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문화(東洋文化)의 향기(香氣)
1. 중국의 4대 미녀(美女)
<3> 비련(悲戀)의 여인 왕소군(王昭君)
전한(前漢, BC206~AD5) 시대, 원제(元帝)의 후궁이었던 왕소군(王昭君)은 중국 역사상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여인으로 훗날 흉노(匈奴)의 왕 호한야(呼韓耶)에게 화친을 목적으로 시집을 가게 되는데 왕소군의 원래 이름은 장(嬙)이고, 아명(兒名)은 호월(皓月)이며 자(字)는 훗날 소군(昭君)으로 불린다.
BC 36년, 전한의 11대 황제 원제(元帝)는 전국에 궁녀를 뽑아 올리라는 조서를 내렸다고 한다.
왕소군은 열여덟 살에 이미 가무(歌舞)와 비파(琵琶) 연주에 능했고 자색(姿色)이 뛰어나 궁녀로 선발되었는데 당시에는 뇌물을 주면 왕의 시중을 드는 궁녀로 선발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숫자가 수천 명에 달하니 황제가 일일이 선발된 궁녀를 확인하는 일은 불가능했기에 화공(畵工)이 초상화를 그려 올린 것을 보고 간택했다고 하는데 당시 궁녀들은 황제를 하룻밤이라도 모시기 위해 화공들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소군(昭君)은 집안이 가난하고 궁(宮)에 연줄도 없었던 데다 원제(元帝)를 속일 마음도 없어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고, 그 결과 평범한 얼굴에 큰 점이 찍힌 추녀(醜女)로 그려졌다. 그리하여 소군(昭君)은 5년간, 원제(元帝)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궁녀 신분에 머물며 외롭고 쓸쓸한 궁궐 생활을 비파(琵琶)를 연주하며 이겨냈다고 한다.
당시 북방의 흉노(匈奴)는 정권 다툼이 심했는데 친형인 질지선우(郅支單于)와 정권을 다투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는 형에게 밀려 한(漢)의 장안(長安)으로 와서 신하의 예를 갖추고 있었다.
BC 51년, 한나라와 동맹 관계를 구축한 호한야(呼韓邪)는 이번 기회에 스스로 한나라의 사위가 되길 청하며 화친을 강화하고자 했다. 한나라는 건국 후 계속되는 흉노와의 갈등 속에서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했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를 종실(宗室)의 공주와 정략 결혼시켜 평화를 유지하기로 한다.
원제(元帝)는 크게 기뻐하며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고 자신의 부름을 받지 못한 궁녀들에게 연회 자리에서 술을 따르도록 했다. 그중에는 왕소군(王昭君)도 끼어 있었는데 소군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긴 호한야는 종실의 공주가 아닌 궁녀 중에서 한 명을 택해도 좋다며 왕소군을 선택한다.
원제는 공주를 선택함으로써 생길 어려움을 피할 수 있다는 기회로 보고 호한야의 제의를 기꺼이 수락했다.
원제는 ‘흉노에 시집가는 궁녀는 공주와 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로써 뒷일을 보장해주기까지 했다. 원제(元帝)는 호한야선우와 왕소군을 장안에서 결혼시키고 그녀에게 ‘한나라 황실과 황제를 빛내라’는 의미가 담긴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흉노족 차림의 붉은 옷을 입은 신부 왕소군을 태운 말이 떠날 때 원제는 처음으로 절세미인이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제야 왕소군의 미모를 알아차린 원제는 자신의 결정을 크게 후회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왕소군의 출가를 번복할 경우 호한야선우와의 신뢰가 깨지고 흉노와의 관계가 나빠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궁으로 돌아와 궁녀들의 초상화를 대조해 본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화가 실물과는 전혀 다르게 그려진 데다 커다란 점까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분노한 원제는 초상화 제작 과정에서 뇌물이 왕래했음을 간파하고 자신을 기만한 화공(畵工) 모연수(毛延壽)를 참수(斬首)했다고 한다.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과 이별하고 오랑캐로 부르던 흉노 훈족(Hun族)의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먼 북쪽 오랑캐의 땅으로 떠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왕소군이 훈족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 마침 기러기 떼가 그녀의 머리 위를 날았다.
그러자 그녀는 비파(琵琶)를 꺼내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 포함된 노래 ‘출새곡(出塞曲)’이 바로 이 노래인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노래와 미모에 취해 날갯짓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 이후 왕소군은 ‘기러기가 떨어졌다’라는 의미의 ‘낙안(落雁)’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출새곡(出塞曲)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오랑캐(훈족)의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겠구나.
BC 31년, 호한야선우가 세상을 떠나자, 20대 초반이던 왕소군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흉노족의 풍습에 따라 호한야의 장자(長子) 복주루(復株累)와 혼인해야만 했다.
왕소군은 이러한 풍습에 거부감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한나라의 제12대 황제 성제(成帝)의 만류로 그 뜻을 접어야만 했다. 다행히도 젊었던 복주루가 왕소군을 사랑하여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다. 복주루와 다시 결혼한 왕소군은 11년간 그와 살면서 두 명의 딸을 낳았고, 그 사이 한나라에 있던 왕소군의 오빠들은 제후(諸侯)에 봉해졌으며, 그녀의 두 딸인 수복거차(須卜居次)와 당우거차(當于居次)도 한(漢)의 장안(長安)에 머물며 원제(元帝)의 황후를 모시는 등 두 나라 간에 평화가 지속(持續)되었다. BC 20년, 복주루가 사망했고 이후 왕소군은 홀로 생활하다 흉노 땅에서 사망했는데 그녀는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소재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묻혔다. 그녀의 무덤은 가을에 북방의 풀들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그 무덤의 풀만은 늘 푸르름을 유지한다고 하여 ‘청총(靑塚)’이라 불린다고 한다. 훗날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당(唐)나라의 시인 이태백(李太白)이 쓴 ‘왕소군(王昭君)’이라는 시이다.
왕소군(王昭君)
昭君拂玉鞍 上馬啼紅頰(소군불옥안 상마제홍협)
소군이 옥으로 만든 말안장을 잡고 말 위에서 울어 뺨이 붉어졌구나.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금일한궁인 명조호지첩)
오늘은 한나라 궁궐의 사람인데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의 첩이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