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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 네번째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까? 예수님은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에 대하여,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허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막힌 담을 헐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수많은 담이 존재합니다. 보이는 장벽도 있고 보이지 않는 장벽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영역을 표시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담을 쌓습니다. 들짐승이나 다른 사람의 침입을 막고, 자신과 자신의 삶의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서 담을 쌓는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와 민족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국경이라고 하는 장벽이 있고, 반일 감정, 반중 정서와 같은 심리적인 장벽도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성탄절에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에 벌어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지난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점령한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저지른 대학살 테러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마스는 1400여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살해하고 240명이 넘는 시민들을 납치했습니다. 하마스 대원들이 평범한 민간인들을 살해하고 납치하는 장면은 영상에 담겨 그대로 공개되었습니다. 하마스를 규탄하는 여론이 전 세계에서 비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대가 하마스의 거점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완전 봉쇄하고 보복 공격을 시작한 지 약 80일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팔레스틴 지역에서만 어린이 8천명을 포함하여 2만여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이 더 이상의 공격을 멈추고 휴전할 것을 권고하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인질 석방과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 위협 제거라고 하는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을 태세입니다.
팔레스틴 땅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 지역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002년부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영토와 팔레스틴 자치지구가 맞닿은 경계선에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구간은 콘크리트 기초위에 세워진 5미터 정도 높이의 철조망으로 되어 있고, 일부 중요한 구간은 그 높이가 8미터에 달하는 콘크리트 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과격분자의 테러로부터 이스라엘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합니다. '테러가 없었다면 장벽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건설 동기가 무엇이든 결국 장벽은 특정 지역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다른 지역과의 교류를 단절시킵니다. 이번 전쟁이 시작되고 이스라엘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봉쇄된 가자 지구는 식품이나 의약품을 비롯해서 모든 자원의 공급히 완전히 끊겨서 더욱 비참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 막힌 담이 무너지는 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비로소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산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은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제일 첫 번째 구역에 들어서면, 이 구역은 이방인들도 출입할 수 있는 곳으로 이방인의 뜰이라고 부릅니다. 그다음 구역은 여인들의 출입이 허락된 여인들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 안쪽으로 세 번째 구역은 유대인 남성들만 들어갈 수 있는 구역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제일 안쪽 구역은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첫째 구역인 이방인의 뜰까지만 출입이 허용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도록 거기에는 담이 있었고, 그 담에는 ‘이방인은 이곳에서 더 이상 들어가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담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인 유대인과 비유대인, 즉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의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이라고 믿었습니다. 소위 선민의식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자신들만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받았고 그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들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라고 하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우월감은 선민의식과 함께 다른 이방민족에 대한 편견과 독선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죄인지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율법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면서 회개하고 반성하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을 세워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을 알고 그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무시하고 경멸한 것입니다.
헬라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헬라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습니다. 자신들은 철학과 예술을 발전시킨 문명인이고, 그 밖에 다른 민족들은 모두가 다 야만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명인이라고 하는 우월감을 가지고 야만인에 불과한 이방인들은 경멸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헬라인과 다른 민족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담을 높이 쌓고 살아간 것입니다. 이런 형편이고 보니,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며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신들만이 우월하다고 믿는 유대인과, 스스로 문명인이고 교양인임을 자부하며 다른 민족을 다 야만이라고 폄훼하는 헬라인들이 서로 하나가 되고 화목하게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를 읽었습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에 속하는 지중해의 항구도시로서,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무역항이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은 오랜 기간을 헬라의 지배를 받았고 헬라 문화권에 속하였는데, 바울은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에베소교회는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방인들이 중심이 된 이방인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기 이전, 그때 너희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육체적으로는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몰랐고, 율법도 몰랐고, 그리스도도 몰랐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의식도 없었습니다. 그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 본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그저 인간의 본능을 좇아 살아가던 그 때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너무나 빗나간 소망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한다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너무나도 부끄럽고 더욱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값없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더욱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우리들도 에베소 교인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들 역시도 하나님을 몰랐고, 하나님의 계명도 모른 채,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아니면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때로는 우월감에 젖거나 아니면 스스로 열등감에 빠져서 살아가던 우리였습니다. 그 우월감 혹은 열등감은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고 소외시키는 담과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언제나 담을 쌓았고, 그 담 안에는 하나님도 없었고, 다른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담 안에 갇혀서 나는 스스로 주인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 막힌 담을 허셨다는 것입니다. 담 안에 갇혀 살아가던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으로는 our peace ‘우리의 평화’라고 번역했습니다. 신약성경 희랍어 원어로는 ‘에이레네’입니다. 이 ‘에이레네’는 우리 말 성경에서는 평화, 화평, 평강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본래 ‘에이레네’라고 하는 말은 구약의 ‘샬롬’을 번역한 말입니다. 이 ‘샬롬’이란 말은 모자람이 없고 왜곡된 것이 없고 온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근심도 없고 염려도 없고, 물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또 하나는, 관계의 개념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증오나 갈등 없이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아갈 때, 그것이 샬롬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평안을 꿈꾸고 화평을 꿈꿉니다. 모자람이 없고 만족한 상태, 이웃과의 사이에도 갈등이 없고 서로 신뢰하고 사랑을 나누는 그런 관계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모자람 없는 삶은 세상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부족함이 없을만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부부간에, 혹은 가족이나 이웃 간에 관계가 깨어지고 평안이 깨어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화평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온전한 관계가 될 때 진정한 화평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진정한 화평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평이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담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죄라고 하는 담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말씀했습니다. 죄의 담이 가로막혀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나갈 수도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려 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도 못하고, 오로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불안하였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담안에 숨어서 살았습니다. 담 밖에 있는 사람은 치열한 경쟁의 대상이었고, 그 경쟁에서 이겨야 했고, 자기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내야 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 또한 화목하지 못하고, 늘 경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이웃과의 관계도 무너진 것입니다. 거기에 ‘에이레네’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고, 하나님 안에서 영적으로 충만함과 평안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막힌 담도 허물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요 율법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들만 의롭다고 하는 영적, 도덕적인 우월감에 빠져있던 유대인들과, 자신들만이 문화인이요 지식인이라고 하는 지식의 교만에 빠져있던 희랍인들이, 이제는 모두가 다 구원받은 죄인임을 고백하는 한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참으로 고약한 것이 인간적인, 그리고 민족적인 우월감과 선민의식입니다.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우월감에 빠져서 사람들은 담을 쌓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민족적인 이유로, 서로 증오합니다. 도덕적인 교만, 지적인 교만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경멸합니다. 이와 같은 막힌 담을 그리스도가 허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 사랑에는 야만인이나 문화인의 차별이 없고, 남자나 여자의 차별이 없고, 흑인이나 백인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그 사랑에 빚진 자일 뿐입니다.
인간 세계의 그 수많은 담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허무셨습니까?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서로가 담을 쌓고 원수처럼 살아가던 사람들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쌓아 놓은 담을 당신의 육체로 허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육체로 희생의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이렇게 막힌 담을 허신 것은,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습니다. 문화인도 야만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제부터 너희는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피 흘리신 그 사랑 안에서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아닌, 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야 말로 사랑과 평안, 화해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담을 쌓습니다. 부부나 형제 사이에도, 직장 동료나 친구 사이에도, 이기심과 독선, 교만의 담을 쌓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하여,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하여, 지역간에, 이념 간에, 계층 간에 편을 가르고 담을 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을 허물어 버리셨듯이 우리 또한 담을 허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화해를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로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우리도 또한 먼저 자기를 내려놓고, 자존심이나 감정도 다 내려놓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정신이요,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사명은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교회는 화목하게 하는 자, 평화를 만드는 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오히려 담을 쌓고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구원과 축복만 누릴 뿐 담 밖의 세상을 돌아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물질, 명예, 권력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교회라면 십자가의 정신, 즉,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회복하고 이 땅에서 평화를 만들고 담을 허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이 절기에, 내가 지금 쌓아 놓고 그 안에 갇혀서 살고있는 담은 무엇인지 살펴보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탐욕과 교만, 독선으로 내가 쌓은 담이 있다면 그 담을 허물어 버려야 하겠습니다. 이 절기에 또한 온갖 편견과 탐욕, 교만으로 만들어진 우리 사회의 온갖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고,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과 분열의 질병을 치유하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