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나비 사당
진허 스님이 나타났다. 잔나비(원숭이) 한마리를 데리고.
저잣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뤄 잔나비 녀석이 재주를 부릴 때마다 폭소가 터졌다.
권 대인도 챙 넓은 갓을 눌러쓰고 두손을 뒷짐 진 채 멀찌감치 진허 스님과 잔나비의 재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진허 스님과 권 대인의 눈이 마주치자 권 대인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잔나비의 재주라야 별것이 없었다.
스님이 능금을 던지면 잔나비가 당나귀 등을 타고 뛰어올라 능금을 낚아챘다.
구경꾼들이 짝짝 박수를 쳤다.
기나긴 봄날이 저물고 장도 파장이 가까울 무렵 마지막 공연이 뭇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맸다.
진허 스님이 넓은 판자벽을 세우더니
잔나비에게 굵은 고구마 하나를 보여주고 판자벽 반대편에 고구마를 놓았다.
판자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잔나비가 그 구멍으로 앞발을 쑥 넣어 고구마를 잡았다.
고구마를 쥔 앞발이 빠지지 않았다.
스님이 회초리로 잔나비 엉덩이를 때리자 “캭” 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뒷발로 구멍쪽 벽을 힘껏 찼다.
도망가려 했지만 앞발이 빠지지 않았다.
잔나비는 발목에 피가 나도 고구마를 놓지 않았다.
고구마를 꽉 쥔 앞발을 송곳으로 콕 찌르자 잔니비는 “꽥”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구마를 놓고 앞발을 빼냈다.
진허 스님이 말했다. “이것이 일본에서 잔나비 잡는 방법이오.”
장이 파하고 구경꾼들도 안개가 걷히듯 흩어졌는데
권 대인 혼자 남아 “이제 광대가 되셨구려.” 툭 한마디 던졌다.
이내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목이 마르네” 했다.
두사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척하면 삼천리’, 장터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해물부침개 안주에 청주 한 호리병을 시켜놓고 두사람은 대작을 시작했다.
“이게 얼마 만이요, 일년이 넘었지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지냈소?”
권 대인의 물음에 빙긋이 웃던 스님이
“일본에서 세월을 보냈소. 방방곡곡 떠돌아다니며 탁발을 하고 좋은 곡차도 많이 마셨소” 했다.
권 대인이 또 물었다. “일본서도 저 잔나비를 데리고 다니며 광대놀음을 했소?”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저 잔나비 이름은 ‘노욕(老慾)’이요.
사람으로 치자면 이순(耳順)이 넘었는데 욕심이 끝이 없어요.”
노스님이 잠이 든 잔나비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이놈이 잡힌 것도 그놈의 끝없는 욕심 때문이었소.”
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 지난봄 일본 남부 규슈 지방을 떠돌 때를 회상했다.
봄날은 사람도 짐승도 배고픈 계절이다.
해가 지고 어둠살이 내릴 때 숲속에서 잔나비 두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동네로 내려와
가난한 농부 미나미네 집에 들어갔다. 물론 곳간 문은 잠겨 있었다.
뒷마당으로 돌아가 쌓인 짚단을 치우자 쥐구멍보다 훨씬 큰 구멍이 보였다.
몇날 며칠을 굶어 홀쭉해진 잔나비 두마리는 낑낑거리며 밀고 당겨 구멍으로 들어갔다.
안은 곳간이었다.
잔나비 두마리는 퍼질러 앉아 고구마 자루를 헐어 안에 든 것을 게걸스레 먹기 시작했다.
노욕의 친구 잔나비는 고구마를 먹다 말고 몇개를 들고 들어왔던 구멍으로 가더니 밖으로 던졌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구멍을 빠져나갔다.
노욕에게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노욕은 들은 체 만 체 고구마를 다 먹어 치우더니
“꺽” 트림을 하고 동산만 해진 배를 두드렸다. 이윽고 새벽닭이 울었다.
그때는 이미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구멍에 배가 걸려 나갈 수가 없었다.
가난한 농부 미나미가 곳간에서 새어 나오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몽둥이를 들고 들어왔다.
머리와 팔은 빠져나왔지만 배와 다리가 나오지 못한 노욕은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러고는 줄에 묶여 장터에 팔려 나온 걸 진허 스님이 고구마값을 물어주고 산 것이다.
그날 밤,
크게 취한 권 대인은 잠이 오지 않았다.
‘진허 스님이 그 잔나비 이름을 노욕으로 지었다. 나를 빗댄 것인가?’
권 대인은 천석꾼 부자에 첩이 셋이다.
보릿고개에 장리쌀을 놓아 가을에 논밭을 뺏다시피 해서 전답을 늘렸다.
빚을 못 갚은 빚쟁이에게선 마누라와 딸을 빼앗아 첩으로 삼았다.
원한에 사무친 빚쟁이가 시퍼런 낫을 들고 담을 넘어온 게 몇번이던가!
밤이나 낮이나 담 밑으로 창을 든 사병을 배치해두고 나들이할 때도 칼잡이들이 그림자처럼 권 대인을 호위했다.
권 대인은 별채에서 자고 있는 진허 스님을 깨워 또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얼마 가지 않아 새벽닭이 울었다.
권 대인이 “꺼이꺼이” 목을 놓아 울자 진허 스님이 청아하게 목탁을 두드렸다.
이튿날,
장리쌀을 놓아 빼앗은 논밭을 모두 돌려주고 첩들을 제 집으로 돌려보내자
빚쟁이였던 소작농들이 권 대인의 마당으로 몰려들어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다.
곳간을 열어 보릿고개에 허덕이는 가난한 집에 곡식자루를 보냈다.
잔나비 노욕이 죽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장례를 크게 지내고 사또는 잔나비 사당을 지었다더라.
첫댓글 영국에서 유명 하던 스크루지 영감 비스무리 하네여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