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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과 장미, 그리고 여성의 인권] 세계 여성의 날을 통해 본 여성의 인권
인권이란 당연하게도 사람이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뜻하는 말이다. 생명의 안전이라든지 신체의 자유와 같은 권리,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경제·사회·문화적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등은 인간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온전함을 보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필요한 인권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돌아보면 모든 인간과 시민의 보편적 평등이라는 규범적 원칙이 작동하는 근대 시민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도 인권과 시민권을 아무런 제약 없이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가령 19세기만 하더라도 여성에게는 정치적 참여의 수단인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고 고등 교육, 재산 소유, 법적인 소송 등의 자격도 인정되지 않았다. 여성은 이성적 능력을 의심받았고, 무엇보다 자신의 행위를 책임질 수 있는 독립적인 ‘인격’(person)으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여성이 있어야 할 자리는 가정’이라는 오랜 관념이 불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어디서나 일을 하면서 살아왔으나 산업화와 더불어 가정과 일터가 분리된 이후 불평등과 차별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실을 잣는 정방공(spinster)에게는 혼기를 놓친 ‘노처녀’란 뜻이 따라붙었고, 가정에서 무보수로 이뤄지는 돌봄 노동은 지금도 일이 아닌 소비 행위로 간주될 뿐이다. 하지만 19세기 이래 지구촌의 여성들은 각자의 자리와 저마다의 현장에서 억압과 차별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며 인권과 시민권의 평등을 향해 부단히 전진해 왔다.
오늘날 ‘3·8 세계 여성의 날’이 지구촌의 대표적인 기념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20세기를 통해 각국의 여성들이 펼친 실천이 자리 잡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은 지난날의 특정 사건을 단순히 기념하는 날이라기보다 오히려 미래를 내다보며 현장을 증언하고 여성 인권의 의제를 새롭게 제시하는 행동주의적 실천의 날이자 연대의 축제로써 그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 최초의 여성의 날
해마다 3월이 다가오면 국제 연합(UN)을 비롯한 국제 기구나 각국의 단체들은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를 공지하고 관련 정보를 제시하지만, 이 날의 기원에 관한 설명이 매우 달라 불일치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는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와 관련하여 다양한 기원설이 공존해 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국이나 일본에서 오랫동안 널리 공유된 세계 여성의 날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과도 차이가 있으며, 캐플런, 이토 세츠 교수를 비롯한 몇몇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구체적인 사실로 뒷받침되지 않는 신화적 전설 같은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사료와 전거로 뒷받침되는 내용을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자 여성 선거권의 획득을 촉진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최초의 단초가 주어진 곳은 미국이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미국은 유럽의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가족 이민을 통해 이주한 노동자 가족이 증가하는 상황이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섬유나 의류 산업 등에서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을 감수해야 했다.이처럼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 노동 운동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삶의 조건을 결정할 수 없던 여성들의 제도적 권리 개선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1909년에 미국 사회당(SPA)은 전국여성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2월의 마지막 일요일(1909년 2월 28일)을 ‘여성의 날’로 선포하고 여성 선거권(투표권, vote for women) 집회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단수로 표현된 ‘여성의 날’(Woman's Day)은 그 자체로 특정한 의미를 갖는 기념일이 아니라 여성 선거권 집회를 열고자 임의로 선택된 하루였을 뿐이다.
이주민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미친 효과
공교롭게도 1909년 11월에 뉴욕시에서는 의류 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파업이 자생적으로 일어났다. 흔히 ‘2만 봉기’(Uprising of the 20,000)라고 부를 만큼 파급력이 컸던 이 파업은 이주민으로 구성된 의류 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힘겨운 투쟁을 지지하는 여성들의 폭넓은 연대 속에서 진행되었다.
미국 사회당이 1909년에 이어 1910년 2월에 여성 선거권 쟁취를 위한 ‘여성의 날’ 집회를 다시금 개최하게 된 것은 스스로 권리를 자각하고 존재감을 드러낸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었던 당시의 사회적인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여성 노동자들의 수난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1911년 3월 뉴욕의 대규모 의류 업체인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14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으며, 대부분의 사망자는 화재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여러 나라의 여성들이 함께 기념하다
이처럼 선거권을 이슈로 개최된 ‘여성의 날’ 최초 집회의 효과는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으로 말미암아 그 효과가 증폭되었고, 미국 여성들의 움직임은 유럽의 여성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1910년 8월에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회 국제 사회주의 여성 회의에서는 클라라 체트킨 등의 발의로 모든 나라가 여성의 날을 함께 기념하자는 ‘국제 여성의 날’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었다.
이에 1911년부터 독일,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 등 유럽의 나라들이 먼저 여성의 날을 국제적으로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 많은 나라로 그 범위가 넓어졌다.
세계의 역사를 바꾼 러시아의 여성의 날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 전시 경제 아래에서 생계의 압박을 받게 된 여성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식료품의 품귀와 가격 앙등에 항의하는 시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1917년 3월 8일(음력 2월 23일)에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러시아의 페트로그라드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벌인 파업과 시위는 2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1921년 6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회 코민테른 여성 회의는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나라들이 날짜를 3월 8일로 통일하여 함께 기념할 것을 결의하였고, 이에 1922년부터는 3월 8일이란 날짜에 맞추어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관행이 국제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지역을 가로질러 지구촌을 엮어낸 조각보의 상징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 해방 운동의 물결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1970년대에 들어와 또 다른 전기를 맞게 되었다. 유엔이 ‘세계 여성의 해’를 선포한 1975년 3월 8일에 뉴욕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이 현수막을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하여 이날을 기념하였다. 그리고 1977년 12월에 유엔 총회는 모든 국가가 여성의 권리와 국제적 평화를 위한 유엔의 날을 정하여 공포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여 세계 여성의 날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엔의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유엔 총회는 1979년 12월에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철폐에 관한 협약’을 결의하였으며, 1993년에는 ‘여성 폭력 철폐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1995년에 베이징에서 개최된 유엔의 제4차 세계 여성 대회는 여성의 권리가 인권임을 확인하고 선언과 강령을 통해 성 주류화 전략을 공유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계 여성의 날은 애당초 열사의 죽음이나 영웅적인 투쟁과 같이 과거에 자리 잡은 어느 하나의 특정한 사진에서 유래하거나 이를 기억하거나 추념하고자 정한 날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당대의 현실 속에서 저마다 목소리를 표출하려는 여성들의 열망을 조각보처럼 엮어낸 상징에 가깝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예상하지 않은 돌풍을 몰고 오듯이, 무수한 여성들의 행동주의적 실천을 통해 변화를 도모해 온 선언, 연대, 축제의 현장은 한 세기를 넘어 유지되고 있는 살아 있는 역사인 것이다.
지금은 21세기, ‘빵과 장미’는 성취되었나
세계 여성의 날의 역사적 의미를 함축하는 인권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빵과 장미’일 것이다. 미국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이 1911년에 발표한 ‘빵과 장미’는 당시 뉴욕, 시카고 등에서 분출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배경으로 작성된 시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싸우는 건 빵을 위해서야. 그러나 또한 장미를 위해서도 싸우지.”란 구절은 이후 1912년 로렌스 파업의 장면을 압축하는 기억의 단서가 되기도 하고, 뒷날 노래의 가사와 영화의 제목으로 재현되는 등, 일하는 여성들의 인권 문제를 환기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21세기로 접어든 오늘날 지구촌 여성들의 인권, ‘빵과 장미’는 어떠할까? 세계경제포럼이 작성하여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는 경제적 참여, 교육 수준, 건강과 생존, 정치적 권한 부여 등 4개 분야를 중심으로 전 세계 144개국의 성별 격차를 비교하고 분석한다.
최근의 보고서는 오히려 성별 격차가 확대되는 추이를 보이며, 이와 같은 퇴보를 보인다면 지구촌의 성별 격차를 줄이는 데는 170년이 아니라 217년이 걸릴 것이라는 암담한 전망을 내놓았다. 그런가 하면 최근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MeToo)나 ‘타임스업’(#Time'sUp) 운동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여러 나라로 확산되면서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여성과 남성의 성별 임금 격차가 3분의 1을 넘어서고 외국의 미투운동에 앞서 ‘#OO_내_성폭력’의 핵심어 표시(#, 해시태그)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을 장식했던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검사를 비롯한 전문직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직장 내 성폭력과 성희롱이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다. 해마다 지구촌 각 나라의 세계 여성의 날 캠페인과 행사 소식을 집산하는 공식 웹 사이트는 2018년의 캠페인 주제를 ‘진보를 위한 압력’(#PressforProgress)으로 선정하였다. 이는 해당 사회의 정부를 비롯한 조직과 단체들이 여성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의지와 책임을 공유하면서 성 평등의 원칙을 더욱 힘 있게 밀고 갈 때가 되 있음을 시사한다.
‘빵과 장미’의 행진은 계속되어야 한다
‘빵’이 열악한 상황에서 충족되어야 할 최소한의 생존적 필요를 뜻한다면, ‘장미’는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고양된 인식과 품격 있는 삶에 대한 희망의 기대 지평이다. 노동자에게 임금은 생명줄이지만, 생존을 위하여 인격의 존엄성을 침해당하고 행복을 추구하며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면, 그것이 일하는 여성들이 원하는 여성의 해방이나 진정한 노동의 미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용된 일터에서의 생존권과 한 개인의 인격권의 핵심인 성의 자유를 맞바꾸도록 강제하는 것은 차별과 폭력의 시작이다. 이 점에서 ‘빵과 장미’는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 낮은 목소리와 작은 날갯짓으로 시작되는 ‘빵과 장미’를 향한 여성들의 행진이 더욱 증폭되고 부단히 지속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 빵과 장미, 그리고 여성의 인권] ‘엄마’처럼 살지 않을래요
최근 20대 여성들과 만났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더 이상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결혼하지 않는 이유도 엄마처럼 될까봐 두렵다고 했다. 나도 과거에 그랬다. 그래서 아내와 엄마의 이름이 아닌 내 이름으로 살려고 버둥거렸다.
그런데 내 딸과 같은 또래인 20대들이 30년 전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엄마의 돌봄으로 성장했지만 그 돌봄을 벗어나고 싶단다. 또 그 돌봄을 자식들에게 주는 것이 부담스럽단다.
여성을 여성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회
이 사회는 결혼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20대 여성들의 의지를 잘 알지 못한다. 20대 남성들도 여성들이 이기적이라고, 권리만 주장할 뿐 의무는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냥 현실을 잘 모르는 응석받이 여성 정도로 간주하는 것일까? 아니면 천천히 변화하는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며 사회 변화를 유도하는 ‘프로 불편러’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여성의 공적 사회로의 진출은 무섭다. 1990년대 초 남아 선호 사상에 문제를 제기한 드라마 ‘아들과 딸’에 나오던 ‘후남이’ 세대를 거부하며, 계층의 차이는 있지만 여성들의 대학 진출은 이미 남성과 비슷하거나 근소한 차이로 넘어섰다. 여러 통계 수치를 통해서도 여성들의 약진은 눈부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훌륭한 여성들이 사회 각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 같지는 않다. 노력하면 될 것 같지만 ‘유리 천장’으로 많은 여성은 실망한다.
가끔 믿을 수 없어 인용하기도 꺼려지는 수치가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7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성격차 지수가 136개국 가운데 118위, 여성 고용률은 56.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25위다. 특히 한국의 고학력 여성의 고용률은 OECD 회원국 가운데 33위로 최하위 수준에 머물렀다. 성별 임금 격차 37.2%는 OECD 회원국 중 격차가 가장 큰 국가(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성 인지 통계, 2017)로 한국의 성 평등 수준은 거의 바닥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내 총생산(GDP)이나 무역 지수 등과 같은 경제 지표는 OECD 회원국 가운데 상위권인데 왜 성 평등 지수는 거의 꼴찌 수준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수치를 체감하지 못하더라도, 다양한 영역의 실태 조사 결과는 여성이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맞벌이 부부의 가사 노동 시간은 남성에 비해 여성이 여덟 배나 많다고 하니 공적 영역뿐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제2의 성’, 곧 두 번째 성일 뿐이다.
또 친밀한 관계에서도 여성은 안전하지 않다. 2017년 서울에 거주하는 여성 2천 명을 대상으로 데이트 폭력의 피해 실태를 조사한 결과 열 명 중 아홉 명은 데이트 폭력을 경험하였고, 10%는 위협이나 공포심을 넘어 신체적 피해를 입었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여성의 현실은 법 제도화의 마련과는 별개로 여전히 폭력을 경험한다. 신고해도 역차별이나 명예 훼손, 무고 등의 문제로 폭력 피해를 해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여성 폭력의 문제는 여성 비정규직 문제, 빈곤의 문제, 건강권의 문제와 연관되어 여성의 삶을 어렵게 한다. 이는 50년 전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잘 사는 한국의 낮은 성 평등 순위와 연동된다. 한국의 성 평등 지수가 꼴찌 수준인 이유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전히 여성은 어머니, 아내, 딸의 역할에 따른 정체성을 잘 수행해야 여성으로 인정받는다. 나아가 ‘돈 잘 버는 능력 있는 여성’도 가정에서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 여성으로서 빛날 수 있다. 그렇지 않는 여성은 여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성매매와 여성 인권
최근 서울 종로구 소재 한 여관에서 성 매수를 거절당했다며 여관에 방화해 여섯 명이 사망하고 네 명이 중상을 입는 참담한 일이 일어났다. 이 여관이 성매매 집결지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반 숙박업소에서 성매매 알선을 당연하게 요구했다는 사실이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 술 취한 상태에서 숙박업소에서 성매매를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거절되었다고 방화를 할 수 있는 사실은 2016년에 일어난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지나가는 여성이 지나가는 모르는 남성에게 둔기로 맞았다. 또 밥을 차려 주지 않는다고 아버지가 딸을 죽였다. 판사가 여성의 치마 속을 몰래 카메라로 찍었다. 이처럼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건들이 현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남성 피해자도 분명 있겠지만 더 쉽게 여성이 피해자가 되는 현실에서 여성의 위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로 선택되는 가장 취약한 여성들의 삶과 고통으로 여성 인권의 내용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성매매가 불법이라는 인식은 높아졌지만 한국 남성의 성 구매 경험률은 여전히 높다는 사실이다. 성매매는 불법이지만 남성들이 여전히 성을 구매한다는 것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일까?
여성가족부의 2016년 성매매 실태 조사에 따르면 일반 성인 남녀 2,134명(남 1,050명, 여 1,084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일반 남성 응답자의 50.7%가 평생 동안 한 번 이상 성 구매를 한 경험이 있다고 했으며, 25.7%가 최근 1년간 성 구매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는 2013년(27.2%)에 비해 1.5%p 감소한 것이지만 여전히 매우 높은 성 구매 경험률이다.
여성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 곧 이 사회의 가장 약자인 성매매 여성을 돈으로 거래할 수 있다는 인식은 결국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여성이 잘 인지해서 성매매를 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과, 그래도 ‘성매매를 선택(?)하는 여성은 (선택했으니)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이 오늘날 우리 사회 여성 인권의 수준이다.
이 사회는 자발로 성매매를 선택한 여성은 ‘여성’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물론 성폭력도 피해자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에 따라 성폭력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사회가 인정하는 ‘합리적 여성’이 아니면 성폭력 피해자로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와도 같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의 성폭력은 인정받기 어렵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에 대한 이중 규범에서 시작한다. 여전히 더러운 여성과 정숙한 여성의 이분법이 존재한다. 물론 정숙한 여성이라는 과거의 범주는 소비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정숙하면서 섹시한’(분열적) 여성으로 변화한다. 그러다 보니 예쁜(섹시한)여성은 여성이지만 못생긴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는 대중적 인식에 영향을 받은 10대 여성 청소년은 인형 같은 기형적 몸을 자발적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또 인형 같은 예쁜 몸이 아니거나 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갖추지 않으면 여성이 아니라는 현실에서 가해자들은 얼마든지 여성을 함부로 할 수 있다. 가정폭력의 원인인 성 역할의 부재, 곧 아내나 딸이 밥을 차려 주지 않거나 늦게 들어올 때, 예쁘게 단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데이트 폭력을 감행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가정 폭력은 가출을, 가출은 성폭력(데이트 폭력)과 비인격적 대우와 만나며 가출 청소년은 생존을 위해 성매매를 선택하기도 한다. 분명 자발적 선택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발성 뒤에서는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성매매는 여성 빈곤의 원인이자 결과로 여성의 건강을 해치는 주요 원인이며 모든 여성 폭력의 시작이자 종착지이다. 성차별과 특정 성 혐오가 폭력의 원인이고 그 결과 여성 인권의 수준이 바닥이 된다. 여성의 인권이 고양되면 이러한 순환 고리를 단절할 수 있다.
함께 만드는 여성 인권
여성 인권을 이야기할 때 회자되는 아픈 말이 있다. ‘여성이 죽어야 여성의 인권이 지켜질 수 있다.’는 말이다. 여성이 죽었거나 주변 사람이 죽어야 변화가 있었던 역사를 고려하면 일정 부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죽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엄청난 희생이 따를 때 변화가 있다는 것은, 여성 인권뿐 아니라 당사자가 투쟁을 통해 쟁취했던 인권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당연한 권리라고 말하는 인권을 확보하려는 역사 뒤에 엄청난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참 씁쓸하다.
여성 투쟁의 역사는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 다양한 인권 쟁취 사례가 있지만 오늘날 한국을 강타하는 ‘미투 운동’(#MeToo, 성폭력 생존자들이 누리소통망을 통해 자신의 피해 경험을 잇달아 고발한 현상)의 열풍을 들 수 있다.
미국발 미투 운동보다 훨씬 앞서 우리나라에는 여성들이 납득할 수 없는 피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역사가 있다. 1983년 ‘여성의 전화’ 핫라인 상담 전화와 19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 전화를 통해서다.
이런 현실에서 여성 인권을 고양하고자 하는 몇 가지 과제를 제안한다.
첫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법과 정책 등 제도가 여성의 삶을 돌보아 주기는 하지만 여성 인권을 고양하려는 필요조건이기는 하나 충분 조건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일회적인 법적 처벌로 폭력이 방지되지 않듯 성차별과 성 평등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여성의 인권을 고양하려는 사회 구조의 변화가 근본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당연하게 용인되는 여성성-성 역할, 가치, 통념, 제도 등의 변화가 요구된다.
둘째, 다양한 영역에서의 여성 인권의 고양은 여성뿐 아니라 여성과 함께 살고 있는 남성, 아동, 청소년, 노인까지, 곧 성별, 세대와 지역, 종교 등을 넘어 함께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여성 인권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시민으로 살아가려는 당연한 권리이자 지향으로 특별한 여성의 문제이거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요즘 새롭게 불을 지핀 ‘미투 운동’은 새로운 희망으로 우리에게 힘을 준다.
여성들이 분노를 넘어 행동하기 시작했다. 성폭력 피해뿐 아니라 이 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여성들과 남성들의 용기 있는 결단이다. 한국형 미투 운동의 연속선에서 서지현 검사가 드러낸 용기가 그 의미를 갖도록 우리는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고자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미투 운동을 넘어서 전 국민적인 응원과 지지의 ‘위드유’(#WithYou), 그리고 ‘나부터 나서서 성폭력을 막자.’는 ‘미퍼스트’(#MeFirst) 성폭력 방지 운동 그리고 여성 운동을 통해서 우리는 여성 인권을 지켜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이 남녀노소 같이 하는 시민운동이 될 때 여성 인권은 고양될 수 있다.
[빵과 장미, 그리고 여성의 인권] 교회와 여성, 그리고 모성
현시대는 남성과 여성이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 협력하고 발전하며 구체적인 변화를 이루어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 따라 교회도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2005년에 내놓은 「한국 천주교회 여성 사목 방향 정립을 위한 의식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앞으로 여성 신자의 비중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측되며, 여성에게 지도자로서 활동할 기회와 여건을 평등하게 제공하지 않는 기존의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알린다. 또한 이 보고서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여성들이 지도자로서 참여할 수 있도록 교회가 적극적으로 배려하기를 권장하며, 아울러 여성 사목의 핵심 과제로 ‘여성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의 개발과 교육’을 제안하고 있다.
아쉽게도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교회의 분위기를 볼 때 지도자보다는 뒤에서 조용히 일하는 협력자 또는 봉사자가 ‘여성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교회의 현대화에 발맞추는 여성의 지위와 역할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를 통해 현대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고자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교회의 현대화’(Aggiornamento)라고 말하는 이유도 교회가 현대 사회의 흐름에 발맞추어 세상에 문을 열어야 하며, 교회가 쇄신하여야 한다는 바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은 초대 교회 공동체처럼 성령 중심의 교회, 친교를 이루는 교회,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 하느님 백성으로의 귀환이다. 여기서 하느님 백성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말한다. 이처럼 교회는 어떤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로 구체화 된다. 곧 우리 모두가 교회인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고백한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기존의 성직자 중심의 수직적 교회 구조를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수평적 교회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교회는 공의회에서 말하는 이러한 모습과 닮았을까? 여성의 시각으로 이에 관해 다시 한번 살펴본다.
1994년에 발표된 교황 교서 「남성에게만 유보된 사제 서품에 관하여」에 드러난 가톨릭교회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가톨릭교회는 매우 근본적인 이유로 여성의 사제 서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직 남자들 가운데서만 당신의 사도들을 뽑으셨다는 성서의 기록, 오직 남자들만을 선택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를 지켜 온 교회의 관례, 여성의 사제직 금지는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과 일치한다는 것을 일관되게 견지해 온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입각한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도 교회의 위계적이며 남성 중심인 수직적 구조를 탈피하여 수평적이고 평등한 교회 구조로 쇄신하는 것을 복음화의 과제로 삼고 있지만, 사제품만은 여성에게 불가능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교계의 지도자로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교회 내 여성에게는 남성과 다른 역할이 주어진다.
가톨릭교회는 여성의 특별한 역할을 ‘모성’에서 찾는다. 특히 여성의 모성은 생명의 신비 안에서 발견된다. 곧 여성은 어머니가 되는 과정에서 고유한 본능으로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지하며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생명의 신비를 마주한다.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모성에 근거한 생리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과정을 겪지만, 모성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리학적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본질적인 의미, 곧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로서 하느님의 창조적인 능력에 동참하는 여성의 특별한 소명과 깊이 연결된다.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 과정에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성을 여성의 특별하고 고유한 영역으로 규정하면, 여성의 역할은 폭넓은 모성의 내용과 의미에 밀접하게 관련될 수 있다.
모성을 바라보는 교회와 페미니즘의 시각
여성을 모성과 연결시켜 여성의 소명감을 일깨우는 이러한 가톨릭 사상은 여성주의자의 관점에서 볼 때 단지 ‘모성 신화’로 비추어질 요소가 많다. 모성 신화란, 여성은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능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며, 모성을 통해 여성은 자기희생적이며 사랑을 주기만 하는 사람으로 이해되는 것을 말한다.
근대 페미니즘에서 모성은 ‘모성 신화’ 또는 ‘모성 이데올로기’로 강하게 비판받았다. 여성의 인권과 자유를 주장하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모성이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장애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모성 담론에서 여성의 역할은 ‘어머니 역할’(mothering)을 충실히 실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제한하고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서 남성보다 불평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가부장적 여성 통제의 핵심 기제로서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모성이 임신과 출산, 수유 같은 생물학적 요소뿐만 아니라 양육과 이데올로기라는 사회적 요소까지 포함하는 복합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곧 가정이 여성에게 자기희생과 소외의 장이 되고, 모성은 여성의 억압을 은폐하면서 여성에게 어머니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 이른바 ‘모성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이다.
근대를 비판하는 페미니즘에서 과거 여성의 덕목으로 칭송받았던 모성이 이처럼 평가 절하되었고, 여성의 자율성과 권리, 그리고 개인의 자기완성이 더 높은 가치로 인정받게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런 페미니즘의 주장과는 다른 가톨릭 사상을 세상에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한 방법으로 1995년 ‘베이징 세계 여성 대회’에 즈음하여 가톨릭교회의 공식 견해를 밝혔다. 교황은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당시 세계 여성 대회의 의제인 ‘평등, 발전, 평화’보다 더욱 중요한 일임을 상기시켰다.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 참여를 주장하던 당시의 정황에서 여성의 모성적인 역할을 강조하였기에 페미니즘과 가톨릭교회는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띠었다.
공동체성이 강조되는 21세기 사회로 접어들면서 페미니즘의 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모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여성 리더십에 대한 탐구 과정에서 생겨났다. 근대 모성의 한계를 벗어나 여성 리더십의 원천으로서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부장적인 사회가 지닌 여성을 억압하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여성의 고유한 역할과 실천 속에 형성된 모성적 가치가 여성 리더십의 원천으로 재발견되었다.
모성이라는 양식에 축적되어 온 ‘돌봄’(caring)이라는 가치가 여성주의적 윤리 시각으로 다루어지면서 모성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곧 모성은 혈연관계에서 오는 이기적 가족주의의 틀을 벗어나며, 모성의 실천으로 형성된 사회적 속성이 여성 리더십과 상호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명을 보호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모성 리더십이 새롭게 거론되고 있다.
‘생명을 보호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역할을 강조하는 가톨릭 사상이 이 시대가 요청하는 여성 리더십과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회적 모성 리더십
가톨릭 사상은 여성 특유의 역할을 모성에서 찾는데, 그러한 모성의 영역은 교회와 맞닿아 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혈연관계의 가족 공동체 범위를 넘어선다. 교회의 원형은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의 관계에서 재발견된다.
아들을 찾아간 어머니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또한 군중 가운데 한 여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어머니를 칭송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하고 응답하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혈연관계의 가족 범주를 벗어나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신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세워지는 새로운 공동체 건설에서 마리아는 첫 번째로 응답하는 신앙인이었다. 마리아의 소명감은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 4,4)라는 「성경」 말씀을 통해 전해진다. 마리아는 믿음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의지로 행하였고, 자신의 긍정적 응답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진정한 주체가 되었다.
마리아의 모성은 하느님의 새로운 구세사 창조에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응답(루카 1,38)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서의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품속에 감싸 안고 있거나 아들의 명성으로 칭송받으려는 여인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온전히 내건 신앙의 여인이었고, 아들의 길을 곁에서 지켜 준 든든한 후원자였으며, 하느님의 일을 이어 간 여인이었다. 마침내 하느님의 새로운 자녀들을 양육하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었다.
여기서 혈연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녀 관계를 넘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는 새로운 부모와 자녀 관계가 설정된다. 마리아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아들 예수를 낳음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마리아의 모성은 단지 아들의 몸이나 인성만이 아니라 모든 위격, 곧 신적인 차원과 연관된다.
마리아의 모성은 혈연관계의 육적 모성에 국한되지 않고, 신앙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집합체인 교회의 영적 모성을 일컫는다. 마리아는 육적으로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어머니로서 영적 어머니 역할을 수행한다.
교회의 어머니로서 마리아가 보여 주는 사회화된 모성은 이 세상을 당신 뜻대로 보전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인간의 품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교회의 여성 영성은 모성에 바탕을 두지만, 그 영역은 지구촌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오늘날 여성의 소명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인간성 상실을 막는 것’이며, 그러한 여성의 역할은 가족을 넘어 사회적 모성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사회적 모성은 사랑과 돌봄, 자애, 희생, 지혜, 희망이라는 특성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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