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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강단-492 주님은 누구시옵니까(사도행전9장1-9절)
성경말씀은 사도행전 9장 1절에서 9절까지 봉독합니다.
[사도행전 9장]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다 혹은 사마리아까지 전파된 복음들은 대체로 베드로 중심으로 한 사역들이고,
그리고 9장에서 오늘 이 사도바울이 등장하는데, 그 때까지는 사울이었죠.
사울이 정말 바울이 되는 그런 과정으로 겪으면서 복음이 이방인 세계로 넘어가는, 그리고 베드로 행전에서 다시 바울 행전 쪽으로 넘어가는 그런 한 고비가 되겠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7장에서 8장으로 넘어오면서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는 그 대박해때에 사도 외에는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온 천하로 흩어져나갔다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장에 보면,
[사도행전 9장]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런 것을 보면, 그 다메섹 여러 회당이 있어서 그 쪽에 공식적으로 보낼 문건이 있으면 자기가 가는 길에 가져가겠다 하고 그리고 그 공문이 예수 믿는 사람 있으면 잡아들이라 그런 공문도 포함되었겠죠.
그리고 체포 영장을 가져가야 체포 할 것 아닙니까?
그런 공문을 요청한 것을 보면 사울이라는 청년이 단지 신학생 정도가 아니라, 나이가 서른쯤 되었고 공문들을 가지고 전달하고 공무를 집행할 수 있는 일정의 공직에 연루된 사람이다 이렇게도 짐작이 가능해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런 것을 볼 때에 사도 바울이 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총각에게는 무슨 공직이 주어지지 않고, 서른 살 될 때까지 결혼 안 한 사람이 없는 거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유대인들이 서른 살 될 때까지 결혼 안 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도 나이가 비슷한데, 이미 그 장모가 있는 것을 보면, 바울도 결혼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고, 독신이라는 것은 이 때 이후에 예수님을 믿어버리고 나니까 부인되는 분이 이혼을 하자고 했던지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아무 주장할 만한 것은 아닌데..
나중에 바울 서신 속에 보면 홀로 되었다가 재혼을 할 입장에 있는 사람을 보고 ‘남편으로부터 갈렸거든 보고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할 때 ‘나와 같이’ 라는게 아예 결혼 한번도 하지 말고 나와 같이가 아니라, 결혼을 했다가 헤어졌거든 나와 같이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도 좋다.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가져갈 정도라면 결코 그냥 일반 유대교인 정도 이런 사람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사람들을 무슨 권위로 무슨 권세를 가지고 사람을 잡아다가 때리고 감옥에 넣고 그렇게 하겠어요?
그러니까 예루살렘 유대교 안에서 일정한 행정직에서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잡아올려면 경비도 많이 들고 열심도 들텐데, 다메섹까지 갈려면 거리가 부산에서 대전까지 되거든요.
부산에서 대전가는 거리만큼 돼요.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갈려면.. 240km쯤 되니까, 지금처럼 차를 가져가서 잡아오는 것도 힘들텐데, 아마 말을 타고 갔거나 아니면 약대를 타고 갔거나 그런 건데, 꽤 먼 거리를 갑니다.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가지고 잡히기만 해봐라. 그냥..
하면서 굉장히 위협적인 그런 자세로 다메섹에 다 가가는데, 갑자기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다.
강렬한 빛이 압도해 올 때, 땅에 엎드러졌다는 거예요.
얼마나 빛이 강했던지.. 예수님을 만났던 자기 경험속에 두고 두고 이야기 하죠.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보지 못했느냐?’ 내가 왜 사도가 아니냐? 할 때 늘 이 이야기를 합니다. 이 때에 만난 예수님을..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지금 사울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예수님을 핍박한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잖아요.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는데, 이것을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핍박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만약에 우리 성도님들이 조심해야 될게 어떤 예수 믿는 사람을 미워하고 핍박한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미워한 거야.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를 미워하는 것 조심을 해야 돼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과 우리를 따로 보면 따로지만, 유기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머리이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머리에 붙은 몸이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한 몸이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 따로 나 따로가 아니고 예수님 안에서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에 붙은 한 몸으로서 ‘예수님 이름 안에서 기도한다’ 그렇게 우리가 하잖아요.
그러니까 바로 우리가 예수님 몸에 붙은 예수예요. 예수..
예수님의 세포처럼..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 교회를 핍박하는게 바로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죠.
바울이 대답하기를, 대답한 것이 아니라 질문한 거죠.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놀라운 얘기죠.
여러분도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경상도 산골에 농촌에 옛날 할머니들이 말하던 것이 있어요.
생뚱맞은 질문을 할 때, ‘시집살이 십년만에 시아버지 성을 묻더라’ 그런 말이 있어요.
시집살이 십년을 해 놓고는 ‘가만히 있어 시아버지 성이 뭐더라?’ 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을 언제부터 믿고 찾고 신학을 전공하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그렇게 공부를 한 수제급이라는 사람이 ‘주여 뉘십니까?’ 물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또 한편, 최고로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런 엉뚱하게 정작 알 것을 모르고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당시에는 최고로 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행여라도 우리가 무슨 잘 믿는다 그런 생각 조심해야 돼요.
그 당시로서는 하여튼 바리새인들이 가장 율법에 밝고 성경에 밝고 했는데, 정작 알 분을 모르는 거죠. 주여 뉘시옵니까? 했으니까..
나중에 바울이 쓴 편지나 베드로가 쓴 편지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그런 말이 있어요.
또 이미 우리가 지나갔습니다만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안다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할 정도로 예수님을 누구신지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가면 신학 중에 조직신학이 있어요. 조직 신학..
‘시스타메틱 데올로지(systematic theology)’. 그러니까 체계적으로 신학의 구조를 시스타메틱(systematic) 하게 연구해보자 할 때, 맨 먼저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신론(神論)하면서 공부해요.
신론 다음에 인간론(人間論)이예요. 인간론을 공부하고, 인간론 다음에 기독론(基督論)을 해요.
우리가 공부를 할 때 신론 다음에 기독론 하는게 아니고, 성부론 다음에 성자론이 아니고 신론 다음에 인간론을 해요.
인간이 타락한 것까지 해야 그리스도가 왜 필요하냐? 하는 것을 이야기 할 차례가 되니까, 신론 인론 그 다음에 기독론이예요.
하나님을 알고 인간을 알아야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고 참 인간이니까..
하나님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사람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을 알고 사람을 알고 나서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서 기독론이죠.
기독론은 ‘그리스도가 누구시냐? 그리스도의 정체가 누구냐?’
인간이 물을 수 있는 최고의 질문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여러분 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것이 간단한 차이 같지만 하늘과 땅 차이일 수 있고, 천국과 지옥 차이일 수 있어요.
예수님이 누구시냐?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3년간 교육을 한 후에 가이사랴 빌립보에 졸업여행을 가서 졸업시험 문제를 냈는데, 예수님이 딱 한 문제를 냈다니까..
연습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진짜 본 문제는 ‘사람들은 놔두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후 엠 아이? (Who am I?)’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러분 예수님을 보고 최고 수준높은 신자, 최고 학자라는 분이 자기 주인을 보고 ‘후 아 유 로드? (Who are you LORD?)’라고 했어요.
실컷 믿어놓고 ‘당신이 누구냐’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그야말로 일생 일대의 질문이 되는 것이고, 우리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한번은 물어야 될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제가 가끔 제 간증을 했습니다만, 교회에 가서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볼 때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은 계셔야 되겠다더라고.. 있어야 되겠어. 보니까..
창조주라는 분이 없으면 이 우주의 질서와 법칙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만물의 제 1원인을 규명할 수가 없으니까 뭐가 있어야 되는 거야.
모든 것의 제 1원인되는 하나님이 있어야 되죠.
그것으로 되는데, 왜 예수가 나와서 속을 썩이냐? 젊은 사람이..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한참 있다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또 자신의 자아가 무너지고 깨어지고 하는 그런 중생의 어떤 체험과 함께 그 때 그러고 나서라야 예수님이 알아지더라고..
믿어지고 알아져요.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머리가지고만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하심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내적 조명과 함께 일어나는 계시적 사건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지는 것은 계시적 사건이지, 지식을 가지고 달달 외워가지고 이렇게 알아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돼요.
물론 여기 오신 분들은 다 이미 지나간 질문이고 그럴 수 있겠죠.
그러나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하나님이거나 이렇게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훌륭한 선생, 원수를 사랑했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윤리적인 사람 이런 정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라고는 안 되는 거야.
어떻든 여기 ‘누구시옵니까?’ 하고 바울이 물었는데, 참 위대한 인물은 그런 엎어지고 꺼꾸러져가지고 엉겹결에 물어도 질문같은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렇죠?
여기에는 이렇게만 나왔는데, 나중에 이 일을 다시 간증할 때 사도행전 22장에 또 한번 이야기를 간증으로 나오는데, 이렇게만 물은게 아니고, ‘주님 누구시옵니까?’ 묻고 나서 두 번째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래서 이 두가지 질문한 것이 나오는데, 한 질문은 기독론이 나오고, 또 한 질문은 실천신학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고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을 알면 알 것 다 아는 겁니다.
딴 것은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우리가 안 알아도 뭐 IT BT 그런 것 우리가 안 해도 다 세상이 알아서 아랫것들이 할 거예요. 전부 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것을 알아야 돼요.
..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왜 다마스커스에 다 와가지고 꺼꾸러지게 했느냐?
너무 먼데에서 꺼꾸러지면 눈이 안 보여서 가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거의 다 와가지고 조금만 더 가면 될 때 그 때 꺼꾸러졌으니까 남에게 이끌림 받아서 조금만 가면 되죠.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의 행할 것을 예수님이 직접 다 이야기 해주는게 아니라, 네가 행할 것을 너에게 일러줄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가 행할 것을 우리에게 일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맨날 하늘 쳐다보고 하나님 직접 다이렉트로 나에게 일러달라. 그러면서 보채는 사람 많아요. 한국에..
여러분 이렇게 위대한 사도바울이라도 사람에게서 배워야 돼요.
너의 행할 것을 이를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직접 다이렉트로 직통계시로 다 알려주는게 아니고..
여기에서 뭘 배워야 되느냐? 겸손을 배워야 돼요.
여러분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는 그런 교만 가지고는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권위라는게 사람에게서 배워야 되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를 받아들여야 돼요.
최소한도 그 정도 겸손은 있어야 돼요.
우리가 겸손한 척 하는 그런 것은 아니라도..
이 하나님께서 그 큰 권위와 권세를 허물 많은 베드로에게 또 허물많은 우리 사람에게 위탁해 두셨다는 거예요.
이런 교회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정도의 그 정도 겸손도 안 되어갖고는 은혜와 진리에 접근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고 초대교회 그 누가 사도바울을 능가할 인물이 나오겠어요?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라도 네게 일러줄 사람이 있는데, 너는 그 사람에게 가서 들어야 돼. 배우고..
그래서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하는 것만 알게 한 다음에는 겸손히 가서 아나니아라고 하는 아주 이름없는 하나님의 사람 이름도 별로 유명하지 않은, 그 뒤로도 어떤 유명한 그런 행적도 별로 없어요. 그 아나니아가..
그런 사람에게 가서 들어야 되는 거야.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우리 그것도 역시 경상도 말이거나 아니면 지방 방언인데, 눈 뜨고도 못 보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죠?
눈을 뻔히 뜨고도 못 보는 사람이 있다니까..
그것을 우리 지역에서는 ‘당달’이라고 해요. 당달.. 들어보셨나요?
어떻게 알지? 당달봉사를..
혹은 ‘청맹과니’라고도 하고 ‘당달봉사’라고 해요.
젊은 사람들은 처음 듣는 말이죠.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 많습니다.
정말 사도바울이 자기가 당달봉사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자기가 공부 좀 했다고 해서 다 아는 줄 알았는데, 정작 알 것을 모르잖아요.
자기 주인을 보고 후아유?(Who are you?) 했으니까..
여러분 자기 아버지를 보고 후아유?(Who are you?) 해봐.
꼭 같은 거야.
사람이 되어가지고 사람의 주가 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후아유(Who are you?) 했으니까..
여러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깨닫지도 못하였다 하는 말이 딱 이런 사람이 그렇잖아요.
당시에 최고로 잘 나간다고 하는 사람이 이 정도야
예수님 당시에 제일 잘 믿는다고 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받은 점수는 빵점이예요. 빵점..
빵점은 괜찮은데,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면하겠느냐?
이런 점수를 받은 것을 볼 때, 그러면 그 때는 그랬고 오늘 우리는 잘 믿는 거냐?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도..
우리도 별로 잘 믿는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얼마나 충격이 되었는지, 자기가 지금 얼마나 열심을 가지고 이 지구상에서 저런 것들은 씨를 말려야 된다고 발본색원(拔本塞源)한다고 위협과 살기등등해가지고 그렇게 열정적으로 핍박을 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고 하나님을 핍박한 거거든요. 그게..
그러니까 자기 정리를 하는데, 이게 지금 사흘 동안 음식을 전폐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이로부터 시작해가지고 한 3년을 고민해요.
아라비아 광야에서 자기 정리를 하는데, 3년을 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기 잘못된 사고방식을 고친다든지 잘못된 관점을 고치는 것 쉽지 않습니다.
3년을 고민해가지고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될 때는 근 3년이 지나서. 바로 이 이후에 다마스커스에 가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데, 사람들이 안 받아들입니다.
‘사람이 쇼를 해도 분수가 있지, 엊그저께 잡으러 온 놈이 저것 뭐하는 거야?’ 하고 전부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고 이렇게 되면서, 사울 자신도 큰 혼란에 빠져서 한 3년간 아라비아에 가서 자기가 지금까지 배운것이 무엇이며 내가 지금 내 눈 앞에 전개되는 현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 정리하는데, 한 3년이 걸립니다.
30년 동안 쌓아올렸던 것을 허물어 내는데 한 3년 걸렸다는 거예요.
저는 신학교에서 이상한 신학들 별별 학설들 이런 것들을 배웠는데, 전부 성경과 안 맞는 거예요. 신학교에서 배운게..
그래서 내가 참 정성을 들여서 신학을 했는데, 이게 왜 성경과 안 맞냐? 이게..
그것을 허물어 내는데 저도 꽤 시간이 걸렸어요.
그래서,
10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신자가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예수 믿는 사람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데 제자예요. 제자..
‘신자’라는 말은 한번인가 밖에 안 나와요.
로마서에 한 번이 신자라는 말이 있고 나머지는 전부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실 때 ‘너희가 가서 모든 족속을 신자로 삼으라’고 한게 아닙니다. 제자를 삼아서..
제자를 삼으면 가르쳐야 되고,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
그러니까 배워야 돼요.
그런데 ‘믿습니다. 믿습니다’만 하고, 오늘 교회가 도무지 배울 생각을 하지 않고 가르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거야. 잘못된 거예요.
전부 신자에서 머물러 버립니다.
신자는 옳은 신자도 안 되고, 제자가 안 되고는 신자도 안 되는 거야.
믿을려면 제대로 들어보고 제대로 알아보고 와서 믿는 것이지, 교회가 도무지 교육도 하지 않고, 교육이라는게 교회학교때 조금 해 보는 것. 그것은 사실 교육도 아녜요.
율동이나 좀 하고 노래 조금 하는 것이지, 그것을 교육이라고 우리가 착각 한거예요.
반드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배우고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심판주 하나님까지 내세론 종말론까지 우리가 다 공부를 해야 됩니다.
아무리 큰 교회도 지금 교육이 없습니다. 있다해도 그 교육이 너무 간지러워요.
한번 보세요.
지금 서울에 대형교회는 예배를 1부에서 7부까지 드려요.
교육할 시간이 있습니까? 계속 예배인데..
예배하고 다 집으로 가는 거예요.
요즈음은 낮예배 오후 찬양예배, 예배 모범에 헌법에 정한 것 다 무시해버리고 성도는 많고 예배당 장소는 한정되니까 그만 주일에 어느 한부만 예배드리고 집에 가 버려라. 그냥..
한부만 예배드리고 헌금만 하면 끝나는 것처럼 그렇게 하고 말아요.
너무 내용이 없어요.
그래서 교육을 해본다고 한게 소그룹 어쩌고 저쩌고 한다든지.. 아니면 알파코스 한다든지 아주 전도수준도 아니고 세례받을 수준도 안되는 그런 내용을 가지고 교육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는 제자가 안 돼요.
여기 지금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주의 제자’라고 되어 있어요.
..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러니까 항상 이 자세가 종의 기본 자세요.
여러분 옛날에 보면 왕이 ‘밖에 아무도 없느냐?’ 그러죠.
그러면 항상 대기하고 있죠?
그래서 여기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말로는 잘 안 하는데, 영어로 하면 ‘히어 아이 엠.(Here I am.)’
‘항상 여기 있나이다. 항상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먼데 가지 않고 항상 부르면 ‘예’ 하고 대답할려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게 기본 자세예요.
‘주여 제가 요즈음 바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항상 여기 있나이다. 해야지..
아무리 바쁜 것도 주인이 부르면 그저 ‘히어 아이 엠.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나타나야지, ‘이 다음에 봅시다.’ 그러면 곤란한 거야.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직가(直街)’는 ‘곧은 길’이죠.
지난번에 우리가 다마스커스에 가 봤는데, 한번밖에 못 가봤어요.
동쪽에서 서쪽으로 쭉 뻗은 길이 나옵니다.
우리 창원 같으면 중앙로 그런 곳이예요.
동서로 쭉 뻗은 길이 나 있습니다.
..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여러분 기도하는 중인데, 응답은 하나님이 다이렉트로 바울에게 응답한 것이 아니라, 아나니아를 통해서 가는 거예요.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것도 참 놀라운 내용이죠.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고 이런 사람을 보고, ‘내가 택한 그릇’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우리가 전도하거나 할 때 우리 주변에서 길길이 뛰고 위협과 살기 등등하고 그리해도 너무 겁내지 말아요.
그러거든 ‘아 택한 그릇인가 보다..’
그렇게 해야지 ‘아 너는 글렀다.’ 그러면 안 됩니다. 지금은 몰라요.
저는 지금까지 길길이 뛰던 사람치고 안 믿는 사람 없어요.
제일 애 먹였던게 ‘믿는 것은 다 좋은 거죠. 아무 것이나 잘 믿으면 좋은 거죠.’ 하는 사람은 잘 안 믿어요.
반대하고 길길이 뛰던 사람은 변화시켜 놓으면 일꾼 됩니다. 일꾼이..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사도 바울은 선택받은 목적이 첫째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택한 그릇인데, 그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얼마나 해를 많이 받을 것인지,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고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인지 내가 그에게 보여줄 거야. 그렇게 한 거야.
그러니까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 위대한 고난, 그런 고난은 아무나 짊어질 수 있는게 아니고 이런 택한 그릇 정도 되어야 짊어지는 거야.
나중에 우리가 고린도후서 공부할 때 사도바울의 고난의 이력서가 나와요.
고린도후서 11장에 고난의 이력서가 나오는데, 그 때 그 편지를 기록할 때 사도바울의 일생을 두고 보면, 절반 정도 사역을 했을 때 그 정도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일생 겪은 고난 전체를 한 종이에 썼다면 그야말로 사람이 태어나서 그렇게까지 험한 인생을 산 사람이 많지 않을 텐데, 여기 예수님께서는 ‘너 나만 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 이렇게 한게 아닙니다. 정직하게..
그가 내 이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해를 받을 것인지 내가 그에게 보여줄 것이다.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이렇게 위대한 인물에게 세례를 베푼 아나니아라는 무명의 제자가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아마 다마스커스에 오는 길에서 강렬한 빛이 열과 함께 임해왔든지 눈이 그냥 완전히 멀어버린 거예요. 그 빛에..
그래서 어떤 각막 같은게 비늘같은 게 눈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는 거죠.
가끔 성경강좌에 와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들은 분이 ‘정말 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내 얼굴에 수건이 걷혔습니다.’ 이런 분이 있어요.
어제 저녁 8시경에 미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이분이 목사님이고 선교사님인데, 제가 주안교회에 가서 요한계시록 강의한 것을, 그 때 주안교회에 가서 요한계시록만 하고 온 적이 있었어요.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돌고 있거든요.
‘주안교회 노우호 요한계시록’ 하면 찾을 수 있어요.
그것을 밤새도록 들어서 다 들었다는 거야.
다 듣고 보니까 새벽 6시 되었는데, 우리 시간으로는 8시가 되죠.
전화가 왔는데, 들어도 풀리지 않는게 몇가지가 있다.
세가지가 있는데, 질문 다 받아주다가 제가 밥을 하다가 솥을 다 태웠어요.
냄새가 난다 싶었는데 가보니까 이미 다 타버린 거야.
그러면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남은 인생은 요한계시록을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겠다. 이렇게 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정말 성경을 제대로 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눈에서 정말 비늘같은 것이 떨어져서 밝히 봐야 돼요.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소문은 참 빠른 거죠.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이런게 어려운 거야. 굴복을 안 시키면 핍박받을 일이 없는데, 굴복을 시키니까..
바울이 그 실력을 가지고 닥치는 사람들에게 전부 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니까 아무도 바울을 꺾지 못하는 거죠.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여러분 진리를 말하면 때로는 죽일려고 합니다.
같이 죄를 짓고 어울리고 하면 다 좋아하는데, 딱 홀로 서서 누가 진리를 말해봐.
예수님도 그래서 죽은 것 아닙니까? 바울도 그렇고..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참 열심이 대단하죠?
엊그저께만 해도 바울 자기가 남을 죽일려고 했는데, 이제는 자기가 오히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어요.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다메섹에 성지순례가면 그 광주리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어요.
그것인지 몰라요. 하여튼 비슷한 것을 두었는데, 크기가 사람 둘은 타겠더라고..
큰 배처럼 생긴 광주리가 있어요.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엊그저께만 해도 스데반 죽이는데 찬성했던 사람이 어느 날 예수 믿는다고 하니까 못 믿겠다하는 거죠.
제가 전에 밀양에 있었을 때 어깨가 있어요.
전화 한통만 하면 전국에서 2백명이 단숨에 쫓아와서 줄 맞춰서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까 ‘아이고 누가 예수를 믿어?’ 그러면서 사람들이 도무지 못 믿어하는 거야.
그런데 가끔 사람들 데리고 오는데, 대개가 보면 위협적이야.
나중에 가서 ‘목사님 자꾸 이상한 사람만 데려와서 죄송합니다.’
나는 하나도 안 죄송한데.. 그런 사람이 와야죠.
하여튼 바울이 너무 엉뚱한 사람이 갑자기 믿어가지고 예루살렘교회에 나타나니까 아무도 바울을 믿어줄려고 하지 않아요.
그의 믿음을 믿을려고 하지 않는 거죠.
27절에 바나바가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앞서서 사도들의 발 앞에 재산을 팔아 바쳤다. 그 때 한번 나오고 여기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바나바가..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 행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결정적으로 바울을 바울 되게 했던,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을 바울 되게 했던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혼자 다이렉트로 예수님 만나가지고 갑자기 어느 날 불의 사자가 된 것이 아니라, 사울이 바울 되어서 그런 인물이 되기까지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의 곁에서..
첫째는 물론 자기 부모가 있었죠.
자기 부모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자기 아버지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유시민으로 당당한 그런 가문에서 태어났고,
그 다음에 바울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에서 철학을 가르친 스승들이 있었을 것이고,
세 번째는 예루살렘에 왔을 때 가말리엘이라는 대율법학자가 있었겠죠.
그리고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어요.
사도행전 7장에 있는 스데반의 설교를 폐부 깊숙히 찔리는 설교를 들었고,
그 다음에, 다마스커스에 갈 때 아나니아를 만났고,
지금은 바나바를 만난 거예요.
그리고 바울의 행적을 소상히 곁에서 따라다니면서 기록한 누가가 있었고, 그의 아들같고 제자같고 동생같고 친구같은 디모데가 있었고,
그의 왼팔 오른팔 같은 디도가 있었어요.
그리고 항상 그 심부름을 열심히 잘하는 두기고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려울 때 항상 찾아 위로하는 오네시보로 같은 사람도 있고, 브리스길라 아굴라 같은 분도 있고, 하여튼 바울을 바울 되게 하는 바울 메이커가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 사람들이 합해서 바울이 바울 되는 것이지, 바울 혼자 된게 아니라고..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니까,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또 죽이려고 하는 거야. 또..
어떻게 진리를 알면 죽이려고 해요. 진리를 말하면 죽이려고 합니다.
..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이것은 지금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지금 죽이려고 해요. 바울을..
그러니까 지금 다마스커스에서도 죽이려고 하고 여기에서도 죽이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형제들이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소. 분위기가 달라질 때까지 고향에 가서 푹 썩어와야 되겠다.’ 하고,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길리기아 다소는 사도바울이 그냥 마치 실패한 것처럼 해가지고 고향으로 낙향을 한 거예요.
거기에서 한 10년 정도를 고향에서 푹 결이 삭은 것 같아요.
나중에 그 10년 쯤 거기에서 푹 썩은 후에 안디옥에서 믿는 사람이 생겨가지고 그 때 바나바가 일하다가 사람이 너무 많이 밀려오니까 혼자 가르칠 수 없어서, 그 길리기아 다소까지 사도바울을 찾아서 바나바가 가서 그 낙심하고 낙향하고 있는 그런 사도바울을 일으켜서 바울 되게 한 것이 바나바예요.
바나바라는 인물은 주저앉은 사람을 항상 일으켜 세우고, 그리고 항상 사람들을 좋게 말해가지고 공동체 안에서 바르게 소개되어서 교제하게 하는 멋진 인물이 바나바예요.
그래서 이 사람 이름이 원래 요셉이라는 사람인데, 요셉이라는 이름을 잘 모르고 전부 바나바라고 해요. 바르나바스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란 뜻이예요.
하도 권하고 위로하고 다독거리고 북돋우고 세워주고 이런 것을 잘 하기 때문에, 하도 위로를 잘하기 때문에 위로의 아들이다 이렇게 이름이 붙어가지고 그만 본명은 온데간데 없고 별명이 본명처럼 되어버렸어요.
31절,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핍박은 핍박대로 있고 은혜는 은혜대로 있고 함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하고 핍박이 많은 곳에 위로도 더하고 그래서 수가 더 많아지는 거예요.
한편 카메라가 다시 베드로 쪽으로 옮깁니다.
32절에,
32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거기 줄을 그으세요.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가 어디냐 하면 샤론평야에 있어요.
샤론교회에 있는게 아닙니다. 샤론평야에 룻다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 지 팔 년이라
이 병도 오래된 병이죠.
중풍병 나병 이런 병들이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었던 병이예요.
기름기를 잘 짜서 제거하고 음식을 먹어야 안 걸리는게 아니고 덜 걸릴텐데, 그냥 기름기 있는게 미끄럽고 부드럽고 하니까 기름기를 먹는 거예요.
살고기만 먹어야지 아무리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 하는 것도 기름기는 조심해야 돼요.
그러다보니까 중풍병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상당히 많아요. 도처에 중풍병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젊을 때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은 모르겠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온이 자꾸 떨어지고 운동도 줄어들고 고기 좋아하고 그러면 곤란합니다.
저는 거의 누가 실수로 사오면 어쩔 수 없지만, 내 손으로는 고기사러 잘 안 가요.
특히 요새는 마블링 어쩌고 하면서 일등급이라고..
제일 나쁜 고기인데, 멍청한 것들이 최고라고 하는 거야.
우리는 ‘3등급을 주십시오. 마블링 하나도 없는 것, 빨간 살코기만 조금 주십시오.’ 이렇게 하지, 여기 중풍병이라는게 딴 것 때문에 오지 않습니다.
거의 다 동물성 지방질이예요.
이 사람들이 중동사람들이 고기를 먹고 우유도 많이 먹거든요.
그러니까 다른 병 보다 중풍이 많아요.
다른 병들은 별로 없겠어요.
여러분 언젠가 이스라엘에 가보면 병이 있을게 없어요. 너무 말라가지고..
병도 말라죽을 판이야. 뜨거워 죽고 말라 죽고 땅이 다 타들어가니까..
염소와 양을 먹이는데, 구제역이라고 가축들이 입과 코 등 발에 병이 드는데, 구제역이 거기는 없어요. 건조하기 때문에..
그런데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있는 그런 병들은 있고,
그 다음에 유대인들에게 ‘태이삭스’라는 유전병이 있습니다.
너무 근친끼리 결혼해서 그게 많아요. 지금은 좀 달라졌는데,
하여튼 중풍병은 상당히 많은 편이예요.
성경에 많이 나오는 병이 중풍병이죠.
그래서,
34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참 이랬으면 좋겠어요. 그렇죠? 안수하고 긁고 할게 아니라, 이렇게 하면 참 좋겠는데..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참 아름다운 사역이죠.
여러분 우리가 샤론이라는 데가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 해변가에 펼쳐진 풀밭이고 옛날에 다윗의 왕실 목장이 있는 곳이어서 양치기에 가장 좋은 땅이예요.
이스라엘에 평야가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이스르엘 평야예요, 이스르엘 평야는 곡식이 잘 되는 곳이고, 또 하나는 샤론평야인데 양치기 가장 좋은 곳이예요.
지금 가보면 샤론평야도 많이 개간 되어서 곡식도 잘 재배되고 있어요.
지중해성 온화한 기후 가운데 들판이 끝없이 개발되고 있어요.
36절,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여기도 ‘신자’가 아니고 ‘여제자’예요.
..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남에게 옷을 해준다는게 지금도 쉽지 않습니다. 지금도 중국제 때문에 싸지, 중국제가 아니면 비쌀텐데, 그 때는 천이 너무너무귀할 때 예요. 천이..
그런데 어떻게 해서 든지 홀로 된 사람들을 입히는 일에 열심히 봉사해가지고 미싱이나 있어요? 다 손으로 하는데, 이런 정성을 가지고 남의 옷을 만드는 것은 대단한 정성이예요.
다비다라고도 하고 도르가라고도 하는데, 참 아름다운 일이예요.
그 여인이 나이가 얼마나 몇살 때 죽었는지 모르지만, 온 동네 사람들이 아까워 할 정도로 정말 멋쟁이야.
사랑과 인정이 풍부한 그런 사람이예요.
죽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사람들이..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이것 참 멋진 사람은 죽었다 살아나도 수 많은 사람을 전도하게 하잖아요.
우리가 삶을 엉터리로 살면 죽으면서 딴 사람 믿지 못하게 만드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죽었다가 깨어나는 것 때문에 또 많은 사람을 예수님 믿게 하는..
그래서 참 이 도르가라고 하는 아름다운 여인은 살아서도 아름답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더 큰 역사가 되어가지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하였다는 거죠.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피장이라는 말은 가죽을 무두질 해가지고 기름기를 깨고 쓸만하게 만드는, 죄송한 얘긴데 그 당시로서는 가장 천민입니다.
피장이는 제일 우리 경상도 말로 상놈들이예요. 그 당시에..
그래서 히브리 속담에도 피장의 집에 갔다오면 가죽에 손도 안 대어도 냄새가 난다. 그런 말이 있어요.
영향을 받는다 그런 말인데, 단백질이나 지방질 이런 것이 가죽에서 곰팡이 냄새가 너무 진하기 때문에 약품 처리하지 않으면 지금도 가죽에 냄새가 나잖아요.
그래서 피장이 시몬의 집..
지금 베드로라는 시몬과 피장이 시몬이 한 집에 시몬이 둘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 여러 날 더 있었다 하는데, 이런 것을 보면 베드로 자기 자신이 옛날에 갈릴리에서 자기는 물고기 잡는 사람이었어요.
그 비린내도 어지간하거든요. 물고기 비린내..
그러니까 그런 냄새 안 가리고 그런 집에도 가서 거리낌 없이 갔어요.
세상에 천하의 사도 베드로가 피장의 집에 가서 여러 날 있었다는 거예요. 그 냄새나는 집에..
성지 순례가면 반드시, 다른 집은 몰라도 그 피장의 집에는 갑니다. 물론 한번도 대문 열어준 적은 없지만 대문간에 가서 묵도하고 나오죠.
이렇게 해서 베드로가 두루 다니면서 죽은 사람 아픈 사람 아니면 피장이 집 이런 데에 거침없이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사도들의 행적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이고, 우리도 이를 본받아서 우리 모두의 행적이 남아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사람 사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는 모습을 보았고, 또 그가 진리를 말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일려고 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샤론평야에 있는 룻다와 욥바와 해변길을 따라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신자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다 제자가 되어 사도들처럼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신실한 증인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