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 때문에 마음이 괴로울 때(요21:1-14)
2024. 4. 14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이 말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돌아갔던,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폭탄선언이다. 이런 종류의 폭탄선언은 늘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베드로는 왜 갑자기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말을 할까? 이것이 그의 진심일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진 것일까? 그래서 지금부터는 그만 믿으려고 결심이라도 한 것일까?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주님을 따랐던 모든 시간들이 허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예수님의 부활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일까?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전후 상황들을 보면, 베드로가 이런 이유들로 인해 다시 옛날(어부)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후에 빈 무덤도 직접 확인했고, 예수님이 나타나서 직접 손과 발도 보여주셨고, 심지어 구운 생선토막까지 드시는 것을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이다(요20:19-29, 눅24:36-43).
그러면 왜 그는 느닷없이 이런 당황스러운 말을 했을까? 베드로의 이런 돌발행동은 그의 심리상태를 이해해야 보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베드로의 마음상태를 자세히 보면,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예수고 뭐고 이제는 다 귀찮아서 때려 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부활을 못 믿어서도 아니다. 조금은 충격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여전히 주님을 사랑했고,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다만 마음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났던 것뿐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나)의 내면의 모습을 비춰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품으셨던 사랑의 주님을 우리도 깊이 만나고 체험하자.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돌아왔다(요21:1-2).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들이 갈릴리에 가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미 먼저 도착하여 계시고, 자신들 찾아오실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이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고, 그곳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마28:6-10, 막16:7).
그런데 정작 베드로는 갈릴리에 도착하자 ‘자신은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베드로가 누구인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수제자였다. 그는 주님을 감동시키는 신앙고백도 했고(마16:16), 자신은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온갖 큰 소리는 뻥뻥 쳤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주님을 멀찍이 따라가다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
예전에 교회 주변 어느 동네 마을회관에서 장수사진 찍을 때 있었던 일이다. 몇 분의 남자 어르신들이 장수사진을 찍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복장을 하고 회관에 오셨다. 얼굴 표정이나 분위기를 보면 분명히 찍고 싶어서 오신 것 같은데, 입에서는 ‘뭐~ 어어~’를 연발하시면서 안 찍어도 된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물론 나중에 마지못해서 찍히는 듯이 하시면서 ‘어어~ 그럼 한번 찍어볼까’라고 하시면서 찍히셨다. 후에 사진을 받았을 때, 굉장히 좋아하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러면 왜 그분들은 마음과 행동이 달랐을까?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에게 보이는 체면의식과 자존심 또는 약간의 미안함 같은 것들이 내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베드로의 행동도 이와 비슷하다. 언뜻 보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했던 말이 베드로가 또 다시 주님을 배신하고 옛날로 돌아가려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의 내면에는 너무너무 간절하게 부활의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주님을 더 빨리 보고 싶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눈물로 용서를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주님에 대한 죄송함과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뻔뻔하게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배 위에서 다른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라는 소리쳤을 때, 베드로는 지체 없이 겉옷을 두르고 바다를 향해 뛰어들어서 약 90m(“오십 칸쯤 되므로” 요21:8)의 거리를 거침없이 수영해서 갔다. 그 바다가 어떤 바다인가? 전에 물 위를 걷다가 빠져서 죽을 뻔 했던 트라우마가 있는 바다이다. 그러나 그런 트라우마도 주님을 향해 폭발한 사랑을 박을 수는 없었다. 베드로의 뜨거운 심장은 마치 최고 출력을 하는 선박의 엔진과도 같았고, 그의 손발은 강하게 회전하는 프로펠러와도 같았다.
그런데 이러한 베드로의 강렬한 마음이 바로 우리 영혼의 간절한 마음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는(실제로 가버린) 베드로의 복잡한 심리가 지금 몸은 주님을 떠나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주님을 더 그리워하는 사람들(잃은 양들)의 마음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많다.
또 어떤 때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도 너무 힘들어서 입으로는 ‘나 안 할거야!’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내면의 속사람은 이와 반대로 ‘주님, 사실은 나 더 잘하고 싶어요. 주님, 저 살고 싶어요. 주님을 떠나면 저는 못 살아요’라고 절규할 때가 있다. 성도들은 그들의 속사람의 절규와 탄식을 들어야 한다. 주님, 우리에게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시고, 그들을 품을 수 있는 예수님의 심장을 갖게 하소서…….
주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수치심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가셨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베드로와 제자들의 상처와 수치심을 치유하신 방법은 용서와 격려였다. 예수님은 용서와 격려를 통해서 그들을 다시 예수님만 사랑하는 사람으로 회복시키기 원하셨다. 이 순간 나에게도…….
미국의 오럴 로버츠 대학교(Oral Roberts University)의 총장인 마크 러틀랜드(Mark Rutland) 박사는 그의 저서 [자비의 물결, Streams of Mercy]에서 미국인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에 관한 설문조사를 언급했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세 가지 말은, “사랑합니다(사랑해)”, “용서합니다(괜찮아)” 그리고 “식사합시다(밥 먹자)”였다. 이 세 가지 말은 모두가 소중한 말들이고, 서로 연관성이 있다. 본설교자는 이 세 가지 말들 중에 세 번째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흔히 우리 한국인들은 가족을 식구(食口)라고도 말한다. 식구가 무슨 뜻인가? 식구는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이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도 갈릴리 호숫가에서 식사를 준비해 놓으시고,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요21:12)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는 한 마디가 너무도 감동적이다. 쉽게 말하면, “와서 밥 먹어라”는 말씀이다. 그 밥 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녹아있다. 이를 통해서 주님은 그들을 용납하시고, 여전히 사랑하는 한 식구임을 보여 주셨다(“베드로야 괜찮다. 이해한다. 용서한다. 우리는 여전히 한 식구야....”). 이때 주님이 식사를 준비하셨던 바위가 지금도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데, 그 바위를 “맨사 크리스티(MENSA CHRISTI,그리스도의 식탁)”라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어떤가?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여전히 수치심과 죄송함으로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해, 당신의 십자가 핏 값으로 세우신 교회에서 맨사 크리스티(그리스도의 식탁)를 베푸시고, 생명의 양식을 함께 먹자고 초청하신다.
또한 더 나아가 우리들이 세상으로 고기 잡으러 가버린 잃어버린 영혼들(잃은 양들)을 향해, 주님을 대신해서 가자. 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과 함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그 심령을 격려하시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수치심과 내면의 고통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식탁에 그들도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수치심이나 자괴감 또는 사역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이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힘들 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같은 마음과 행동이 다른 말을 하지 말고, 더욱 주님 앞에 나아가자. 혹시 이미 세상 속으로 물고기 잡으러 떠난 분들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사모하는 내면의 영혼의 갈망을 외면하지 말고, 주님의 식탁 앞으로 나아가가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