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오늘 9.11 테러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 장영희 교수님은 하버드대 안식년 기간으로 미국에 계셨죠. 당시 시작된 지 얼마 안되었던 '문학의 숲' 시리즈에도 참가하셨고요.
아래의 글은 사건으로부터 약 2주일 후인 2001년 9월 29일자 조선일보에서, 9.11 사태와 손톤 와일더의 희곡 <우리 마을>을 소재로 쓰신 글 "아, 멋진 지구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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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아, 멋진 지구여… - 북스조선 - 뉴스 (chosun.com)
오늘 저녁 ABC 뉴스는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로 출근했다가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찾아 여전히 거대한 잔해의 산 주위를 서성거리는
마이클이라는 남자를 인터뷰했다. 시신 식별 DNA 검사를 위해 아내의
칫솔을 소중하게 싸서 가져온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
끔찍한 날 아침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침에
서로 직장가느라 바빠 눈도 못 마주쳤습니다. 그 사람의 눈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을 한 번만 더 안을 수 있다면, 한 번만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해 ‘한 번만 더’를 외치는 그를 보며 나는
20세기 미국문학 시간에 가끔 가르치는 손톤 와일더의 「우리 마을(Our
Town)」이라는 작품을 떠올렸다. 1938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래 새로운
연극기법과 완벽한 구성, 시적인 문체로 미국연극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지만, 「우리 마을」은 이렇다 할 줄거리도, 극적인
요소도 없이 다만 제목 그대로 미국 뉴햄프셔주의 어느 작은 시골마을의
일상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3막으로 되어 있는 연극이 시작하면 나레이터겸 배우, 때로는 무대 위의
연출가 역할까지 하는 ‘무대 매니저’가 나타나 관중들에게 직접
그로버즈 코너즈라는 마을에 대해 설명을 한다. 마을의 지리, 인구,
건물들을 소개하며 두 이웃 깁가와 웹가의 하루를 보여준다. 아침이
되어 신문배달부가 신문을 배달하고, 우유배달부가 지나가고, 엄마들은
아이들을 깨워 아침밥을 먹여 학교에 보내고 교회 합창 연습을 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등,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아주 평범한
하루이다. 2막의 제목은 ‘결혼’. 몇 년이 흘러 이웃에서 함께 자란
에밀리 웹과 조지 깁의 결혼식 날이다. 딸을 시집 보내며 섭섭해 하는
친정엄마, 분주한 준비, 들이닥치는 손님들, 또다시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결혼식날 풍경이 묘사된다.
3막은 다시 몇 년이 흘러 둘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에밀리가 묻힌
묘지가 배경이다. 두고 온 세상에 미련이 남아 에밀리는 무대
매니저에게 꼭 하루만 다시 삶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자신의 열 두 번째 생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 받는다.
아침밥을 잘 씹어먹으라는 엄마의 잔소리, 출장에서 돌아오는 아버지,
이모와 조지에게서 온 생일 선물들…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지상에서의
하루를 살며 에밀리는 회한에 젖어 소리친다.
“엄마, 절 그냥 건성으로 보시지 말고 진정으로 봐 주세요. 14년이
흘렀고, 저는 조지와 결혼했고, 그리고 이제 죽었어요. 월리도 캠프
갔다 오다가 맹장염으로 죽었잖아요. 지금, 바로 지금은 우리 모두
함께이고 행복해요. 우리 한 번 서로를 눈여겨 보기로 해요.”
그러나 물론 웹 부인은 기계적으로 이런저런 선물 설명을 하기 바쁘다.
에밀리는 견디다 못해 무대 매니저에게 말한다. “그냥 돌아가겠어요.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고,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쳐다볼 틈도 없어요.
안녕, 세상이여, 안녕, 그로버즈 코너즈, 엄마, 아빠, 똑딱거리는 시계,
엄마의 해바라기, 맛있는 음식, 커피. 그리고 갓 다림질한 옷, 뜨거운
목욕, 잠자리에 드는 것,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아, 지구여, 네가
얼마나 멋진 곳인 줄 알았더라면….”
서로 질시하고 싸우고 110층짜리 마천루가 삽시간에 무너지는 곳이지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사랑하는 연인들이 있고 노을진 단풍산이 저토록
아름다운 이 지구는 그래도 살만한 곳인데, 항상 너무 늦게야 깨닫는
것이 우리들의 속성인지라 지금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눈 마주치고
진정으로 얘기를 나눌 틈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겁게 살아간다.
마이클의 아내는 무너지는 세계무역센터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깨달았을 때 집 전화의 음성사서함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남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당신을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주세요’라고.
언젠가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에서 본 한 구절이
생각난다. “당신이 1분 후에 죽어야 하고 꼭 한 사람에게 전화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겠습니까?”
(장영희·서강대 영문과교수·미 보스턴에서)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