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인생
아침에 출근하는데 라지오에서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
젊어서 일본이나 유럽 영화를 주로 봤다. 그들 나라에서 만든 영화가 슬픈 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유트브가 발달하고부터는 그들 나라 영화를 끊었다. 유트브를 통해 조선영화만 봤다. 조선영화가 진짜 슬펐다. 조선영화에 비하면 일본이나 유럽영화는 밋밋했다. 조선영화라고 해서 다 보는 건 아니다. 슬프기는커녕 웃겨서 죽을 뻔했던 영화도 있었기 때문이다. 슬프기로만 치자면 세상에서 조선영화를 따라올 영화는 없다.
난 슬픈 게 좋다. 노래나 영화도 슬픈 게 좋다. 사람도 아프고 슬픈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갔다. 내가 쓰는 소설도 슬프다.
슬픔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라는 노래가 있다. 신나는 곡인데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지금도 눈물을 흘린다. 내가 20대 때 소개팅 받아 사귄 여친에게 이별을 통보받는 순간 다방에서 흘러나온 노래였다. 그래서 이 노래가 슬프다. 참, 근데 헤어지자는 이유가 뭐였는지 아냐. 사실대로 말하겠다.
나에게 변변한 옷이 없어서 맨날 교련복 바지만 입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차인 뒤로도 졸업할 때까지 교련복 바지만 입고 살았다. 내가 채였던 그 다방 상호를 아직도 기억한다.
'한서다방'
근데 이별을 통고받은 그 다방 커핏값을 내가 냈을 것 같냐? 더 슬픈 건 뭔지 아냐. 정작 그 여친 이름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현실 생활에서 실제 있었던 사실을 씨앗 삼아 소설을 썼다. 내용이나 전개는 실제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지만 계기는 실재한 사실이었다.
오래 전에 소설을 올릴 때 그 계기가 된 실재한 사실을 같이 적어둘까 생각했었다. 의미가 없는 짓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실재한 사실이 소설보다 더 슬펐기 때문이었다. 소설 자체가 겁나 슬픈데 실재한 사실까지 같이 적어놓으면 읽는 사람들은 어쩌라고. 슬픔을 견뎌내지 못 하게 될 것이다. 너무 슬퍼서 사회가 굴러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공된 소설만 올렸다.
내 인생은 슬픔으로 점철되었다.
가끔 할멈을 보면서 미소짓기는 했다. 그러나 할멈을 바라보면서 짓는 미소는 황당해서 나온 것이거나 목적의식적으로 하는 짓일 뿐이었다.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 누구든 나를 슬픔을 잠시 잊고 웃게 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