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자
성찬경
마음먹고 붓에 먹물을 듬뿍 먹여
한일자 하나 써본다.
삐뚤빼뚤 굵었다 가늘었다 심지어
불결하기 짝이 없는 터럭까지 매달려 있다.
이것 큰일났구나.
바로 내 마음 내 모습 아닌가.
세상에 태어나 한일자 하나
제대로 못 쓰고 만대서야 되겠는가.
나는 요새 남몰래 한일자 쓰는 연습을 한다.
사람이 아무리 연습해도 완벽한 한일자는 못쓴다.
완벽한 한일자에 무한히 접근할 따름이다.
단 한 획, 가장 간명한 꼴
따지고 보면 인생은 한일자다.
흠없는 한일자 하나 남기고 가면 빼어난 인생이다.
(성찬경·시인, 1930-)
*백지
성찬경
빛깔로 무한인 너.
아무리 높은 파도도
아무리 깊은 골짝도
네 안에 아늑히 묻혀서 보이지 않게 된다.
너의 장단에 침묵이 춤을 춘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너.
뭣이고 마다하지 않는 너.
너를 보다가 내 무슨 유혹에서인지
너를 짝 찢는 상상을 해본다.
파열음과 균열.
뚝뚝 떨어지는 성혈.
열리는 역사.
그러나 현실의 눈앞엔 여전히 無垢(무구)의 結晶(결정)
그 선지빛 울음을 삼키고도 백지.
백지는 자유의 極地(극지)이다.
無心(무심)과 無我(무아)의 끝이다.
나의 마지막 스승이다.
아무도 오르지 못한
완벽한 뽄의 萬年雪(만년설)이다.
백지엔 무수한 원과 원심이 숨어 있다.
백지엔 영원한 두려움의
안개가 서려 있다.
<현대문학 4월호>
*영물
성찬경
호랑이 구렁이 두루미 개미 제비 귀뚜라미
영물스런 이름들이다.
영물이란 영험한 징조를 보인다는 뜻이리니
인간이 자랑하는 영성도 짐승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으리라.
전에 고양이가 너무 늙었다고 걱정했더니 그 길로 사라졌다.
착한 것이었는데 사람 마음 꿰뚫는 독심술이 섬뜩했다.
짐승들은 지진이나 큰물을 미리 안다 하니 신비한 초능력이다.
영물 아닌 짐승이 없다.
인간은 부끄럽다 과식과 거짓말과 탐욕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소만 한 성인 봤나.
짐승의 거동은 대인풍인데 인간은 소인배의 수준이다.
산천초목은 물론이요 나는 돌멩이 하나도 잠자는 영성이라 여긴다.
모든 것을 품은 우리 고향 이 우주 자체가
몸집 큰 한 마리의 영물 아닌가.
*나사 1
성찬경
길에서 나사를 줍는 버릇이 내게 있다.
암나사와 숫나사를 버릇이 있다.
예쁜 암나사와 예쁜 숫나사를 주우면 기분이 좋고
재수도 좋다고 느껴지는 버릇이 있다.
찌그러진 나사도 상관은 없다.
투박한 수나사도 쓸만한 건 물론이다.
나사에 글자나 수자나. 그리고 무뉘
음각이나 양각이 되어 있으면 더욱 반갑다.
호주머니에 넣어 집어가지고 와서
손질하고, 기름칠하고
슬슬 돌려서 나사에 나사를 박는다.
그런 쌍이 이제는 열 쌍은 된다.
작은 쌍, 못난 쌍이
내게는 다 정든 오브제들이다.
미술품이다.
아니 차라리 식구 같기도 하다.
*춘추
성찬경
창 밖에서 산수유 꽃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틀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 본 아내는
허튼 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가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에 지치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 새
가을이 깊어 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는 후박나무 잎지는 소리.
첫댓글 참 좋은 시... 잘 감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