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3. 대림절 첫 번째 주일예배설교
시편 130편 1~8절
보다 더 기다리나니
■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헷갈리시죠? 무엇을 계속 보다가 더 기다린다는 것인지, 누구보다 더 기다린다는 것인지, 헷갈리시죠? 후자입니다. 이 기다림을 누구보다 더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6절에서 왔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파수꾼은 보초병입니다. 특히 야간 근무를 서는 보초병은 아침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적의 침투가 주로 밤에 있기에 밤에 서는 보초는 그 긴장감이 매우 심합니다. 그렇기에 어서 아침이 되고, 교대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바로 이러한 야간 보초병이 아침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보다 시편 기자가 더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더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것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시편 기자가 간절히 기다린 것은 8절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무엇인가요? “여호와의 속량”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시고, 해방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를 기다린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여호와의 속량을 기다린 것일까요? 다른 나라에 식민국가가 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벌로,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리신 조치였습니다. 결국, 이 고통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고난/고통에 대한 하소연은 가능하지만 원망은 옳지 않았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더욱 옳지 않았습니다. 표현이 거칩니다만, 고통/고난의 이유는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1~4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편 기자는 자업자득을 알았고, 결자해지(結者解之)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지은 죄를 두고, 그래서 받게 된 벌을 두고 하나님 앞에 누가 감히 맞설 수 있느냐 고백하며 부르짖은 것이 오늘 시편 기도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주님만을 경외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참으로 시편 기자의 태도와 고백은 옳습니다. 그리고 이 간청에서 보이는 태도 또한 옳습니다. 그 태도는 <기다림>이었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분명 사유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유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간청 외에는 난동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간절함으로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사유의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가 옳게 취한 태도는 <기다림>이었습니다. 간절했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을 기다리듯, 하나님의 사유하시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 때도 바로 벌을 내리시지 않을 때가 있듯, 사유하심도 바로 하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운동입니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선의 작동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폭력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행복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원리를 바르게 아는 시편 기자는 <거룩한 기다림>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기다림에는 보장된 장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약속>이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약속, 해방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기다림은 지치거나 포기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시간이 길어져도 말입니다. 그렇기에 5절입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이는 약속을 주셨기에 이를 믿고 기다리고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편 기자의 기다림은 언제까지든 기다릴 수 있다는 건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6절을 단지 ‘기다림의 간절함’만으로 읽기보다는, ‘기다림의 여유’로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물론 이 기다림은 간절함입니다. 야간 보초병이 아침을 기다리듯 주님이 속량해주실 시간을 기다리는 간절함입니다. 그렇지만 구원과 해방의 약속을 붙잡고 기다리는 것이니 여유입니다. 당연히 한 시라도 빨리 구원해주시고 해방을 주시면 좋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하나님의 시간 행위는, 기다리는 동안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7절입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속량하심이 인자하심이고 풍성한 속량이시지만, 속량을 받기까지 기다릴 수 있는 그 시간 동안, 인자와 풍성함을 베푸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거룩한 기다림>이자 <견딜만한 기다림>이 됩니다.
■ 바로 이 기다림의 태도와 행위가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필요한 태도요 행위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앞두고 4주에 걸쳐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바로 이 기다림에 시편 130편을 통해 보여준 시편 기자의 기다림의 모습을 배우고 행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구원과 해방에의 간절함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수도 없습니다. 영혼의 구원은 물론이고 육체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이들이 악으로부터의 해방되고 죄로부터의 자유를 얻도록 간구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둘째는, 간절함의 정도가 야간 보초병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님을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구원과 해방이 절실하다면, 이 모든 것을 막는 죄악과 구조적 불의에 맞서야 합니다. 그리고 전쟁을 부추기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 ‘아니요’라고 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시간표를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의 말씀처럼,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셨던 것처럼, 때가 차면 하나님의 움직이심이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일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룩한 소원에 응답하시는 움직이심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움직이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결론은 늘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결론은 종말의 그 날까지 ‘진행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의 끝이 끝이 아니듯, 이 사건도 아직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그 어떤 것도 아직 끝이 아니기에, 우리는 지금 부족해 보이는 것에 불만을 하거나 좌절할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아직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끝은 모든 것이 영화롭게 되는 그 날입니다.
바로 그날의 시작을 주님의 성탄으로 계시하신 것이고, 바로 그날의 끝을 주님의 재림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성탄과 재림의 의미를 동시에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 바라기는 대림절이 시작되는 오늘, 12월 첫 번째 주일부터 이 기다림의 거룩한 의미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욱이 이 ‘거룩한 기다림’의 태도와 행위가 대림절 이후에도 일상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주님의 구원과 해방을 그 누구보다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