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9월 1일,
KAL 007기 소련기에 피격, 탑승자 269명 전원 사망
1983년 9월 1일 새벽3시 26분 뉴욕발 서울행 KAL KE 007(기종 보잉 747)가 사할린 인접 해역 1만m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 수호이 15기가 발사한 공대공 미사일 2발에 의해 격추 당했다. 승객 246명과
승무원 23명 등 총 269명 전원이 사망케 한 사건으로 전세계를 경악시켰다. 당시 KAL기는
무려 5시간이나 예정항로보다 북쪽으로 이탈해비행 중이었으며 이 후 수색작업에서 단 한 구의 시신도
회수하지 못했다.
희생자를 국적별로 보면 오스트레일리아 2명, 캐나다 8명, 도미니카공화국 1명, 홍콩 12명, 인도1명, 이란
1명, 일본 28명, 대한민국 105명, 말레지아 1명, 필리핀 16명, 스웨덴 1명, 대만 23명, 태국 5명, 베트남
1명, 영국 2명, 미국 62명 이었다.
격추 후 소련 측은 미국이 감청한 소련군간의 교신 내역을 공개하기까지 격추 사실을 부인했다. 결국
소련이 격추 사실을 부인하자 미국이 감청된 녹음을 공개하였고 소련은 이를 통해 자국의 통신망이
감청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소련은 사고의 책임을 "미국이 대한항공
보잉기를 소련 공해를 침범하도록 보냄으로써 의식적으로 승객들을 죽음의 위험에 처하게 했다"며 사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미국에게 전가했다.
한국 정부는 이 사건을 국제평화에 대한 중대한 위협행위로 여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요청, 소련의
비인도적 만행을 규탄하고 보상 및 관련자 처벌을 내용으로 한 5개항을 제시하였다.
이어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특별이사회가 열려 한국이 제시한 요구조건을
소련이 이행
하도록 촉구하였다. 서방국가들도 소련에 대해 여객기 취항규제, 운송협정 폐기, 전략물자 금수 등의
조치를 취하였고, 미국은 소련항공사와 거래를 중지하고 소련 아에로플로트항공사의 미국 사무실을
폐쇄하는 등 강경조치를 취하였다.
1983년 9월 7일 서울 운동장에서 3부 요인, 사회단체, 시민학생 등 10만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추락 희생된 KAL여객기 탑승자 합동 위령제
위령제에 이어 규탄대회가 열렸다. 비무장 민간여객기에 무차별 공격을 한 소련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4천만 겨레와 전 인류의 이름으로 규탄하며 소련이 저지른 인간존엄과 세계평화에 대한
도전을 평화와 질서를 존중하는 모든 국가와 국제기구가 신속하고 단호하게 응징할 것을 촉구한다
등 5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당시 심각한 냉전상태였다. 미국의 보수적인 로널드 레이건이 취임(1981년 ~1989년)
하고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1979년~1989년)을 하는 중이었다. 당시 두 나라는 사할린 상공에서 첩보
전을 펼치고 있었다. 소련은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려고 준비 중이었고, 미국은 이것에
대한 정보를 캐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건은 발발하였고 그래서 1983년 가을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 중에서도
가장 '차가웠던' 시기가 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미국이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Ⅱ과 지상발사 순항 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했고, 나토는
'에이블 아처 83'이라고 불리는 군사훈련을 진행함으로써 미국과 소련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소련은 이를 훈련을 가장한 실제 공격일지 모른다고 우려해 동독과 폴란드 공군에 최고 경계태세를
유지하라고 명령하고 정찰 비행도 대폭 늘렸다. 또 국가안보위원회(KGB)와 군 정보기관에 각국에서
핵전쟁 준비 신호가 있는지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최대의 의문점은 1) 왜 당시 KAL KE 007은 5시간이나 예정된 항로를 벗어나 운항한 것인 지와 2)
소련은 민간항공인지를 인지하고도 폭격한 것인지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풀어줄 열쇠는 바로
항공기의 블랙박스였는데 소련은 이를 사고해역에서 즉시 회수하고도 10년이 지나도록 돌려주지 않았다.
본 사건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978년 4월 21일에도 이미 대한항공 소속 여객기가 소련영공을 침범하여
무르만스크 인근에 강제 불시착 당한 적이 있다(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이러한 전례는 소련
측이 서둘러 대응하게 하고, 또 블랙박스를 넘겨 주는데 주저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해빙기를 맞은 한국과 소련의 관계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소련의 참가에
이어 1990년 수교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1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때
문제의 블랙박스가 한국 정부에 전달되었다. 하지만 상당부분 빠져 있고 변조된 흔적인 있는 불완전한
상태였다. 이후 블랙박스는 ICAO에 제출됐고 남은 유품은 유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ICAO는 이
블랙박스를 제3국이었던 프랑스의 항공당국에 제출하여 분석했고 그 결과를 기본으로 하여 6개월 후 최종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의 따르면 사고는 한국 항공기 승무원의 실수와 소련 측의 착오로 인한 것이라고 하였고 이는
기존 결론들을 번복한 것이었다.
“비행기가 5시간이나 항로를 벗어난 상황이 지속되긴 했지만, 이 검토 결과, 승무원이 항로를 벗어난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획득한 것은 아니다”라고 이 보고서는 설명한다.
또한, 소련 측의 혼동으로 인해 참사가 일어났다는 점도 인정했다. “RC-135라는 미국의 첩보 비행기가
(사고를 당한) 한국 비행기와 같은 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소련을 향해 날고 있는 대한항공기를
RC-135라고 생각한 것이다”라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문제의 RC-135는 보잉기와 유사하긴 하지만,
자국 영공을 침투한 비행기 정체에 대한 확신이 선 것도 아니었는데, “소련은 철저한 확인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라고 보고서는 결론지었다. 이에 더해, 소련 측이 강력히
주장했던 것처럼 사고를 당한 비행기의 승무원이 첩보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도 재차 밝혔다.
결론적으로 ‘KAL기는 항법 실수를 인식하지 못한 채 미국의 정찰기로 오인 받아 격추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종사가 장시간 실수를 인식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는 밝혀지지 않았다.
KAL을 격추한 전투기 조종사인 오시포비치와의 인터뷰 내용 중에도 오시포비치는 당시 007편 꼬리날
개에서 민항기 항법등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찰기인 줄 알고 과감하게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에선 일반 여객기에 여러 가지 장비들을 달아 군용 정찰기로 사용하기도 하고,
또 정찰기들을 민항기로 위장시키는 경우도 있었기에 격추 당시 민항기로 위장한 미국 정찰기라
생각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고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관제소로부터 KAL기를 국제 관례에 따라 유도 착륙시키라는 명령을 받고서 여객기에 300m까지 근접,
KAL 007편과 같은 고도로 날아가면서 전투기 날개 쪽에 달린 경고등을 깜박거리며 수 차례 유도착륙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KAL 007편은 비행을 계속했으며, 통상탄(당시 조명탄은 장전하지 않았다)을
4차례 발사했는데도 여객기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도를 높이자 관제소로부터 경고 사격
후 격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격추당한 KAL기로 1982년 홍통 카이탁 국제공항에서 촬영된 사진. 사건 이후 대한항공은
007을 영구 결번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