 있습니다. 여덟째, 바다에는 금모래가 있고 네 가지 보배로 된 수미산이 있습니다. 여래의 법에는 어떤 것이 있기에 비구들이 그 안에서 즐깁니까?” “내게도 여덟 가지 처음 보는 법이 있어 비구들이 그 안에서 즐기고 있다. 첫째, 내 법 안에는 계율이 갖추어져 있어 방일한 행이 없다. 그것은 저 바다처럼 매우 깊고 넓다. 둘째, 세상에는 네 가지 계급이 있지만 내 법 안에는 마치 네 개의 강이 바다에 들어가면 한맛이 되듯이 도를 배우게 되면 그들은 그전의 이름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셋째, 정해진 계율에 따라 차례를 어기지 않는다. 넷째, 내 법은 결국 똑같은 한맛이니 팔정도가 그것이다. 다섯째, 내 법은 갖가지 미묘한 법으로 가득차 잇다. 바다에 여러 중생들이 사는 것처럼 비구들은 그것을 보고 그 안에서 즐긴다. 여섯째, 바다에 온갖 보배가 있듯이 내 법에도 온갖 보배가 있다. 일곱째, 내 법 안에는 온갖 중생들이 집을 떠 머리를 깍고 법복을 입고 도를 닦아 열반에 든다. 그러나 내 법에는 더하고 덜함이 없다. 바다에 여러 강이 들어와도 더하고 덜함이 없는 것과 같다. 여덟째, 큰 바다 밑에 금모래가 깔려 있듯이 내 법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삼매가 있다. 비구들은 그것을 알고 즐기는 것이다.” 젊은이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거룩하십니다. 부처님 여래의 법 가운데 처음 보는 법들은 바다의 그것보다 백 배 천 배 뛰어나 견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인의 여덟 가지 길입니다.” 부처님은 그를 위해 차례로 법을 말씀하셨다. 보시와 계율과 천상에 나는 법을 가르치셨고, 탐욕은 더럽고 번뇌는 큰 재앙이므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열리고 의심이 풀린 것을 보시고 괴로움과 그 원인과 없앰과 없애는 길 등의 네 가지 진리를 말씀하셨다. <증일아함 팔난품>
6. 법다운 보시
라자가하에 바드리카리는 부호가 있었다. 그는 재산이 남아 주체할 수 없이 많으면서도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 남에게 조금도 베풀려고 하지 않았다. 과거에 지은 공덕을 까먹기만 하고 새로운 공덕을 쌓을 줄 몰랐다. 그는 어찌나 인색했던지 일곱 개의 문을 겹겹이 닫아 얻으려 오는 사람을 막았고, 그물을 쳐 새들이 뜰에 내려와 모이를 쪼아먹는 것까지 막았다. 어느 날 목갈라나, 카샤파, 아니룻다 들이 모여 바드리카를 교화하기로 의논하고 그의 집으로 갔다. 이때 바드리카는 자기 방에서 혼자 맛있는 떡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바리를 들고 나타난 아니룻다를 보고 놀랐다. 마음으로는 아주 못마땅했지만 아니룻다에게 남은 떡을 조금 주었다. 아니룻다가 돌아간 후에 그는 문지기를 불러 왜 사문을 들여 놓았느냐고 꾸짖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문이 굳게 잠긴 것을 보고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했다. 바드리카가 이번에는 구운 떡을 먹고 있을 때였다. 그때 불쑥 카샤파가 그 앞에 나타났다. 그는 또 하는 수 없이 먹던 떡을 조금 떼어 주었다. 카샤파가 돌아간 후에 다시 문지기를 불러 꾸짖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디로 들어왔는지 몰라 잔뜩 화가 난 그는 사문들이 요술을 부려 사람을 놀리는 것이라고 욕지거리를 했다. 그의 아내가 칫타 비구의 누이동생인데, 남편의 욕설을 듣고 말했다. “그렇게 욕설을 마세요 당신은 두 스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먼저 분은 카필라의 드로노다나왕의 아들 아니룻다 스님입니다. 그분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 제자 중에서도 천안통이 으뜸이라고 합니다. 또 한 스님은 카필라 부호의 외아들 카샤파입니다. 그분은 뛰어난 미인을 아내로 맞았다가 함께 출가하여 검소한 생활을 함으로써 부처님께 두타 제일이라고 칭찬받은 스님입니다. 그와 같은 두 스님이 우리 집에 오신 것은 다시 없는 영광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언젠가 그 이름을 들은 것 같군.” 이때 목갈라나는 쇠그물을 뚫고 공중에 뜬 채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바드리카는 놀랍고 두려워 이렇게 소리쳤다. “너는 천신이냐, 귀신이냐, 간다르바냐, 야차냐?” “천신도 아니요 귀신도 간다르바도 야차도 아니오. 나는 부처님의 제자 목갈라나이며 법을 설하기 위해 당신 앞에 나타난 것이오.” 바드리카는 그가 사문이라는 말을 듣고 보시를 청하는 거지로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요구가 있더라도 거절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목갈라나는 법을 설했다. “부처님은 법과 재물 두 가지 보시를 말씀하십니다. 정신차려 잘 들으시오. 내 이제 법의 보시를 말하리라. 부처님은 다섯 가지로 이 법보시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살아있는 목숨을 죽이지 않는 것, 둘째는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않는 것, 셋째는 남의 아내를 범하지 않는 것, 넷째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 다섯째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 이 다섯 가지가 법의 보시입니다. 당신은 한평생 이 큰 보시를 지켜야 합니다.” 바드리카는 이 다섯 가지 법보시가 아무 손해될 것 없음에 우선 마음이 놓였다. 살생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고, 자기는 부자이니 남의 것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남의 아내를 범하지 않고 거짓말을 않는 것은 좋은 일이며, 더구나 술 마시지 말라니 그것은 돈을 모으는 요긴한 방법이라 더욱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부처님은 가르침이 이런 것이라면 즐겨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목갈라나를 청해 처음으로 공양을 내었다. 공양을 마친 뒤 다시 옷을 공양하기 위해 창고에 들어가 가장 허름한 천을 고르려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손이 저절로 좋은 천으로만 옮겨져 집었다가 놓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이때 문득 목갈라나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남에게 베풀면서 마음과 싸우는 것은 어질고 착한 이로서는 차마 못할 일, 보시란 원래 싸움이 아니니 당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시오.” 바드리카는 이 소리를 듣자 자기 마음이 환히 드러나 보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좋은 천을 가져다 목갈라나에게 공양했다. 목갈라나는 옷감을 받고 그를 위해 다시 보시의 공덕에 대한 법을 설했다. 설법을 들은 바드리카는 비로소 마음의 눈이 띄어 기뻐하면서 한평생 부처님의 신도가 되기를 맹세했다. <증일아함 성문품>
7. 피할 수 없는 죽음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어느 날 파세나디왕은 나라 일로 성 밖에 나가 있었다. 그 때 왕의 어머니는 백 살에 가까운 나이로 오래 전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불행히도 아이 나가고 없는 사이에 돌아가셨다. 지혜로운 신하 불사밀은 효성스런 왕이 이 불행한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슬퍼할까 염려한 끝에 어떤 방편을 써서라도 왕의 슬픔을 덜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백 마리의 코끼리와 말과 수레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수많은 보물과 기녀들을 실은 뒤 만장을 앞세워 풍악을 잡히면서 상여를 둘러싸고 성 밖으로 나갔다. 왕의 일행이 돌아오는 도중에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왕은 호화로운 상여를 보고 마중 나온 불사밀에게 물었다. “저것은 어떤 사람의 장례 행렬인가?” “성 안에 사는 어떤 부잣집 어머니가 돌아가셨답니다.” 왕은 다시 물었다. “저 코끼리와 말과 수레는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그것들은 염라왕에게 갖다 바치고 죽은 어머니의 목숨을 대신하려고 한답니다.” 왕은 웃으면서 말했다. “어리석은 짓이다. 목숨이란 멈추게 할 수도 없지만 대신할 수도 없는 것. 한번 악어의 입에 들어가면 구해낼 수 없듯이, 염라왕의 손아귀에 들면 죽음은 면할 수 없다.” “그러면 여기 오백 명의 기녀들로 죽은 목숨을 대신 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녀도 보물도 다 쓸데없는 짓이다.” “그러면 바라문의 주술과 덕이 높은 사문의 설법으로 구원하겠다고 합니다.” 왕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한번 악어 입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것, 생이 있는데 어찌 죽음이 없겠는가. 부처님께서도 한번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거늘.” 이때 불사밀은 왕 앞에 엎드려 말했다. “대왕님,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생명 있는 것은 반드시 다 죽는 법입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태후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왕은 한참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착하구나. 불사밀이여, 그대는 미묘한 방편으로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구나. 그대는 참으로 좋은 방편을 알고 있다.” 파세나디왕은 성으로 들어가 여러 가지 향과 꽃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께 공양하고 나서 부처님이 계신 기원정사로 수레를 몰았다. 전에 없이 한낮에 찾아온 왕을 보고 부처님이 물으셨다. “이 대낮에 웬 일이오?” “부처님 저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백 살에 가까운 어머님은 매우 노쇠했지만 저는 한결같이 공경해왔습니다. 만약 이 왕의 자리로 어머님의 죽음과 바꿀 수 있다면, 저는 왕위뿐 아니라 거기에 따른 말과 수레와 보물과 이 나라까지도 내놓겠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살아 있는 모든 목숨은 반드시 죽는 법입니다. 모든 것은 바뀌고 변하는 것 아무리 변하지 않게 하려 해도 그렇게 될 수는 없소, 마치 질그릇은 그대로 구운 것이건 약을 발라 구운 것이건, 언젠가 한번은 부서지고 마는 것과 같소. 네 가지 두려움이 몸에 닥치면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것이오. 그 네 가지란, 늙음과 질병과 죽음과 무상이오. 이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아낼 수 없소. 마치 큰 산이 무너져 사방에 덮쳐 누르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소. 견고하지 못한 것은 아예 믿을 것이 못되오. 그러므로 법으로 다스려 교화하고 법이 아닌 것을 쓰지 마시오. 법으로 다스려 교화하면 그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 천상에 태어나지만, 법 아닌 것으로 다스리면 죽은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오.” 왕은 부처님께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나니 여러 가지 슬품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나라 일이 많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파세나디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물러갔다. <증일아함 사억단품>
8. 강물에 떠내려가는 통나무처럼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마가다나라에 머무르면서 많은 비구들과 함께 강변으로 나가셨다. 때마침 강 한가운데 큰 통나무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저기 강물에 떠내려가는 통나무를 보아라. 만일 나무가 이쪽 기슭이나 저쪽 기슭에 닿지 않고 중간에 가라앉지도 않고, 섬에 얹혀지지도 않으며, 사람에게 건져지거나 사람 아닌 것에 잡히지도 않으며, 물을 따라 돌아오거나 물 가운데서 썩지 않는다면, 저 나무는 결국 바다로 들어가 머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강물은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너희들도 그와 같아서 만일 도의 강물 위에서 이쪽 기슭이나 저쪽 기슭에 닿지 않고, 중간에 가라앉거나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에 잡히지 않고, 물을 따라 돌아오거나 썩지 않는다면, 열반의 바다에 들어가 머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선정은 반드시 열반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때 난다라는 소치는 사람이 멀리서 이 말씀을 듣고 부처님께 와서 여쭈었다. “부처님, 저도 지금부터 그렇게 노력한다면 열반에 이르게 됩니까?” “물론 그렇다. 누구든지 그와 같이 하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저도 사문이 되어 도 안에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네가 맡아 있는 그 소를 주인에게 돌려준 뒤에라야 사문이 될 수 있다.” “이 소는 집이 있는 송아지를 생각하지 때문에 혼자서도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제가 사문이 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 소는 혼자 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네가 끌고 가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자 난다는 소를 돌려주고 와서 사문이 되었다. 사문이 된 난다는 부처님께 또 물었다. “부처님, 양쪽 언덕은 무엇이며, 중간에 잠기고 섬에 얹히며,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에 잡힌다는 것은 무엇이며, 물을 따라 돌아오고 썩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이쪽 기슭이란 육신을 말하고, 저쪽 기슭이란 육신이 없어짐을 말한다. 중간에 가라앉음은 욕락에 빠지는 일이고, 섬에 얹힌다는 것은 교만을 가리킨다. 사람에게 잡힌다는 것은 비구가 재가신도와 사귀어 세속의 정을 같이 함으로써 도 닦는 마음을 타락케 함이고, 사람 아닌 것에 잡힌다는 것은 비구가 천상에 나기 위해 수행하되 ‘이 계행과 이 고행에 의해 천상에 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을 따라 돌아옴이란 그릇된 의심이고, 썩는다는 것은 비구들이 성질이 악하고 계를 지키지 않으며, 착한 일에 용감하지 못하고 자기 허물을 덮어 높으며, 청정한 수행자가 아니면서도 청정한 수행자인 체하는 것을 말한다.” <증일아함 마혈천자품>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