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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묵상글 들 ( 주님 탄생 예고 축일 -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이에게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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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 탄생 예고 축일 -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이에게도
징표와 예고
우리 전례는 오늘 주님 탄생 예고 축일 전례 독서로 동정녀가
임마누엘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하는 이사야서를 선택했는데
여기서 주님은 아하즈에게 하늘의 표징을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신약의 주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사악한 세대라고 응답하신 것처럼 사악한 것인데,
그렇다면 표징을 청하라는 말씀이 주님의 진심일까요?
아하즈를 떠보는 말씀이 아닐까요?
떠보는 말씀이 아니라 진심일 겁니다.
아하즈는 하늘의 징표조차 구하지 않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징표를 청한다는 것은 그래도 믿으려는 마음이 한 구석이라도
있는 사람일 텐데 이 인물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은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하느님 힘에 의탁하는 인물이 아니라
당시 이민족의 최강자인 아씨리아의 도움에 의지하려던 사람이기에
예언자를 통하여 표징을 청하라는 말을 듣고서도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고,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그럴듯하게 위선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 중에는 하늘의 징표를 청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늘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하늘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나
하늘의 힘이 이 땅에 개입하는 것을 싫어하고
철저하게 이 땅의 힘의 논리에만 골몰하는 사람은 하늘을 안 쳐다봅니다.
이런 그에게 하느님께서 원하지도 않는 표징을 보여주신다며
동정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을 낳게 될 거라고 예고하십니다.
이것은 징표를 보여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예고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늘을 믿지도, 쳐다보지도, 징표를 청하지도 않는 자에게
엄청난 예보를 하느님께서 하시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보는 아하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믿음이 대단한
사람일지라도 믿기 힘든 예고이고 그래서 아하즈가 아니라
마리아도 이런 것을 청하지 않았을 것이고 예고의 말씀이 있었을 때
마리아도 바로 믿을 수 없었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은 인간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청하지도 않았던 겁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언감생심 우리 인간이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철저히 하느님의 주도하심이고 그래서 완전히 하느님 은총이지요.
그러므로 이 은총을 믿고 받는 사람 그러니까 마리아와 같은 사람만
임마누엘 하느님이 함께 계시게 되겠지요.
그런데 역사적인 임마누엘 예고는 아하즈와 성모 마리아께 주어졌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임마누엘 예고는 계속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전에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감히 생각지도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이젠 우리도 임마누엘 하느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아하즈처럼 되시겠습니까?
성모 마리아처럼 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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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120326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저는 3월17일 청원군 노인복지관 관장을 겸임하는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왜 저에게는 이러한 십자가를 주십니까? 지금도 벅찬데.....거두어달라고 청해야 하나요?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하신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짊어지고 갈 힘도 주시리라 믿으며 순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순명을 하라고,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강론을 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교구에는 정기적인 사제 인사이동이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인사권자인 주교님께서 발표하기도 전에 신부님들 사이에는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서 누가 어디로 갈 것이라고 인사이동을 다 합니다. 그러나 막상 인사발령 공문을 받으면 의외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해마다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인사권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사제로 서품 받으면서 독신과 순명을 서약하며 그리스도를 닮은 가난한 삶을 살 것을 살 것을 권고 받습니다. 그렇다면 주교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삶의 자리가 복된 곳이고, 그곳에서 기쁨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 서운함을 갖기도 합니다. 주어진 현실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 이 말씀에 결국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이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순명은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1,37) 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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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오늘은 주님탄생예고 대축일입니다.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대화>는 천사의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당황, 곧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함입니다(루카 1,29).
<둘째 대화>는 천사의 아기 잉태 예고와 그 아기의 신원과 소명에 대한 마리아의 물음, 곧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 곧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입니다.
이 대화를 통하여, 마리아의 깨달음은 세 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고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달음입니다.
<둘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주님의 여종”임을 깨달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기 잉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명에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사랑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내 안에서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피앗)라는 동의, 곧 받아들임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분의 은총이 나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내 안에서 하시도록 나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처럼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께 결혼의 단란함과 미래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어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그것을 희망하고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말씀에 대한 “믿음”의 봉헌이었습니다.
그분의 희망 안에 일치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입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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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사람이 되시는 위대한 사실을 오늘 복음은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곧 인간의 차원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들어 올려졌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은 이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룰 수 있게 하였고, 그 마리아의 자세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된다.
복음: 루카 1,26-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복음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남자가 들은 것이 아니라 오직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새로운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행하시는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35절)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물 위를 감돌며 창조를 이루신 분도 성령이시다.(창세 1,2 참조)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아들이신 말씀을 잉태하시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낳아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말씀을 잉태한다는 것은, 마리아와 같이 자신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한다. 나 자신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올바로 따를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고 자신을 버리는 고통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낳아줄 수 있을 것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이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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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부르심, 응답>송영진 모세 신부님.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28-31)”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8).”
1) ‘예수님 탄생 예고’는 일방적인 명령이나 통고가 아니라,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로 너를 선택하셨다.
너는 이 부르심에 응답하겠느냐?”)
이 부르심에 응답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마리아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일입니다.
(응답하지 못하겠다고 대답해도 죄가 되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 없는 로봇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셨습니다.
2) “천사가 직접 나타나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면, 무슨 부르심이든지 간에
나도 금방 응답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세의 경우,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집트로 가서 백성을 구하라고
말씀하시자(탈출 3,7-10), 그는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탈출 4,10.13).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시라는 모세의 말은,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말입니다.
<말솜씨가 없다는 것은 핑계이고, 살인을 하고 도망친 입장에서(탈출 2,12.15)
이집트로 되돌아가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파라오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몹시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탈출 3,12).”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한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인사말도
모세의 경우처럼 ‘약속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3) 판관 기드온의 경우,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판관 6,15).”
기드온은 자기가 가장 약한 지파의 가장 약한 씨족에 속해 있다는 것과
또 자기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지 못하고서 의심하는 말을 먼저 했고,
자기가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판관 6,17).
그때 하느님께서는 그가 청하는 대로 표징을 보여 주시긴 했는데,
그 표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라는 약속입니다(판관 6,16).
4)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경우, 그는 천사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믿지 못하고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루카 1,18).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을 한 것은,
메시아의 선구자가 될 요한의 아버지가 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한 것인데,
즈카르야는 자신과 아내의 나이가 많다는 점 때문에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고,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가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 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즈카르야의 경우는 기드온의 경우와 비슷한데, 즈카르야가 얻은 표징은,
말을 못하게 되었다가 아기가 태어난 뒤에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일입니다.)
모세, 기드온, 즈카르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하느님 쪽의 설득과 설명이 필요할 때도 많고,
사람 쪽에서 오랫동안 심사숙고와 고민을 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5) 마리아의 경우,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는데(루카 1,34),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라고
부정하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사의 대답을 보면,
천사는 아기의 잉태 과정과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루카 1,35-37).
(35절-37절에 있는 천사의 대답은,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대답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마리아의 질문은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저는 미혼이고 동정녀인데,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바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까?”)로 해석됩니다.
6) 천사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마리아가 응답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생각은 ‘고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대한 ‘묵상’입니다.
사실 천사가 전해 준 일은, 마리아 입장에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
원한 적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에 관한 말씀을 듣자마자 금방 응답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라는 말은, 마리아가 깊이 생각하고
결심하고 응답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일방적으로 예수님 탄생을 예고하는 말만 하고서 곧바로 떠난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응답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응답을 듣고 나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7)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부르심이 주어집니다.
그 부르심이 평소에 원하던 일에 관한 부르심일 수도 있고,
원하던 것과는 다를 수도 있고,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나의 인간적인 판단들과 소망들을
모두 내려놓고서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는 일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렵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고, 훌륭한 일이 됩니다.
(마리아의 경우는 인간의 상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한 위대한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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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말씀을 사람이 되게 하시는 성령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영을 통해 말씀을 받고 내다본 대로, 동정의 몸으로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하느님을 잉태하시리라는 전갈을 천사가 전해 주었습니다.
이 성령 잉태와 동정 출산은 천지 창조에 버금가는 하느님의 창조 업적이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진리를 전해 주고 고통조차도 사랑으로 바꾸어 줌으로써
인간과 소통하시는 성령의 역할이었습니다(참조: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 39-41항).
다윗 가문의 요셉과 막 정혼한 처지이면서도, 성령께서 천사를 통해
이 엄청난 전갈을 알려 주었을 때 마리아께서 순명하실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아나빔 전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왕들과 사제들과 궁정 예언자들의 우상숭배적 행실과 이로 인한 민족적 고난에도 불구하고,
정통 예언자들이 자신의 일생과 목숨을 걸고 전해 주었던 하느님의 말씀과 이 말씀을
전해 듣고 굳게 믿어온 아나빔들의 믿음을 이끄신 성령께서 확인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고난은 물론 아나빔들의 개인적인 고뇌까지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바꾸어 주신 성령의 떨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성모 영보(領報) 사건은 우선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된
단초를 알려 주는 일이면서도, 성령 잉태와 동정녀 출산이라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을 알려 주는 일인가 하면, 숱한 역사적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당신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느님의 섭리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마리아야말로 구약시대 아나빔들이 대를 이어 전해준
믿음을 간직한 진정한 이스라엘이심을 입증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구원적 의미가 더 있습니다.
이 성모 영보로써 에덴동산 시대에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저질렀던 원죄가 비로소 극복될 수 있는 길이 드디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함으로써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였습니다.
그 전에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조성해 놓으시고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었습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그런데 사탄은 사람에게 접근해서는 이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유혹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1).
그랬더니 사탄의 간계를 눈치채지 못한 하와가 순진하게도 이렇게 받았습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창세 3,2-3).
여기서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 열매를 따 먹어도 좋다고 허용하셨지만
그 선악 나무 열매만큼은 따 먹지 말라고 하셨을 뿐인데,
하와는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하여 사탄에게 빌미를 주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 선악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하와의 후손이 이 사탄과 싸워 이기리라고 사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여기서 그 여자는 하와인데, 그 여자의 후손이 아나빔들에게 예고되었습니다.
결국은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께서 순명으로 이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리아의 믿음과 순명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 유혹과 십자가 승리를 아울러 예언하신 원복음(原福音)이라고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시절에 요셉과 마리아로부터 아나빔이었던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준 신앙의
전통을 배우셨을 것인데, 오늘 미사의 화답송에 이런 아나빔들의 전통어린 신앙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님,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편 40,7-8).
무엇보다도 자의식이 형성되신 후부터는 하느님과 기도로 직접 소통하시면서
이런 원복음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이끄심을 잘 깨달은 신약의 아나빔들인 히브리인 출신 신자들이
그에 대한 메아리를 오늘 독서로 남겨 놓았습니다.
“형제 여러분,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4-7).
이렇게 예수님의 속죄 희생으로까지 증폭된 성령의 떨림이 이제 우리네 혼의 울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모영보 전갈은 우리네 삶에서도 말씀이 울려 퍼지도록 발생한 성령의 떨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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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세상에는 지금도 삶과 죽음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딘가에서는 사고로, 전쟁으로, 무관심으로, 미움과 욕심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그런데 또 어딘가에서는 사랑으로, 믿음으로, 위로와 배려로, 희생으로 또 다른 생명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의 삶에도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고, 또 우리 곁에 삶과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아 갑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시기심과 질투로, 이기심과 욕심으로 누군가를 짓밟고 죽이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배려하며 위로하고 안아 주면서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저마다 행동으로 삶과 죽음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사순 시기, 유다인들의 시기와 욕심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이 사순 시기에 생명의 탄생을, 새로운 구원의 삶을 가져다주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생명의 탄생 예고에도 우리네 하루처럼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의 알림은 젊은 약혼녀의 죽음을 뜻합니다. 천사를 보고 죽음의 두려움을 체험한 마리아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더 편하고 더 안정적인 삶을 살고자 마리아는 아무런 응답도 행동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거부하였다면 그 마음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음모를 꾸미고 군중을 선동하였던 유다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일 것입니다. 자신만 살려고 누군가를 죽이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한마디로 자신을 희생하고 내어놓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살리게 됩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길을 갈 수도 있고, 아니면 희생과 죽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 두렵지만 믿고 내어놓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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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여러분에게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지요? 작년에 어머니는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사진과 기억 속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강한 어머니’였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셨던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는 연탄배달, 쌀 배달을 하셨습니다. 6년 동안 밥장사를 하였습니다. 집에서 밥과 반찬을 만들어서 구청까지 들고 갔습니다. 형들과 저도 함께 했습니다. 어머니의 젊은 날의 고생은 나중에 잦은 병치레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사를 가도 어머니는 모든 짐을 혼자서 옮겼습니다. 어머니 혼자의 힘으로 오랜 전세살이를 마치고 우리 집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바깥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자리와 권위를 늘 지켜주셨습니다.
‘충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학교는 가지 않아도 야단치지 않았지만, 성당엘 가지 않으면 야단을 치셨습니다. 어머니의 강함은 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성당에서 반장으로 봉사하였고, 돌아가시기 전에도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수도자와 성직자의 어머니이기에 더욱 기도하였고, 겸손하였습니다. 돌아가신 어르신들을 위한 ‘연도’를 꼭 기억하였고, 제게도 미사를 봉헌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제가 작은 본당의 신부로 있을 때는 3년 동안 밥을 해주셨습니다. 방문 교리도 하였고, 환자 방문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대녀들의 신앙을 챙겨주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사제생활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도 어머니 기도의 힘입니다.
‘꿈이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배움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어머니의 꿈은 많이 배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많이 배웠던 아버지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아버지를 보지 않았고, 신앙의 기준으로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강직하고, 지혜로운 아버지를 평생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앙 안에서 두 분은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수도자와 성직자의 부모가 되신 것을 감사하였고, 기뻐하였습니다. 꿈이 있었기에 어머니는 고통 중에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꿈이 있었기에 어머니는 가난함에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꿈이 있었기에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잘 마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기쁘게 가셨습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했고, 마리아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한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교회는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과 사랑을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교회는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으로 공경합니다.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면서 삼위일체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마리아에 대한 지극한 공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어머니에게 요한 사도를 아들로 부탁했습니다.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지기에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는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를 ‘복되신 동정녀’로 공경합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인한 잉태였기에 마리아는 동정녀라고 교회의 전승은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마리아의 몸에서 ‘임마누엘’ 주님이 태어나셨습니다. 하와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고, 죄의 결과는 죽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순종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께서는 죄, 죽음,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동정녀는 생물학적인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은 동정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동정을 지키는 사람을 동정녀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정결하게 사는 이들이 동정녀입니다.
마리아는 ‘강한 어머니이며 신앙의 여성’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마리아는 예수님 십자가를 함께 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내려진 예수님을 무덤에 묻기 전에 마리아는 가슴에 묻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에게 마리아는 힘들 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두려울 때는 용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마리아는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당찬 여인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구세주의 어머니를 알아보았고, 태중의 아이까지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구름 속에 있는 고귀한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천상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는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동정녀이기 전에, 천주의 모친이기 전에 마리아는 강한 어머니였고, 신앙의 여성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면서 ‘마리아의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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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주님과 함께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의 삶 -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평화가 없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희망이 없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자유가 없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 않으면 행복하다 할 수 있을까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자 평화요, 희망이자 자유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 때 샘솟는 기쁨, 평화, 희망,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사순시기 대축일 배치가 절묘합니다. 얼마전 성 요셉 대축일과 짝을 이루며 광야 사순시기 오아시스와 같은 신선한 역할을 하는 오늘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오늘 대축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기쁨, 평화, 희망, 자유의 삶인지 배우게 됩니다.
첫째, 은총恩寵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은총 가득한 축복 받은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으로 이를 깨달아 알 때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묵묵히 정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즘 소리없이 곳곳에 샛노랗게 피어나고 있는 민들레꽃이 감동입니다. 아무리 낮은 곳에서 작게 피어나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습니다. 흡사 나자렛 보잘 것 없는 마을의 마리아 같습니다. 그러니 마리아 역시 요셉처럼 주어진 제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정주의 삶에 한결같았던 분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자리 탓할 것은 없습니다. 어디서나 뿌리내리면 거기가 제자리요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모실 수 있으면 됩니다.
바로 마리아가 그러했고 때가 되니 마리아를 알아 본 눈밝은 하느님께서 참으로 겸손히 당신 천사를 통해 방문하십니다. 마리아의 내면의 어둠은 다음 말씀과 더불어 일거에 은총의 빛으로 환히 밝아졌을 것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몹시 놀란 마리아에게 거듭된 천사의 격려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마리아는 바로 축복 받은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은총 가득 받은 복된 존재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깨달아야 진정 자존감 높은 행복한 삶입니다. 위 말씀은 제가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주 예전 이 말씀을 써드렸을 때,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같은 말씀’이라 환호하던 어느 수녀님의 낭랑한 음성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둘째. 사명使命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하나가 신의 한 수 같은 존재입니다. 이 진리는 제가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수도형제 하나하나를 보며 깨닫는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용인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묘합니다. 그러니 각자 하느님 주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 사명을 다함이 중요합니다. 이래서 진정성 가득한 끊임없는 참된 회개가 절실합니다.
참으로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선물이 됩니다. 아름답습니다. 행복합니다. 제자리를 벗어날 때 짐이요 혼란을 조성하며 결코 행복하지도 못합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바로 이 고백이 예수님 삶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게세마니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며 ‘내뜻이 아니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달라시던 말씀을, 또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온전히 비워 모두를 하느님께 드렸으니, 바로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모전자전, 그 어머니 마리아에 그 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새삼 우리의 사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오늘 지금 여기서 내가 이룰 하느님의 뜻은, 사명은 무엇이겠는가 끊임없이 간절히 묻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추호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순종順從입니다.
우리의 순종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침묵중에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마음에 담아 두고 곰곰이 생각한 관상가의 전형인 마리아의 순종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일방적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순종의 동의 없이는 일하시지 못합니다. 주님 천사의 말씀을 경청한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순종의 응답에 즉시 떠난 천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참으로 고마웠을 것입니다. 마리아야 말로 “예스(Yes)의 사람” 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인류 역사상 전환점이 된 역사적 순간입니다. 모든 것이 이제 결코 똑같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마리아의 무조건적 예스(Yes)의 응답에 감사해야 할 것이며 우리 역시 하느님께 예스(Yes)로 오늘, 또 앞으로도 남은 생애 예스(Yes)로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의 무조건적 순종의 응답으로 마침내 하느님께서 오매불망 기다려오던 이사야 예언도 성취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으로 ‘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신 임마누엘 예수님과 늘 함께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은총과 사명, 순종의 삶에 충실하며, 임마누엘 당신과 함께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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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마라톤 전 구간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포기하는 구간은 언제일 것 같습니까? 체력적으로 힘든 마지막 구간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5~10km 지점이라고 합니다. 이때 가장 많은 낙오자가 발생하게 되는데, 오히려 30km 지점을 지나서는 낙오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이 가득해서 초반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30km 지점을 지나면,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에 낙오하지 않고 끝까지 달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삶을 많은 사람이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실제로 삶 안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5~10km 구간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인내를 갖고 사는 사람은 30km 지점을 달리는 중입니다. 이들은 포기라는 말을 아예 잊은 상태입니다.
마라톤을 시작했다가 곧바로 포기하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마라톤이 내게 맞지 않아. 나는 수영을 할 거야. 나는 사이클을 할 거야….’ 그러나 다른 것을 해도 초반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들고 지쳐서 숨이 턱 밑까지 왔을 때, 비로소 포기라는 단어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포기’라는 단어를 아예 내 생각에서 지워버려야 합니다.
성모님도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것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으로 인해 무조건 순명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라는 특별한 인사를 받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특별함은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일에 대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일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데 함께 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와 달리 성모님께서는 놀랐지만 의심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의 물음은 그녀의 동정 서원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동정 잉태라는 거룩한 신비에 대한 숙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순명은 마지막 말씀에서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성모님의 믿음을 다시금 묵상했으면 합니다. 주님의 일을 포기하지 않는 성모님의 믿음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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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없는 것처럼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내게 마지막 순간이 올 때도 기쁘게 눈감을 수 있지 않을까?(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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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
금붕어는 보통 5cm의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조그마한 어항에 관상용으로 키웁니다. 그런데 만약 이 금붕어가 계속 자란다면 어떨까요? 어항의 크기도 맞지 않겠지만, 금붕어가 크면 도저히 아름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2020년 8월 8일, 인도네시아의 ‘토바’라는 호수에서 무게 15kg 크기가 1m가 넘는 거대 금붕어가 잡혔습니다. 직접 잡은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대단하다는 생각보다는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붕어는 아름답다고 말해야 하는데, 징그럽다고 말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금붕어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두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닐까요?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 보시기에 징그러운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의 삶을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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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기도드립니다.(루카 1, 38)
사람이
있는 곳에
주님도
계신다.
여기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주님께서 오신다.
주님의 탄생
예고는
설레이는
희망의
탄생이다.
희망은 진짜와
진심을 나누는
우리 삶의 모든
여정이다.
그래서
모두를
살린다.
하느님
사랑의 방식은
언제나
살아있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말씀의 접촉은
소통의 힘찬
시작이 된다.
마리아는
말씀과 함께
말씀의
길을 걸어간다.
소통은
탄생이다.
하느님께서
희망의 대화를
시작하신다.
희망은
참으로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희망의 뒷면에는
구체적인 사랑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
이기적이지
않기에
길이 되신다.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다.
같이와
함께 사이에
말씀이 있고
말씀의
탄생이 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따르는
은총의 사순이다.
이루어져야 할
이루어질
하느님 말씀의
탄생 예고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말씀의 탄생이
있다.
말씀의 여정은
주님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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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구원을 위한 순종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는 천사가 들려 준 잉태 소식에 놀라지만 이내 순종합니다. 율법을 익혀온 유다의 처녀로서 혼전 잉태로 벌어질 후폭풍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인데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제1독서에서는 일찌기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언급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주실 이 표징은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이었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통해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감추어진 신비였지요.
자신들을 이민족의 압제에서 구해 줄 메시아, 다윗의 영화를 되찾아 줄 번영의 메시아를 깨어 기다리는 여느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마리아 역시 그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하지만 천사의 발현부터 처녀 잉태의 예고까지 마리아가 맞닥뜨린 현실은 이미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과정을 넘어섰기에 그녀는 놀라고 의문스럽고 두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두려움을 딛고 고백한 응답은 그저 "어쩔 수 없으니 그렇게 하세요." 하는 식의 수동적 동의가 아닙니다.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분명히 끝을 맺지요. 이는 자신도 동의와 수용을 넘어 간절히 열망하고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이며 그래서 창조적인 순종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율법에 따라 바치는 황소와 염소의 피를 원하지도 기꺼워하지 않으심을 아십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의례는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열정과 진정성을 잃은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스스로" 아버지께 완전한 제물로 드리시는 데 기꺼이 순종하십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육화하심으로써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조건으로 시작하십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져 초능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동떨어진 신이 아니라, 육신을 취한 이로써 그 실존을 몸소 겪으며 성장하고 활동하다 죽으셨지요.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의 제사로 원죄의 상처로 허덕이는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순종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었기 때문이지요.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입니다. 은총, 기쁨, 주님의 현존이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는 우리의 현실이지요. 때로는 천재지변이나 불가항력적 사건으로, 때로는 우리 각자의 죄와 나약함으로, 때로는 관계적 환경적 한계로 먹구름이 드리우고 안개에 싸여 정말 우리가 그런 사람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기도 하지만, 우리의 현실 맞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맞게 건네시는 말씀에 귀기울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마리아와 함께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주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으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요. 대축일 함께 기뻐하며 기꺼운 순종의 행복을 아는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겸손과 순종으로 구원 사업에 협력하신 마리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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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탄생예고대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1)
오늘은 말 그대로 주님이신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분, 곧 신성과 인성을 두루 갖추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사람이셨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어머니의 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나자렛 처녀 마리아를 주님을 잉태할 도구로 선택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전해들은 마리아는 몹시 놀랍니다. 그리고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곧 남자와 잠자리를 갖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그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일이고, 태어날 아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응답합니다.
예수님의 잉태 사건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이 세상에서의 하느님의 첫 출발을 알리는 큰 사건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어머니 마리아의 태에 계시다가 12월 25일에 탄생하십니다.
주님탄생예고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마리아처럼 각자의 마음 안에 예수님을 잉태하도록 합시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10,7)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명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안에는, 그것이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분명히 그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마리아처럼 곰곰이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고, 그 뜻에 순명하도록 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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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존재 자체로 순례 하는 우리들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어주시는 성모님!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 측의 메시지 ‘주님 탄생 예고’ 앞에 보여준 나자렛의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 그러나 부담스럽고 두려운 초대 앞에 마리아는 즉각적이고 호의적으로 응답합니다.
나자렛 소녀의 응답의 말씀이 참으로 기특하고 갸륵하며 사랑스럽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복음 1장 38절)
단순하면서도 겸손한, 그러나 단호한 결기로 가득한 마리아의 응답 앞에서 하느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고 흐뭇해 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입장에서 그녀를 각별히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어울리는 표현이 아마도 총애(寵愛)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에 앞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는 수많은 위인들과 예언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보인 반응들을 보면 제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왜 하필 저입니까?” 하고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어떤 예언자는 “죽어도 못합니다?”라며 도망가버렸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댔습니다.
“저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이제 곧 세상을 하직할 나이라 죄송합니다!”
“제 나이 이제 열 여섯입니다.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께서 보인 응답은 참으로 각별합니다.
예라고 응답했을 경우 자신에게 닥쳐올 고통과 시련이 엄청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 저를 원하시니, 주님께서 저를 선택하셨으니, 주님께서 저를 초대하시니, 앞뒤 돌아보지 않고 예! 라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귀, 영적인 귀, 마음의 귀가 제대로 열리지 못한 관계로, 초대의 말씀을 미처 듣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매일의 다양한 사건들,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다양한 음성을 통해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초대, 하느님의 음성을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잘 경청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초대 앞에 망설인다거나 뒤로 물러서지 말고 기쁘게, 즉각적으로 순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영성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음성,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측의 적극적인 호응과 응답과 협력, 그것이 참된 영성 생활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나자렛의 마리아는 가장 충실하고 모범적인 영성생활의 길잡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존재 자체로 순례 하는 하느님 백성인 우리들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어주시니, 기쁨에 찬 감사와 공경을 드려야 마땅하겠습니다.
척박한 산골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마리아께서 평생에 걸친 순명과 기도, 각고의 노력 끝에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도 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하느님의 큰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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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좋은 긍정은 여러 부정의 결과다
오늘은 성자께서 성모 마리아 태중에 구세주로 잉태하신 날입니다.
이 구원의 결정적인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성모님의 긍정(Amen = Fiat)입니다.
긍정이 곧 잉태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커다란 가르침을 줍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무언가 되어가는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인간이셨지만 그분의 긍정으로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성모님께 함부로 대하는 것은 인간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과 하나 되어 계신 하느님께도 함부로 대하는 것이기에 독성죄가 됩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무언가 되어가는 방법이 ‘긍정’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시며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긍정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인간의 품위를 넘어서 하느님과 한 몸인 지위까지 오르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긍정’은 항상 ‘부정’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 실패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게 더 중요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선생님들은 아이들 미래의 ‘꿈’을 명확히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가졌던 꿈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그 꿈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꿈을 방해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어디가 깨졌는지 찾고 그것들을 수리해 나가는 게 우선일까요?
물은 붓지 않아도 됩니다.
언젠가는 비가 와서 독이 채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깨진 곳을 수리하는 것을 게을리하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갑니다.
아무리 어렸을 때 천재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려주지 않으면 그 모든 축복이 오히려 저주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의 문장가 왕안석은 ‘상중영(중영이란 사람의 경우를 슬퍼함)’이란 제목으로 글을 써서
무엇이 천재적인 능력을 망치게 만드는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강서성 금계현에 방중영이란 아이는 집안 대대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글공부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아이는 붓과 벼루, 종이를 달라고 하더니 부모님께 효도하고 가족이 서로 합심하자는 내용의 시를 거침없이 썼습니다.
다른 시제를 주어도 척척 문장을 적어 내는데 그 내용과 운율이 기가 막히게 매끄러웠답니다.
이에 부모님은 물론 동네 사람들도 방중영을 신동이라며 입이 마르게 칭찬했고, 현에서는 중영의 아버지에게 큰 상을 내렸습니다.
지방의 권력가들은 중영이 커서 큰 인물이 되면 훗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미리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중영의 아버지는 점점 돈에 욕심이 생겨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중영의 재주를 보이고 돈을 벌었습니다.
중영도 학교에 가지 않고 아버지에게 돈을 벌어주는 일을 하게 되어 이런 삶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오랜 시간 아버지와 함께 밖으로 떠돌다가 중영은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영재발굴단’에서 ‘우주를 보는 천재 소년’ ‘강범진’군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그림 실력으로 초등학교 때 이미 영화제작사가 그에게 관심을 가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 그림을 포기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려면 모두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획일화된 입시경쟁에서 범진군의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학교를 자퇴시키고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만의 독특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방중영의 아버지와 강범진군의 어머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범진군의 어머니는 아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명확히 알려주었습니다.
방중영의 아버지는 돈에 대한 욕심을 갖는 것이 그리 나쁜 것인지 몰랐습니다.
재능만 닦아나가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는 아무리 재능이 많이 들어와도 그것들을 다 흘려버리게 만듭니다.
구약의 요셉이 능력이 많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죄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포티파르의 아내가 그를 유혹할 때, 그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기에 뿌리쳤습니다.
이 능력이 결국엔 모든 이를 살리는 은총이 담길 그릇을 만들어주었습니다.
학교에서 아무리 아이들에게 꿈을 이야기해도 결국 게임이 왜 안 좋은지, 경쟁이 왜 나쁜지, 안 좋은 동영상을 보거나 지나친 호기심으로 왜 죄를 지으면 안 되는지를 알려주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해야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성모 마리아께서 세상 구원을 위한 메시아를 잉태하실 수 있으셨던 결정적인 이유는 ‘원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원죄는 세속-육신-마귀입니다.
아무리 좋은 능력이 있더라도 그것을 자기만을 위해 써먹으려 했다면 성모님일지라도 구원자를 잉태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연간 35만 명의 소아마비 환자들을 위해 자신이 개발한 백신을 무료로 뿌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조너스 소크’(Jonas Salk)입니다.
1955년 4월, 원자폭탄만큼이나 미국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소아마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발표할 때,
기업들은 앞다투어 그 백신 특허권을 자신에게 팔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때 조너스 소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특허 같은 건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
만약 소아마비 백신에 대한 특허를 냈다면 수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신 제조 방법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다른 백신을 만들겠다며 다시 연구실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분이 원죄 없으신 성모님과 가장 닮은 분입니다.
이분이 머리가 좋아 백신을 만든 것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온 인류에게 그 사람을 통해 필요한 은총을 주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꾸준히 하면 성공합니다.
타고난 천재만 할 수 있다는 체스 세계 챔피언을 세 자매 모두 만든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재능이 온 세상에 유익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성모님이나 조너스 소크처럼 죄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렇기만 하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분명 온 세상을 유익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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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복음 묵상방.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한 여인에게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을 알려주게 됩니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지 하고 놀랍기도 하고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하거나 몹시 당황스러워하셨을 겁니다.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그게 무슨 말씀인지 하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 뜻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하며 헤아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일단 안심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아서 일어날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 성모님의 입장이 된다면 가브리엘 천사의 말이 납득이 가겠습니까?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축복이 되는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의 총애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영적으로는 축복이 될 일일는지는 모르지만 땅을 딛고 사는 이 세상에서는 하나의 가시밭길과 같은 길이 눈앞에 펼쳐질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묵상을 한번 해봤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이 일을 바라볼 게 아니라 2000년 전의 시간에서 한번 바라보고 싶습니다. 사람이신 성모님의 입장에서는 그게 축복과 총애라고 먼저 인식되지 않으셨을 겁니다. 복음에 나오는 대로 몹시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놀라워하셨다는 말씀이 어떤 뜻을 내포할 거라고는 어느 정도 추측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만약 그게 하느님의 총애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세상에서 그걸 쉽게 인정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성모님께서는 그런 일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하나의 십자가처럼 여겨질 수가 있었을 겁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런 일을 거부하고 싶은 하나의 큰 십자가처럼 보여지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엄청난 축복일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잉태로 앞으로 험난한 길이 펼쳐질 걸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서겠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를 세상에 탄생하게 해드리는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가시밭길을 이겨내실 힘이 나셨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설령 그렇다고 한다고 해도 그 어린 처녀에게는 가혹한 일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지금 현 시점에서 다시 이 일을 한번 바라보겠습니다. 결론은 어떤가요? 하느님으로부터 천상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입는 영예를 입으셨습니다. 엄청난 영광입니다. 고통의 십자가처럼 여겨질 수 있던 게 영광의 십자가로 변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렇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게 십자가였든 십자가가 아니였든 천사의 말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두려워서 할 수가 없었던 일이지만, 아들이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게 될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말씀의 순종이 가져다주는 축복입니다. 친척 엘리사벳 언니의 임신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 늙은 나이에도 임신하였다는 사실에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고 했을 때 최종적으로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고 결심을 하시게 됩니다. 그게 하느님의 뜻이라면 성모님 자신을 통해 기꺼이 그 말씀이 이루어지시길 바란다는 말씀은 십자가를 흔쾌히 받아들이시여 그걸 성모님, 당신의 십자가로 지고 가시겠다고 하는 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그 당시 성모님의 연령은 20세도 채 되지 않으신 연령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그와 같은 믿음을 어떻게 가지시게 되었는지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에서 성모님의 믿음이 대단하고만 인식할 게 아니라, 그와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어떤 한 순간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닐 겁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선택하게된 것도 하느님께서 이미 예비하셨을 겁니다. 그 배경에는 성모님의 믿음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에 결국 하느님은 성모님을 선택하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은총과 은혜도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고 자기가 그런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준비가 되어야만이 은총이 주어져도 받을 수가 있지 그렇지 못하면 그릇이 없기 때문에 담을 수가 없을 겁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그릇을 만들어야 할 겁니다. 좀 더 달리 표현을 하면 십자가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믿음의 크기와 비례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십자가도 은총이 된다는 생각과 그런 은총도 그냥은 받을 수가 없고 이미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어 있을 때만이 하느님의 은총도 누릴 수 있다는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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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5.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제1독서 (이사7,10-14;8,10ㄷ)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렵 합니까?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7,10~14참조)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에 반기를 든다. 남부 유다의 아하즈 임금(B.C.735~716)이 아시리아에 반대하는 그들 동맹을 거절하자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이 남부 유다를 침공한다.
아하즈의 목숨뿐 아니라 다윗 왕조의 운명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이사야는 저 유명한 임마누엘의 표징을 아하즈에게 알리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한 아하즈는 하느님께 매달리는 대신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하고, 그 댓가로 아시리아의 이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이사야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그가 반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하지 말라고 한 것은 당시 근동의 초강대국인 아시리아에게 무모하게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었지 아시리아 의존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10)
이사야서 7장 1~9절은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하즈에게 남부 유다가 북부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침략에서 보존될 것을 예언하는 내용이었다.
이제 이어지는 이사야서 7장 10~16절은 남부 유다의 보존 예언을 확증하는표징으로서 임마누엘의 예언을 주는 내용이다. 즉 이것은 주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아하즈에게 다시 한 번 주님을 믿고 그에게 도움을 구하라는 일종의 신앙적 도전이라 할 수 있으며, 표징을 구하지 않는 그에게 주님께서 친히 표징을 주심으로써 그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이르셨다'는 말씀은 7장 13절의 '이사야가 말하였다'와 연결되는데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 것이다.
이사야는 주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되풀이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를자신의 지성과 언변에 담아 아하즈에게 전달하였던 것이다.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11)
여기서 제기되는 '표징' 즉 '오트'(oth)는 어떤 추상적 사실이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표적과 같은 것을 지칭한다.
아하즈에게 하나의 표징(징조)을 구하라는 것은 그가 주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주님의 능력을 얼마나 믿는지를 표현하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 제안을 표면적으로 보기에 하느님을 시험하라는 의미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하즈의 믿음을 시험하는 제안이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으로서 인간이 구하는 어떠한 표적도 다 보여줄 수 있다.
더욱이 주님께 징조를 구하라는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이 시공간을 벗어나 가상적인 것이 아닌, 현실 가운데 실제 역사하는 것이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즉 이것은 세상에서 그분이 구체적으로 행사하시는 일, 실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을 체험함으로써 보다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제안이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느님을 가리켜 '너의 하느님' 즉 '아하즈의 하느님'이라고 칭한다. 이것은 그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헛되고 무력한 거짓 신을 섬기는 이방 민족의 왕이 아닌, 하느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왕이며, 하느님을 섬기는 계약의 백성들 중에 통치자로 존재함을 확인시켜주는 표현인 것이다.
그는 지금껏 이방 신을 섬기고 온갖 패역을 자행하는 자였지만, 이 일을 계기로 하느님을 다시 자신의 하느님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계약 국가 유다를 하느님의 섬기는 나라로 다시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고 있는 것이다.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11)
아하즈가 표징을 구하되 그 표징을 깊은 데서 오게 해 달라고 혹은 높은 데서 오게 해달라고 구하라는 의미이다.
이 두 장소는 인간이 도달하기 불가능한 곳으로서 음부와 하늘을 지칭한다.
만약 그곳에서 표징이 보인다면, 이것은 하느님께서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요구까지도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확인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사야는 아하즈에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징표로 구하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12)
이것은 아하즈가 주님께서 제안하시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음을 보여주며, 그가 아시리아와 손을 잡고 그 제국으로부터 도움을 받겠다는 것을 이미 결심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아하즈는 가장 믿을만한 것으로서 주 하느님이 아닌, 장차 유다를 침공할 이방 아시리아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본문은 두 절 모두 강한 부정어 '로'(lo)와 더불어 동사의 미완료형이 사용된 구문으로서, 결코 영원히 구하지 않겠다는 것으로써 아하즈가 얼마나 완고하고 사악한 자인지, 그리고 하느님께 대체 얼마나 무관심한 자인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시험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아낫쎄'(anaseh)의 원형 '나싸'(nasah)는 구약성경에서 34회 사용된 동사로서 어떤 물건의 품질이나 인격의 진정성을 알아내기 위해 시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아하즈도 신명기 6장 16절의 '그분을 시험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근거삼아 이렇게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명기의 말씀은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그를 시험하는 불신앙적 행위를 금한 말씀이다.
반면에 지금 이사야가 제안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그 믿음을 하느님께 어려운 징조를 구함으로써 표현하라는 것이므로 이 둘은 아무 상관 관계가 없다. 그 점에서 볼 때 아하즈가 거부하고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그의 백성이 마땅히 올려야 할 기도인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기도를 거부한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능력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한다는 표시이며, 하느님을 도무지 신뢰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13)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왕실을 가리켜 '아하즈의 왕실'이라고 칭하지 않고 '다윗 왕실'이라고 칭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윗 왕실은 다윗 임금이 다스리던 시대의 이스라엘의 왕실을 의미하는데, 그 왕실은 주 하느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통치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수백년이 흐르면서 그 믿음의 표상은 불신앙의 표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응당 믿음의 표상이 되어야 마땅한 유다의 왕실이 어찌하여 불신앙의 표상이 되었느냐고 물으면서 한탄의 어조로 이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유다 임금 아하즈는 유다 왕실을 대표하는 자로서 그의 뜻은 곧 왕실 전체의 뜻이기에 아하즈의 태도에 따라 왕실과 나라 전체가 복을 받기도 하고, 심판을 받기도 하는데 말이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렵 합니까?' (13)
여기서 '사람들'에 해당하는 '아나쉼'(anashim)은 흔히 유한하고 병약한 존재로서의 사람을 의미하는 명사 '에노쉬'(enosh)의 복수형이다.
자기 자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주권자를 의지하여 도움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유다 왕실로부터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통만 당하는 무력한 백성들을 의미한다.
이사야서 7장 11절까지만 해도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너의 하느님', 즉 아하즈의 하느님으로 지칭하다가 여기서는 '나의 하느님', 즉 이사야 자신의 하느님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렇게 호칭이 바뀌게 된 것은 이사야서 7장 12절에 기록되어 있는 아하즈의 불신앙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불신앙과 교만으로 가득하여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에게는 기탄없이 등을 돌리시는, 겸손하게 그를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다.
'성가시게 하고서'의 '할르오트'(haleoth)의 원형 '라아'(laah)는 구약 성경에서 19회 사용된 단어로서 피곤하게 하고 진절머리가 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탈출7,18; 욥4,2; 16,7; 예레15,6).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14)
아하즈가 구하기를 거부한 표징을 주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실 것이 선포된다. 하느님께서 표징을 주신다는 것은 아하즈가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그것을 그분은 능히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실 하느님은 유다 백성에게 표징을 보여주실 의무가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표징을 주신다는 것은 무상의 선물인 은총인 것이다. 하지만 그 은총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될 수 없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14)
여기서 '젊은 여인'(처녀; virgine)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알르마'(haalmah)이다.
이 단어의 원형 '알르마'(almah)는 구약에서 7회 사용되었는데,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 즉 결혼 적령기에 있지만 성(性)경험이 없는 여자라는 의미로 사용된다(창세24,43; 탈출2,8; 잠언30,19).
더욱이 구약 성경 희랍어 번역본인 칠십인역(LXX)은 본문의 이 단어를 숫처녀를 의미하는 희랍어 '파르테노스'(pharthenos)로 번역하였다.
이 '파르테노스'(pharthenos)는 숫처녀를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 '뻬툴라' (bethula; 창세24,16)의 번역어이기도 하며, 마태오 복음 사가가 마리아를 가리켜 '처녀'(동정녀)라고 한 희랍어 '파르테노스'와 동일한 단어이기도 하다(마태1,23).
이러한 사실은 본문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가리키는 예언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난점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징조가 당시 아하즈 임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700년 후에 일어날 징조가 당시 아하즈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한 그러하다면 그 징조가 아하즈에게 어떻게 그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징조가 될 수 있겠는가?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난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난제를 이렇게 해석하면 물의가 없다.
사실 700년 후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이사야 예언자가 그 사건을 예언하면서 그것이 자기 시대에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였고, 또 아하즈에게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전혀 부자연스런 일이 아니고, 그 예언이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그 광대한 진리를 하느님께서 계시로 주신대로 왜곡이나 변조없이 그대로 증거한 것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주장을 취하게 되면, 여전히 이사야서 7장 16절이 난해한 구절로 남는다.
'그 아이가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게 되기 전에, 임금님께서 혐오하시는 저 두 임금의 땅은 황량하게 될 것입니다' (7,16)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700년 후에 태어날 임마누엘의 예표로서 이사야 시대에 한 아들을 주셨을 것이며, 이사야서 7장 16절은 아마도 그 아들에 대한 예언일 것이다.
그 아들은 이사야서 8장 3절, 8장 4절과 관련하여 이사야가 그 아내를 통해 낳은 아들이 분명하며 그 이름은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이다. 이사야서 7장 16절의 아들이 임마누엘을 예표하는 것은 구약 시대의 이사악이나 요셉, 여호수아 등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다는 사실과 관련지을 때 조금도 부자연스런 것이 아니다.
창세기의 요셉이 동정녀를 통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 수 있었듯이, 또한 이사악이 비록 제단에서 문자적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그가 십자가상 희생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 수 있었듯이, 그 여자가 낳게 될 아들 역시 믿는 자에게 구원이 되고 불신자에게 심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14)
'임마누엘'은 '~와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 '임'(im)에 1인칭 복수 접미어가 결합하여 '하느님'이란 뜻의 명사 '엘'(el)이 함께 쓰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이 이름은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달리 이 아이를 낳은 어미인 그 처녀가 지어줄 것이다.
즉 '이라 할 것이다'에 해당하는 '웨카라트'(weqarath)는 '칭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라'(qara)의 여성 3인칭 단수형이다.
사실 700년 이후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을 낳아 천사의 지시대로 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마태1,21). 그런 점에서 '임마누엘'은 그 아들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그 아들의 인격속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동정녀를 통하여 이 땅에 보내실 분은 하느님 당신 자신이 육화(肉化)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명칭이 바로 '임마누엘'(immanuel)이라는 것이다.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logos)이신 성자 하느님께서 (요한1,1~3) 이 땅에 강생(육화)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직접 그의 백성 바로 곁으로 오신 것이다(요한1,14). 곧 임마누엘은 제2위 하느님이신 성자 그리스도의 강생(육화)에 대한 예언이며, 그의 백성이 하느님을 볼 것에 대한 축복의 예언인 것이다.
비어있는 마음, 하느님으로 채우기
(루카1,26-38)
비어있어 불안한 마음을 하느님 당신으로 채우소서~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 여섯-숫자6 , 안식-7. 7에서 하나가 부족한 6입니다.
하늘의 안식 그 하나가 부족한 곳에 안식의 일을 하시려 천사를 보내십니다.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 약혼, 하느님 만을 믿고 따르겠다고 약속(약혼)한~ 그러나 그 하느님으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고통, 쓴 물인 마리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마리아의 뜻이 쓴 물, 고통이라 했습니다.)
세례로 하느님과 약속(약혼)은 했지만 안식을 채우지 못해 비어있는 처녀입니다. 쓴 물이 나무 하나를 받아들이면 단물이 되는, 곧 죄인(쓴 물)이 대속의 십자 나무를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면 의인(단물)이 되는 ~~그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로(탈출15,25) 하늘의 안식, 그 하나를 채워 누리게 하시기 위해 천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보내신 것입니다.
(루가5,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 이십니다.(요한1,14)
고통, 쓴 물(마리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잉태) 그 말씀 안에 숨겨진 하늘의 안식이신 구원자 예수님을 깨달아야(낳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마태12,8참조)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 끝까지 자기 고집, 자기 뜻대로 살았던 야곱(죄인)입니다. 내 뜻 만을 위해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그의 하느님’이라 하십니다. 죄를 덮으시는 하느님, 그분 사랑의 다스리심이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4,7-8 참조)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ㄱ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 자격이 있어서 가 아닙니다. 덮으심으로 일하시는 그 사랑 때문입니다.
(창세1,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 비어있어 어둠인, 그래서 쓴 물인 땅, 그 위를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라하프 - 덮으심) 계심으로 창조를 이루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35ㄴ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잉태) 그 말씀 속에 하느님의 아들을 구원자로, 구원의 진리로 깨달아야(낳아야) 합니다.
(요한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죄를 덮으시기 위한 대속의 속죄 제물로 내 주심입니다.
(요한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 구약의 잉태는 하나가 부족한 여섯의 상태라 하십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곧 죽음의 존재를 생명으로 창조하시는 전능 하신 하느님이십니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 비어있어 처녀인 그가 말씀을 받아들여(잉태), 단물의 마리아가 되는 그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 그 깨달음으로 하늘의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 이루어 졌다’ 하신 그 십자가 밑에 많은 사람들 중에 ‘마리아’ 그 이름, 마라아 들만 소개합니다.(요한19,25참조)
오늘 독서에서~
(히브10,9-10)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인들이 거룩하게 되어 하늘의 쉼, 그 안식을 사는 것입니다.
그 안식을 깨닫는 것, 7입니다.( 충만 완전을 뜻하는 안식의 숫자 7) 그 7, 안식을 위해 오늘도 말씀이 찾아 오셨습니다. 비어있어 불안한 우리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웁시다.
그러기 위해 내 안에 모든 것이 쓴 물(죄)임을 인정하는~
(코헬3,18) 나는 인간의 아들들에 관하여 속으로 생각하였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어 그들 자신이 다만 짐승일 뿐임을 깨닫게 하신다. 고~~~
그 나의 부인(否認), 죽음으로 그 나를 버려야 합니다. 그 나를 부인하는, 죽이는 삶이 단물인 마리아의 삶 이였습니다.
우리(마리아)의 마음이 칼, 곧 말씀에 꿰 찔리는 삶입니다.(루가2,35)
(히브4,12)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 덮으시기 위한, 용서하시기 위한 드러내심입니다.
(에페5,11-13) 11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 12 사실 그들이 은밀히 저지르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 13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 드러나 십자가로 용서 받는 것, 참 자유, 쉼, 안식입니다.
♡ 아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복음(루카1,26~38)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37~38)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hoti; for)로 시작되는 루카 복음 1장 37절은 의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자에게 임신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즉 하느님의 모든 말씀은 불가능이 없기 때문이다.
원문의 '말씀'에 해당하는 '레마'(rema)는 일차적으로 '생생한 목소리로 선포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루카 복음 1장 37절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 탄생에 관해 예언된 모든 말씀을 의미하며, 이러한 예언들이 마치 생생한 목소리로 선포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아뒤나테세이'(adynatesei;is impossible)는 '아뒤나토스'(adynatos)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아뒤나토스'(adynatos)는 '능력있는', '강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뒤나토스' (dynatos)에 부정 접두사인 '아'(a)가 붙어서 '능력없는', '약한'이란 뜻을 갖는 단어이다.
따라서 '아뒤나테세이'(adynatesei)는 앞의 '우크'(ouk; nothing)와 연결되어 이중 부정의 의미를 갖고서 매우 강한 긍정의 의미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능력과 권세가 있어서 마리아에게 선포된 모든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씀은 노쇠하여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던 아브라함에게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며 아들 이사악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창세18,14)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루카 복음 1장 38절은 하느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순수하게 믿는 마리아의 순수한 신앙을 잘 보여 주며, 이러한 신앙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즉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고 잔치집 일꾼들에게 지시함으로써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데 일조했던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가 자신을 지칭한 단어인 '둘레'(doule; servant)는 '종'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doulos)의 여성 명사로서 '결코 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하녀(계집종)'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주인', '주님'을 의미하는 '퀴리오스'(kyrios)의 소유격 '퀴리우'(kyriu)와 연결되어 철저하게 주님께 예속된 능력없는 계집종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마리아가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완전하게 맡기겠다는, 철저한 순종과 겸손의 표현인 것이다.
또한 본문 서두에 기록되어 있는 '보십시오'에 해당하는 '이두'(idu)라는 단어는 마리아의 이러한 마음을 잘 드러내 준다.
'이두'(idu)의 용법은 이야기의 생기를 돋우어 주거나, 듣는 이나 읽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킬 때, 그리고 좀 더 깊은 생각을 촉구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루카 복음 1장 38절에서는 이 단어가 동사없이 명사와 함께 사용되어 마리아 자신의 '종'으로서의 존재를 천사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줌으로써, 자신의 겸손함을 더욱 드러내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신 대로'에서 '대로'에 해당하는 '카타'(kata)라는 전치사는 목적격과 연결되어 뒤에 오는 명사의 내용이나 본질이 조금도 훼손되는 일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는'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에 해당하는 '게노이토'(genoito; may it be)는 '발생하다'는 뜻의 '기노마이'(ginomai)의 희구법으로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마리아의 염원을 담고 있다.
비록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보증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었기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믿고 바라는 위대한 순종의 신앙을 보여 주었다.
바로 이 순간이 마리아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의 모친으로서의 성소를 허락하는 순간이며,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피와 살을 취하고 인간의 역사안으로 들어오는 강생(육화; Incarnatio)의 순간이기에, 우리는 사도신경과 삼종경을 바칠 때 고개를 숙여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흠숭의 예를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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