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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에 의하면 고구려(한-당)시대의 冀州는 현 섬서성과 산서성 남서부를 지칭했으나 후대사가의 의도적 혹은 오류적 해석으로 인해 당나라시대의 기주가 이미 후대인 고려시대의 기주 지역인 하북중부로 올라가 그곳에서 지명 해석을 한다.(운영자 주)
신교본사기삼가주新校本史記三家注 / 신교본사기新校本史記 / 열전列傳 / 권卷 六十七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第七
[원문]
孔子既沒,子夏居西河[一]教授,爲魏文侯師[二].其子死,哭之失明.
공자(孔子)가 이미 죽은 후에, 자하(子夏)는 위문후(魏文侯)의 스승이 되어 서하(西河)에서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 아들이 죽어서 곡을 하다 실명하였다.
[注1.] 서하(西河)
○ 索隱在河東郡之西界,蓋近龍門. 劉氏云:「今同州河西縣有子夏石室學堂也.」
『사기색은(史記索隱)』 에 이르길, 하동군(河東郡)의 서계(西界)이고 대략 용문(龍門)에 가깝다.
류씨(劉氏)가 이르길, 「현 동주(同州) 하서현(河西縣)에 자하(子夏) 석실학당(石室學堂)이 있다.」고 하였다.
○ 正義西河郡,今汾州也.爾雅云:「兩河閒曰冀州.」禮記云:「自東河至於西河.」河東故號龍門河爲西河,漢因爲西河郡,汾州也,子夏所教處.
『사기정의(史記正義)』 에 서하군(西河郡)은 현재의 분주(汾州)이다.
『이아(爾雅)』에 이르길, 「두 하(河)의 사이를 기주(冀州)라 한다.」고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길, 「동하(東河)로부터 서하(西河)에까지 이른다. 」고 하였다.
하동(河東)의 옛 호칭인 용문하(龍門河)는 한(漢)이 서하군(西河郡)이라 한데서 기인하여 서하(西河)가 되었으며 분주(汾州)이고 자하(子夏)가 가르침을 편 곳이다.
○ 括地志云:「謁泉山一名隱泉山,在汾州隰城縣北四十里.注水經云『其山崖壁五,崖半有一石室,去地五十丈,頂上平地十許頃.隨國集記云此爲子夏石室,退老西河居此』.有卜商神祠,今見在.」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길, 「알천산(謁泉山)은 일명 은천산(隱泉山)으로 분주(汾州) 습성현(隰城縣) 북쪽 사십리에 있다. 수경(水經)에서 주석하기를, 『그 산은 절벽이 5곳이며 절벽 중간에 석실(石室)이 하나 있는데 지면으로부터 거리가 50장丈(1丈=10尺)이며 정상은 평지인데 10여 경(頃=이랑)이다. 수국집기(隨國集記)에 이르길, 이곳에 자하(子夏)가 석실을 세워 늙어 물러나자 서하西河 이곳에 거주하였다. 』고 하였다. 점(卜)을 헤아리고 신사(神祠)에 제사내는 일이 많은데 현재도 볼수있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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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기삼가주史記三家註』를 보면 역시, 서하(西河)의 위치에 대하여 두가지 견해가 상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사기정의(史記正義)』의 주석된 내용으로 수록되었지만 『이아(爾雅)』와 『예기(禮記)』는 늦어도 모두 한대(漢代)에 저술된 것으로 시기적으로 당(唐)나라때는 물론 남북조시대와 한대(漢代)에도 공히 적용될 수 있고 서술된 내용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기(禮記)』는 천리(千里)를 운운한 것로 보아 청대까지 계속된 주석서 판본들에서 가필이 있었거나 당대(唐代)의 지리적 인식을 많이 담았다고 보이지만요.
이제, 사료를 용문하(龍門河) 즉 서하(西河)의 위치를 기준으로 다시 나누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용문하(龍門河)가 있는 서하(西河)를 동주(同州)로 규정한 기록
[한대(漢代)와 당(唐)나라 측천무후때 사마정(司馬貞)의 사료]
『사기색은(史記索隱)』 ○ 索隱在河東郡之西界,蓋近龍門. 劉氏云:「今同州河西縣有子夏石室學堂也.」
『색은(索隱)』 에 이르길, 하동군(河東郡)의 서계(西界)이고 대략 용문(龍門)에 가깝다.
류씨(劉氏)가 이르길, 「현 동주(同州) 하서현(河西縣)에 자하(子夏) 석실학당(石室學堂)이 있다.」고 하였다.
『이아(爾雅)』 ○ 爾雅云:「兩河閒曰冀州.」 「두 하(河)의 사이를 기주(冀州)라 한다.」
『예기(禮記)』 ○ 禮記云:「自東河至於西河.」 「동하(東河)로부터 서하(西河)에까지 이른다. 」
둘째, 용문하(龍門河)가 있는 서하(西河)를 분주(汾州)로 규정한 기록
[당(唐) 현종(玄宗)때 이태李泰의 지리서와 당(唐) 현종(玄宗) 때 장수절(張守節)의 사료]
『사기정의(史記正義)』 ○ 正義西河郡,今汾州也. 河東故號龍門河爲西河,漢因爲西河郡,汾州也,子夏所教處.
『정의(正義)』 에 서하군(西河郡)은 현재의 분주(汾州)이다.
하동(河東)의 옛 호칭인 용문하(龍門河)는 한(漢)이 서하군(西河郡)이라 한데서 유래하여 서하(西河)가 되었으며
분주(汾州)이고 자하(子夏)가 가르침을 편 곳이다.
『이아(爾雅)』 ○ 爾雅云:「兩河閒曰冀州.」 「두 하(河)의 사이를 기주(冀州)라 한다.」
『예기(禮記)』 ○ 禮記云:「自東河至於西河.」 「동하(東河)로부터 서하(西河)에까지 이른다. 」
『괄지지(括地志)』 ○ 括地志云:「謁泉山一名隱泉山,在汾州隰城縣北四十里.注水經云『其山崖壁五,崖半有一石室,去地五十丈, 頂上平地十許頃.隨國集記云此爲子夏石室,退老西河居此』.有卜商神祠,今見在.」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길, 「알천산(謁泉山)은 일명 은천산(隱泉山)으로 분주(汾州) 습성현(隰城縣) 북쪽 사십리에 있다. 수경(水經)에서 주석하기를,『그 산은 절벽이 5곳이며 절벽 중간에 석실(石室)이 하나 있는데 지면으로부터 거리가 50장丈 (1丈=10尺)이며 정상은 평지인데 10여 경(頃=이랑)이다.
수국집기(隨國集記)에 이르길, 이곳에 자하(子夏)가 석실을 세워 늙어 물러나자 서하西河 이곳에 거주하였다. 』고 하였다. 점(卜)을 헤아리고 신사(神祠)에 제사내는 일이 많은데 현재도 볼수있다. 」고 하였다.
이와같이, 뚜렷이 두 곳으로 위치가 갈림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아(爾雅)』와 『예기(禮記)』의 기록인데 ‘양하(兩河)의 사이를 기주(冀州)라 한다는 이아(爾雅)와 이를 확인하는 동하(東河)로부터 서하(西河)까지 이르는 지역을 기주(冀州)라 한다고 한 예기(禮記)’ 의 언급입니다.
이는, 고대의 기주(冀州)를 현재의 하북성으로 비정하는 현대 학자들의 어리석음을 통렬히 부정하는 것입입니다.
『이아(爾雅)』와 『예기(禮記)』는 춘추전국시대때의 기록이거나 그 기록들을 기저로 함을 감안할 때 이는 최소한 춘추전국시대와 전한(前漢)때의 기주(冀州)는 동하(東河)로부터 서하(西河)의 두 하수(河水) 사이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동쪽이 발해만으로 하(河)가 아닌 바다가 있는 하북성은 결코 기주(冀州)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두 번째의 기록들에서 서하(西河)로 비정된 분주(汾州)는 산서성 동남단의 평야지대로 기존의 익히 잘 알려진 지역인데 습성현(隰城縣), 개휴현(介休縣), 평륙현(平遙縣)등이 위치한다고 사기(史記) 주석에서 언급됩니다.
또한, 한서지리지(漢書 地理志)에는 서하군(西河郡)의 속현(屬縣)들로서 부창富昌,추우騶虞,곡택鵠澤,평정平定,홍문鴻門,린藺,선무宣武,서도石,평륙平陸,음산陰山,박릉博陵,염관鹽官등 36縣이 속한다 하였으니 여기서의 용문하(龍門河)는 현 황하(黃河)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기록의 서하(西河)는 어디일까요?
첫 번째의 기록은 하동군(河東郡)의 서계(西界)가 서하(西河)로 동주(同州) 하서현(河西縣)을 들어 서하(西河)땅이라 하였습니다.
동주(同州)는 섬서성의 옛 지명으로 현 대려현(大荔縣) 치소일대입니다.
황하(黃河) 서쪽인 섬서성이 동주(同州)이니 서하(西河)땅은 동주(同州)가 포함되야하므로 결국 황하(黃河) 이서(以西)이고 이로써, 하(河), 즉 용문하(龍門河) 역시 서진되어 그 상류 수원이 연안시(延安市)를 흐르는 락하(洛河)가 용문하(龍門河)가 됩니다.
이는 북송(北宋)의 송민구(宋 敏求,1019년-1079년)가 편찬한 『장안지(長安志)』에 삽입된 장안지(長安志)의 봉원주현지도(奉元州縣地圖)의 동주(同州)위치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또한, 이전에 언급한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의 한서지리지(漢書地理地)를 베낀 우禹의 9주 치수기록의 옹주(雍州)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 集解孔安國曰:「西距黑水,東據河.龍門之河在冀州西.」
『사기집해(史記集解)』에 공안국(孔安國)이 이르길, 「서(西)로는 흑수(黑水)에 이르며 동(東)으로는 하(河)가 막아서 있다. 용문(龍門)의 하수(河水)는 기주(冀州)서쪽에 있다.」
『이아(爾雅)』,『예기(禮記)』기록과 함께 비교하면, 역시 양하(兩河)중 서하(西河)는 용문하(龍門河)인 락하(洛河)를 동하(東河)는 현 황하(黃河)를 이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래 요(堯),순(舜)의 부락연맹체시기부터 최소한 진(秦)나라때까지는 사기(史記)의 기록에 나온 서하(西河), 용문하(龍門河)는 락하(洛河)이고 동주(同州)는 하동군(河東郡)이 되고 락하(洛河)이서지역에 진혜공(晉惠公) 이오(夷吾)가 진秦 목공(繆公)에 패하여 바친 하서(河西) 8성(八城)이 위치한 것이라 볼 것입니다.
○ 爾雅云:「兩河閒曰冀州.」 『이아(爾雅)』에 이르길, 「두 하(河)의 사이를 기주(冀州)라 한다.」
○ 禮記云:「自東河至於西河.」 『예기(禮記)』에 이르길, 「동하(東河)로부터 서하(西河)에까지 이른다. 」
《 결언 》
결론적으로, 서하(西河)란 한(漢)이 설치한 서하군(西河郡)에서 비롯한 명칭으로 원래 춘추전국시대 사용된 지명이 아님을 알았고 한(漢)이 지명을 바꾸기 이전의 원래 하(河)의 옛 이름은 용문하(龍門河)이고 용문(龍門) 또한 서하(西河)땅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용문하(龍門河), 즉 하(河)는 황하(黃河)만을 고려하여왔으나 현재의 그 상류 수원이 연안시(延安市)를 흐르는 섬서 동북의 락하(洛河)로 볼 수 있으며 한(漢)나라는 이를 서하(西河)로도 불렀고 원래 진한(秦漢)이전의 기주(冀州)는 서쪽으로는 용문(龍門)이 위치한 서하(西河). 즉 현 락하(洛河)로부터 동하(東河)인 현 황하(黃河)사이의 땅을 이른 것이라 생각됩니다.
덧붙여,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의 석실학당(石室學堂)이 동주(同州)에도 나오고 분주(汾州)에도 나온 것은 지명변조가 서에서 동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갔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를, 요약하면 간략히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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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漢代이전) | 지명(漢代이후) | 지명(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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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하(龍門河) | 하(河) | 락하(洛河)
용문(龍門) | 서하속지(西河屬地) | 락하(洛河) 하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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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주석에 인용된 사료들
『사기집해(史記集解)』 : 남조(南朝) 송(宋·420~479)나라 배인(裴駰)의 사기 주석서, 모두 80卷
『사기색은(史記索隱)』 : 당(唐)나라 측천무후때 사마정(司馬貞)의 사기 주석서인 모두 30卷
『사기정의(史記正義)』 : 당(唐) 현종(玄宗) 개원년간(713~741) 장수절(張守節)의 사기 주석서, 모두 30卷
『괄지지(括地志)』 :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넷째 아들 이태李泰가 정관 16년(642년) 주찬해 완성해 바친 지리서. 모두 550卷
『이아(爾雅)』 : 저자및 편찬연대미상이나 늦어도 한대(漢代)에 완성되었음.
서한(西漢) 양웅(揚雄)의 〈방언方言〉과 양(梁) 유협(劉勰)의 〈문심조룡 文心雕龍〉은 공자의 문인이 지었다 함.
위(魏) 장읍(張揖)은 〈진광아표進廣雅表〉에서 주공(周公)을 저자라 함.
송(宋) 구양수(歐陽脩)와 섭몽득(葉夢得)은 한대(漢代) 학자들이 집록(集錄)하였다 함.
『예기(禮記)』 : 예(禮)관한 경전을 보완(補完)·주석(註釋)한 것으로 유향(劉向)이 정리한 《예기(禮記)》 131편등 여러 문헌을 종합하여
후한(後漢) 대덕(戴德)이 정리한 85편을 《대대예기(大戴禮記)》, 대성(戴聖)이 정리한 49편을 《소대예기(小戴禮記)》라
말하며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이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함께 《소대예기》에 주석을 붙여 삼례(三禮)라고
하였고 이로서 《소대예기》를 《예기》라 부르게 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많은 주석서들이 이어져 나왔다.
솟대님의 글을 coo2.net에서 옮기고 운영자가 도표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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