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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공개: 원고청탁서
반 경 환
수신:
유종호: 서울대 영문과 졸업, 뉴욕 주립대 석사, 서강대학교 영문학 박사(영문), 전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 연세대 석좌교수.
김우창: 서울대 영문과 졸업, 미국 하버드대 영문학 박사, 전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 고려대 교수.
백낙청: 미국 브라운대 졸업, 미국 하버드대 영문학 박사,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서울대 교수.
김치수, 서울대 불문과 졸업, 프랑스 프로방스대 박사, {문학과지성} 편집위원, 이화여대 교수.
김주연, 서울대 독문과 졸업, 독문학 박사, {문학과지성} 편집위원, 숙명여대 교수.
황동규: 서울대 영문과 졸업, 에딘버러대 대학원, 시인, 서울대 영문과 교수.
이성복: 서울대 불문과 졸업, 불문학 박사, 시인, 계명대 교수.
이인성: 서울대 불문과 졸업, 불문학 박사, 소설가, 서울대 교수.
정과리: 서울대 불문과 졸업, 불문학 박사, {문학과사회} 편집위원, 충남대 교수.
김정란: 한국 외국어대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대 불문학 박사, {작가세계}, {문예중앙}, {현대시} 편집위원, 상지대 교수.
김진석: 서울대 철학과 중퇴,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철학 박사, 전 {문학과사회} 편집위원, 인하대 교수.
내용:
흔히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말합니다만, 그 말을 좀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면, 모든 교육은 ‘이민족의 백만 두뇌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교육’이라는말이 더욱 더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공산주의, 실존주의, 허무주의, 구조주의, 탈구조주의는 최고급의 지혜의 저장소인 데, 그러나 지극히 애석하게도 그러한 사상들은 우리 한국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비행기, 자동차, 고속전철, 항공모함, 컴퓨터, 인공위성, 비아그라, 쥬라기 공원 등과도 같은 산업 부문에서 어느 것 하나 우리 한국인들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는 소식은 전혀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앎의 투쟁에서의 패배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고, 우리 한국인들의 미래를 더욱 더 어둡고 암담하게 만들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지난 번 서울대학교 총장 후보들이 ‘우리가 영재들을 불러 모아서 바보로 만들었다’라는 탄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습니다만, 이기준 총장이 선출된 이후로, 이내 그 탄식의 목소리는 잠잠해지고, 오히려, 거꾸로 대한민국의 최고의 문학잡지인 {문학과사회}는 어떠한 교육 개혁도 반대한다라는 ‘반 교육 개혁의 특집’을 마련해 놓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빌면, ‘권력은 유죄’이고 ‘학자는 무죄’인데, 왜냐하면 권력자들이 돈을 몇 푼씩 안겨주며 우리 학자들을 길들여 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는 어떠한 교육 개혁도 유효하지 않은 데, 왜냐하면 교육 개혁의 주체는 없고 교육 개혁의 대상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 개혁을 바라는 우리 국민들의 열화같은 성원이 있는 한, 언젠가, 어느 때는 진정한 교육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그들은 결론을 맺고 있었습니다({문학과사회}, 98겨울호 참조). 우리는 이 ‘반 교육 개혁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엄청나게 크고 당당한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수십 년씩, 수백 년씩, 뒤처져 있는 교육 제도에만 안주하고 있는 그들의 그릇된 사고 방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이제부터라도 하루에 열 시간씩, 열두 시간씩 공부를 하여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쇼펜하우어와도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을 배출해 내자는 목표가 없었고, 둘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이 비록, 大權을 잡기는 했지만, 그들이 결코 교육 제도를 만들지 못하고 우리 학자들이 교육 제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이 없었고, 셋째, 문화적 선진국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동교 출신 우대의 폐해----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대부분의 명문대학교들이 동교 출신의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 학자들은 모두가 ‘근친상간주의자들’인지도 모릅니다----에 대한 반성이 없었고, 넷째, 국립 대학교에서는 외국인 교수 채용이 불법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학문 중의 학문인 철학’을 중, 고등학교에서 가르치자는 교과 과정의 개혁의 목소리가 전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공부를 안 하고 놀기를 더욱 더 좋아하는 우리 학자님들, 수많은 권모술수와 음모로 철두철미하게 아첨꾼(애제자)들만을 생산해내고, 우리 한국인들의 혈세만을 축내고 있는 우리 학자님들, 무목표, 무의지, 무책임으로 일관하면서도 문화 선진국의 교육 제도의 장점은 전혀 알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사상과 이론만을 무차별적으로 베껴먹고 있는 우리 학자님들, 1억원이 넘는 거액의 연구비를 받고 타인의 글을 베껴내도 그 학자를 파면하자거나 사법처리하자고는 죽어도 말하지 않고 있는 우리 학자님들,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쇼펜하우어와도 같은 대 사상가들은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나오지 못하게 하고, 문화적 식민주의자들의 입맛에 따라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를 철두철미하게 무력화시켜 놓고 있는 우리 학자님들----, 존경하는 유종호, 김우창, 백낙청, 김치수, 김주연, 황동규, 이성복, 이인성, 정과리, 김정란, 김진석 선생님----, 과연, 우리 한국인들 중에서 세계적인 대 사상가들이 나오고, 우리 한국인들이 진정으로 ‘사상가의 민족’이라고 불릴 수 있는 날이 올 수가 있는 것일까요? 서울대학교가 세계에서 900등씩이나 하는 삼류대학교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반교육 개혁주의자들’이 전혀 공부는 하지 않고, 오직, 대학 제도를 권력투쟁의 장으로만 삼아왔기 때문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대한민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해외 유학을 다녀오셨거나 모두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명문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으신 분들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스물 일곱 살의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써서 세계의 사상을 석권했고, 30대 초반의 미셸 푸코가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인 {광기의 역사}를 써서 세계의 사상을 석권한 바가 있습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쇼펜하우어, {차이와 반복}의 들뢰즈, {소설의 이론}의 루카치, 발생론적 구조주의자인 골드만, {몽상의 시학}의 저자인 바슐라르 등, 모든 세계적인 제일급의 학자들이 다 마찬가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 중에서, 스물 일곱 살의 청년에 불과했던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간단히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니체는 철학의 관점에서 예술을 이해하고 예술의 관점에서 철학을 이해했던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철학자의 경직된 논리와 사유 체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호머,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셰익스피어, 괴테, 바그너, 또스트옙프스키의 문학 작품을 구체적인 전거로 삼아, 모든 것을 알기 쉽게 설명했고, 또한 예술가들의 감성에 치우친 논리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또 몇몇의 위대했던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받아들여 잠언적이고도 경구적인 문체를 개발하고, 모든 가치관들을 날카로운 펜싱용 칼처럼 베어버리는 놀라운 비판 정신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의 스승인 리츨 교수는 니체를 “딱딱한 고전문헌학의 논문을 불란서 소설처럼 쉽고 재미 있게 쓴다”라고 극찬을 하고, 이제, 겨우 24살 짜리의 청년을 스위스 바젤대학교 교수로 취임할 수 있도록 천거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어떠한 박사 학위의 논문도 쓴 일이 없는 그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해준 스승의 파격성을 의식하고, 그가 스물 일곱 살 때 쓴, 최초의 저서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하루바삐 그리스 문학과 그리스 신화를 수용하여 위대한 독일의 민족 신화를 창조하자고 역설하는 한편, 기존의 서정 시인과 서사 시인이라는 두 유형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두 유형의 비극 시인들의 상을 정립하게 됩니다. 아폴로 유형(서사 시인)과 디오니소스 유형(서정 시인)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존의 서사 시인들이 장중하고 웅장한 문체로 그리스의 {일리어드}, {오딧세우스}, 수메르의 {길가메쉬}, 이스라엘의 {출애굽기},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에서처럼, 위대한 민족의 영웅을 노래했다면, 기존의 서정 시인은 주관적인 개인의 감정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의 정서를 아름답게 노래했다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폴로 유형의 서사 시인들은 아름다운 꿈과 가상의 세계를 추구하며, 언제나 과도함과 지나침을 배격하고 엄격한 자기 절제를 요구했다고 할 수가 있으며, 디오니소스 유형의 서정 시인들은 ‘자아를 망각한 존재의 무근거 상태’로서 죄를 짓고 죄악을 정당화할 수 있는 황홀한 도취의 세계를 노래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은 사회 역사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구원이라는 소승적 세계에 머무르는 반면,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인들은 오딧세우스나 프로메테우스나 외디프스처럼, 고통에 고통을 가중시켜 나가면서 그가 속한 사회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대승적인 세계----위대한 비극의 주인공들의 삶----를 노래하게 되었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담하고 야심만만한 관점이며,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니체는 ‘음악으로부터 비극이 탄생했다’라는 전제 아래, 비극의 역사 철학적인 개념과 그 기원을 정립하고, 비극의 무대에서 합창단을 소외시키고 대사 중심의 드라마를 연출해냈다는 이유로 ‘소크라테스의 문화’를 어느 누구보다도 날카롭고 예리하게 비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니체는 그리스 문학과 그리스 신화의 위대성을 고찰하는 한편, 베토벤에서 바하로, 바하에서 바그너로 이어지는 독일의 음악 정신을 토대로 하여, 소크라테스 이후, 이미, 사멸해 버린 비극 예술을 하루바삐 다시 부활시켜 보자고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글로 역설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타국의 신화라는 나무를 성공적으로 이식(移植)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나무는 아마도 한 때, 외국적 요소를 무시무시한 싸움에 의하여 떨구어버릴 정도의 힘과 건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식된 나무는 대개 쇠약해 지고 위축되거나 순간적으로 무성하기도 하다가 이내 죽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독일 본질의 강력하고 순수한 핵심을 높이 평가하여 우리가 바로 그것에 의하여 강력하게 뿌리내린 외국적 요소의 제거 작업을 해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독일 정신이 자각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복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독일 정신이 라틴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그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것을 위한 외적인 준비와 격려는 이번 전쟁에서 보여준 무적의 용기와 피에 물든 영광 속에서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적인 필연성은, 이 길에 있어서의 선구적인 숭고한 투사들, 예컨대 루터 및 우리의 위대한 예술가와 시인들, 이들에게 동등하고자 하는 경쟁심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러나 독일 정신은 그런 투쟁을 자기의 수호신 없이, 자기의 신화적 고향 없이, 모든 독일적인 사물의 ‘부흥’ 없이 해낼 수 있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인이 고향에 돌아갈 길을 몰라 두려워하며, 자기를 오래 전에 잃어버린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줄 인도자를 찾기 위하여 두리번거린다면, 그는 단지 디오니소스의 새가 환희에 차서 유혹적으로 부르는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그 새는 그의 머리 위에서 선회하면서 그에게 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자 할 것이다”.----(니체, {비극의 탄생}, 청하, 142면)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쓸 당시에는 이처럼 민족주의자(반 프랑스와 반 유태주의자)에 불과했지만, 그의 두번째 저서인 {반시대적 고찰}에서부터는 반 민족주의자이자 친근한 유럽인의 이상을 제시하게 됩니다. 그의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은 헤겔학파의 철학자 다비트 슈트라우스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문화의 프랑스에 비하여 너무나도 형편이 없는 독일 문화와 독일 정신을 비판하게 됩니다. “모든 시인과 예술가는 동시대의 파렴치한이 되어야 한다”, “나는 언제나 동시대를 비판하고 동시대를 비판함으로써 그 시대에 참여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 아니 열 권의 책으로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단 열 개의 문장으로 말한다”, “잘 읽는다는 것은 느릿느릿 천천히 되풀이 읽는 것이다”라는 수많은 경구와 잠언들은 바로 {비극의 탄생}의 저자가 아니라면 쓸 수가 없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미셸 푸코의 ‘계보학’이나 ‘광기의 역사’도 니체의 철학의 지류에 불과하고, 데리다의 ‘차연’이나 ‘백색의 신화’도,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도 니체의 철학의 지류에 불과합니다. 존경하는 유종호, 김우창, 백낙청, 김치수, 김주연, 황동규, 이성복, 이인성, 정과리, 김정란, 김진석 선생님, 니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독일의 교육 제도가 꽃 피워낸 필연의 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愛知}의 편집자들은 훌륭한 교육 제도만이 위대한 천재들을 생산해낼 수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서양의 철학자들----, 일테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쇼펜하우어, 니체, 푸코 등은 진정으로 학문을 위해서 태어났고, 학문을 위한 사제----결혼도 하지 않고 학문을 위해서 출가를 했던 사제----들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산책을 하고, 또,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산책을 하고----, 어떠한 사치와 오락도 모르는 이러한 학자의 길을 통해서, 자기 자신들만의 사상을 완성하고, 그리하여 모든 인간들과 이 세계를 정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교육 제도 속에서 공부를 했으며, 그들의 스승은 누구이며, 그들은 또한 어떠한 친구들과 교제를 했으며, 왜, 그처럼 어렵고도 힘든 길만을 골라서 걸어갔는지, 대부분의 우리 한국인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들께서는 외국 교육제도의 장점과 대 사상가들의 학문의 태도 등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따라서 {愛知}의 기획 특집, ‘한국 교육 개혁의 올바른 길--외국의 교육제도의 장점 편’을 반드시 써주실 것이라고, 또한, 이처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여러 선생님,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 곧 위대한 천재의 생산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으며, 만일, 이러한 세계적인 대 사상가들이 21세기에 탄생하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인들의 미래는 정말로 암담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문과학에서의 패배가 정신의 IMF 사태로 나타났고, 자연과학에서의 패배가 경제의 IMF 사태로 나타났습니다. 또, 언제, 어느 때, 선생님들의 후손과 제자들이 문화적 식민주의자들의 손짓과 입맛에 따라서 수많은 실업자로 전락을 하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부디 한국의 교육 제도를 개혁하고,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를 양성하기 위해서라도, 아니, 풍전등화 속의 우리 한국인들을 위해서라도 꼭 기획 특집, ‘한국 교육 개혁의 올바른 길--외국의 교육 제도의 장점 편’의 원고를 집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 상, 사상가만이 고귀한 명예이며, 삶의 완성이며, 보다 완전한 인간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선생님들과도 같은 외국 문학의 석학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꿈을 꿀 수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여러 선생님, ‘대한민국, 만세, 만세’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원고 매수: 70 매 내외
원고 마감일: 2000년 10월 15일
----(계간시전문지 {愛知} 2000년 가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