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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65편 1절-3절: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1절-2절: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시온의 성도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서원기도를 들어주신다. 인간 자기를 지으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관한 서원기도를 하기 때문에 들어주시는 거다.
여러분들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느냐? 무슨 응답을 받았느냐? 부자 되게 해 달라고 하니까 그 응답을 받았느냐?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부자가 되는 응답을 받았느냐? 부자가 되는 응답을 받으려면 우주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니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부자가 되는 응답을 받아야 할 게 아니냐?
예수 믿는 사람이 이방 불신자들보다 더 부자도 아니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자가 되는 응답을 받았다고 자랑을 하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거다. 왜냐? 이방 불신자들은 기도를 안 하고도 자기 힘으로 부자가 되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았다고 하면서 불신자보다 미달이 되는 부자가 되었다면 이게 자랑할 일이냐? 이렇게 되면 누가 누구에게 큰소리를 치게 되겠느냐? 불신자 부자가 예수 믿고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사람에게 큰소리를 치게 되는 거다. 왜 이 이치를 모를까?
하나님께서는 만능의 능력자요 세상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인데, 이 하나님에게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면 동양에서 제일 부자가 되든지, 세계적으로 제일 부자가 되는 응답을 받아야 될 게 아니겠느냐?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런 식의 기도를 들어주는 분이라면 세계에서 제일 부자는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게 한 거냐?
기독교 세계에서 이런 식의 신앙은 야바위꾼들이 ‘돈 놓고 돈 먹기’ 장난을 하는 것과 같은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정신을 가지면 안 된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주식 하는 거 못 쓴다. 주식도 일종의 돈 놓고 돈 먹기 장난이다. 이런 걸 하는 사람 속에는 세상물욕심이 가득하다. 창:에 ‘네가 수고를 해야 식물을 먹으리라’ 라고 했는데, 이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말씀하는 거다. 부하려 하는 자는 반드시 시험과 올무에 걸린다. 예수를 바로 믿으면서 노력 것 해서 먹고 살면 이 이상 좋은 게 뭐가 있느냐?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관한 서원기도란 하나님의 온전을 두고 하는 기도를 말한다. 하나님의 지혜로 바로 서서 세상의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하나님 앞에 바로 하고 바로 사는 것 이상 좋은 게 없다. 세상사람들은 여러 가지 잔꾀를 가진 사람을 알아줄지라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알아주신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안 되면 이 세상을 어떻게 바로 다스릴 것이며, 신령천국의 사람으로 안 된 채 도둑의 심보를 가진 자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일을 맡기겠느냐? 지극히 거룩한 성품의 사람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는 게 당연한 거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에 먼저 다녔다고 해서 먼저 올라가는 게 아니고, 나중에 나왔다고 해서 나중이 되는 게 아니다. 내가 올라가는 원칙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순종을 하며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되었느냐?’에 달린 거다. 이게 아닌 자기가 올라가려고 나대다가는 자기는 밑으로 뚝 떨어지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기도나 들어주시는 게 아니다. 들어줄 기도가 있고, 안 들어줄 기도가 있다. 하나님의 계약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는 들어주시지만 중언부언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 이룰구원, 성화구원, 하나님의 온전에 관한 기도는 들어주시지만 세상 불 탈 것을 구하는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세상을 향한 목적이 뚜렷해도 세상을 향한 기도는 다 중언부언의 기도일 뿐이다. ‘중언부언 기도’란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더듬더듬하는 기도를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것이 아닌 세상에 관한 것을 구하는 걸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것을 소원 목적적으로 구하게 하면 시험에 들고 올무에 걸려든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그런 식으로 부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거다. 성도가 세상에 포로로 잡혀가서 부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바벨론에서 부하면 무슨 소용이 있고,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부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짐승에 불과한 거다.
일반세상은 배만 부르면 만족해한다. 세상의 것을 많이 가지면 만족해한다. 만족해 한다는 것은 배가 부르니 기쁘다는 말이다. 세상으로 인해 기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것으로 만족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음으로 만족이다.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니 하나님 앞에 바로 살고자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고 세상을 겁 없이 살게 된다.
물질은 바다의 밀물과 썰물 같아서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면 채울 수 없는 거다. 자기가 물질을 많이 가지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나님께서 여기저기서 일이 터지게 하면 자기가 무슨 수로 감당을 하느냐?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을 버린 채 물질을 따라 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물질을 위해 과도하게 욕심을 내지 말아라. 과도한 욕심은 자기 몸이 망가진다. 낮에 일을 하고 밤에는 밤을 자야 하는데 돈을 더 많이 가지겠다고 밤에까지 일을 하면 이 사람은 몸이 망가진다.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자기가 벌어놓은 것을 남이 다 가져가 버린다. 이런 가정에서는 부모가 죽게 되면 자식들이 서로가 부모의 재산을 많이 가지려고 죽어가는 부모 앞에서 싸우게 된다. 물질을 탐하는 자식은 사람으로 여기지 말아라. 형제 중에 이런 형제가 있으면 남처럼 여겨라.
종교적 사업목적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거짓 종들에게 이용감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거짓 종들이 성도들로부터 물질을 취하려면 종교적인 일을 벌리고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성경구절을 근거로 대면서 교인들이 자원적으로 헌금을 하도록 마음을 빼앗는다. 이건 기독교가 아니다. 남의 재산을 탈취하는 게 기독교가 아니다. 우리가 보면 성도들 중에 잘못된 목사를 따라가서 피해를 본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목사를 잘못 만다면 자기가 평생 동안 일을 해서 번 것을 다 빼앗기고, 가정은 가정대로 문제가 생긴다.
우리교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명령만 따라라.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면 당신이 알아서 그 순종자에게 주실 것을 주신다. 그러니 절대로 세상의 말을 듣지 말아라. 악한 자들은 아무리 그 후손들이 많아도 하나님께서 치우기로 되어있다. 반면에 당신의 자녀들은 쓰레기처럼 치우지 않는다. 그러니 바로만 살아라. 이룰구원도 망하고,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도 다 빼앗기고 일반적으로 살게 되면 이 사람은 완전히 못써져 버린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여기서 ‘육체’란, 첫째는 영이 기본구원을 입지 못한 육체가 있다. 이것은 아직 미신자요, 아직은 불신자요 이방인이다. 이방인들은 육체의 사람들이다. 두 번째로 본문에서 말하는 ‘육체’란 이런 사람을 말함이 아니라 기본구원의 은혜는 입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자들, 말씀에 불순종자들, 하나님 앞에 범죄자들 등등을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육체’라 할 때는 영이 중생되지 못한 육체의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니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라고 한 영이 중생이 되었지만 육을 따라 사는 육체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진리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살면 영인성장이 된다. 일반적인 표현으로 말을 한다면 사람이 바로 서 간다. 그러나 세상으로 기울어지면 육체의 사람이 돼버린다. 이렇게 되면 성령의 감화성은 떠나고, 하나님의 온전을 덧입는 인격성장이 없는 고로 성경은 이런 사람을 ‘멸망 받을 짐승 같다’고 한다.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사람이 어떻게 주께 나아오게 되느냐? 첫째는, 1절에서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라고 했듯이 시온의 사람으로 진리통치를 받으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주님의 권고로 주께 나아오게 되는 거다. 주께 나아오는 자는 주님의 권고가 있었구나.
우리교회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설정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구원을 이루는 신앙이기 때문에 이 교훈을 따라가는 우리교인들에게 성령님의 권고가 있구나. 인터넷의 우리교회 카페를 통해서 이 말씀을 접하고 많은 깨달음을 받았다고 하면서 헌금을 하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다른 목사님은 어떨 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헌금을 안 받는다. 우리교회 교인도 아닌데 왜 내가 헌금을 받느냐? 헌금은 질적으로 같은 신앙 안에 소속이 되어서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지 목사에게 내는 게 아니다. 어쨌든 인터넷을 통해 옳은 진리이치, 생명이치, 신적인 도덕이치를 들어보고 받아보고 헌금을 하겠다는 마음이 들어가는 것은 주님의 권고가 있었구나.
두 번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아는 자는 주께 나아온다. 계속 예수를 믿고 있었지만 어떤 경로로 건 옳은 말씀을 듣고서 ‘내가 그동안 하나님을 떠났었구나. 잘못 믿었구나’ 라고 하면서 주께 돌아오는 일도 있다. 공부하러 오는(주-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이 신학생 및 교역자를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 어느 목사님은 여기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아, 예수님에게도 사상이 있구나. 예수 믿는 것도 사상이 있구나’ 라고 하면서 엄청나게 울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목사님은 그동안 ‘아무 교회나 다니면서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면 이게 하나님의 뜻이려니’ 했던 거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교훈을 듣고 보니 ‘아차, 내가 예수 헛 믿었구나’ 라고 하면서 운 거다. 이건 ‘아, 주님의 권고가 있었구나.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구나.’
‘예수 믿어 세상에서 부자가 됩시다’ 라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면 이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악령의 역사다. 예수정신은 따로 있다. 예수님의 정신은 일반사람의 정신과 같지 않다. 예수님께서 일반사람과 같은 정신을 가르치려고 하늘보좌를 버리고 오신 거냐? 말의 이치가 안 맞지 않느냐? 그럼에도 세상 속화된 기독교회는 완전히 세상 판으로 나가면서 예수가 세상소원 목적을 들어주러 온 것처럼 말을 한다.
예수님은 죄에서 구원이다. ‘죄에서 구원’이라는 말에는 많은 뜻이 함축돼 있다. 이질이 되면 죄요, 올라가지 못하면 죄요, 탈출하지 못하면 죄요, 자라지 못하면 죄요, 바꾸지 못하면 죄다. 한 마디로 사망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다 죄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교회들은 이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맨 도둑질하고, 싸우고, 때리고, 사기 치는 것 등을 죄라고 하면서 이런 것을 회개하는 게 바로 믿는 것으로 안다. 이런 것을 회개하는 것을 ‘종별적 회개’ 라고 하는데, 이 종별적 회개는 하나님의 본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면을 바로 하지 못함을 회개하는 ‘방향회개’를 하게 되면 저절로 되어지는 거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게으른 사람도 있고, 여전히 도둑질을 하는 사람도 있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시기 질투를 하는 사람도 있는 등 별의 별 유형의 사람이 있는데, 이런 게 다 죄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하면서 앞으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고 기도를 하면 회개가 된 거냐? 이건 회개가 아니라 일종의 반성에 불과한 거다. 왜 그런 죄를 짓게 되는 거냐? 자기 속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런 죄를 짓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그런 죄를 없이 하는 방법은 자기 속에 하나님의 옳은 것으로 채워 넣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세상으로 향해져 있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뀌면 자기 속에서 죄를 지으려는 요소는 자지러져서 그런 죄를 짓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이 방향회개다.
세 번째는 주께만 죄 사함이 있다는 것을 알면 주께로 돌아온다. 주께서만 죄를 덮을 수 있고, 주께서만 죄를 사하시고, 주께서만 죄를 안 짓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주께로 돌아오게 된다. 사람을 죄악의 자리에 멈춰있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달음박질하게 하는 게 죄 사함이다. 오직 진리로 달음박질하는 사람에게 죄 사함이 있다. 죄 사함은 다른 데는 없다. 다른 교훈은 없다. 오직 주께만 있다.
네 번째는 주께서 부르심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죄에서 탈출하게 권고하고, 죄인임을 알게 하고, 죄 사함이 되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이 사람을 부르셔서 주께 나왔기 때문이다. 이건 성령님의 부르심이다. 누구를 통해서건 교회에 나오는 것은, 그리고 옳은 진리이치를 듣고 옳은 가치판단 평가가 생기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안 된다. 악력의 역사, 사단 마귀의 역사에는 이런 게 없다. 악령이 역사하는 교회에 가서 북치고, 예언 방언하고, 뒤집어지고, 엎어지고 할지라도 이건 신앙이 아니다. 이방신을 믿는 이방 종교인들이 이렇게 하는 거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이 죄의 사함을 받으려고 하나님의 온전을 향해 가고, 하나님의 뜻이 알고 싶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고 싶은 자만 주께로 나아온다. 인간표현으로 말을 하면 잘난 사람은 주께 나아오지 않는다. 못난 사람이 주께 나아온다. 세상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준해서 하나님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을 어리석게 볼지라도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축복된 사람이다.
세상에서 잘난 사람은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께로 나아오지 않는다. 어두움의 자녀는 주께로 나오지 않는다. 잘난 사람은 세상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 나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잘난 사람은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이고, 못난 사람은 진리 생명 길로 나오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잘난 사람이 많다. 네가 그렇게 살아봐라. 절대로 못 올라간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상태가 되면 안 믿는 사람들처럼 세상으로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진리말씀에 붙잡혀서 살기도 싫고,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
예수를 믿으면서도 교만한 육체의 사람이 있고, 겸손한 육체의 사람이 있다. 겸손한 육체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성화구원을 입어간다. 그러나 교만한 육체의 사람은 말씀 깨달음이 필요가 없다. 이런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남의 말을 안 듣는다. 이런 사람이 혹 도덕적으로는 잘못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 사람의 성격은 하나님 앞에 엄청나게 잘못된 거다. 이런 사람은 영웅소리를 듣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그러니 ‘돈을 어떻게 많이 벌어볼까?’ 하는 면으로 치닫게 된다.
3절: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생물이 건강하면 부패성이 침범치 못한다.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가 진리말씀을 붙잡고 생명 길로만 가면 자기의 신앙이, 영인이 건강하게 잘 자라지만 진리생명의 말씀을 놓치게 되면 자기에게 죄가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은 죄가 자기를 이긴 셈이 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반드시 넓은 길 사망 길로 가게 된다. 말씀을 놓치면 세상 길로 가게 되어있고, 말씀을 붙잡으면 세상 길에서 나오게 된다. 신앙에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고, 저것이 아니면 이것이 되는 거지 중간은 없다.
넓은 길 사망 길을 가는 신앙은 성장은커녕 사람이 인격적인 면에서 서서히 몰락되어 들어간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왜 자동적으로 엄마의 젖을 빠는 거냐? 배가 고파서 먹는 거냐, 먹고 싶어서 먹는 거냐, 살기 위해서 먹는 거냐? 안 먹으면 성장을 하느냐, 아니면 아이의 속에 있는 것마저 빠지느냐? 빠진다. 그러니까 태어나자마자 왜 젖을 먹는 거냐? 성장을 하기 위해 먹는 거다. 같은 이치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은 즉시로부터 진리말씀을 먹어야 영인성장이 된다. 안 먹으면 자기 속에 들어있던 하나님의 것이 쏙 빠져나가고 세상이 들어와서 세상이 힘을 쓰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머리통은 완전히 세상화로 되어서 사람 자체가 병적으로 돼버린다. 이 사람의 모든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병적으로 돼버린다.
사람은 자기의 몰락성을 알아야 한다. 안 믿는 사람의 사고방식은 병적이기는커녕 전부가 사망적이다. 하는 모든 것이, 그 사고방식이 사망적이다. 하면 할수록 죽어나가고, 안 해도 죽어나간다. 이래도 죽어나가고 저래도 죽어나간다. 시온의 백성이 된 믿는 사람은 자기가 몰락이 되지 않기 위해 늘 말씀을 먹고 영적인 힘을 키워서 항상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 영적인 면에 자기가 약하게 되지 않으려면 말씀을 먹어야 한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먹는 것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 먹을 때는 영양가가 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 세계의 정상들은 좋은 건 다 먹을 거다. 그런데 늙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비싼 산삼을 먹을지라도 자기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되지 못하면 잘못된 정신과 마음에 따라 자기 속의 장기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난다고 했다. 책을 많이 본 사람의 사고방식과, 전혀 안 본 사람의 사고방식이, 머리 씀씀이가 같으냐? 예수를 믿어도 성경을 전혀 안 본 사람과, 많이 본 사람의 사고방식은 다르다.
우리는 영적인 힘을 키워야 하는데, 이를 위해, 첫째는 대내전에서 이겨야 한다. 내 안에서 옛사람은 세상 염려 걱정을 하고, 새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염려 걱정을 하는데, 여기에서 새사람이 옛사람을 이겨야 한다. 진리를 붙잡으면 새사람이 이기고, 세상을 붙잡으면 옛사람이 이긴다. 자기 안에 이런 싸움이 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평소에 항상 옳은 것을 생각하고 말씀을 붙잡아라.
두 번째는 대외전에서 이겨야 한다. 내 몸 밖의 세상성이 내 몸 안에 들어와서 나를 지배하도록 하면 안 된다. 내 주위의 친구나 부모형제나 이웃 할 것 없이 다 세상성이 들어있다. 이 세상성이 내 속에 들어오게 하면 안 된다. 상대가 ‘내 속에 들어있는 세상을 네 속에 집어넣겠다’ 라고 하지는 않지만 그들과 관련이 될 때 그들의 정신과 사상이 내 속에 들어올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눈으로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속에서 말씀으로 무장이 잘 돼 있으면 아무리 세상적인 말을 들어도 관계가 없다.
그러면 ‘세상성’이라는 게 뭐냐? 여기서 말하는 세상성이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소원 목적을 말한다. 믿는 우리는 이 세상성을 가지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믿는 사람은 아예 세상의 것을 멀리 하라는 것은 아니다. 믿는 우리도 세상 것을 배우고 가져야 한다. 그러나 세상 것을 목적적으로 가지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과 세상의 것을 예수를 잘 믿는 일에 이용을 하려는 거다.
세상의 일 때문에 말씀을 받는 데 문제가 생긴다면 지혜롭게 세상 일을 줄여야 한다. 안 그러면 네가 망한다. 공장을 하는 사람이 예수를 바로 믿고 싶은데 일거리가 자꾸 많아질 때 이걸 다 하려고 하면 밤낮이 없어져 버린다. 이러면 자기 몸도 망가지고 정신도 망가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지혜롭게 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