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광부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3일간 시위를 벌였다. 회사 처지에서 임금 인상안에 합의한 어용 노조 지부장 퇴진을 요구하며 시작된 시위는 회사 사무실을 때려 부수고 사북 지서와 무기고를 점거하며 경찰과 유혈 충돌이 벌어지는 사태로 확대됐다. 그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숨졌다.
광부와 주민들은 회사 편을 든 노조 간부를 폭행했다. 잠적한 노조 지부장 이재기씨 대신 아내 김순이씨를 발가벗겨 광업소 정문 기둥에 이틀간 묶어놓고 집단 폭행했다. 일부 주민은 김씨의 음부에 난행(亂行)을 저질렀다. 사태가 진정된 뒤 군경 합동 수사단은 시위 광부와 주민들을 연행해 조사했다. 조사 과정에서 고문과 구타 등 가혹 행위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후 노무현 정권 때인 2005년, 사북 시위를 주도한 이원갑씨는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광부와 주민들은 회사 편을 든 노조 간부를 폭행했다. 잠적한 노조 지부장 이재기씨 대신 아내 김순이씨를 발가벗겨 광업소 정문 기둥에 이틀간 묶어놓고 집단 폭행했다. 일부 주민은 김씨의 음부에 난행(亂行)을 저질렀다. 사태가 진정된 뒤 군경 합동 수사단은 시위 광부와 주민들을 연행해 조사했다. 조사 과정에서 고문과 구타 등 가혹 행위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후 노무현 정권 때인 2005년, 사북 시위를 주도한 이원갑씨는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1997년 6월 4일 한총련 출범식이 열릴 예정이던 한양대에서 이석(23)씨가 학생들에게 맞아 숨졌다. 선반 기능공인 이씨는 시위 구경을 갔다가 대학생들에게 프락치로 몰려 밤새도록 맞았다. 이씨 시신을 부검한 국과수 법의학부장은 "몽둥이나 그와 비슷한 흉기로 온몸을 무수히 얻어맞아 과다 출혈과 조직이 뭉그러진 것이 사인(死因)"이라고 했다. 얼마나 맞았던지 이씨 몸 전체의 피 중 40~50%가 혈관 밖으로 빠져나간 상태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항의하며 시작된 6월 항쟁의 주역 학생운동 세력이, 10년이 지나 무고한 선반공을 고문 치사한 집단으로 변모했다. 사건 주범들은 5년,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김대중 정권 때인 1999년 2년도 복역하지 않고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김순이씨나 이석씨에 비하면 신씨의 피해는 지극히 작다. 그렇더라도 큰 정의를 위해서 개인의 인권과 명예는 짓밟혀도 좋은가. 개인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갈 때 깔려 짓이겨지는 진흙 덩어리인가. 국정 농단 단죄 과정에서 이런 일이 너무 잦았다. 청문회에서 국회의원은 부인(否認) 답변을 하는 증인에게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고 면전에서 모욕했다. 거짓말이라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검찰 포토라인의 정당성
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고민은 완전히 사라졌다. 검찰은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으로 소환하는 사람까지 포토라인에 세웠다. 민주주의 파괴를 단죄한다면서 역설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민주적 가치를 파괴하는 일이 수시로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소통을 통한 수렴, 절차의 정당성을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다. 공분(公憤)을 야만적 방식으로 푸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