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실성당
낙산 가실 성당은
병인박해 후 경상도 북부 지역의 전교 활동 중심지다.
여러 차례의 본당 분할을 하며
경상도 지역의 신앙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1년 김천 본당을 분가시킨 것을 시작으로, 점촌·퇴강·왜관 본당 등,
영남 서북부 지역에 자리 잡은 수많은 본당의 모태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고,
새로운 신자들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곳 하나가 신나무골이다.
그리고 병인박해 가 끝난 후 성직자들은
신나무골을 중심으로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94년 파이야스(Pailhasse, 河敬朝, 1868~1903, 가밀로) 신부가
입국하였고, 그는 경상도 북부 지역의 전교 활동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895년 왜관읍 낙산동 가실에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가실 성당이다.
가실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열한 번째,
대구대교구에서 계산 성당에 이은 두 번째라는 오랜 연륜을 지녔다.
대구 첫 본당인 계산 성당의 전신인 칠곡 신나무골 연화 학당처럼,
가실 성당에도 신학문과 구학문을 가르치던 학당이 있었고,
한국 천주교회사의 영광과 아픔을 한몸에 품고 있다.
가실 성당은 원래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설립 당시
창녕 성씨 집안의 실학자 성섭의 증손자 성순교가 살던 집터 일대다.
성순교는 경신박해(1859∼1860년) 때 가실을 떠나 상주로 피난 갔다가,
그 이름처럼 1861년 상주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상주로 옮겨가기 전에 성순교는 가실 집을 외가에 맡기고 갔는데,
주인이 순교하자 집은 주인을 잃어버렸다.
당시 경상도 지방 선교 책임자로 부임한 파이야스 하경조(河敬朝) 신부는
가실에 살던 성순교의 집을 사들여 그의 기와집을 첫 가실 성당으로 하였다.
그래서 성순교 가문의 유적비가 성당 정면에 들어서 있다.
가실 본당의 현재 건물은 1922∼1924년에 지어진 고딕식 벽돌조 건물로,
설계는 서울 명동 성당과 대구 계산 성당은 물론 1896∼1925년까지
30년간 한국 교회의 거의 모든 교회 건축물을 설계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푸아넬
(Poisnel, 朴道行, 1855∼1925, 빅토리노) 신부가 담당했다.
가실 성당은 깊이 들여다보면 성당 곳곳에서
40가지 성경 말씀을 체험할 수 있다.
성당 내 10개의 큰 창문에 있는 색유리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삶이다.
창문마다 4개의 주제가 있는데,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보면 된다.
일곱 번째 창문은 위에서 아래로 되어 있다.
가실 성당은 깊이 들여다보면 성당 곳곳에서
40가지 성경 말씀을 체험할 수 있다.
성당 내 10개의 큰 창문에 있는 색유리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삶이다.
창문마다 4개의 주제가 있는데,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보면 된다.
일곱 번째 창문은 위에서 아래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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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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