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12) 그늘 속의 사람, 정약현
하나는 죽고 둘은 귀양… 가문 지키려 아우 시신마저 거부
- 정창섭 작 ‘성 정하상 바오로 가족’. 왼쪽부터 복자 정약종의 딸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부인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 아들 성 정하상 바오로.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배 건너요!”
2018년 6월 12일, 필자가 다산의 여유당이 자리한 마재로 다산의 먼 일가인 정규혁 바오로 선생댁을 찾았다. 평생을 마재에서 사신 분으로, 92세의 연세에도 기억이 맑고 말씀이 곧았다. 6·25전쟁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온 마을에 찢어진 한적(漢籍)이 바람에 낙엽처럼 뒹굴던 얘기부터, 중공군 장교 하나가 틈만 나면 옛집 다락에 올라가서 그 많은 책을 여러 날 읽고 갔더란 얘기를 들었다.
집안에 구전된 이야기도 있었다. 정약종이 사형당한 뒤 목 잘린 시신이 배에 실려 두미협을 올라왔다. 마재 건너편 배알미리에서 관 실은 배가 마재로 건너려고, 큰 소리로 “배 건너요!”하고 외쳤다. 시신 실은 배라서 그랬다. 그러자 강가에서 “안 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되돌아왔다. 완강한 저지에 막혀 배는 끝내 못 들어왔고, 그 다음 날도 들어올 수가 없었다.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산의 큰 형님인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이었다. 집안을 결딴낸 당사자의 시신을 고향 집으로는 절대 들일 수 없다는 결연함이 묻어 있었다. 결국, 정약종의 시신은 고향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배알미리 쪽에 묻혔다고 한다.
정규혁 선생 소유의 땅이 예전 배알미리 쪽에 있었다. 산자락에 봉분 비슷한 무덤 흔적 3개가 희미했다. 전부터 그중 하나는 머리 없는 무덤으로 불렀다. 인근의 한씨 집안 묫자리에서 묵주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짚이는 것이 있어 1956년 또는 1957년경 이 무덤의 존재를 알렸고, 주교님과 정약종의 후손되는 두 분 신부님의 입회 아래 그곳을 팠다.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에 걸쳐 세 곳을 모두 팠는데 세 곳 모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파고 파도 흙뿐이어서, 무덤 자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첫날 두 무덤을 팔 때는 입회했고, 월요일은 출근 때문에 입회하지 못했다. 나중에 그곳을 정약종의 묘소로 인정하고, 그 흙을 담아 직계 후손이 살던 안산으로 이장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후 “배 건너요!” 하는 외침에, 강가에서 결연히 ‘안 돼!’를 외치던 정약현의 이미지가 내 안에 새겨졌다.
그 사이의 고초는 붓으로 적기 어렵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가산을 모두 적몰(籍沒) 당해 어쩔 수 없이 마재로 돌아온 정약종 일가가 고향 집에 와서 받았던 핍박에 대해 유독 자세히 적었다. 부친 생존 시에도 천주교 신앙을 엄금한 부친의 명을 거부하고, 정약종은 집안과 절연한 채 분원 쪽으로 이주했었다.
정약종이 사형당한 뒤 그의 모든 재산은 적몰되어 가족들은 지낼 곳조차 없었다. 달레의 기록에 따르면 “친척들은 죽기가 무서워 그들을 도와주는 것을 두려워” 했고, 정약종의 옛 친구 한 사람이 이들을 마재로 데려오자, 집안에서 이들을 차마 쫓아내지는 못하고 옹색하고 시련 많은 생활을 시작했다고 썼다. 그 옛 친구가 누구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거기서 가진 것도 없고 양식도 없이 버림을 받았는데, 다행히 어떤 상민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달레는 다시 이렇게 적었다. “아무 재산도 없어 마재에 있는 시아주버니댁으로 갔는데, 시아주버니는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집안에서 천만 가지로 핍박하였고, 극도의 빈궁 속에 신음하게 버려두었다. 맏딸은 얼마 가지 않아 죽었고, 순교자 정철상 가롤로의 아내와 아들도 죽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와 딸 정정혜 엘리사벳밖에 남지 않았다.”
1890년 홍콩 나자렛수도원(納肋靜院)에서 펴낸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相書)」 앞에 실린 「재상에게 진술한 글을 쓴 정 바오로에 대하여(述宰相書丁保祿日記)」에서는 “그 사이의 고초는 한 붓으로는 다 기록하기가 어렵다(這間苦楚, 一筆難記)”고만 썼다. 정약현을 중심으로, 가장을 유배지로 보낸 정약전과 정약용의 가족이 힘을 합쳐 정약종의 남은 식구를 원수처럼 배척하고 핍박하던 정황이 눈에 그릴 듯하다. 이들에게는 가문의 명줄이 달린 문제여서 그 핍박 또한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다산은 「계부가옹행장(季父稼翁行狀)」에서 막내 삼촌인 정재진(丁載進, 1740~1812)이 “화를 당한 집의 고아와 과부를 더욱 불쌍히 여겨, 집을 세내서 살게 하고, 때때로 급한 형편을 돌보아 주었다.(禍家孤寡, 尤愍恤之, 屋以居之, 以時周急)”고 적고 있다.
달레의 책에는 이런 내용도 보인다. 어느 날 아내 유소사 체칠리아의 꿈에 정약종이 나타나 말했다. “내가 천국에 방이 여덟 개 딸린 집을 지었소. 그중 다섯은 찼는데, 나머지 세 방은 아직 빈 채로요. 비참한 생활을 잘 참아 견뎌, 무엇보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오.” 절대적 궁핍과 가문의 학대 속에 전처 소생의 딸과 정철상의 아내, 그리고 어린 아들마저 잃고 절망에 빠져있던 유 체칠리아는 이 꿈을 꾼 뒤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마재 정씨 천주교 인맥의 꼭짓점
강가에 서서 아우의 시신 실은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정약현은 배경 속 희미한 그늘에 숨어 있어서 좀체 그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과는 배다른 형제였다. 어머니 의령 남씨는 1751년 5월 6일 아들 약현을 낳고, 이듬해인 1752년 10월 24일에 세상을 떴다. 그는 두 살 젖먹이 때 어미를 잃고, 유모를 따라 외가에서 자랐다. 그의 조용한 성품은 이 같은 성장 과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우들은 형에 비해 항상 더 빛났다. 1789년 막내 다산이 28세에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하지만 맏형인 그는 6년 뒤 45세 나던 1795년 봄에야 진사시에 턱걸이로 합격했다. 이후 대과를 포기하고, 가문의 관리자로 살았다.
다산은 그런 큰 형에 대해 「선백씨진사공묘지명(先伯氏進士公墓誌銘)」에서 이렇게 썼다. “신유년(1801)의 화에 우리 형제 세 사람이 나란히 기이한 화에 걸려들어, 하나는 죽고 둘은 귀양 갔다. 공은 없는 듯이 물의(物議) 속에 들지 않고 우리 집안을 보전하고 제사를 받들었다. 온 세상이 모두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벼슬은 한 차례도 못한 채 마침내 초췌하게 세상을 떴다.”
대과에 급제한 정약전과 정약용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서 귀양을 갔고, 천주교 명도회 회장으로 활동한 정약종은 목이 잘려 형장에서 죽었다. 큰형인 그만 아무 벼슬도 하지 않고 신앙생활도 하지 않아 연루됨이 없이 집안을 지킬 수 있었다. 집안에 천주교 신앙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아버지 정재원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정약현은 대역부도에 몰려 폐족이 된 집안을 붙들어 지키려 안간힘을 썼다.
앞서 보았듯 정약현 자신이 신앙 활동을 한 자취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초기 천주교회의 기둥이 된 인물들이 모두 그의 그늘에서 나왔다. 우선 초기 교회의 리더 이벽은 정약현의 처남이었다.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에게 천주교를 심은 출발점이 바로 이벽이었다. 정약현은 딸 셋을 두었다. 맏딸 정난주(마리아, 1773~1838)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에게 시집갔다. 둘째 사위는 승지를 지낸 홍영관(洪永觀, 1777~?)이고, 셋째 사위가 홍낙민(洪樂敏, 루카, 1751~1801)의 아들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 1789~1840)이다. 홍재영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아버지 홍낙민을 이어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처남과 사돈이 초기 교회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게다가 친동생 정약종은 천주교의 지도자였고, 누이는 조선교회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에게 시집갔다. 초기 가성직 교단의 신부였던 정약전 정약용에다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과 정하상의 어머니 유소사 체칠리아와 그 딸 정정혜 엘리사벳까지 포함하면, 마재 정씨 집안의 천주교 인맥이 결코 단순치가 않다. 황사영이 결혼 후 처음으로 천주교 이야기를 들었다고 쓴 것을 보면, 정약현의 딸은 결혼 전에 이미 독실한 천주교도였던 듯하다. 그런 그가 교난(敎難)의 와중에서 유독 비켜갈 수 있었던 것은 천운에 가까웠다.
정약현이 정약종의 가족에게 가한 학대에 가까운 핍박은 어떻게든 잔명을 붙들어 가문을 유지하려는 안타까운 비원(悲願)처럼 여겨진다. 부친 서거 후 가뜩이나 옹색한 마당에다 망하정(望荷亭)을 세우고, 날마다 정자 위에 올라가 부친의 묘소가 있는 충주 하담(荷潭) 쪽을 바라보던 그의 자책 어린 아련한 눈길도 보인다.
그런 그의 거처에 다산은 유배지에서 「수오당기(守吾堂記)」를 지어 올렸다. 글에서 다산은 ‘나’를 굳게 지킨 형님에 비해, 나를 잃고 오래 딴 길을 헤맸던 자신을 반성했다. 정약전의 거처에 지어 올린 「매심재기(每心齋記)」에서는 ‘매심(每心)’ 즉 뉘우치는 마음(悔)을 토로하기도 했다. 집안을 중심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 천주 신앙이 온 집안과 조선 땅에 천주학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같은 정황을 말없이 배경에서 지켜보았을 정약현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13)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8일 피정
권일신,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면서 절에서 8일을 지내다
- 「성경광익」 표지와 「성경광익」 앞쪽에 수록된 ‘피정근본’.
권일신이 용문산 절에서 가진 최초의 피정
1785년 3월 명례방의 집회가 추조에 적발되면서 천주교 신앙 집단의 존재가 수면 위로 처음 드러났다.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 1728~1803)은 뜻밖에도 문제를 키우지 않고 중인(中人)인 김범우(金範禹, ?~1786) 한 사람만 처벌한 뒤 서둘러 사태를 봉합했다. 관련자들이 모두 쟁쟁한 집안의 후예들이어서, 자칫 큰 파란으로 번질 우려가 있었다. 이 와중에 리더였던 이벽이 그해 초가을에 전염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조선인으로서 처음으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은 배교를 공언하고 「벽이문(闢異文)」까지 공표하며 이탈을 선언한 상태였다. 정약용 형제 또한 아버지의 밀착 감시 아래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최고의 이론가 이벽의 죽음 이후, 교회의 중심 그룹이 주춤하는 사이, 피치 못하게 천주교회의 새로운 리더 역할을 맡게 된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베리오, 1751~1791)은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 1739~1830)과 함께 피정을 결심하게 된다. 관련 내용이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이 설명의 근거는 말할 것도 없이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였을 것이다. 책에 따르면, 권일신은 활발한 전교 활동의 와중에 피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던 듯하다. 서학서를 펴놓고 함께 공부하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교회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지도력을 발휘하려면 더 굳건한 영성의 확립과 교리 이론의 장악이 절실했을 것이다. 권일신은 자신의 신심과 교리 지식이 이벽에 결코 미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달레는 이때 일을 이렇게 썼다. “그는 규칙적인 피정(避靜)을 할 결심을 하고, 자기의 계획을 더 쉽게 실천하기 위하여 용문산에 있는 어떤 적막한 절로 들어갔다. 친구 중에서는 오직 한 사람, 조동섬만이 그를 따라갔다. 절에 도착한 그들은 피정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주님과 그 성인들을 본받고자 하는 바람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신심 수업, 즉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면서 절에서 8일을 지냈다.”
이때 권일신이 찾아갔다는 용문산의 적막한 절은 어디였을까? 권일신의 집이 있던 감호(鑑湖)를 기준으로 볼 때 지금의 양평읍 쪽에서 남한강을 건너 용문산 중턱에 숨은 절 사나사(舍那寺)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널리 알려진 용문사는 반대쪽으로 접근해야 한다.
시끄러운 곳을 피해 고요히 수행하다
피정(避靜, retreat, recessus spiritualis)은 말 그대로 고요한 곳으로 피해 들어가는 것이다. 시끄러운 곳을 피해서 고요함을 취한다는 뜻의 피뇨취정(避鬧取静), 또는 피속추정(避俗追靜) 즉 속세를 피해 고요함을 추구한다는 말에서 나왔다. 예수께서 40일간 광야에서 단식하신 일을 본떠 시작된 것이, 16세기 성 이냐시오 로욜라(St. Ignatius of Loyola)가 자신의 저서 「영신수련(靈身修鍊, Exercitia Spiritualia)」을 통해 실제적인 피정 방법을 제시하면서 오늘날까지 천주교회에서 보편적인 신심 수련의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권일신이 8일간의 피정에 들어가면서 근거로 삼은 서학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성경광익(聖經廣益)」과 「성년광익(聖年廣益)」 두 책이었음에 틀림없다. 8일이란 피정 기간도 「성경광익」에 규정된 것이고, 이 책에는 8일간 매일매일의 시간표와 묵상 제목까지 제시되어 있다. 또 묵상의 구체적 내용은 「성년광익」에 실려 있다.
이 두 책은 모두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이야(J.F.M.A. de Moyriac de Mailla, 馮秉正, 1669~1748)의 저술이다. 그는 중국어와 만주어에 능통하고 중국 문화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지닌 인물로, 두 책 외에도 「성세추요(盛世芻蕘)」와 같은 교리서와 신심서를 펴냈다. 「성경광익」은 「성경」의 중국어 완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성경직해(聖經直解)」를 확장하여 매주 미사에 맞춰 성경 본문과 이에 대한 묵상, 그리고 기도문을 제시한 책이고, 「성년광익」은 날짜별로 정리한 가톨릭 성인전과 묵상자료집이다.
「성년광익」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까지 성인이 되는 바탕은 묵상에서 말미암은 것이 대부분이다. 고금의 여러 성인이 서로 전해온 것을 두루 소급해보더라도 이 한 가지 길을 버리고서 능히 큰 덕과 기이한 공을 이룬 경우는 거의 없다.(從來作聖之基, 多由於默想. 歷溯古今聖聖相傳, 鮮有舍此一途, 能使大德奇功.)” 두 사람이 피정이 진행된 8일 동안 묵언 수행을 다짐한 것은 이 첫 문장 때문이었다.
권일신은 장차 조선천주교회에서 대덕기공(大德奇功)을 세워 기사귀정(棄邪歸正), 즉 삿됨을 버리고 바름으로 돌아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마땅히 한 번에 8일을 기준으로 삼아 거행해야 한다”고 한 것을 권일신이 그대로 따라 했다. 또 「팔일총강(八日總綱)」에는 “8일 중에 날마다 3차례 묵상하고, 매번 1시간을 쓴다.”면서 그 자세한 수행의 방법을 설명했다. 날마다 묵상하는 제목의 차례는 반드시 「성경광익」과 「성년광익」 두 책에 제시된 제목을 순서대로 진행하되, 순서를 건너뛰거나 다른 날 할 것을 미리 앞당겨 해서도 안 된다고 적었다. 이 과정 중에는 속무(俗務)를 완전히 손에서 떼어냄으로써 다른 생각으로 분심이 들지 않게 해야만 한다고도 했다.
앞쪽에 실린 「8일 내 묵상간서제목(默想看書題目)」을 보면 첫날의 묵상 주제는 ‘잠시 살다 가는 인생을 잘 쓰자(善用暫生)’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小心時候)’, 그리고 ‘영혼을 잘 보살피자(小心靈魂)’이다. 이것을 세 차례에 걸쳐 1시간씩 묵상한다. 제목 아래 ‘「성년광익(聖年廣益)」 1편 14일’과 같이 함께 읽을 대목이 지정되어 있다. 이를 이어 성 바오로 전기와 성 안토니오의 전기를 읽고 묵상한다. 그리고 다시 ‘경기(輕己)’, ‘중령(重靈)’, ‘진심(盡心)’의 세 화두를 들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기도한다. 역시 매 항목마다 두 책에서 엮어 읽을 대목을 지정해 두었다.
하루의 일정은 새벽 5시부터 시작해서 저녁 8시까지 시간표에 의해 진행되었다. 대단히 빡빡한 강행군이었다. 8일간 두 사람은 두 책을 옆에 두고 서로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 피정의 일정을 소화했다.
명례방 집회와 「성경광익」
이렇게 볼 때, 당시 권일신과 조동섬은 그냥 단순히 “조용한 사찰로 가서 기도와 묵상 등으로 신앙을 실천”한 것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각오와 다짐 아래 교회 지도자로서 부족한 자질을 채우고, 신심을 고양시켜 천주 대전에 부끄러움이 없는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비장한 각오로, 정해진 규정에 따라 「성경광익」과 「성년광익」 두 질의 책을 펼쳐가며 8일 피정을 진행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 천주교회에서 최초로 진행된 본격 피정이었다.
이 사실은 여러 문제를 환기시킨다. 먼저 1785년 명례방 집회 당시 이벽이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강론했고, 함께 있던 사람들의 손에 들려있던 책이 다름 아닌 「성경광익」이었고, 당시 이들이 이 책과 함께 「성년광익」도 열심히 읽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성경광익」은 앞쪽의 피정에 대한 설명 이후로는 매주 미사에서 읽을 성경 한 대목과 이를 이어 ‘의행지덕(宜行之德)’이라 하여 마땅히 행해야 할 한 가지 덕목에 대한 묵상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끝에 실은 ‘당무지구(當務之求)’는 그 아래에 기도의 제목을 적고, 기도문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비해 「성년광익」은 앞쪽에 1년 365일에 따라 주제문에 해당하는 「경언(警言)」을 제시한 뒤, 날마다 한 분의 성인전을 소개하고, 그를 통해 배우는 ‘의행지덕(宜行之德)’과 기도문인 ‘당무지구(當務之求)’를 수록했다.
당시 명례방 검거 당시의 모임은 단순한 교리 연구 모임이 아니었다. 이벽이 주일 미사를 집전하면서, 해당 주일의 성경을 읽고, 이에 대해 설명한 뒤, 의행지덕에 대해 강론하던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권일신은 이벽보다 연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제자라 일컬으며 책을 옆에 끼고 모시고 앉아 있었다고 「벽위편」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 모임이 두어 달 되었다고 한 시점이었으므로, 권일신의 입장에서는 이벽에게 강론을 듣지 못한 나머지 부분에 대한 이해 부족을 절감하고 있었을 터였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이들의 피정을 소개한 뒤, “진정한 천주교 정신에 잘 맞는 이러한 실천은 그들 자신과 그들이 피정 후에 가르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얻게 한 것이 확실하다”고 썼다. 그들은 영성이 충만해져서 산을 내려왔고, 8일간의 영적 기도로 얻은 은총으로 침체에 빠진 조선 교회에 새로운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14) 그들은 왜 얼굴에 분을 발랐을까
집회 참석자 대부분 얼굴에 분을 바른 채 푸른 두건을 쓰다
- 김태 선생의 ‘명례방 집회’. 명동대성당 소장.
이벽의 설법 장면과 제건(祭巾)의 모양
「벽위편」에 실린 이만채(李晩采)의 글이다. “을사년(1785) 봄,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용 등이 장례원(掌禮院) 앞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설법하였다. 이벽이란 자가 푸른 두건을 머리에 쓰고 어깨에 드리운 채 정 가운데 앉아 있었고,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제자를 일컬으며 책을 낀 채 모시고 앉아 있었다. 이벽이 설법하며 가르치는 것이 우리 유가에서의 사제의 예법에 비하더라도 더욱 엄격하였다. 날짜를 약속해서 모인 것이 거의 몇 달이 지났으므로, 사대부와 중인으로 모인 자가 수십 인이었다. 추조(秋曹)의 금리(禁吏)가 그 모임을 도박판으로 의심해서 들어가 보니, 대부분 낯에 분을 바르고 푸른 두건을 썼는데, 손가락을 드는 것이 해괴하고 이상했다.”
1785년 모임에 다산 3형제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조금 낯설다. 설법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를테면 미사의 집전과 강론을 한 것일 테고, 당시 이들이 옆에 끼고 있던 책은 앞서 8일간의 피정을 말할 때 설명했던 마이야의 「성년광익」 또는 「성경광익」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연히 언해본이 아닌 한문 원본이었다.
이 일이 있기 전 이벽 등이 천주교를 믿고 따른다는 말에 이가환이 이를 나무라자, 이벽이 그와 논쟁하여 이가환의 말문을 막은 일이 있었다. 이에 이가환이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겠다고 하니, 이벽은 「성년광익」 한 부가 있었지만, 이가환이 성스러운 기적을 믿지 않을까 염려해서 이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 했다는 내용이 황사영의 백서 속에 나온다. 이벽이 이미 「성년광익」 한 질을 갖춰두고 공부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사제간의 예법이 엄격해 보였다고 한 것은 집전자이자 강론자였던 이벽의 권위가 엄연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사제의 역할을 이승훈이 아닌 이벽이 맡았다는 얘기다. 사실 이벽의 권유에 의해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의 신심은 당시 북경에서도 영세를 줄 수 있느냐로 논란이 있었을 만큼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해 전부터 천주교 공부를 집중적으로 계속해온 이벽을 능가할 사람은 당시 조선에는 없었다.
- 마태오 리치 신부 초상.
한편 이벽에 대한 묘사에서 청건(靑巾)을 ‘복두수견(覆頭垂肩)’, 즉 푸른 두건을 써서 머리를 덮고 어깨 위에 드리웠다고 적었다. 마태오 리치의 초상화에 나오는 두건처럼 관(冠)을 머리 위에 쓰고, 그 뒤로 두 개의 길쭉한 천을 달아 양어깨로 드리운 모양이었을 것이다.
알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가 정리한 「미사제의(彌撒祭義)」에 당시 이벽이 썼다는 제건(祭巾)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사방 둘레에 모두 나부끼는 판이 있고, 세 번 꺾은 줄이 있다. 한 모서리는 앞쪽을 향하고, 뒤편에는 두 개의 길게 드리운 띠가 있다. 이것이 바로 제건(祭巾)이다(上方下圓, 四圍俱有飄版, 俱有三折線路, 以一角向前, 後有二長垂帶, 卽祭巾也)”라고 설명했다. 당시 이벽이 썼던 제건의 모양도 이것과 비슷했을 것으로 본다.
분면청건(粉面靑巾)의 이유
위 「벽위편」의 기술에서 더 주목을 끄는 것은 대부분의 참석자가 ‘분면청건(粉面靑巾)’을 하고 있었다는 대목이다. 참석자 모두가 얼굴에 분을 바른 채 푸른 두건을 쓰고 있었다. 미사를 드린 것은 알겠는데, 얼굴에 분은 왜 발랐을까? 앞서 권일신이 이 사건 이후 8일 피정을 진행한 것과, 근거 경전이 바로 「성년광익」과 「성경광익」인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날 이들이 얼굴에 분을 바른 것도 분명 교회력에 따른 전례의 일환으로 봄이 타당하다. 이승훈은 1784년 봄에 귀국했다. 그의 북경 체류 기간은 1783년 음력 12월부터 1784년 2월까지이니, 혹 그 기간에 보았을 의례를 본떠 행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다. 우선 이벽의 제건과 달리, 나머지 사람이 쓴 청건은 아마도 복두(幞頭)의 모양이 아니었을까 한다.
굳이 푸른색으로 통일한 것에는 어떤 뜻이 담겼을까? 당시 미사 때 입는 제복(祭服)은 흰색, 빨간색, 검은색, 하늘색, 녹색을 때에 맞춰서 썼다. 「미사제의」에 하늘색의 의미를 설명한 대목이 보인다. “천청(天靑) 즉 하늘색은 하늘의 바른 색이니, 겨울과 봄에 많이 쓰고, 재일(齋日)을 만나 혹 힘들게 공과(功課)를 행하며 천주께 기구할 때 모두 이것을 쓴다. 대개 이 색깔은 하늘과 가깝기 때문에 천주와 통하여 도달하기를 원하는 자가 입는다(天靑者, 天之正色, 冬春多用. 凡遇齋日, 或行苦功, 祈求天主之時, 皆用之. 盖此色近天, 故願通達于天主者衣之)”라 한 대목에 눈길이 간다.(조한건, 「성경직해광익 연구」, 서강대 사학과 박사논문, 2011 참조)
한편 얼굴에 분을 바르는 의식은 아무래도 ‘재의 수요일’ 예식을 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싶다. 재의 수요일을 당시에는 ‘성회예일(聖灰禮日)’로 불렀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뜻에서 이마에 재를 바르는 의식을 행했다. 「성년광익(聖年廣益)」의 「성회예의(聖灰禮儀)」 항목에서는 이 의례를 이렇게 설명한다. “대개 성회(聖灰)란 영혼의 거룩한 약제(藥劑)이니, 각 마음의 병을 능히 낫게 해준다.(蓋聖灰爲靈魂之聖劑, 能療各心之病.)” 또 “네가 사람이 됨은 재로 만든 것임을 기억하라. 어제 재에서 나서, 내일에는 반드시 재로 돌아가리라. 천주께서 재로 정신의 병을 치료해주신다…오늘 천주의 약제와 천주의 말을 빌려 재를 써서 이마에 찍으면서, ‘벗이여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微小)하기가 모두 재와 같을 뿐이라, 천주께서 재를 가지고 사람의 몸을 만드셨으니, 그 몸은 얼마 못 가서 또 재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여라’라고 말한다
이날 이들이 흰 재를 이마에 바르고 있었다면, 영문을 모르는 파수꾼의 입장에서 보면 영락없이 사내들이 얼굴에 분을 발랐다고 착각할만했을 것이다. 다만 교회력으로 확인해 보니, 1785년의 재의 수요일은 양력 2월 9일이었고, 음력으로 환산하면 1월 1일, 정월 초하루로 나온다. 음력 3월 중순과는 도저히 날짜를 맞출 수가 없다. 하지만 초기의 엉성했던 전례 지식과 정보를 고려하면, 이들이 당시에 그레고리안력에 의거해서 정확하게 로마 교회의 전례를 실행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교회의 전례를 체험한 이승훈의 기억에 바탕을 둔 전례 적용이었다고 볼 때, 이승훈이 북경에 체류할 당시 1784년 음력 1월에 체험했을 성회예의 행사를 떠올려, 3월에 이를 적용해 보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시 이들은 명례방에 모여 회개와 다짐의 의식을 행하면서 「성년광익」 3편에 실린 「성회예의」의 설명에 따라, 이승훈이 북경 체류 당시 직접 보았던 성회예의의 의식을 재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명동대성당의 ‘명례방 집회’ 성화(聖畵)
현재 명동대성당에 걸려 있는 명례방 집회 모습을 그린 성화는 화가 김태 선생의 작품이다. 정웅모 신부의 그림 해설(2018년 10월 28일 연중 제30주일, 서울주보 5면)에 따르면 장면 하나하나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화가는 이벽이 입고 있는 하늘색 두루마기가 그가 지금 천상의 진리에 대해 가르치고 있음을 나타내고,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십자고상과 「천주실의」이며, 앞쪽에 공간을 비운 것은 후대에 주님을 믿게 될 사람을 위해 남겨둔 자리라는 뜻을 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각각의 인물 배치도 구체적 인명을 염두에 두고 그린 섬세한 작품이다.
다만 그 복장이 「벽위편」에서 묘사한 분면청건이나 푸른 두건이 머리를 덮고 어깨에 드리운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쉽다. 기록에는 이벽 뿐 아니라 대부분의 참석자가 청건을 쓰고 얼굴에 분을 발랐다고 썼다. 인물들은 청건을 쓰고 있었기에 이마에 묻은 흰 재가 더욱 도드라져서 포졸들 눈에 마치 분을 바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또 「벽위편」에서는 “마침내 예수의 화상과 서책과 물건 약간을 적발하여 추조에 보냈다(遂捉其耶蘇畵像及書冊物種若干, 納于秋曹)”고 썼다. 적어도 이벽이 앉은 뒤쪽 벽면에 예수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다. 또 ‘거지해이(擧指駭異)’라고도 썼는데, 손가락을 드는 행동이 해괴하고 이상했다는 말이다. 그들이 성호를 긋는 모습이 이렇게 보였던 듯하다.
이 작품은 작가의 깊은 이해와 해석이 담긴 걸작임에 틀림없고, 오랫동안 신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성화는 한 장면을 여러 화가가 나름의 해석을 담아 그리는 것이니, 청건을 쓰고 예수의 성상(聖像)을 걸어둔 형태의 그림도 새로 한번 시도해봄 직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벽위편」의 명례방 집회 장면에 대한 묘사는 당시 이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었고, 청건까지 마련해서 썼을 정도의 열성을 보였음을 보여준다. 분을 바른 것은 재의 수요일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들은 이미 미사 전례나 복식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15) 을사추조 적발 사건의 막전막후
김범우만 가두고 사대부 집안 자제 모두 무죄 방면한 까닭은
- 1785년 봄 명례방(현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 이승훈,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삼형제 및 권일신 등은 종교 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형조관리에게 발각돼 체포되었는데 그 중 유일하게 중인 신분이었던 김범우만 감옥에 갇혀 형벌과 고문의 여독으로 1786년 사망했다. 그림은 탁희성 작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공적집회도’로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상한 집회 현장
1785년 3월, 명례방 추조 적발 사건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 보자.
명례방 집회 적발 현장에서 정작 당황한 것은 형조의 포졸들이었다. 얼굴에 분까지 바른 양반가의 자제들이 푸른 두건을 쓴 채, 푸른 제건(祭巾)을 한 키 큰 사내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있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십자가가 놓였고, 벽에는 이상한 서양 사내의 화상이 걸려 있었다. 포졸들은 노름판인 줄 알고 덮쳤다가 싸한 현장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도리어 허둥댔다.
뭐지? 막상 방안의 사내들은 침착했다. 수십 명의 사람을 줄줄이 묶어 체포하고, 현장의 이상한 물건들을 압수한 뒤 보고가 올라갔다. 이제 막 형조판서로 부임했던 김화진(金華鎭, 1728~1803)은 이 일로 몹시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실로 미묘한 타이밍에 난처한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붙들려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다 하는 남인 명문가의 자손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평생 처음 포승줄에 묶여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실제 검거도 있었고,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었음에도 사건 발생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남은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김화진이 형조판서에 임명된 날짜는 「정조실록」에 1785년 2월 29일로 나온다. 그러니까 추조 적발 사건은 그의 임명 이후인 3월에 발생했다. 또 이들이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에 날짜를 정해 주일을 지켰다는 기록이 홍유한의 경우와 주어사 모임 이후 천주교 모임을 말할 때마다 반복해서 나온다. 당시 명례방 집회 또한 1784년 연말부터 한 달에 네 번씩 정해진 날짜에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명례방 집회 날짜는 3월 7일, 3월 14일, 3월 21일, 3월 28일 중 하나였을 텐데, 추조에 적발된 날은 정황상 3월 14일과 21일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3월 7일은 너무 빠르고, 3월 28일은 너무 늦다.
김화진은 당시 58세로, 일반적으로는 노론 온건파로 알려졌지만, 황윤석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는 소론으로 나온다. 이조ㆍ호조ㆍ병조ㆍ예조판서를 두루 거쳤고 오늘로 치면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 판윤까지 지낸 노련한 정객이었다. 그런 그가 명례방 추조 적발 사건을 쉬쉬하면서, 사태를 덮기에 급급했던 것은 실로 의외다. 이것이 김화진의 개인 판단이기는 어렵다. 그냥 터뜨리기에는 이 사건이 지닌 폭발력이 너무 컸다. 한순간에 조정을 격랑 속으로 빠뜨릴 수 있는 문제임이 분명했다.
3월에 발생한 「정감록」 역모 사건의 여파
김화진이 형조판서에 제수된 1785년 2월 29일에, 실록에는 “숙장문(肅章門)에서 김이용(金履鏞)과 이율(李瑮)과 양형(梁衡)을 친국하다”로 역모 사건 취조의 공식 개시를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김화진이 형조판서에 제수된 날 역모 사건의 취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임금이 김화진에게 이 사건의 총괄 처리를 맡겼다는 뜻이다.
이날 터진 것은 이른바 문양해(文洋海)의 「정감록」 역모 사건으로 불리는 변고였다. 이 사건은 「정감록」 신앙과 관계되어 왕조의 아킬레스건을 깊숙이 찔렀다. 3년 전인 1782년에도 문인방(文仁邦)에 의한 「정감록」 역모 사건이 조선을 뒤흔들었다. 이번 또한 그때와 비슷하게 팔도에서 일제히 기병해서 한양으로 쳐들어와 조선을 접수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역모 계획이었다.
문양해 등이 중심이 된 지리산 하동(河東) 일원의 신흥 종교 집단과 서북 지역의 술사(術士) 주형채(朱炯采), 정조 초년 한때 최고의 권력자였던 홍국영의 사촌 동생 홍복영(洪福榮), 밀고자 김이용 등이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어서, 자칫 국기(國基)를 뒤흔들 민감한 사안으로 번질 기세였다. 조정이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들의 배후로 지목된 이현성(李玄晟)이란 인물은 나이가 250살인데, ‘도처결(都處決)’이란 것을 지니고 다니면서, 군사를 일으킬 방향을 지시하고, 권력을 탐하는 자를 자객이나 범을 보내 죽인다고 했다. 500년 된 사슴과 400년 된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녹정(鹿精)과 웅정(熊精)의 존재도 등장했다. 녹정은 별호를 청경 노수(淸鏡老壽) 또는 백운 거사(白雲居士)라 했고, 웅정은 청오 거사(靑烏居士)라 불렀다. 녹정은 얼굴이 길고 머리털이 희었으며, 웅정은 낯빛이 흐리고 머리털은 검었다고 했다.
녹정은 “동국(東國)은 말기에 셋으로 갈라져 100여 년간 싸우다가 비로소 하나로 통합된다. 통일할 사람은 정가(鄭哥) 성을 가진 사람이고, 그 싸움은 나주(羅州)에서 먼저 일어난다. 유가(劉哥), 이가(李哥), 구가(具哥) 성을 가진 세 사람이 거사하여 반정(反正)할 텐데, 거사 시기는 을사년 7, 8월이 아니면 병오년 정월이나 2월이다”라고 말했다. 모두 문양해의 서면 공초에서 나온 말이었다.
여기에 더해 제주 섬에 있다는 진인이나, 미래를 예언하는 향악선생(香嶽先生)이란 별호를 지닌 일양자(一陽子) 김정(金鼎), 하동 영원사(靈源寺) 승려 혜준(慧俊) 같은 정체가 모호한 존재들이 잇달아 등장해서 풍문을 한껏 부풀렸다. 3월 16일 기사에는 마침내 비결서인 「정감록」과 「진정비결(眞淨秘訣)」의 내용까지 등장했다. 3월 26일에는 을사년 3월에 역모가 일어난다는 의미를 담은 ‘을용(乙龍)’이란 두 글자가 관련자 대질 심문 자리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취조의 결과만 두고 보면 당시 역모의 정황은 전국 규모였다. 영흥과 통천, 고성과 광양, 태안, 당진, 면천, 공산, 한산, 황주, 봉산, 곽산, 안변 등 전국 각지에 거점을 두고, 자기들끼리 대도독이니 유장(儒將)이니 하면서 거점별 조직책의 이름까지 다 나온 상황이었다.
긴장한 조정에서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부산 동래와 묘향산, 남원 지리산까지 수색하는 소동을 벌였다. 이현성의 근거지라는 지리산 선원촌(仙苑村)을 찾기 위해 선전관(宣傳官) 이윤춘(李潤春)을 비밀리에 파견했고, 평안도관찰사 정민시(鄭民始)는 묘향산 일대를 여러 차례 수색한 뒤 조정에 보고서를 보내왔다.
조정은 이 풍문의 실체를 잡기 위해 3월 한 달 내내 온통 총력전을 펼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모 사건이 그렇듯 서로 물고 물리는 취조의 과정에서 연루자만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손에 잡히는 실상은 없었다. 이 역옥은 3월 29일 주모자인 문양해와 홍복영을 처형하고, 관련자를 귀양 보냄으로써 정확히 한 달 만에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처음으로 주목한 백승종 교수는 그의 책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푸른역사, 2006)에서 이 사건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듬해 사건 수사에 간여했던 포도대장 구선복(具善復)과 그의 조카 구명겸(具明謙)이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고, 정조가 이듬해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게 된 것도 이 사건의 여파라고 보았다. 남은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은 채로 조정은 서둘러 이 문제를 덮었던 것이다. 그만큼 「정감록」은 언제라도 민중의 소요를 일으킬 수 있는 뇌관이었다.
형조로 끌려간 그들은 어찌 되었나?
공교롭게도 명례방 추조 적발 사건은 문양해 「정감록」 역모 사건이 한창 확대일로로 치닫던 와중에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어쩌면 그들은 운이 몹시 좋았거나 대단히 나빴다. 조정은 역모의 관련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상황에서, 전혀 다른 심각한 문제 하나를 더 얹을 여력이 없었다. 이것은 운이 좋았다. 역옥(逆獄)이 다른 데로 불똥이 튀어 번지면,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 점은 몹시 불리했다.
처음에는 현장에 있던 수십 명이 모두 끌려갔다. 꽤 소란스런 광경이었을 법한데, 이 장면에 대한 묘사가 어디에도 없다. 「벽위편」에는 “판서 김화진이 사대부가의 자제들이 또한 잘못 들어가게 된 것을 애석히 여겨, 알아듣게 타이르고는 내보내 주었다. 다만 김범우만 가두었다(判書金華鎭惜其士夫子弟, 亦爲誤入, 開諭出送, 只囚範禹).”라고 처리 과정을 간결하게 적었다. 잡혀 온 집회 참석자들을 심문한 김화진은 먼저 이들이 명망 있는 사대부가의 자제들임을 확인했다. 그 뒤 이들을 잘 타일러 무죄 방면했다는 것이었다. 장소 제공자였던 김범우만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지만 김화진의 뜻과 달리 사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숨을 죽이고 근신해야 마땅할 당사자들이, 압수해간 예수 성상과 십자가 및 책자를 돌려달라고 집단으로 형조까지 항의 방문을 했던 것이다. 예상을 벗어난 이들의 행보에 가뜩이나 역모 사건 처리로 골치가 아프던 김화진은 인상을 더 찌푸렸다. 단지 이것뿐이었을까? 여기에는 깊이 따져 봐야 할 행간이 더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