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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어떻게 할 것인가
인생은 이별의 연속입니다. 이 땅에 태어날 때 이미 어머니 뱃속과 이별하며 인생은 시작되었습니다. 자라면서 점점 따뜻한 부모님 품을 떠나 학교로 사회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커서는 자라온 가정과 이별하고 새로운 가정으로 나아갑니다. 때로는 공부하기 위해 또는 일을 위해 집을 떠나기도 하고 나라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결국 이 세상과도 이별하고 저 하나님 나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참 많은 이별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우선 사람들과 이별하며 살아갑니다. 가족들과 이별을 겪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겪습니다. 이런 저런 연관된 사람들과 이별을 겪습니다.
다음으로 공간과도 이별하며 살아갑니다. 정을 붙이고 살았던 고향과 이별하기도 하고, 이사하면서 정붙이고 살았던 집과도 이별하기도 합니다. 학교와 이별하고 직장과 이별하고 공동체와도 이별합니다.
그리고 시간과도 이별하며 살아갑니다. 매일 매 순간 시간과 이별하며 살아갑니다. 가장 실감나는 것은 오늘과 같은 이런 세모에 한 해를 떠나보내며 한 해와 이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별을 겪으면서 아픔을 겪습니다. 이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아픔은 바로 슬픔입니다. 특히 상실에 대한 슬픔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 없을 때 정말 우리는 큰 슬픔을 겪습니다. 그것이 사별로 다시는 이 땅에서 만날 수 없는 이별일 때 그 슬픔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별을 잘 해야 합니다. 이별의 아픔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아픔이 두고두고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그러면 이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이별을 잘할 수 있을까요?
작가 김형경이라는 분이 [좋은 이별]이라는 에세이집을 펴냈습니다. 도대체 좋은 이별이란 무엇일까 라는 궁금한 마음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분은 이별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고통은 상실에 대한 슬픔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별 뒤에 찾아오는 이 상실의 슬픔을 잘 다독거리지 못해서 마음속에 큰 상처로 남게 되고 두고두고, 자신을 힘들게 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별은 ‘나뿐 이별’인 것입니다.
이분은 이별 때문에 상실에 대한 슬픔이 일어날 때 애도의 기간을 갖으라고 권합니다. 이 기간 동안 슬픔 가운데 있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그 상실의 아픔과 슬픔을 흘려보내라고 권합니다.
상처 뒤에 새살이 돋아나듯이 새로운 소망, 새로운 비전, 그리고 새로운 자아가 마음속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이별을 겪어내는 것을 ‘좋은 이별’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별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별을 자기 힘으로 이겨내려는 몸부림일 뿐입니다. 그저 이별의 슬픔을 줄이고 슬픔의 기간을 단축하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정도를 좋은 이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이별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믿음의 수용
신명기는 모세의 일종의 고별 설교입니다. 모세는 지난 40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의 행군을 진두지휘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이 바라보이는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그 인생을 끝내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이끌던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이별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해오던 사역과도 이별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착잡했을까요? 다시는 가족들을 볼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동안 40년을 생명처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이끌어왔던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이별을 해야 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러나 민수기와 신명기를 자세하게 읽어보면 모세는 결코 이별의 아픔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별의 아픔 때문에 힘들어하기 보다는 차분하게 이별을 준비했습니다. 그 이별을 후회 없는 이별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신 34장 1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기까지’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하나님께 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이 이별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이 명령을 수용했던 것입니다.
삼하 12장을 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이 밧새바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다윗이 아이를 낫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모든 일을 제쳐두고 철야하며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7일 만에 죽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다윗의 태도입니다. 아이가 불쌍하기도 하고 밧새바가 안 됐고 해서 크게 슬퍼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슬퍼하기는커녕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왕궁으로 돌아가서는 잘 먹었습니다. 슬픔을 툴툴 털어버렸던 것입니다.
지켜보던 신하들이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다윗 왕에게 물었습니다. “이 일이 어찌됨이니이까?” 삼하 22:7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미 다윗은 나단 선지자로부터 이 아이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그 뜻을 돌이키셔서 아이를 살려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뜻대로 아이를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께서 뜻 가운데 이 아이를 데려가셨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아이와의 사별을 수용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별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수용하면 이별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다 좋은 계획 가운데 이별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기에 이별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2015년과 이별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2015년을 보내고 2016년을 맞으라 하시기에 우리는 2015년을 보냅니다. 그리고 희망 찬 2016년을 주실 것을 믿기에 아쉽지만 송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억
오늘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별설교로 남긴 말씀 가운데 일부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으로의 행군의 시대를 끝내고 가나안 시대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모압 평지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에 시간과의 이별 그리고 공간과의 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모세는 본문 2-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광야 생활 40년을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별을 잘 하려면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아름다운 추억을 마음에 간직하고 감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아름다운 기억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감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국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한국을 잘 아는 한 미국인이 교육자들이 모인 모임에 초청되어 강연을 했다고 합니다. 이분이 강연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국 교과서와 미국 교과서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느냐는 질문입니다.
이분이 제시한 답은 ‘영웅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교과서에는 많은 영웅 이야기가 있는데 한국 교과서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아이들은 영웅의 이름을 열거해 보라면 누구라도 20여명은 거뜬히 댄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한국 아이들은 그저 이순신, 세종대왕 하다가 만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비극도 비극으로만 끝내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도 영웅을 찾습니다. 상실의 현장에서도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나라입니다. 9.11 테러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책임소재를 따지자면 대통령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물러나도 시원치 않을 상황입니다.
그러나 미국사회가 주목한 것은 테러 당시 현장에서 인명을 구하기에 온 힘을 바쳤던 소방대원들을 비롯한 지원봉사자들입니다. 저들을 기리기 위해 미국은 그곳을 ‘영웅구역’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9.11 사태의 아픔을 잘 극복하고 사회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세월호 참사를 겪은 뒤에 우리나라가 보인 태도입니다. 세월호 참사 때 승객 중에 김홍경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가장 탈출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탈출하지 않고 구명조끼 수십 벌을 찾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 커튼을 찢어 끈을 만들어 학생들을 끌어올려 20여명을 구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이런 사람을 영웅으로 높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사 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고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중인데도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책임소재를 따지느라 그리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느라 세월만 보내고 상처를 더욱 깊이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별을 잘 하려면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밝은 모습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억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추억을 마음에 남겨두어야 합니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교훈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감사의 기억을 소멸시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교훈은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되 겉으로는 감사의 기억을 드러내게 해야 합니다.
이제 2015년을 마감하는 시점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깊이 하나씩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억으로 담아두시기 바랍니다. 물론 내가 실수했던 일들과 그 교훈도 기억의 깊은 곳에 묻어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세는 감사의 기억이 되게 해야 합니다.
희망의 기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복된 미래를 열어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7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된 앞날을 활짝 열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앞날을 바라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앞날을 분석해 본다면 비관적입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원주민들을 다 내쫓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가 회의적입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있을 것인지 두려운 상황입니다. 그 땅을 차지한다고 해도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회의적입니다. 그 땅이 그렇게 옥토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찬 비전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찬 비전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부정적인 상황을 바꾸시고 저들의 희망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실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제롬 그루프먼이라는 분은 [희망의 힘]이라는 책에서 희망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희망이란 마음의 눈으로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길을 볼 때 경험하는 상승 감정이다.’ 희망은 마음의 눈을 열고 더 나은 미래를 볼 때 일어나는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그저 마음속에 밝은 미래를 그려놓는다고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눈으로 밝은 미래가 보여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삼상 14장을 보면 블레셋과 이스라엘과의 전투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때 블레셋 군대는 전차 3만, 기마병이 육천, 보병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군인은 겨우 3천이고 저들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었고 농사짓던 농기구를 들고 전쟁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전투를 벌이려하기 보다는 바위틈에 숨어 떨었습니다.
이 때 요나단이 삼상 14:6을 보면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 하였느니라”
지금 요나단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더 나은 미래를 믿음의 눈을 열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펼쳐주실 놀라운 미래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별을 할 때 이별 후 펼쳐질 아름다운 미래를 믿음의 눈을 열고 내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을 가질 수 있고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2016년을 내다봅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온통 부정적인 이야기들뿐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눈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펼치실 복된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희망의 기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송년주일입니다. 2015년과 이별하고 2016년을 맞이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우리가 이별을 잘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2015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감사한 기억을 마음에 담으며 2015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2015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
<행복약 유감>
누에나방이 번데기에서 고치를 뚫고 나와 나비로 변하는 과정은 참 어렵습니다.
고치에 아주 작은, 바늘구멍 만한 틈이 있는데 그 틈으로 나방이
나오기 위해서는 꼬박 한 나절 동안이나 발버둥을 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좁은 구멍을 아주 힘들게 고생해서 나온 나방은 아주 멋진 나비가 되어서
날 수 있지만, 쉽게 구멍을 빠져 나온 나방은 얼마 날지 못하고 떨어져 죽습니다.
비좁은 구멍을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다보니 날개 근육이 강해져서 산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아닌 동물의 세계에서도 고난이 생존에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요즈음 세상은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게
더 오래 살 수 있을 지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그리하여 삼불(三不), 즉 불안, 불쾌, 불만을 제거할 수 있는 행복약이 있다고 선전합니다.
프로작(Prozac)이니 리탈린(Ritalin)이니 하는 항우울제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우리의 기억을 완전히 재편집해서 행복한 기억만 남기고 불쾌한 기억은 깨끗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행복약을 개발하는 제약회사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고통과 슬픔이 없는 사회가 진짜
사람다운 세상일까 하는 문제를 깊이 성찰해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병적인 우울증은 반드시 치료되어야 하겠지만 사람인 이상 누구나 다
어느 정도의 우울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감사한 일이 아닐까요?
우울한 느낌이 있기에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 뭔지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은 오히려 진정한 기쁨으로 나아가는 길목이 되며,
두려움은 진정한 평안으로 나아가는 대문이 될 수 있으며,
고통은 우리의 인격을 더욱 정금과같이 연단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반드시 광야의 길을 통과해야만 한다>
저는 오늘 고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일까요?
왜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한 일만 일어나게 하지 않으시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도 주실까요?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본문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모세가 요단 강 앞에서 가나안 땅 진입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신 말씀이지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 있지 않으면 그토록 고대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으로서 지금의 광야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본문 7-9절 말씀을 보세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정말 대단한 땅이요, 축복의 땅, 낙원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좋은 땅에 들어가게 될 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 한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거치지 않고서도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에 걸어 들어가는 거리가 직선 거리면 한 주 정도가
걸리고 이리저리 우회해서 들어간다고 해고 한 달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할 때 광야의 고생 없이 곧바로 만사형통 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참 위험한 일이요,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달가워하시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뜻이 있어서 우리에게 광야 생활을 일부러 경험하게 만드십니다!
여러분,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저는 아직까지 성지순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야가 어떤 곳인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사진으로는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사진으로 본 광야는 한 마디로 사람 살 곳이 전혀 못되는 황무지요 사막이요 암반 지역입니다.
누런 색깔로 된 바윗돌과 모래,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키 작은 관목들만
간간이 보이는 참 척박하고 기가 탁 막히는 지역이 광야입니다.
광야가 어떤 곳인지 성경에 있는 말씀을 직접 보겠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세요.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여기 이 짧은 말씀을 보면, 광야가 어떤 곳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광야는 광대한 땅입니다.
넓고 황량해서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 다음에 광야는 위험한 땅입니다.
사람이 살지 못하니 야생 동물들,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위험지역입니다!
게다가 광야는 물이 없는 사막지역입니다!
사람이 생활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것이 식수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식수를 구할 수 없는 사막 황무지가 바로 광야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광야는 막막하고 황량하고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위험지역이며 물을 구하기
어려운 사막 지대였을 뿐 아니라 낮과 밤의 기온 차가 극심해서 사람 살기가 힘든 곳입니다.
낮에는 지독하게 뜨겁고 밤에는 엄청나게 추운 곳이 광야란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는
말씀은 낮에는 구름이 뜨거운 태양을 가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뜨겁지 않도록 도와주셨으며,
밤에는 뜨거운 불기둥으로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지켜주셨다는 뜻이지요.
여러분, 이렇게 살기 어려운 광야를 농사지을 수 있는 가나안 땅과
비교 해 보면 이것은 그야말로 지옥과 천당의 차이입니다!
사람이 집을 짓고, 농작물을 기르고, 꽃이 피며, 물을 길어 먹을 수 있는 가나안 땅,
이 땅은 확실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했던 광야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광야 생활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장장 40년 동안을 허락하셨습니다.
40이라는 숫자가 히브리인들에게는 완전 숫자요 충족 숫자이니 인간이
고생할 수 있는 최고치 까지 고생을 시켰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허락하셨을까요?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광야 없이 가나한 땅에
직통하도록 하실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광야를 허락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요즈음 교인들 가정을 심방해 보면 꼭 광야생활 같이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언제 이 고통이 끝날지 기약도 없이 막막하게,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과 두려움 속에, 먹을 것 입을 것 생계 때문에 염려하시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광야생활 한 가운데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 다함께 본문 2절 말씀을 읽어볼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를 허락하신 큰 뜻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를 겸손케 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거치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면 굉장히 교만해졌을 것입니다.
사실, 광야생활이라는 것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한 준비와 훈련의 과정이 아닙니까?
광야라고 하는 것이 사방팔방 갑갑하고 막막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곳이 아닙니까?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면 엄청나게 교만해졌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다 자기 힘으로 된 것인 줄로 착각하고 엄청나게 마음이 높아졌겠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기 위하여 일부러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오늘 고통스럽고 막막한 광야의 길을 걷고 계신 분들은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더욱 더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낮추기 위하여 광야를 허락하십니다!
고난이나 실패 없이 모든 일이 승승장구 잘 되는 사람들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기 잘 나서 자기 능력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까닭에 본문 17-18절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보면, 사람들은 재물을 많이 얻을 때 이것이 다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된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재물도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재물 얻을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됩니다!
우리는 광야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더 귀하게 쓰시기 위하여 더욱 더 낮아지도록 하려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우리를 시험하시려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기 원하는 대로 척척 이루어질 때 하나님을 인정하고 잘 믿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것마다 좌절되고 또 원치 않은 고난이 찾아올 때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기 쉽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갖가지 기적을 체험하고서도
조금만 불편해지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생활은 모든 인간적인 기대와 소망이 끊어진 자리에서도
하나님만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지를 시험한 자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방의 희망이 다 끊어진 막막한 그 자리에서도 변함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주신 계명을 다 지키는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광야의 시련 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가나안의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광야생활은 모든 인간적인 희망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도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는 자리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광야의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테스트해보려고 하시는 과정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광야생활 한 가운데에도 믿음의 줄을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청종하고 실천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마십시오!
광야의 시험을 잘 통과할 때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더 정금과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 6절 말씀처럼 광야의 길을 걸어갈 때마다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며,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뜻이 하나 더 있습니다.
셋째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으로 살게 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 3절 말씀을 보세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돌이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을 받으셨을 때 물리치신 아주 유명한 말씀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할 때 늘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걱정했지만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주셨습니다.
너무나 신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은 물론이고
그 조상들도 알지 못했던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4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지만 신기하게도
지난 40년 동안 몸에 걸친 옷이 해어진 일도 없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먹여주시고 입혀주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옷으로만 집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 붙들고 살면 광야 한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우리의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것 정확하게 아시고 다 허락해주십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마 7장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의를
붙들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은 저절로 해결된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라는 속담도 있듯이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참 암담했던 시절이 다 있을 것입니다.
혹독한 광야생활 한 가운데 먹을 것 때문에 끼니를 걱정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참 신비하지 않습니까?
그 때는 곧 죽을 것 같았는데 지나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것 명석한 두뇌 아름다운 외모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요.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Shaw)에게 한 아리따운 여배우가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당신의 명석한 두뇌와 저의 미모가 만나면 아주 뛰어난 아이가 나올 거예요."
그러자 쇼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못생긴 얼굴과 당신의 둔하고 빈 머리가 만나면 괴물이 나오겠네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어떤 일로 치달릴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혹독한 광야의 시련 한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강>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존 버년(John Bunyan)이 쓴 『천로역정』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두 순례자가 온갖 고생을 다한 끝에 천성 가까이까지 왔는데 앞에 큰 강이 놓여있었습니다.
다리도 없고 배도 없을 뿐 아니라 너무 깊고 길어서 헤엄을 처 건너기도 어려웠습니다.
이 때 두 천사가 나타나 강을 건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 강은 그냥 걸어가면 되는데 강을 건너는 사람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깊어지기도 하고 또 얕아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드디어 두 사람이 그 강을 건너는데 한 사람은 처음부터 강물이 얕아서
강을 잘 건너갔는데 두 번째 사람은 강물 깊이 빠져 들어가 제대로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 순례자의 귀에
이사야 43: 2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 순례자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용기를 내어 다시 발을 내디뎠더니
이내 강물이 얕아져서 목적지인 천성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혹독한 광야의 길을 걷고 계신 분들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좋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언젠가
광야생활은 끝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명하여 부르셨으며 여러분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기에 여러분이 어떤 시련을 만나도 함께 하시고 지켜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 뜻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광야의 시련을 허락하고 계십니다.
광야의 길을 걸을 때마다 마음을 낮추어 더욱 겸손해지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이 시련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 함으로써 잘 통과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광야의 길에서 다 승리하시고 영광스러운
가나안 땅에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