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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만리도(3)] - 정령(井嶺). 정령회하(井嶺回河), <전사부(田師付)-호(湖)>
전회(前回)에 우리는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에 압록강(鴨綠江)의 흐름에 대한 기술(記述)이 4문단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즉 ‘아래’ 인용된 내용 가운데, [1]은 최종적으로 압록강이 흘러들어가는 대능하(大陵河)를 의미하고,
[2]는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에 역북막(歷北漠)해온 과정이 [3]은 오늘날의 압록강에 대한 묘사로 보고,
[4]는 다시 대능하(大陵河)쪽의 압록강(鴨綠江)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 압록강(鴨綠江) 관련 원문(原文) 발췌(拔萃) (*)
[1] 鴨緣江在義州西, 古名靑河, 云龍灣。
: 압록강(鴨綠江)은 의주(義州) 서(西)쪽에 있다. 옛 명칭이 청하(淸河)이다. 용만(龍灣)이라고 말한다.
==> 대능하(大陵河)주변
[2] 其源出自白頭山, 行數百餘里,
: 압록강(鴨綠江)의 원천(源泉)은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 854m)인 백두산(白頭山)의 아수달하(阿水達河)에서 연원
(淵源)하며, (남(南)쪽으로 내려가서 일단) 수백여리(數百餘里)를 간다.
===> 역북막(歷北漠)해온 과정으로써 칠성닙자산(七星砬子山)에서 남류(南流)하는 압록강(鴨綠江)
[3] 過咸吉道甲山郡, 歷閭延、江界、理山, 與禿魯江水合, 經碧潼、昌城、小朔州, 至于州之城西,
: ‘(압록강이)함길도(咸吉道) 갑산군(甲山郡)을 경과(經過)하는 것’은 여연(閭延)、강계(江界)、이산(理山)을 거쳐서
(=역(歷)) 독로강(禿魯江) 강물과 합(合)하는데, 벽동(碧潼)、창성(昌城)、소삭주(小朔州)를 경유(經由)해서 의주
(義州) 성(城)의 서(西)쪽에 이른다.
===> 오늘날의 압록강(鴨綠江)
[4]爲鴨緣江, 過暗林串入海。
(의주(義州)성(城) 서(西)쪽에서) 압록강이 되는데, 이는 암림곶(暗林串)을 통해서 바다로 들어간다.
===> 대능하(大陵河)주변의 압록강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 경계의 불(乀)자 모양으로 난 분수령(分水嶺) 서(西)쪽에서
이 불(乀)자에 평행(平行)되게 동요하(東遼河)와 ‘오늘날의 압록강’을 연결시키는 ‘갑문(閘門)과 제방’이 서로 연결된
운하(運河)가 있어서 여기에 강물이 흘렀고, 따라서 선박(船舶)을 타고 갈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상상을 할 수
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의 경계선의 분수령(分水嶺)’에 대한 한정(限定)해서 우리 조상
들이 칭하는 산맥이 없었겠는가? ”하는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계만리도’에 기재된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은 전체적으로 이런(乀ㅗ丿)의 모습으로 길목해(吉木海)
를 껴안는 오늘날의 가목사(佳木斯)산맥을 들려서 오되 동(東)쪽의 완달산(完達山)산맥을 포함하고, 장백산맥을
바탕으로해서 서(西)쪽으로 ‘개마대산’ 즉 오늘날의 대흥안령산맥에 이르기 까지 이르는 만주(滿洲)전체를 껴안는
산맥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의 경계선의 분수령(分水嶺)’에 대한 우리 조상(祖上)들의 칭호는
바로 정령(井嶺)-산맥입니다.
이는 아래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 1710년)’는 위에서 밑으로 지형(地形)을 내려 누른 듯한(↓) 모양으로 그려져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서(西)쪽의 통원보(通元堡)에서 오늘날 압록강에 내려오는 초하(草河)가 그려져 있고, 또 동(東)
쪽에서 크게 4갈래로 흘러나오는 오늘날의 혼강(渾江)에 해당하는 파저강(波猪江)이 그려져 있는데, 그 ‘사이’의 북
(北)쪽에 정령(井嶺)을 기점(起點)으로해서 서북류(西北流)하는 산맥이 그려져 있습니다.
(*) ① 서(西)쪽의 통원보(通元堡)에서 내려오는 초하(草河)
② 크게 4갈래로 내려오는 오늘날 혼강(渾江)인 파저강(波猪江)
③ 정령(井嶺)이 ①과② 사이에 있고, 이 정령(井嶺)을 기점으로 서북류(西北流)하는 산맥을 볼수 있는 ‘동국여지지도
(東國輿地之圖: 1710년)’
http://blog.daum.net/sabul358/13645892
이 “정령(井嶺)이 오늘날의 어떤 산(山)을 의미하는지?” 또 “왜 이 산(山) 이름 앞에 ‘우물 정(井)’을 붙였는지?”를
우리는 생각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솟대님의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지도’와 비교해보면, 이 정령(井嶺)은 바로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25m)입니다.
문제는 이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25m)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강(江)들이 방사선(放射線)처럼 뻗쳐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갑문(閘門)과 제방을 연결해서 이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36m)을 중심으로 해서 뻗어나가는 강들이
서로 회통(回通)하도록 하는 수로(水路)가 있고, 그 가운데에 이 산(山)이 있었기 때문에, 정령(井嶺)이라고 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물(=정(井))은 가운데에 ‘두레박’을 거는 ‘솟은 대’를 세우기 때문에 정령(井嶺)자체는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25m)이 되겠지만, 여기서 방사선으로 나가는 하천(河川)들은 우물 정(井)자가 뜻하는 것처럼 수로(水路)가 서로
연결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정령(井嶺)을 중심으로 돌아가는(=회(回)) 하천(河川)”이란 의미로 정령회하(井嶺回河)라고 이름할
수가 있습니다.
“정령회하(井嶺回河)는 여러 강(江)들을 어찌 연결해서 흐르고 있는가?”
예를 들어, ‘요녕성 수계 지도’를 보면,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36m) 서남(西南)쪽에 오늘날 본계(本溪)동쪽의
관음각(觀音閣)-수고(水庫)를 형성시키면서 마치 오른쪽을 낮춘 ‘북두칠성(--凵)’같이 돌아가는 하천(河川)이 있습
니다.
이 하천(河川)이름이 “아래를 끼우는 하천(河川)”이란의미의 하협하(下夾河)입니다.
그런데, 이 하협하의 국자(凵)부분 왼쪽에는 1254m의 (**정자(貞子)-산(山))이 있는데, - 이 산(山)의 첫 두 글자가
판독(判讀)하기 힘들어서 미군사지도(1950년대)를 찾아보니 구재정자(九財頂子:1231m)로 나타납니다.
- 이 구재정자(九財頂子:1231m) 남(南)쪽에서는 그 밑의 어떤 하천(河川)과 - 이는 팔도하(八道河)입니다.
- 서(耳亇)를 이루고 있음이 ‘옅은 초록색’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보다 상세한 미군사지도(1950년대)로 살펴보면, 팔도하(八道河)로 연결되는 서(耳亇)에 연결되도록 수위
(水位)를 올리게 되면, 그 왼쪽에 있는 초하(草河) 원류(源流)까지 연결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아래 솟대님의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 지도’를 보면, 초하(草河) 오른쪽에서 감(凵)자 모양으로 돌아서 북류
(北流)해 올라가서 <본계(本溪)-만족(滿族)-자치현(自治縣)>쪽으로 올라가는 하천이 있는데, 이 하천(河川)의
이름이 “뒷쪽으로 돌아가는 하천(河川)”이란 의미에서 <후천(後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후천(後川)이 감(凵)자 모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돌아가도록 하는 산맥’이 있기 때문인데, 놀랍게도
이 산맥 바로 남(南)쪽에서 초하(草河)원류와 이어질수 있도록 하는 동서(東西)로 난 서(耳亇)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북두칠성(--凵)’같은 하협하(下夾河)가 갑문을 활용해서 수위(水位)를 높혀 서(耳亇)를 넘어서 그
아래의 강들을 횡(橫)으로 꾄다면, 마치 한자(漢字)의 ‘마흔 십(卌)’자처럼 남북(南北)으로 종(縱)방향으로 흐르는
4개의 강 - 왼쪽에서부터 ①초하(草河) ②팔도하(八道河) ③애하(靉河) ④포석하(蒲石河)가 횡(橫)으로 흐르는 강
즉 북고하(北古河)(↘)가 남고하(南古河)(↗)를 만나서 이런(↘↗)모양으로 흐르는 강에 꿰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4개의 강을 횡(橫)으로 꿰는 강이 실제 ‘조선여진분계도’에 그려져 있는데, 이름이 적혀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강의 이름을 “강(江)의 모습이 ‘마흔 십(卌)자’처럼 되어있는 것을 보는(=관(觀)) 하천(河川)”이란
뜻에서 <관십자하(觀卌字河)>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즉 관십자하(觀卌字河)는 정령회하(井嶺回河)를 구성하는 중요한 하천(河川)인 것입니다.
(*) 정령(井嶺:1325m) 서남(西南)쪽에서 북두칠성(--凵)모양의 하협하(下夾河)가 서(耳亇)를 통해서 ①초하(草河),
②팔도하(八道河),③애하(靉河), ④포석하(蒲石河)가 관십자하(觀卌字河)에의 해서 북고하(北古河)-남고하(南古河)
로 해서 파저강(波猪江)[=혼강(渾江)]으로 들어가는 모양을 추측할 수 있는 ‘솟대님의 요녕성 수계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북고하(北古河)-남고하(南古河)와 이어지기 전에 4강을 꿰고나가는 <관십자하(觀卌字河)>가 ‘조선여진분계도(1750
년대 초)’에 그려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령(井嶺)이란 개념이 가운데 ‘두레박’을 거는 ‘솟은 대’ 주변에 하천(河川)
을 한바퀴 주류(周流)하면서 꿰었기 때문에 <우물 정(井)>자를 썼다는 우리의 가설(假說)이 합당함을 보여주는 것입
니다.
또한 정령회하(井嶺回河)가 실제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조선여진분계도’에 그려진 <관십자하(觀卌字河)>에 대해서는 이 지도(地圖)에 그려진 트릭(Tric)을 알아야
하고, 또 그 이전(以前)에 정령(井嶺)-산맥에 대한 수계(水系)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이 있어야하므로, 잠시 두로
미루기로 합니다. (*)
그러나 <관십자하(觀卌字河)>는 정령(井嶺: :1325m) 남(南)쪽의 4개의 하천(河川)을 영어의 유(U)자처럼 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관십자하(觀卌字河)-북고하(北古河)-남고하(南古河)가 이어져서 영어의 유(U)자 모양 정령회하(井嶺回河)의 ‘받침
부분’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25m)을 정령(井嶺)이라고 조선조(朝鮮朝)에서 칭한 까닭이 ‘우물(= 정(井))’이
그러하듯 ‘두레박을 매단 솟은 대’ 주변에 우물(=정(井))이 한바퀴 돌아야한다면,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25m)
윗쪽의 하천(河川) 역시 이런(∩) 모양으로 서로 하나로 이어지게 하여야만 정령회하(井嶺回河)의 ‘덮개 부분’이 첨가
되어서 정령회하(井嶺回河)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래 ‘요녕성 수계(水系)지도’를 보면, 정령(井嶺: 1325m) 바로 위에서 서류(西流)(←)하는 태자하(太子河)가
있고, 또 동류(東流)하는 이름이 적히지 않은 하천이 있는데, 이 동류(東流)하는 하천(河川)의 이름은 바로 대이하
(大二河)입니다.
대이하(大二河)는 “크게 2가닥으로 흐르는 하천(河川)”이란 뜻인데, 결국 이런(>--)모양으로 흐르는 강을 의미하는데,
‘요녕성 수계(水系)지도’를 보면, 북(北)쪽의 대이하(大二河)가 흐르는 곳이 ‘옅은 초록’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미군사지도(1950년대)를 보면, 남(南)쪽의 대이하(大二河)와 태자하(太子河)의 분수령(分水岺)이 해발 500m
의 높이로써 불과 1Km남직한 서(耳亇)를 지나고 있고, 바로 북(北)쪽에는 “붉은 석벽(石壁)이 강(江)을 데려오는
(=납(拉)) 산(山)”이란 의미에서 ‘홍석납자산(紅石拉子山)’이 있기 때문에 태자하(太子河)와 남(南)쪽의 대이하(大二河)
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두 하천(河川)의 진행방향(← →) 앞에 갑문을 쳐주면 쉽게 이어질 수 있는 지형입니다.
이처럼 태자하(太子河)-대이하(大二河)가 수평(水平)으로 연결되었음을 인정하는 것만 해도 이미 북두칠성 국자
(---凵)같은 하협하(下夾河)가 서(耳亇)를 타고 서남류(西南流)해서 팔도하(八道河)와 이어지고, 이는 관십자하(觀卌
字河)로 해서 이윽고 혼강(渾江)인 박작호(泊汋湖)를 가운데 두고 흐르는 파저강(波猪江)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태자하(太子河)와 대이하(大二河)가 갑문을 활용해서 이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이하(大二河)가 결국 박작호
(泊汋湖)에 들어가기 때문에, 정령(井嶺: 1325m) 주변은 완전히 하천(河川)으로 마치 해자(垓字)두르듯 하는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 정령(井嶺: 1325m) 바로 위에서 ①서류(西流)하는 태자하(太子河)와 ②동류(東流)하는 대이하(大二河)를 연결
하는 것이 ‘윗 해자(垓字)(∩)’를 형성한다면, ③북두칠성 모양(--凵)의 하협하(下夾河)- ④관십자하(觀卌字河)-
⑤혼강(渾江)-박작호(泊汋湖)-⑥부이강(富爾江)이 ‘아랫 해자(垓字)(∪)’로 정령(井嶺)을 둘러싼 정령회하(井嶺回河)
가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는 ‘솟대님의 요녕성 수계(水系)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왜 이 정령(井嶺) 주변에 무려 6개의 강(江)의 인터체인지(interchange)역할을 하는 해자
(垓字)를 두른 강 - 즉 정령회하(井嶺回河)가 있는가?”하는 것을 생각치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박작호(泊汋湖)와 관련 있습니다.
이 박작호(泊汋湖)는 바로 통일신라-발해(渤海) 때에, ‘중국 천자(天子)의 대리(代理)’가 되는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郞)이 와서 해외(海外)에 투자(投資)를 하는 조공(朝貢)-공정(工程) 플로우(flow)에 참가
하는 ‘투자(投資)중재(仲裁) 배달화백’을 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한 성소(聖所)였던 것입니다.
이는 <구당서(舊唐書)를 인용한 ‘만주원류고’>에 이런 내용으로 언급되고 있는 사실인 것이지요.
(*) 구당서(舊唐書)를 인용한 ‘만주원류고’의 관련 원문(原文) 재인용 (*)
武徳四年 王金真平 遣使朝貢 髙祖親勞問之 遣通直散騎侍郎 庾文素 往使焉 賜以 璽 書 及 畫屏風 錦綵三百段 自此
朝貢不絶
[해석(解釋) 옮김]
무덕武徳 4년 그 왕 김진평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高祖)는 친히 그 노고를 위로하였다.
<통직산기시랑> 유문소(庾文素)를 사신으로 보내어 새서(璽 書)와 그림을 그린 병풍 그리고 비단 3백단을 주었다.
이로부터 조공이 끊어지지 않았다.
또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가운데,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에 관한 기록에서는 이런 중국(中國)천자(天子)의
‘대리(代理)천독(天毒)’들에 대한 지휘방침을 지닌 사신(使臣)이 ‘소방(小舫)’-이는 ‘작은 쌍동선(雙胴船)’을 타고
박작구(泊汋口) - 즉 ‘박작호(泊汋湖)의 입구’에 도달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박작(泊汋)이란 말은 “숙박(宿泊)하면서 ’배달화백‘에 참여하는 선박들을 솥-터(=소도(蘇塗))의 공동체 통합열정으로
삶아댄다(=작(汋)”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의 도리기(道里記) 중에서 옮긴 원문(原文) (*)
①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
압록강(鴨綠江) 입구(入口)로 부터 배(舟)를 타고 100여리를 가서, ‘작은 쌍동선(雙胴船)(=소방(小舫))’으로 갈아타고
물(水)을 거슬러 올라(=소(溯)) 동북(東北)쪽으로 30리를 가면 박작하(泊汋河)의 입구에 도착한다.
이곳부터가 발해(渤海)의 지경(地境)이다.
②又溯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
:또 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500리를 올라가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이르는데, 옛 고구리(高句麗)의 왕도(王都)이다.
(*)참고: 위 내용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이 싸이트(site)에 다음과 갈은 글이 있습니다.
1. <道里記③> 환인(桓仁)평양성 ‘위’에 있었던 박작호(泊汋湖)
2. [①계속] 천자(天子)의 대리(代理), ‘빛나는 황색유리’
(*)참고 말씀. 마침 (*)
즉 박작호(泊汋湖)는 ‘중국 천자(天子)가 대리(代理)-천독(天毒)들을 내세워서 해외(海外) 투자를 통일신라 및 발해
(渤海)에 맡겨서 개척(開拓)하면서 중재하는 배달화백을 하는 성호(聖湖)이고, 또 이 박작호(泊汋湖)의 혼강(渾江)
상류에 있는 <환도현성(丸都縣城)>은 허달성(虛達城)-금성(金城)을 최종적으로 조립(組立)해서 ’고구리(高句麗)때
부터‘ 배달화백을 하는 곳에 공급하는 성지(聖地)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상상을 불허(不許)하는 국제적인 재물(財物)들이 대량으로 투자되는 곳이어서, 국제적인 산적(山賊)과
해적(海賊)들이 들끓기 쉬운 장소인 것입니다.
<소우기(小右記)>에 의하면, 여진(女眞)해적(海賊)이 고리(高麗) 시절에 ‘도자기 로드’를 통해서 유럽과 교역(交易)
하고 오는 무역선(貿易船)을 터는 장면이 언급되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고리(高麗)-수군(水軍)은 ‘국제-
경찰군’으로서 활동한 장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 여진(女眞)해적(海賊)은 오늘날 해병대(海兵隊)처럼 상륙해서 기마(騎馬)부대도 동원해서 국제적으로 인질
(人質)을 확보해서 고리 수군이 나타났을 때에 ‘바다’에 인질을 뿌리고, 이를 구출(救出)하는 동안에 탈출하는 것
으로 소우기(小右記)에 묘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산적(山賊) 해적(海賊)을 ‘국제적 규모’로 군사 작전하듯 하는 여진인(女眞人)들이 만주(滿洲)에 그득하게
있었기 때문에, 중국 천자(天子)로 부터 투자(投刺)를 받는 이 박작호(泊汋湖)에 대한 철저한 경호(警護)수비(守備)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정령(井嶺)을 에워싸는 ‘인터체인지(Interchange) 해자(垓字)’가 까마득한 옛날부터 개척되었고,
또 이런 정령회하(井嶺回河) 덕분에 여진(女眞)해적(海賊)들은 박작호(泊汋湖)로 몰려드는 중국 천자(天子)가 대리
(代理)-천독(天毒)들을 내세워 투자(投資)하는 막대한 재물을 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래 ‘솟대님의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지도’를 보면, 박작호(泊汋湖) 바로 좌측에서 정령(井嶺)의 ‘인터체인지
(Interchange) 해자(垓字)’를 튼 강 - 정령회하(井嶺回河)가 있기 때문에, 이 박작호(泊汋湖)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
능한 것입니다.
(*) 정령(井嶺)과 박작호(泊汋湖)의 관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여기서 우리는 수로(水路)의 제방(堤防)에 대해서 일고(一考)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로(水路)의 모양의 제방은 물(水)을 대량으로 보내기도 하고, 전혀 안보내기도 하기 때문에, 제방의 옆구리 아랫
부분에서 물살을 받는 부분은 석축(石築)을 깔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방 옆구리 윗부분은 흙을 다져서 쌓고,
잔듸를 덮지만, 이런 제방(堤防) 위에는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 보다시피, 이런 (▮___▮) 모양으로 바닥에 돌(石)
을 깔아서 비(雨)가 와도 파이지 않아서 언제든지 마차(馬車)들이 다닐 수 있고 하고, 또 양쪽에는 성벽(城壁)을 돌
(石)로 쌓아서 제방(堤防)을 넘어서 수로(水路)를 장악하는 적(敵)에 대해서 기동(機動)타격을 할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야합니다.
그런데, 정령(井嶺: 1325m)은 인터체인지(Interchange)역할도 겸하는 수로(水路) 가운데에 1325m나 되는 고지
(高地)가 있기 때문에, 6개의 하천(河川) 가운데 한 두개가 점령된다고 할지라도, 내외(內外)상응(相應)해서 이를
퇴치(退治)할수 있기 때문에,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城)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중국 천자(天子)는 대리(代理) 천독 들을 파견해서 혼강(渾江) 상류에 거주(居住)하게 하면서,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郎)이라는 특사(特使)를 보내서, 마음 놓고 투자(投資)-지휘(指揮)를 할 수가 있었던 것
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노독정자산(老禿貞子山:1325m)주변에는 그 지리(地理)가 ‘인터체인지(interchange)해자(垓字)’
를 틀 수 있는 지형인가? 다시 말하면 정령회하(井嶺回河)를 틀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미군사지도(1950년대)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합니다.
먼저 태자하(太子河)와 대이하(大二河)가 연결되는 정령(井嶺:1325m)의 ‘윗부분’의 해자(垓字)부터 살펴보기로
합니다.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를 보면,
[1] 경도(經度)표시: FX5~FX6, 위도(緯度)표시선: 8 바로 밑에 노독정자산(老禿貞子山)이 1367m로 표기되어 있
는데, 바로 북(北)쪽에서 서류(西流)하는 태자하(太子河)(←)가 있고, 동류(東流)하는 대이하(大二河)가 있는데, 이
처럼 서로 등(背)지면서 물이 흐르는 계곡 바로 위에 보면 “붉은 돌(石)로 이루어진 산벽(山壁)이 (높아진 수위
(水位)를) 데려오게 하는(=납(拉))산(山)”이란 뜻의 홍석납자산(紅石拉子山: 600m-700m-600m)로 수평으로
있는데, 두 등(背)진 하천의 서(耳亇)는 해발 500m 높이로 불과 1Km 밖에 안 됩니다.
따라서 태자하(太子河)와 대이하(大二河)를 연결하는 서(耳亇)를 우리는 <홍석납자산(紅石拉子山)-서(耳亇)>라고
이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대이하(大二河) 쪽에서 ① <자반(雌盤)-갑문(閘門)>을 쳐줄 곳은 대이하(大二河) 가운데, 남(南)쪽 대이하
(大二河)가 있는 [경도(經度)표시 FX7~FX8 위도(緯度)표시선:8] 바로 남(南)쪽에 우모대산(牛毛大山: 1350m)의
북(北)쪽 지산(支山)으로써 영어의 유(U)자처럼 생긴 빙가보자산(憑家保子山: 707m)의 왼쪽 ‘산줄기’와 바로 서북
(西北)쪽의 무로유자산(MU-LO-YU-TZU-SHAN])을 연결하면 됩니다.
② 또 웅반(雄盤)-갑문은 빙가보자산(憑家保子山: 707m)의 유(U)자의 오른쪽 ‘산줄기’와 맞은 편 용두산(龍頭山:
500m)를 연결하면, 대이하(大二河)의 북(北)쪽 물줄기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합당할 것입니다.
[3] 태자하(太子河)쪽에서는 ① <웅반(雄盤)-갑문>이 쳐질 곳은 [경도(經度)표시:XF2~XF3, 위도(緯度)표시선:9]의
태자하(太子河)의 남쪽 호산(湖山: 916m)의 북록(北麓)지맥(支脈)이 불(乀)자처럼 뻗은 곳(500m)과 칠도구(七道泃)
가 남류(南流)하는 왼편에 있는 서산대보산(西山大堡山: 500m-400m)이 남행(南行)하는 끝을 520m로 보(堡)의 높이
를 높게한다음 갑문(閘門)-겹납고를 설치하면 될 것입니다.
②<자반(雌盤)-갑문>이 설치될 곳은 [경도(經度)표시선: XF3, 위도(緯度)표시선:9]의 교차점 바로 우측에 호산(湖山:
916m)의 최(最)-북록(北麓)되는 500m되는 곳과 건너편 서차산(西岔山: 700m-500m)의 남단(南端)을 520m로 제방
을 돋구고 갑문을 달면 될 것입니다.
③ 갑문(閘門)과 제방의 높이는 <홍석납자산(紅石拉子山)-서(耳亇)>가 해발(海拔)500m이기 때문에, 수위(水位)높이
를 10m가 되어야만 선박이 넘나들 수있고, 제방은 안전(安全)높이 10m를 더해서 해발 520m가 되어야함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 위 [1], [2],[3]을 살필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신기한 것은 ‘미군사지도’가 공개(公開)된 1950년대까지는 조선조(朝鮮朝)때 갑문과 제방을 형성된 곳의 기억(記憶)
을 담고 있는 지명(地名)이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호산(湖山: 916m)은 갑문과 제방을 설치해서 ‘호수(湖水)를 형성하는 산(山)’이란 의미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또 서(耳亇)의 높이인 500m를 넘기 위해서는 제방이 520m가 되어야하는데, 적절한 위치의 산(山)이름이
서산대보산(西山大堡山: 500m-400m)으로 이 산(山) 위에 제방(堤防) 즉 보(堡)가 있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령회하(井嶺回河)의 ‘덮개 역할’을 하는 강(江)의 흐름은 실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정령(井嶺)의 남(南)쪽 해자(垓字) 역할 - 다시 말하면 정령회하(井嶺回河)의 ‘받침 부분’을 하는 것을 살펴
보도록 합니다.
먼저 하협하(下夾河)가 마치 ‘북두칠성의 국자’가 이런(--凵)식으로 오른쪽으로 눕혀진 듯(↘) 곳부터 살펴보기로
합니다.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에서
[1] 감(凵)자 모양으로 하협하(下夾河)가 돌아나가는 부분은 [경도(經度)표시: XF2~XF3, 위도(緯度)표시: 6~5
사이]입니다. 이처럼 감(凵)자처럼 돌아나가는 곳 우측에서도 지류(支流)가 흘러나오고, 또 기울인(↘) ‘북두칠성
(--凵)’처럼 돌아나가는 곳에 작은 지류를 의미하는 구(泃)에 관한 수명(水名)은 많이 있지만, 전체 이 하천(河川)에
대한 이름은 미군사지도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하천(河川) 바로 우측에서 태자성(太子城)쪽으로 북류(北流)해 들어가는 하천 이름이 “윗쪽에서 끼운다”
는 의미의 상협하(上夾河)로 되어있기 때문에, 태자성(太子城)의 입장에서 태자하(太子河)의 “하류(下流)쪽에서
끼우는 하천(河川)”을 하협하(下夾河)로 칭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하협하(下夾河)의 지리(地理)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凵)자 모양의 ‘국자’부분의 좌하단(左下端)
(↙)쪽의 ‘특이한 지형’입니다.
이는 [위도(緯度)표시선:5와 경도(經度)표시 XF1-XF2-XF3]에 있는데, 암반(巖盤)으로된 산의 모습이 마치 한자
(漢字)의 ‘확 구(臼)’ 속에 ‘가장귀 아(丫)’가 - ‘가장귀’는 “나뭇가지가 갈리진 것”을 뜻합니다.
- 들어가 있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구아암산(臼丫岩山)이라고 이름을 붙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구아암산(臼丫岩山)에서 이런(/ /)모양으로 ‘확 구(臼)’의 틀을 형성하는 서북(西北)쪽의 외벽(外壁)을 치는 산이
바로 구재정자-산(九財貞子-山:1231m)이고 동남(東南)쪽의 외벽(外壁)을 치는 산이 바로 팔대납자-산(八大磖子-
山:1015m)입니다.
이 구아암산(臼丫岩山)이 신기한 것은 아(丫)자의 서남(西南)(↙)쪽을 보면, 팔도하(八道河)쪽으로 나가는 서(耳亇)
가 있는데, 해발 500m높이가 불과 0.7Km정도 밖에 안 됩니다.
이 서(耳亇)가 있는 곳에서 북류(北流)하는(↑) 개울을 성문구(城門泃)라고 한 것을 보아서 과거에 이 서(耳亇)자체
를 비록 “물(水)이 들락거리긴 하지만” 이를 <성문(城門)>으로 인식한 흔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서(耳亇)를 우리는 <구아암산(臼丫岩山)-서(耳亇)>라고 이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자암(丫字岩)의 뿌리되는 암반(巖盤)을 넘어오는 곳은 매우 협소(狹小)하지만 역시 500m가 안되는 해발
높이를 하고 있는데, 아(丫)자의 오른쪽 계곡의 이름이 바로 “적게 (물(水)이)오는 ‘자루(=대(袋))같은’ 골짜기
(=욕(峪)”라는 뜻에서 소래대욕(小來袋峪)이란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는 성문구(城門泃)가 흐르던 계곡을 대래대욕(大來大峪)이라고 이름 붙였음을 능(能)히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3]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 구아암산(臼丫岩山)의 왼편에는 ‘확 구(臼)’자되는 곳에 마치 맹장(盲腸)에 달린 듯이
내려간 계곡이 있는데, 그 모양이 이런(↙)방향으로 눕힌 아자곡(丫字谷)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아자곡(丫字谷)을 꼭 한자(漢字)의 감(凵)자처럼 감싸고 있는 산이 있기 때문에, 이 산(山)을 우리는 감아암산
(凵丫岩山)이라고 이름할 수 있습니다.
감아암산(凵丫岩山)은 감(凵)자를 디귿(ㄷ)자 모양으로 오른쪽(↘)으로 기울여진 모습을 하고 있는데, 북(北)쪽의
외벽(外壁)이 되는 산이 바로 삼차자산(三岔子山:1360m)입니다.
감아암산(凵丫岩山)의 아자곡(丫字谷)은 팔도하(八道河)로 넘어가는 계곡(溪谷)과 해발(海拔) 500m 높이의 서
(耳亇) 0.3Km정도 밖에 안되기 때문에, 하협하(下夾河)와 팔도하(八道河)의 양단(兩端)을 갑문으로 막아서 물이
들락거리게 할 때에 이곳이 가장 물이 왕래 잘 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감아암산(凵丫岩山)-서(耳亇)>라고 이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태자하(太子河)와 팔도하(八道河)를 연결시키는 서(耳亇)는 2가지로 ①감아암산(凵丫岩山)-서(耳亇)와
②구아암산(臼丫岩山)-서(耳亇)가 되는 것입니다.
또 물(水)이 넘나드는 정도는 ①구아암산(臼丫岩山)의 아자곡(丫字谷)이 최고인데 그 까닭은 ‘엷은 서(耳亇)’를 넘기
때문이고 ② 그다음에는 감아암산(凵丫岩山)의 대래대욕(大來袋峪)이고, ③ 소래대욕(小來袋峪)이 물(水)이 가장
적게 넘어오는 까닭은 서(耳亇)를 2번이나 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이곳 지형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감아암산(凵丫岩山) 서(西)쪽의 계곡(溪谷)에서 남류(南流)하는 하천
(河川) 최상류에 포석하(蒲石河)라고 적혀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경도(經度)표시: XF0~XF1 위도(緯度)표시: 4~5 임]
(*) 위 [1],[2],[3],[4]를 볼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감아암산(凵丫岩山) 서쪽 계곡(溪谷)에서 남류(南流)하는 하천이 포석하(蒲石河)의 원류(源流)이다.”라는 지명이
1950년대 미군사지도에 까지 남아있다는 사실은 놀랍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태자하(太子河)의 지류(支流)인 하협하(下夾河)가 2개의 서(耳亇)로 넘어가서 관십자하(觀卌字河)로써 횡(橫)으로
①초하(草河), ②팔도하(八道河),③애하(靉河), ④포석하(蒲石河)를 차례대로 서(西)에서 동(東)으로 지나면서 꿰
면서 이윽고 북고하(北古河)와 남고하(南古河)와 연결되어 혼강(渾江)에 합류하기 때문입니다.
왜냐?
아래 ‘솟대님의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 지도’를 보면, 북두칠성 국자(--凵)처럼 돌아나가는 하협하(下夾河) 왼쪽
에서 부터 ①팔도하(八道河) ②애하(靉河)가 있지만 하협하(下夾河)의 수위(水位)를 높여서 팔도하(八道河)와 이어
지게 하는 (1)구아암산(臼丫岩山)과 (2)감아암산(凵丫岩山)이라는 2가지의 서(耳亇)를 넘는 과정에서 이 팔도하
(八道河)보다 동(東)쪽에서 감(凵)자 처럼 돌아서 북류(北流)(↑)하는 하는 산맥 남(南)쪽에서 초하(草河) 원류와
이어지는 ‘또다른 서(耳亇)’가 있기 때문입니다.
(*) 솟대님 요녕성 수계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다시 말하면, 횡(橫)으로 꿰는 관십자하(觀卌字河)를 통과해서 종(縱)으로 흐르는 흐름이 합수(合水)된 것은 결국
왼쪽에서부터 말하자면 (1)초하(草河) (2)팔도하(八道河) (3)애하(靉河) (4) 포석하(蒲石河)이지만- ‘압록강’에 하구
(河口)를 지닌 것은 (1),(2),(3)의 3강이 초하(草河)로써 하구(河口)를 지니고, 그 다음에 포석하(蒲石河)가 하구
(河口)를 지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2개의 하구(河口)를 지닌 강 모두를 관십자하(觀卌字河)는 횡(橫)으로 꿴 것입
니다.
그런데, 오늘날 압록강에 하구(河口)를 지닌 두 강 초하(草河)와 포석하(蒲石河)중에 초하(草河)의 원류(源流)들을
갑문으로 막아서 절취(截取: cut-off)해서 이를 포석하(蒲石河)로 연결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보면, 관십자하(觀卌字河)
는 결국 포석하(蒲石河)의 수량(水量)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①초하(草河), ②팔도하(八道河) ③애하(靉河)를 절취
(截取: cut off)했다고 단순화시킬 수 있습니다.
북고하(北古河)(↘)는 남고하(南古河)(↗)와 이어져서 이런(↘↗)식으로 크게 옆으로 흐르게 되는데, 박작호(泊汋湖)
를 지나서 혼강(渾江)이 이런(<)모양으로 꺽이면서 압록강에 합류하기 직전에 꺽인 곳(<)에서 혼강(渾江)과 이어집
니다.
따라서 혼강(渾江)이 압록강과 합류되는 하구(河口)의 하류(下流)에서 정령(井嶺)산맥 쪽으로 올라가는 수로(水路)
는 결국 초하(草河)와 포석하(蒲石河) 두 가지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정령회하(井嶺回河)의 받침부분이 (① 하협하(下夾河)+ ②관십자하(觀卌字河)+③고하(古河)
(=북고하(北古河)+남고하(南古河)))로 형성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압록강 쪽에 있는 의주(義州) 남쪽에서 서남류(西南流)(↙)하는 고림천(古臨川)을 백마성
(白馬城)과 망일산(望日山) ‘사이’에 갑문(閘門)을 설치해서 수위(水位)가 올라가면 서곶[(耳亇)串]을 깔대기 판
으로 해서 학현(鶴峴)을 넘어서 결국 의주(義州)의 동북(東北)쪽에 있는 어떤 강의 수구(水口)를 통해서 초하(草河)
하구(河口)쪽으로 나가는 수로(水路)가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 1710년)’를 보면, 이 학현(鶴峴)을 넘어와서 흐르게 되는 강의 이름이 왕강
(王江)이고, 이 왕강(王江)의 수구(水口)에서 조금만 서행(西行)하면
① 포석하(蒲石河)가 등장하는데, 남류(南流)하는 포석하(蒲石河) 서안(西岸)의 명칭이 다탕동(多湯洞)이고 동안
(東岸)의 명칭이 신호수동(申胡水洞)임이 기록되어 있고,
②여기서 훨씬 서(西)쪽으로 가서 위화도(威化島)바로 동(東)쪽에서 오늘날 초하(草河)인 <팔강(八江)>과 만남을
알게 됩니다.
즉 왕강(王江)의 수구(水口)에서 보면, 포석하(蒲石河)와 초하(草河)가 모두 서(西)쪽에 있지만, 포석하(蒲石河)가
더욱 가까운 것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 왕강(王江)의 수구(水口)에서 포석하(蒲石河)가 초하(草河)보다 가깝게 그려진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 1710년)’
http://blog.daum.net/sabul358/13645892
따라서 우리는 조선조(朝鮮朝)때 오늘날 압록강(鴨綠江)에서 ‘요녕성’을 가로질러서 갈 때에 가장 빠른 길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고림천(古臨川)→서곶[(耳亇)串]→학현(鶴峴)→ 왕강(王江)의 수구(水口)→압록강→포석하(蒲石河)→관십자하
(觀卌字河)→팔도하(八道河)→<감아암산(凵丫岩山)및 구아암산(臼丫岩山) 서(耳亇)>→하협하(下夾河)→태자하
(太子河)
(*) 참고: 위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선역도(鮮域圖: 1760년대) <7. 평안도>
- 맨 밑에서 2번째-에서 서곶[(耳亇)串] 주변을 살필 수 있는 곳
http://blog.daum.net/sabul358/18321762
이런 사실은 조선조(朝鮮朝)때까지 한반도에서 중국(中國)으로 들어갈 때, 가는 코스(course)가 포석하(蒲石河)로
역류(逆流)해서 관십자하(觀卌字河)로 해서 팔도하(八道河) 원류(源流)쪽으로 해서 <감아암산(凵丫岩山)및 구아암
산(臼丫岩山) 서(耳亇)>를 넘어 다니다 보니, 이 팔도하(八道河) 원류(源流)를 포석하(蒲石河) 원류(源流)로 생각
하는 관습이 1950년대 미군사지도를 만들 때까지 현지(現地)에 남아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더구나 관십자하(觀卌字河)는 왼쪽에서 부터 종(縱)으로 흐르는 강을 ①초하(草河) ②팔도하(八道河) ③애하(靉河),
④포석하(蒲石河)를 횡(橫)으로 꿰고 있긴 하지만, 이는 갑문(閘門)을 설치해서 강물의 원류(源流)를 절취(截取:
cut off)해서 옆으로 다시 말하면, 동서(東西)가 연결되게 것입니다.
갑문(閘門)은 미닫이 식 (--ㅌ ⊃--)식으로 열고 닫는지라, 내려 보내는 수량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데,
가급적이면, 선박이 많이 다니는 쪽으로 수량(水量)을 보내기 마련이기 때문에, 결국 팔도하(八道河) 원류를 포석하
(蒲石河) 원류(源流)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관십자하(觀卌字河)가 4강을 횡(橫)으로 꿰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수량(水量)을 포석하(蒲石河)쪽
으로 몰아서 흐르게 조정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관십자하(觀卌字河)가 4개의 강(江)을 횡(橫)으로 꿰는 ‘갑문(閘門)시설과 제방시설’이 “도대체 언제
만들어졌을까?”를 상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것이 “20을 한문(漢文)의 한 글자로 나타낼 때에 ‘두 손으로 받들 공(廾)’자(字)를 쓰고, 30은 ‘서른 삽(卅)’
으로 쓰고, 40은 ‘마흔 십(卌)’으로 나타내는데, 이 ‘마흔 십(卌)’이 ‘열 십(十)’과 음가(音價)가 왜 같은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결국 4강을 하나로 꿰는 것이 십(卌)으로 나타나지만, 이를 포석하(蒲石河)로 몰아주어서 수직(垂直)으로 내려
가는 강물줄기와 수평(水平)으로 가는 물줄기가 교차(交叉)하는 것을 상형(象形)한 <십(十)>과 같음을 인지(認知)
하고 있는 사람들이 똑같은 음가(音價)로 “열 십(十)”과 “마흔 십(卌)”을 같은 음가(音價)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감아암산(凵丫岩山)및 구아암산(臼丫岩山) 서(耳亇)>를 넘어오는 물은 태자하(太子河)의 지류인 하협하
(下夾河)인데, “태자하(太子河)의 어원(語源)이 되는 태자(太子)가 도대체 어떤 분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
니다.
이는 우(右)임금 때의 대홍수(大洪水)에 대한 대응책인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달해준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아드님이신 <부루(扶婁)-태자(太子)>를 생각치 않을 수 없습니다.
즉 ‘부루-태자’때에 이미 정령(井嶺)에 <해자(垓字)>역할을 하는 정령회하(井嶺回河)가 흐를 수 있게하는 시설이
갖추어졌고, 관십자하(觀卌字河)로써 4강을 꿰되, 포석하(蒲石河)쪽으로 물(水)이 집중되어서 흐르도록 하였기
때문에, 십(十)과 십(卌)은 우리말의 음가(音價)로써 같은 발음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이 점이 중요한 것은 태자성(太子城)이 위치하는 곳이
[1] 태자하(太子河)와 대이하(大二河)를 연결하기 위해서 태자하(太子河)쪽에 쳐주는 갑문이 의지하는 호산(湖山:
916m)의 서록(西麓)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妙)하게도 서남류(西南流)(↙)하는 태자하(太子河)의 남안(南岸)이 되
면서 북류(北流)(↑)하는 상협하(上夾河) 동안(東岸)에 이런(⊂)모양으로 약 2Km가량 나와있는 500m 고지(高地)
위에 태자성(太子城)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즉 태자성(太子城)바로 서(西)쪽에서 상협하(上夾河)가 북류(北流)하고, 이 상협하(上夾河)가 태자하(太子河)에
합류하는 지점으로부터 서(西)쪽으로 10Km를 가면 하협하(下夾河)가 서북류(西北流)해서 합류하고 있게 됩니다.
그런데, 관십자하(觀卌字河)쪽으로 물을 보내기 위해서는 잠깐 선박이 갑문을 통과할 때를 제외하고는 하협하(下夾河)
의 물(水)이 죄다, <감아암산(凵丫岩山)및 구아암산(臼丫岩山) 서(耳亇)>를 통과(通過)해서 팔도하(八道河) 쪽으로
넘어가서 관십자하(觀卌字河)를 타고 가도록 하는 것이 가장 정령(井嶺)의 해자(垓字)- 정령회하(井嶺回河)를 만들
기에 용이합니다.
[3] 흥미로운 것은 이 태자성(太子城)이 있는 곳에서 동(東)쪽으로 수평거리로 약 7Km정도 가면 호산(湖山:916m)의
정상(頂上)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호산(湖山:916m)의 정상(頂上)에 서면, <감아암산(凵丫岩山)및 구아암산(臼丫岩山) 서(耳亇)>가 서남남(西南南)
방향이 되는데, 이 서(耳亇)를 향해 물이 흘러나감을 바라보는 시각(視覺)을 가로막는 것은 상협하(上夾河)와 하협하
(下夾河)를 불(乀)자 모양으로 가로막는 산 가운데 674m밖에 없는데, 서(耳亇)를 넘는 물 높이 510m와 또 호산(湖山
:916m)의 높이를 고려할 때에, 전혀 시야(視野)를 가리지 않습니다.
바라볼 때에 오른쪽이 되는 구재정자-산(九財頂子-山:1231m)와 삼차자(三岔子:1360m), 또 왼쪽이 되는 팔대납자
-산(八大拉子-山:1015m)는 오히려 시각(視覺)의 초점(焦點)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뿐인 것입니다.
[4] 또한 호산(湖山:916m)의 정상(頂上)에 서서 정동(正東)쪽으로 보면 왼쪽에 홍석납자산(紅石拉子山: 700m-
600m)와 오른쪽에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1367m) 역시 가운데 서(耳亇)를 넘어가는 물 높이 510m를 바라보는
시각(視覺)의 초점(焦點)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게 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태자성(太子城)이 왜 호산(湖山:916m)에서 서(西)쪽으로 수평거리로 7Km 떨어진 곳에 있게 되었는가?”
를 웅변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령(井嶺)의 해자(垓字)-수로(水路)인 정령회하(井嶺回河)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위치이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 태자성(太子城)의 위치
: [경도(經度)표시 XF2~XF3, 위도(緯度)표시선: 8 바로 위]
위 [1],[2],[3],[4]를 볼수 있는 곳.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이런 현장(現場)지리(地理)에 대한 인식은 “이곳 수명(水名)이 왜 상협하(上夾河)와 하협하(下夾河)로 칭하는가?”를
뚜렷이 알게 합니다.
호산(湖山:916m)의 정상(頂上)에 서서 살펴볼 때에, 상협하(上夾河)는 문자 그대로 ‘윗쪽으로만 끼어드는 하천(河川)’
이고, 하협하(下夾河)는 문자 그대로 “갑문(閘門)을 설치해서 아래쪽 다시 말하면, <감아암산(凵丫岩山)및 구아암산
(臼丫岩山) 서(耳亇)>를 넘어서서 관십자하(觀卌字河)가 있는 팔도하(八道河)쪽으로 끼어들기만 하는 하천(河川)”이
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협하(下夾河)는 선박을 타고 갑문을 열 때 잠깐 서북류(西北流)하는 물 이외에는 죄다 서(耳亇)를
통해서 넘어가서 주로 포석하(蒲石河)의 수원(水源)으로 작용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갑문(閘門)이 어찌 이 하협하(下夾河)에 설치되었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
니다.
서(耳亇)의 높이가 해발 500m이기 때문에, 이를 물(水)이 넘으려면 해발 510m는 되어야하며, 또 갑문(閘門)과 제방
의 높이는 해발 520m가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강물을 역류(逆流)시킬 때에는 웅반(雄盤)과 자반(雌盤)을 2차에 걸쳐서 쳐주는 것이 보다 효과적입니다.
웅반(雄盤)은 물의 수위(水位)에 따라서 선박이 올라가게(↑)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자반(雌盤)은 물줄기를 서(耳亇)
를 넘어서 가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웅반(雄盤)과 자반(雌盤)의 거리가 좁을수록 유실(流失)되는 수량(水量)이
적습니다.
또 자반(雌盤)을 쳐주는 위치는 가급적 수원(水源)을 많이 공급받는 위치에다 설치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1] 먼저 하협하(下夾河)가 태자하(太子河)에 합류되는 곳의 좌안(左岸)쪽에 보면, 전황지-산(前荒地-山:865m-
886m)가 있는데, 이 산(山)은 묘하게도 한글의 야(ㅑ)자 처럼 두 팔(=수(手), arm)을 오른쪽으로 뻗고 있습니다.
팔의 거리는 2.5Km 정도 됩니다.
그런데 하협하(下夾河) 맞은 편의 산(山)밑의 마을 이름이 대양(大陽)인데, 한자(漢字)의 양(陽)은 수지북(水之北)
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양(漢陽)은 한수지북(漢水之北)인 것이지요.
따라서 이 대양(大陽)이란 지명 자체가 이곳에 갑문을 쳐주어서 물이 높은 수위(水位)로써 있었던 흔적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대양(大陽) 뒷 산이기 때문에 태양산(大陽山: 812m)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 전황지-산(前荒地-山:865m-
886m)가 두 팔을 뻗는 곳과 맞은 편의 태양산(大陽山: 812m)을 연결하는 제방과 갑문을 2.5Km로 떨어지게 북(北)
쪽 팔 쪽에 웅반(雄盤) 갑문을 남(南)쪽 팔 쪽에 자반(雌盤)갑문을 설치하되, 갑문(閘門)의 높이는 해발(海拔) 420m
정도가 되게 되도록 설치되었다고 추측됩니다.
이 때의 웅반(雄盤)-갑문은 3차(次)웅반(雄盤)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3차 웅반(雄盤)갑문과 자반(雌盤)갑문과
그 ‘사이’에 있는 경첩-갑문이 모두 해발 410m의 수위(水位)를 지니고 있었다고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전(前)에 해발 310m로 올리는 1차 웅반(雄盤)갑문이 있고, 또 이를 유지하는 2차 웅반(雄盤)갑문이 있어야
3차 웅반 갑문이 수위(水位)를 310m로 올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자반(雌盤)-갑문>과 <3차 웅반(雄盤)-갑문> ‘사이’에 경첩-갑문이 쳐져있었다고 보는 까닭은 적선(敵船)이 들어
올 경우, 경첩 갑문을 갑자기 젖혀서 해발 410m의 수위(水位)를 지닌 물을 순간적으로 방류(放流)시킨 폭류(瀑流)
로써 접근을 엄금하는 ‘군사상의 고려’ 역시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 2차갑문의 수위(水位)가 310m까지 올린 수위(水位)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상대적(相對的)으로
격차가 100m가 되는 폭류(瀑流)가 덮치게 되어서 사실상 적선(敵船)이 이 정령회하(井嶺回河)에로 접근하는 것을
금지한 장치가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곳에 자반(雌盤)갑문을 쳐주는 것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조선조(朝鮮朝) 때까지 전(傳)해 내려온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운하학(運河學)에서 자반(雌盤)갑문이라 함은 갑문
(閘門)으로 물(水)을 막아서 ①수위(水位)를 높혀서 서(耳亇)를 통해서 다른 원래 없었던 수로(水路)로 물줄기를
내거나, ②서로 등(背)지면서 (← →)흐르는 물을 이어지게 하거나, ③큰 호수(湖水)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할 때에,
자반(雌盤) 갑문이라는 명칭을 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③번째 이유- 큰 “호수(湖水)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자반(雌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곳에 ‘큰 호수(湖水)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지명부터 열거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먼저 대보(大堡)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이 대보(大堡)는 괄호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별칭(別稱)이고, 원명(原名)
은 “전사부(田師付)” - 즉 “군대(軍隊)(=사(師))를 사냥훈련(=전(田)에 붙이다.(=부(付))”는 의미를 지닌 호수(湖水)가
있기 때문에 이를 에워싼 제방(堤防)을 대보(大堡)라고 칭하였던 것입니다.
즉 <전사부(田師付)-호(湖)>가 이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따라서 <전사부(田師付)>는 수군(水軍)의 <진(鎭)>이라고 할수 있는데,
흥미있는 것은 이 진(鎭)이 있는 바로 동남(東南)쪽에는 광산(鑛山)표시가 있습니다.
생각컨데 “양질(良質)의 철(鐵)이 생산되는 곳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합니다.
즉 이 <전사부(田師付)>는 까마득한 옛날 부터 수군(水軍)의 군선(軍船)을 제조하는 공장(工場)이 자리잡았던 곳인
것입니다.
이 <전사부(田師付)-호(湖)>는 현장 지도(地圖)를 볼 때에 이런(⊃) 모양의 ‘거대한 말굽’모양의 호수(湖水)가 형성
되게 되는데, 말굽 모양으로 돌아가게 하는 가운데는 영어의 유(U)자와 같은 환룡구(丸龍口-山: 532m-500m)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환룡구(丸龍口-山)은 ‘뚜껑(=개(蓋))’를 불(乀)자 방향으로 400m로 덮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이런
(⊂)모양의 분지(盆地)를 지닌 산세(山勢)를 유지하는 셈인데, 환룡구(丸龍口) - 다시 말하여 ‘환룡(丸龍)’의 입구
(入口)는 동(東)쪽으로 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모양의 분지(盆地) 속의 지표(地表) 고도(高度)는 해발 300m~350m로써 추측할수 있는데,
<전사부(田師付)-호(湖)>가 해발 410m로 올라갈 경우, 덮개 산에 산상보(山上堡)를 420m로 해주게 되면, 이런(⊂)
모양의 환룡구(丸龍口-山: 532m-500m-420m)는 환룡(丸龍)을 내장(內藏)하는 기지(基地)의 외벽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장(內藏)되는 환룡(丸龍)이 도대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우리는 경악할 만한 사실을 눈치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허달성(虛達城)-금성(金城)>이 오늘날 축구(蹴球) 공 모양의 32면체의 거대한 부구(浮具)로 둘러쌓인
고구리(高句麗) 때, 환도(丸都)라고 칭한 것이 물(水)위에서 움직일 때 이를 환룡(丸龍)이라고 표현한 것임을 눈치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환도(丸都)를 내장(內藏)시키고 있는 산(山)이 바로 환룡구(丸龍口-山)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환룡구(丸龍口-山: 532m-500m-420m)를 중심으로 해서 <전사부(田師付)-호(湖)>가 이런(⊃)식으로 돌아
나가는 곳에서는 환도(丸都)를 제작함과 동시에 이 환도(丸都)가 환룡(丸龍)으로써 참여하는 군사훈련을 하는 호수
(湖水)였음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이 <전사부(田師付)-호(湖)>가 이런(⊃)식으로 돌아나가는 서(西)쪽에 성창(城廠)이라는 마을이 있어서 더욱더
확실해 지는 것입니다.
성창(城廠)은 공장(工場)(=창(廠))의 주변을 성(城)으로 둘러싸서 철저히 보호함을 의미합니다.
즉 이런 (⊃)식으로 된 <전사부(田師付)-호(湖)> 동단(東端)에는 환도(丸都)를 만드는 성창(城廠)이 있고, 동북(東北)
(↖)쪽 철광(鐵鑛)이 나오는 곳에는 <전사부(田師付)-진(鎭)>이 있는 것입니다.
이곳이 조선조(朝鮮朝)때 <청구(靑邱)-조선(朝鮮)> - 즉 조선(朝鮮)과 여진(女眞)을 통합하는 연합정부에서 ‘직접
관리 하는 지역’임이 드러나는 지명(地名)이 또 하나 발견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런(⊃)식으로 형성되는 <전사부(田師付)-호(湖)>의 서단(西端)을 막고 있는 1061m의 산(山) 이름이
대전자-산(大甸子-山)이기 때문입니다.
한문의 전(甸)은 경기(京畿) - 즉 왕성(王城) 주변의 500리(里)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전사부(田師付)-호(湖)>는
<청구(靑邱)-조선(朝鮮)>에서 직영(直營)하는 성호(聖湖)였기 때문에, 그 서단(西端)을 막아주는 1061m되는 산을
대전자-산(大甸子-山)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따라서 <청구(靑邱)-조선(朝鮮)>의 가장 중요한 군사(軍事)기지(基地)였기 때문에, 이곳으로 들어오는 곳에 자반
(雌盤)-갑문(閘門)을 쳐서 <전사부(田師付)-호(湖)>를 형성해 주고, 또 3차 갑문과 이 자반(雌盤)-갑문(閘門) ‘사이’
에는 경첩-갑문을 두어서 적선(敵船)이 접근하는 것을 엄금하는 시설을 갖추었던 것입니다.
(*) 전사부(田師付), 환룡구(丸龍口-山)이 있는 곳 : 경도(經度)표시:XF1~XF2, 위도(緯度)표시: 7~6 ‘사이’
(*) 위 [1], [2]를 살필 수 있는 미군사지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전사부(田師付)-호(湖)>가 그 수위(水位)를 해발 410m로 유지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전(前)에 하협하(下夾河)의
수위를 해발 310m로 올려줄 수 있는 1차 웅반(雄盤) 갑문과 또 이 해발 310m를 유지할수 있게 하는 2차 웅반(雄盤)
갑문을 쳐줄 곳을 찾아야합니다.
그런데, 하협하(下夾河)의 태자하(太子河)와 이어지는 하구(河口)에서의 수위(水位)는 등고선으로 볼 때에, 해발
210m~250m 정도로 보이기 때문에, 1차 갑문에서 310m의 수위(水位)로 올릴 경우 40m~100m를 올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현실적인 것입니다.
1차 웅반(雄盤)갑문을 쳐줄 위치는 전황지-산(前荒地-山:865m)가 전체적으로 한글의 야(ㅑ)자처럼 팔(Arm)을
내미는 ‘윗 쪽’에 람다(Γ)모양 서남(西南)쪽에 이런(⊂)식의 분지(盆地)를 형성하면서 또 하나의 팔(Arm)을 내민
마가성자(馬家城子:500m-300m)가 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마가성자 (馬家城子:500m-300m)가 팔(arm)을 뻗은 곳 동남(東南)쪽에 보면 대양산(大陽山: 812m)의 서북단
(西北端)에 “문안(問安)드리는 초소(哨所)”라는 의미의 <조초자(弔哨子)>가 있는데, 이곳에서 마가성자 (馬家城子:
500m-300m)쪽으로 해발 320의 제방(堤防)을 불(乀)자처럼 쌓고, 마가성자(馬家城子)쪽으로 1차 웅반(雄盤)갑문
을 설치했다고 봅니다.
1차 자반(雌盤)을 쳐주는 곳은 전황지-산(前荒地-山:865m)이 한글의 야(ㅑ)자처럼 팔(arm)을 내민 곳 윗쪽 팔
(arm)의 북단(北端)에 이런(∧)식으로 튀어나온 곳이 있는데, 그곳에 영어로 ‘Meng-chia-p'u’라고 적혀있는 곳이
있습니다. 이는 맹가보(孟家堡)의 음가(音價)를 옮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맹가보(孟家堡)(Meng-chia-p'u)와 맞은 편 <조초자(弔哨子)>에서 수평(水平)으로 제방을 끌어와서 자반(雌盤)
갑문을 해발 310m의 수위(水位)를 유지할수 있도록 320m의 높이로 수위를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1차 자반(雌盤)갑문과 2차 웅반(雄盤)의 거리는 수직(垂直)으로 1.5Km 밖에 안 됩니다.
결국 2차 웅반(雄盤) 갑문이 형성된 곳 바로 북(北)쪽에는 산세(山勢)가 영어의 씨(C)처럼 되어 있고, 또 이 씨(C)의
끝에 1차 갑문을 형성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씨(C)자 처럼 생긴 곳에 해발 310m로 수위(水位)를 올릴 경우, 거대한
만(灣)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상상을 할수가 있지만, 이는 오해(誤解)입니다.
왜냐? 이곳은 하협하(下夾河)가 흘러나갈 때 반대로 이런(⊃)식으로 물이 돌아서 나가는 것입니다.
즉 영어의 씨(C)자 처럼 산세(山勢)가 분지(盆地)로 둘러쌓여있지만, 분지(盆地)내부의 고도(高度)의 평면도는
완만한 불(乀)자 모양으로 동(東)에서 서(西)쪽으로 갈수록 은근히 높여지는 지역인 것입니다.
1차 갑문을 열고 선박이 통과한 연후에 이를 닫으면, 수위(水位)가 310m로 올라가지만, 선박이 이 1차 갑문으로
부터 2Km 떨어진 2차 갑문을 통과해서 수위(水位) 310m가 유지되게 한 상태에서는 다시 1차 갑문을 열어서 다음
선박이 들어오게 올 때에는 수위(水位)차이가 하협하(下夾河)하구(河口)에서 40m~100m나는 관계로 폭류(瀑流)가
쏟아지는 관계로 대기(待期)하는 선박은 모조리 침몰(沈沒)당할 것 같지만, 현장 지도를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
[1] 일단 하협하(下夾河)와 태자하(太子河)가 만나는 하구(河口)에서 부터 태자하(太子河)가 흘러나가는 곳을 보면
한글의 리을(ㄹ)자처럼 돌아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산자-산(團山子-山: 700m)와 그 남(南)쪽의 ‘Lung-Feng-Shan’이 한글의 여(ㅕ)자처럼 산줄기의 팔(arm)
을 서(西)쪽으로 뻗은 관계로 태자하(太子河)가 그 사이로 리을(ㄹ)자처럼 돌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Lung-Feng-Shan’은 농팽산(弄膨山) - 다시 말해서 ‘물의 수위(水位)가 팽창(膨脹)한 것을 희롱(戱弄)하는
산(山)’의 의미를 지닌 한자(漢字)를 영어의 음가(音價)로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산자-산(團山子-山: 700m)와 농팽산(弄膨山)은 폭류(瀑流)를 리을(ㄹ)자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그
기세(氣勢)를 꺽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을(ㄹ)자로 돌아나가게 한 맨 끝에 있는 단산자-산(團山子-山: 700m) 서단(西端)과 그 맞은 편의 니은(ㄴ)
자 모양의 석조-산(石曹-山: 600m-500m)사이로 영어의 티(T)자와 같은 청하(淸河)가 흘러내려옵니다.
석조-산(石曹-山: 600m-500m)의 ,조(曹)는 ‘짝, 동반자(同伴者)’의 뜻과 함께 방(房), 실내(室內)의 뜻을 지니기
때문에, 갑문을 쳐서 ‘물(水)을 고이게 할 때’에 자주 사용하는 글자인 것입니다.
즉 석조(石曹)는 돌(石)로 보(堡)를 만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석조-산(石曹-山: 500m)과 청하(淸河)의 맞은 편에 단산자-산(團山子-山: 700m)에 <진자(振子)-1차(次)-
갑문>을 쳐줍니다.
여기서 진자(振子)는 ‘시계 추처럼 좌우(左右)로 왕래하는 흔들이’를 의미합니다.
아무튼 1차 갑문이 열려서 하협하(下夾河)하구(河口)에서 40m~100m의 폭류(瀑流)가 쏱아질 때에는 다음 갑문이
열릴 때 정령회하(井嶺回河)를 타고 가려고 대기(待期)하던 선박들은 이 <진자(振子)-1차(次)-갑문>을 열고, 피신
(避身)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자(振子)-1차(次)-갑문>은 수위(水位)를 310m까지 올릴 수 있도록 그 높이가 320m로 되어 있는
갑문인 것입니다.
[2] 중요한 것은 <진자(振子)-2차(次)-갑문>과 또 이 <진자(振子)-1차(次)-갑문>과 ‘사이’에 <경첩-갑문>을 세울
수 있는 지리(地理)가 <진자(振子)-1차(次)-갑문>이 있는 곳 북(北)쪽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청하(淸河)가 영어의 티(T)모양으로 흐르게 되는 까닭은 서(西)쪽에 동대태산(東大台山: 500m)와 청하(淸河)
맞은 편에 쌍고자산(雙古子山: 696m)의 서록(西麓)인 영수보자-산(英(英守堡子-山: 700m-500m-300m)가 있는데,
이 ‘사이’에 <진자(振子)-2차(次)-갑문>을 세울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청하(淸河)우측의 영수보자-산(英(英守堡子-山: 700m-500m-300m)의 영수(英守)의 의미는 “꽃뿌리를
지킨다.”는 의미인데, ‘꽃뿌리’라 함은 꽃잎들을 받쳐주는 ‘받침-기반(基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청하(淸河)가 동대태산(東大台山)과 영수보자-산(英(英守堡子-山)을 연결하는 갑문에 의해서 물이
불어난 모양새가 청하(淸河)의 원류(源流)로 올라가서 마치 꽃잎들이 활짝 핀 듯하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게 된
것입니다.
이 영수보자-산(英(英守堡子-山: 700m-500m-300m)은 이런 청하(淸河)의 원류(源流)가 꽃잎처럼 핀 것을 ‘꽃뿌리’
로써 지켜주는 그 수위(水位)를 높게 지켜제는 산상보(山上堡)가 있었음을 이름 자체에서 함축하고 있습니다.
또 동대태산(東大台山)과 영수보자-산(英(英守堡子-山)을 연결해서 청하(淸河)를 막은 보(堡)의 이름이 영수보
(英守堡)로 칭하였음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동대태산(東大台山)과 영수보자-산(英(英守堡子-山)이 가운데 동남류(東南流)(↘)하는 청하(淸河)를 두고, 남북
(南北)으로 산세(山勢)를 면(面)한 폭(幅)은 2Km정도 됩니다.
따라서 이 면(面)한 폭(幅)의 맨 북(北)쪽에 <진자(振子)-2차(次)-갑문>을 쳐주고, 면(面)한 폭(幅)의 맨 남(南)쪽에
경첩-갑문을 쳐주었다고 보는 것이 이곳 지리(地理)로 보아서 가장 조선인(朝鮮人) 다운 치산치수(治山治水)의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진자(振子)-2차(次)-갑문>과 <경첩-갑문>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제방(堤防)의 높이는 해발 520m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영수보(英守堡)는 해발 520m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처럼 해발 520m로 갑문의 높이를 하는 까닭은 나중에 보다시피 해발 500m되는 서(耳亇)를 넘을 때에
‘흔들이 (=진자(振子)) 모양’으로 물을 하협하(下夾河)에 청하(淸河)를 첨가시켜서 보내기 위할 때인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조 철종(哲宗)때까지에는 동대태산(東大台山)과 니은(ㄴ)자 모양의 석조-산(石曹-山: 600m-500m)에서
고도(高度)가 520m 이하(以下)로 된 곳은 산상보(山上堡)가 있어서 고도 520m가 되도록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3] 그러나 영수보(英守堡)는 굳이 수위(水位)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수위(水位)를 410m 정도로만 높혀서
관리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왜냐하면, <전사부(田師付)-호(湖)>가 해발 410m로써 유지되기 때문에, 이 <전사부(田師付)-호(湖)>에 이르는 1차
갑문을 열어서 폭류(瀑流)가 흘러나올 때에는 선박들은 영수보(英守堡)가 있는 곳까지 옮겨서 피신하고 있다가,
경첩-갑문을 젖히는 힘에 의해서 고였던 청하(淸河)가 폭류(瀑流)로 나가는 힘에 의해서 410m-310m로 수위(水位)
릍 낮추면서 2차 갑문까지 열면서 닫힌 자반(雌盤)-갑문이 있는 문턱까지 문자 그대로 ‘흔들이’처럼 대번에 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 리을(ㄹ)자로 태자하(太子河)가 돌아나가는 곳
: 경도(經度)표시선: XF1, 위도(緯度) 표시선: 8의 교점(交點)부근.
(*) 위 [1], [2], [3]을 느낄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1] 그런데, 이곳 지리(地理)에서 <전사부(田師付)-호(湖)>의 입구에 쳐진 자반(雌盤)-갑문 밖에 ① 마가성자(馬家
城子)에서 1차갑문을 쳐주는 수위(水位)를 해발 210m로 “올리는 곳”과 2차 갑문을 쳐주는 맹가보(孟家堡)(Meng
-chia-p'u) ‘사이’는 미군사지도(1950ㅇ년대)를 볼 때에, 남북(南北)거리가 2Km이고,
② 2차 갑문을 쳐주는 맹가보(孟家堡)(Meng-chia-p'u)와 수위(水位)를 해발 210m를 유지하게 하는 한글의 야(ㅑ)
자처럼 팔을 뻗은 전황지-산(前荒地-山)의 윗 팔(arm)에 쳐진 3차 갑문까지의 남북(南北)거리는 1.5Km밖에 안됩
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에만 전(傳)해지는 운하학(運河學)에 의하면, 웅반(雄盤)갑문은 고도(高度)가 낮은 곳에서부터 높은
곳으로 번호(番號)를 붙여올라가는데, ‘홀수’ 차(次)가 ‘갑문을 닫아서 고도(高度)를 올리는 역할’을 담당하고, ‘짝수’
차(次)가 ‘올린 고도(高度)’를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짝수 차(次)’갑문이 그 다음 ‘홀수 차(次)’까지의 거리까지의 길이가 항상적으로 그 밑의 ‘홀수 차(次)’의 거리
보다도 긴 것이 일반적인 방법론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는 짝수 차(次)의 갑문을 열면 방대(尨大)하게 고인 물이 짧은 거리를 지닌 홀수 차(次)의 갑문을 금시 채워버리게
되어서 선박을 갑문 계단을 타고 상승(上昇)함에 있어서 쓸데없이 물(水)이 채워지길 기다리지 않고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1차(次) 갑문에서 다음 2 차(次)’까지의 거리가 2Km가 되고, 이 2차에서 3차까지의 거리가 1.5Km가 된다는
것은 조선(朝鮮)의 운하학(運河學)의 원칙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물론 청하(淸河)를 가로막는 이른바 진자(振子) 갑문들에 의해서 기다리는 시간을 해소(解消)할수는 있지만,
이런 이유 이외에도 이 전황지-산(前荒地-山)이 영어의 씨(C)자처럼 된 곳의 길이가 유난히 긴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곳은 하협하(下夾河)가 이런(⊃) 모양으로 돌아가는 곳이어서 물이 차올라도 영어의 씨(C)자 차럼 된 곳이 평면도
(平面圖)로 보면 완만한 불(乀)자 모양 기울기가 되는 곳이라서 만(灣)이 형성되지를 않고, 곤(丨)자로 된 수면(水面)
이 점차 서행(西行)하면서(←) 올라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지형(地形)은 바로 ‘논(田)농사(農事)’를 하는 지역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논(田)에 물을 대는 보(堡)는 내려오는 물을 막아서 형성되고, 또 하류(下流)로 내보내어서 ‘논물(=전수
(田水))’를 댑니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서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즉 하류(下流)의 물이 역류(逆流)하면서 물이 마치 밀물처럼 올라올 때에 이를 보(堡)로 막아서 보유하고 있으면서
물을 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에는 이런 ‘밀물’을 가두는 보(堡)의 이름이 허가보(許家保)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허가보(許家保)는 영어의 씨(C)자처럼 된 전황지-산(前荒地-山)의 400m 고지(高地)쪽에 붙어있습니다.
이는 바로 이곳에서 <전사부(田師付)-호(湖)>에 주둔(駐屯)하는 매영(梅營)의 군사(軍士)들에게 군량미(軍糧米)를
공급하는 군전(軍田)에 논물을 공급하는 보(堡)였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전황지-산(前荒地-山)이 영어의 씨(C)자의 북단(北端)을 형성하는 마가성자(馬家城子) 바로 북(北)쪽
에서 태자하(太子河)는 서남류(西南流)(↙)하고 있는데, 이런 태자하(太子河)(↙)를 건너서 보면, 유향초-산
(流响哨-山:835m-500m)가 우뚝 서있습니다.
유향초-산(流响哨-山)의 향(响)은 ‘울린다.(=鳴)’는 의미입니다. “울린다.(=향(响))”는 것은 공명(共鳴)현상을 이르
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유향초-산(流响哨-山)의 의미는 “물(水)의 흐름이 공명(共鳴)현상을 일으키는지?”를 살펴
보는 초소(哨所)가 있는 산(山)이란 이상한 의미를 띱니다.
매우 흥미롭게도 이 유향초-산(流响哨-山:835m-500m)은 이런(∩)식으로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이 있고,
그 맞은 편의 전황지-산(前荒地-山)의 북록(北麓)인 마가성자(馬家城子)에는 반대로 영어의 유(U)자처럼 오목한
곳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이 두 산(山)의 오목한 곳 양(兩)쪽에 팔(arm)을 내민 곳에 역시 갑문을 웅반(雄盤)과 자반(雌盤)을 해발 520m
- 즉 수위(水位) 높이 510m가 유지되게 쳐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청하(淸河)는 물론 태자하(太子河) 전체가 결국 정령회하(井嶺回河)를 형성하기 위해 2방향으로 치달
리게 됩니다.
(1) 하나는 태자성(太子城) 북안(北岸)을 경과해서 홍석납자산(紅石拉子山)-서(耳亇)를 넘어서 대이하(大二河)와
연결되어서 혼강(渾江)쪽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2) 또하나는 하협하(下夾河)를 통해서 <전사부(田師付)-호(湖)>로 해서 흐르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이 유향초-산(流响哨-山:835m-500m)의 웅반(雄盤)갑문과 자반(雌盤)갑문이 움직일 때에는 문자그대로
‘끊어진 정령회하(井嶺回河)’가 크게 공명(共鳴)을 일으켜서 하나의 회하(回河)로써 흐르게 되는 경우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산(山)의 이름 자체가, 유향초-산(流响哨-山) - 즉 “흐름이 하나가 되는 공명(共鳴)소리를 내는 지를
초소(哨所)로써 살피는 산(山)”이라고 이름이 붙게 된 것입니다.
(*) 허가보(許家保)가 있는 곳: 경도(經度)표시: XF0~XF1, 위도(緯度)표시선: 8의 ‘아래’
(*) 유향초-산(流响哨-山) : 경도(經度)표시: XF0~XF1, 위도(緯度)표시선: 8의 ‘위’
(*) 위 [1], [2] ①,②를 볼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그러나 정령회하(井嶺回河)를 흐르게 할 때에, 크게 가물어서 수량(水量)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경우가 아니면,
이 유향초-산(流响哨-山: 835m-500m)의 웅반(雄盤)갑문과 자반(雌盤)갑문이 사용되는 것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
됩니다.
왜냐하면, 물(水)이 풍요할 때에, 유향초-산(流响哨-山: 835m-500m)의 갑문을 활용하면은 주변의 경지(耕地)가
침수(浸水)되서서 경작할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유향초-산(流响哨-山)의 갑문들은 산(山)의 굴(窟)인 ‘갑문-격납고’에 들어가서 휴지(休止)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하협하(下夾河)만 역류(逆流)시켜서 정령회하(井嶺回河)의 영어의 유(U)자 모양으로 받침 역할을
하는 것을 넘게 되고, 이 하협하(下夾河) 1차 갑문이 닫혔다가 열릴 때의 폭류(瀑流)를 피하기 위해서 선박들이 청하
(淸河)를 막아서 형성된 영수보(英守堡)에서 경첩-갑문을 터트리는 힘으로 문자 그대로 진자(振子)처럼 청하(淸河)
는 쏜살같이 내려와서 하협하(下夾河)에 합류해서 첨가해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서 가장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것은 하협하(下夾河)의 중간에 <전사부(田師付)-호(湖)>가 있고, 이곳이
환룡(丸龍) - 다시 말하면 허달성(虛達城)-금성(金城)이 32면체 부구(浮具)로 둘러쌓인 것이 매영(梅營)의 군선
(軍船)과 함께 군사훈련을 하는 성호(聖湖)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 정령회하(井嶺回河)가 고조선의 부루(扶婁)-태자께서 먼 미래(未來)에 ‘중국 천자(天子)로 부터 조공
(朝貢)-투자(投資)를 받기 위해서 박작호(泊汋湖)를 개발하면서, 이를 지키는 정령회하(井嶺回河)를 설계하였음을
웅변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박작호(泊汋湖)에 사용되는 허달성(虛達城)-금성(金城)이 이곳 갈 때에는 <전사부(田師付)-호(湖)>에서 박작
(泊汋)산성(山城) - 오늘날 오녀산성(五女山城)의 원명(原名) - 남(南)쪽에 있는 박작호(泊汋湖)로 갈 때에는 당연히
유향초-산(流响哨-山)의 갑문들의 수량을 풍부하게 해서 환룡(丸龍)들이 기세(氣勢)좋게 데굴 데굴 구를 수가 있는
수로(水路)-레일(rail)을 깔아주었음은 당연할 것입니다.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에는 오늘날 중국이 환인(桓仁)-수고(水庫) 혹은 환룡호(桓龍湖)라고 칭하는 우리의
박작호(泊汋湖)를 ‘왜소(矮小)한 규모’로 재구성하기 전에 만들어진 지도입니다.
그러나, 박작호(泊汋湖) 북안(北岸)에 ‘5여신(女神)을 모신 오녀산(五女山)’은 표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아이러니칼(ironical)한 사실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환인(桓仁)-수고(水庫)를 환룡호(桓龍湖)라고 칭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 환룡호(桓龍湖)의 풍경(風景)
http://big5.elong.com/gate/big5/trip.elong.com/u/blog_96635.html
원래 이 지역은 회인(懷仁)이라는 지명(地名)을 지니고 있었는데, 일제(日帝)강점(强占)때에 <환인(桓因)>의 명칭을
폄하(貶下)하기 위해서 명칭이 바꾸어졌는데, 그 후에, 이 환(桓)자와 룡(龍)을 합치어서 환룡호(桓龍湖)로 부르게
되었지만, 우리는 이처럼 원래의 박작호(泊汋湖)가 환룡호(桓龍湖)로 바꾸게 된 계기(契機)를 눈치챌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박작호(泊汋湖)의 별칭(別稱)이 바로 환룡호(丸龍湖)였던 것입니다!
환룡호(丸龍湖)와 환룡호(桓龍湖)는 음가가 같기 때문에, 슬그머니 대체(代替)가 된 것이지요.
이런 사실은 정령회하(井嶺回河)에서 환룡구-산(丸龍口-山)을 호수(湖水)한 가운데 지니는 <전사부(田師付)
-호(湖)>의 비중(比重)이 얼마나 무겁는가를 여실이 알게 하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 오녀산(五女山: 806m)의 위치: 경도(經度)표시: YF0~YF1, 위도(緯度)표시선 8 바로 밑
(*) 오녀산(五女山: 806m)를 통해서 그 밑의 박작호(泊汋湖)-즉 환룡호(丸龍湖)에서 ← 대이하(大二河)(Ta-eah-Ho)
← 홍석납자산(紅石拉子山)서(耳亇)←태자하(太子河)←태자성(太子城)←하협하(下夾河)←<전사부(田師付)-호(湖)>
로 환룡(丸龍)이 흘러온 곳으로 추적할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양계만리도(4)] 관십자하(觀卌字河)-고하(古河)-혼강(渾江)
- 각설(却說)
이제 “하협하(下夾河)가 그 원류(源流)가 발생하는 곳에서 어떠한 서(耳亇)를 넘어가는가?”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이는 <전사부(田師付)-호(湖)>를 받쳐주는 자반(雌盤)갑문이 해발 410m의 수위(水位)를 유지해 줄 수 있는 높이인
해발 420m이기 때문에, 이 서(耳亇)의 높이는 해발 500m인 것을 의미하고, 또 이를 넘을수 있는 웅반(雄盤)갑문은
이를 넘을 수 있는 해발 510m까지 그 수위를 올릴 수 있도록 갑문의 높이가 520m가 되어야함을 의미합니다.
[1] 이처럼 해발 520m가 되도록 웅반(雄盤)과 자반(雌盤)을 설치하는 곳은 하협하(下夾河)가 북두칠성 국자(--凵)
처럼 돌아나가는 곳에 쳐주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는 북류(北流)(↑)하는 하협하(下夾河)의 왼편에 보면, 구재정자-산(九財頂子-山:1231m)의 동북록(東北麓)을 보면
영어의 씨(C)처럼 두 팔을 내밀고 있는데, 이 씨(C)처럼 생긴 곳의 팔의 거리는 3Km정도됩니다.
하협하(下夾河)의 맞은 편은 태구산(台泃山: 700m)가 있는데, 웅반(雄盤)과 자반(雌盤)을 이 씨(C)모양의 구재정자
-산(九財頂子-山:1231m)의 팔과 그 맞은 편의 태구산(台泃山: 700m)을 연결하면 될 것입니다.
이 때, 갑문과 제방의 높이는 <감아암산(凵丫岩山)및 구아암산(臼丫岩山) 서(耳亇)>를 넘는 수위(水位)를 받쳐줘야
하기 때문에, 해발 520m로 하면 적절할 것입니다.
이곳 역시 <웅반(雄盤)-갑문>과 <자반(雌盤)-갑문> 사이에 경첩-갑문을 설치해서 적선(敵船)이 갑문을 타고 공격
하는 것을 응징할 수 있는 조치가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서(耳亇)를 넘어온 하협하(下夾河)는 경도(經度)표시 6(1)바로 우측(右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3] 그런데, 지도(地圖)하단(下端)에서
①경도(經度)표시 6(0) 바로 왼쪽에서 왕극납자산(王克磖子山동:866m)남록(南麓)에서 500m 고도(高度)에서 서남류
(↘)하는 강이 팔도하(八道河)의 지류(支流)-원류(源流)인 동방철지구(同邦鐵地溝)인 것이 문제가 됩니다.
(빠지는 곳을 관전(寬甸)으로 적혀있음)
(*)참고: 팔도하(八道河)의 원류(源流)인 동방철지구(同邦鐵地溝)가 빠지는 곳이 관전(寬甸)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관전(寬甸)은 관전호(寬甸湖)를 형성하는 남안(南岸)에서 포석하(蒲石河)와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청구(靑邱)
-조선(朝鮮)>의 경기(京畿)로써 그 중요성이 큽니다. (*)
왜냐하면
② 6(1)에 서남류(西南流)(↙)하는 것이 바로 팔도하(八道河) 원류(源流)인데,(빠지는 곳이 관전(寬甸)으로 적혀있음)
이 두 하천(河川)이 <밑의 지도>에서 통합이 되는데, 문제는 서(耳亇)를 넘어온 수위(水位)의 높이가 해발(海拔) 510m
이기 때문에 자연히 왕극납자산(王克磖子山동:866m)남록(南麓)을 통해 역류(逆流)해서 서류(西流)하게 되기 때문입
니다. 그런데, 역류(逆流)한 물을 받는 팔도하(八道河) 왼편의 하천(河川)은 경도(經度)표시 5(9)[=WF9] 바로 좌측에서
남류(南流)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하천이 초하(草河)의 원류(源流)임을 초하장(草河長)이란 마을 이름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왕극납자산(王克磖子山동:866m)은 묘(妙)하게도 남류(南流)하는 후천(後川)을 감(凵)자 모양으로 돌아서
<본계(本溪)-만족(滿族)-자치현(自治縣)>쪽으로 보내는 분수령(分水岺)이 되는 산입니다.
③ 이 후천(後川)은 이런(⊃)모양으로 돌아나가는 <전사부(田師付)-호(湖)>에서 ‘트인 곳’에 있는 대전자산(大甸子山
: 1061m)의 남록(南麓)에 있는 화피욕(化皮峪)계곡에서 서북류(西北流)(↖)하는 대전자구(大甸子溝)가 합류되는 본류
(本流)하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즉 대전자구(大甸子溝)와 후천(後川)이 중요한 까닭은 ‘조선여진분계도’에 정령회하(井嶺回河)가 흘러가도록하는
산세(山勢) 위에 산상보(山上堡)를 장성(長城)으로 그려져 있고, 또 이 보(堡)의 이름이 다른 지도에서 소길보
(小吉堡)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 소길보(小吉堡)에 쳐진 장성(長城)에 도대체 어디를 기준(基準)으로 해서 두르게
되는가?”가 가장 애매한 부분이 바로 태자하(太子河)와 관십자하(觀卌字河) ‘사이’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소길보(小吉堡)-장성(長城)>은 북류(北流)하는 후천(後川)의 좌안(左岸)에서 해발 500m의 능선(稜線)을 이어서
남행(南行)하되, 중간에 서류(西流)하는 지류(支流)는 아취(Arch)모양의 홍예문(虹霓門)을 세워서 뛰어넘고, 왕극
납자산(王克磖子山동:866m)에 와서는 이 산(山)이 동서(東西)로 되어있다가 서북류(西北流)(↖)하는 까닭으로, 서행
(西行)하다가 같이 서북류(西北流)하는 장성(長城)을 쌓아주되, 초하(草河)원류(源流)가 동남남(東南南)방향으로
흐르는 <초하장(草河長)> 이란 곳에서 왕극납자산(王克磖子山:866m)의 고도(高度)가 해발500m되는 곳에서 이 산을
잘라서 갑문을 세워주면서 초하(草河)를 뛰어넘어서 그 서(西)쪽에 있는 ‘또하나의’ 대전자산(大甸子山: 1055m)
동남남(東南南)하는 서록(西麓)의 500m 능선(稜線)을 따라서 장성(長城)을 쳐주는 것입니다.
(*)참고: 대전자구(大甸子溝)는 [경도(經度)표시선: XF0와 위도(緯度)표시선: 6의 교점(交點) 남(南)쪽에 있으며,
‘또하나의’ 대전자산(大甸子山: 1055m) 동남남(東南南)하는 서록(西麓)의 500m 능선(稜線)은 아래 지도 좌하단
(左下端)(↙)에 있음
좌측(左側)지도에 보면, ‘또하나의’ 대전자산(大甸子山: 1055m)이 지도(地圖) 우하단(右下端)(↘)끝에 있음이 다음과
같이 나타남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8.jpg (*)
중요한 것은 한자(漢字)의 <전(甸)>이 경기(京畿)의 뜻인데, <환룡구-산(丸龍口-山)>을 내장(內藏)한 <전사부(田師付)
-호(湖)>외곽(外廓)과 정령회하(井嶺回河)의 외곽을 형성하는 곳에는 산의 명칭이 항시 대전자산(大甸子山)으로 불리
워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만큼 <환룡구-산(丸龍口-山)>을 내장(內藏)한 <전사부(田師付)-호(湖)>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소길보(小吉堡)-장성(長城)은 결국 <왕극납자산(王克磖子山) -서(耳亇)>를 통해서 초하(草河)와 이어지는
관계로 ‘또다른 대전자산(大甸子山: 1055m)의 500m 되는 서록(西麓)의 고도(高度)를 따라서 초하(草河)를 어디에서
절취(截取: cut off)하는가?” 하는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따라서 그 <밑의 지도>에서 이 “초하(草河)의 원류가 관십자하(觀卌字河)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4] 지도(地圖) 하단(下端)에서
③ 6(1)~6(2)에서 와이(Y)자처럼 내려가는 것이 애하(靉河)의 원류(源流)이고
④ 6(3) 경도선(經度線 )을 넘어서 ‘소문자 와이(y)’처럼 넘어가는 지유구(池楡泃)는 애하(靉河)의 지류(支流)-원류
(源流)이고
⑤ 6(4) 바로 우측에서 영어의 와이(Y)자처럼 천교구(天喬泃)와 불야구(佛爺泃)를 모아서 남류(南流)하다가 정욕
(井峪)에서 서류(西流)해서 6(4)경도선經度線)을 넘어가는 것이 바로 포석하(蒲石河)의 원류인 우모생하(牛毛生河)
입니다.
⑥ 6(5)우측에서 남류하는 것은 쓰여진 대로 북고하(北古河)원류(源流)입니다.
따라서 관십자하(觀卌字河)의 모든 원류(源流)가 <감아암산(凵丫岩山)및 구아암산(臼丫岩山) 서(耳亇)>와 같은 위도
(緯度)-선상(線上)에서 남류(南流)하고 있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대전자구(大甸子溝)는 [경도(經度)표시선: XF0와 위도(緯度)표시선: 6의 교점(交點) 남(南)쪽에 있으며,
‘또 하나의’ 대전자산(大甸子山: 1055m) 동남남(東南南)하는 서록(西麓)의 500m 능선(稜線)은 아래 지도 좌하단
(左下端)(↙)에 있음 (*)
(*) 위 [1],[2],[3],[4]를 볼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이제 ‘밑-지도’로 내려와서 일차적으로 검토해야할 것이 “팔도하(八道河)의 원류(源流)중에 하나인 동남류(東南流)
하는(↘) 동방철지구(同邦鐵地溝)와 서(耳亇)를 넘어온 하협하(下夾河)가 함께하는 팔도하(八道河) 원류(源流)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1] 동방철지구(同邦鐵地溝)와 팔도하(八道河) 원류(源流)는 납작하게 눌러진 와이(Y)자처럼 새마집(塞馬集)에서
합류하게 됩니다.
그런데, 동방철지구(同邦鐵地溝)의 뜻은 ‘같은 <큰 나라(=방(邦)>의 굳은(=철(鐵)) 땅(=지(地))의 붓도랑(=구(溝))’
이란 묘한 의미를 지닙니다.
하천(河川)이름치고는 매우 이상한 이름인데, 이는 초하(草河)지역이 ‘여진(女眞)임내(任內)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즉 조선(朝鮮)은 시작할 때부터 여진(女眞)과 <공동-국가>로 운영 되었기 때문에, 정령회하(井嶺回河)를 관리함에
있어서 여진(女眞)과 접맥이 되는 곳의 하천(河川)이름이 이처럼 동방철지구(同邦鐵地溝)로 붙여질 수가 있는 것입
니다.
문제는 동방철지구(同邦鐵地溝)물이 수위(水位) 해발 510m로 올라가서 초하(草河) 상류 쪽에 들어간 물이 경도(經度)
표시 5(9)에서 남류(南流)해서 서남류(↙)하는데, 경도(經度)표시 6(0).5에 있는 새마집(塞馬集)에서 합류한 두 팔도하
(八道河)의 원류(源流)와 초하(草河)는 동서(東西)로 15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새마집(塞馬集) 바로 밑에는 초하
(草河)와 연결되게 하는 서(耳亇)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서(耳亇)는 이미 말씀 드린 대로 15Km정도로 동서(東西)로 길게난 협곡(峽谷)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해발 300m의 고도(高度)로 된 것이 약 1Km정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곳의 이름이 삼도령자(三道岺子)이기 때문에, -이는 ‘세 길(=수로(水路))로 갈수 있는 재(=령(岺))’이란 뜻입니다.
- 이를 <삼도령자(三道岺子)-서(耳亇)>라고 이름할 수 있습니다.
[<삼도령자(三道岺子)-서(耳亇)>가 있는 곳: 지도(地圖)상단(上端) 경도(經度)표시: 5(9)~6(0) 사이임]
[2] 넘어온 물이 해발(海拔) 510m이기 때문에, 일단 초하(草河)가 남류(南流)하다가 서남류(西南流)하는 곳에 갑문
(閘門)의 높이를 520m로써 막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 갑문(閘門)의 역할을 초하(草河)쪽으로 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이 서남류(西南流)(↙)하는 초하(草河)상류의 북안(北岸) 마을 이름이 “오래된 금(金) 제련(製鍊)의 공장(工場)”이란
의미를 지닌 ‘노금창(老金廠)’입니다.
‘노금창(老金廠)’ 뒤에는 741m의 산이 있고, 초하(草河) 맞은 편은 500m-600m의 산(山)이 있기 때문에, 이를 연결
시키는 3Km거리를 두고 웅반(雄盤)과 자반(雌盤)갑문을 쳐주면 될 것입니다.
(*) 위 [1], [2]를 확인할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관십자하(觀卌字河)가 종(縱)으로 흐르는 4강 - 즉 ①초하(草河),②팔도하(八道河)
③애하(靉河), ④포석하(蒲石河)를 횡(橫)으로 뀀을 의미합니다.
물론 다 꿴 이후에 이 관십지하는 원래부터 북고하(北古河)-남고하(南古河)가 이런(↘↗)식으로 횡(橫)으로 흐르는
강과 이어지게 되어서 박작호(泊汋湖) 밑에 혼강(渾江)이 꼭지(<)모양 튀어나온 곳에 이어져서 박작호(泊汋湖)를
가운데 둔 해자(垓字)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지도’를 보면, 초하(草河) 원류(源流)가 남류(南流)(↓)하는곳 바루 우측(右側)에서
감(凵)자 모양으로 돌아서 <본계(本溪)-만족(滿族)-자치현(自治縣)>쪽으로 북류(北流)하는 하천(河川)이 있는데,
이 하천의 이름이 바로 “뒷쪽으로 흐른다.”는 의미로 <후천(後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후천(後川)>은 동방철지구(同邦鐵地溝)가 그 수원(水源)을 왕극납자산(王克磖子山:866m)의 남록(南麓)에서
취하는데, 바로 이 왕극납자산(王克磖子山)때문에 남(南)쪽이 가로막혀서 북류(北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하(草河)가 <삼도령자(三道岺子)-서(耳亇)>를 통해서 관십자하(觀卌字河)가 연결하는 왼쪽의 첫째
하천(河川)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 후천(後川) 좌측(左側)이 관십자하(觀卌字河)가 횡(橫)으로 꿰는 ‘첫번째 하천(河川)’이 됨을 느낄 수 있는 ‘솟대
님의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초하(草河) 원류(源流)는 비록 ‘노금창(老金廠)’갑문에 의해서 원래(原來)의 흐름에서 절취(截取: cut-off)되어서
<삼도령자(三道岺子)-서(耳亇)>를 타고 동류(東流)(→)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령회하(井嶺回河)의 수량(水量)
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팔도하(八道河)가 어디에서 겹-갑문에 의해서 절취(截取)되고, 또 이 물(水)이 어떤 서(耳亇)를 통해서
동(東)쪽의 애하(靉河)까지 연결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지도를 보면,
[1] 새마집(塞馬集)에서 납작한 와이(Y)처럼 만난 팔도하(八道河)의 원류(源流)는 서(西)쪽에서 온 <삼도령자(三道
岺子)-서(耳亇)>타고 온 초하(草河)를 수용해서 양마림자(羊馬林子)란 마을을 지나서 서남류(西南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양마림자(羊馬林子) 서(西)쪽에 삼도령자-산(三道岺子-山)이 있는데, 이 산(山)을 500m 등고선(等高線)
으로 보면 서남록(西南麓)이 동남(東南)(↘)쪽을 향한 씨(C)자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씨(C)의 양끝 거리는 약 2.5Km됩니다,
그 남(南)쪽에는 쌍령자-산(雙岺子-山: 741m-500m)이 가운데에 노두가(老頭家)란 마을을 두고, 서북(↖)방향으로
출구(出口)를 낸 이런(⊃)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모양의 양끝 거리는 5Km 정도가 됩니다.
따라서 불(乀)자 모양으로 된 2개의 <아구>끝을 연결시키는 갑문을 쳐주면, 남(南)쪽이 웅반(雄盤)이 되고 북(北)쪽이
자반(雌盤)이 될 것입니다.
[2] 불(乀)자 방향으로 자반(雌盤)갑문이 쳐지면 절취(截取)된 (초하(草河)+팔도하(八道河))의 물은 물론 하협하
(下夾河)의 물이 니은(ㄴ)자 모양으로 방향을 꺽어서 동류(東流)하게 됩니다.
이렇게 니은(ㄴ)자 처럼 동류(東流)할수 있는 까닭은 동서(東西)로 무려 17Km나 되는 협곡(峽谷)이 길게 나있기 때문
인데, 이 협곡을 남(南)쪽에서 받쳐주는 산 이름이 남묘장산자(南廟長山子)이므로, 이 서(耳亇)를 <남묘장산자(南廟
長山子)-서(耳亇)>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남묘장산자(南廟長山子)-서(耳亇)>에서 ‘넘어야할 <턱>’은 (Hsip-k'ai-ling) -이를 십개령(十价岺)으로 추측합
니다. -등고선(等高線)의 높이로 볼 때에, 해발 400m이고 길이가 0.5Km 밖에 안 됩니다.
따라서 정령회하(井嶺回河)는 이를 쉽게 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남묘장산자(南廟長山子)-서(耳亇)>의 ‘턱’인 십개령(十价岺)은 지도(地圖) 최상단에서 경도(經度)표시:
6(1)~6(2)사이에 요녕성(遼寧省)과 안동성(安東省)의 경계표시선이 지나가는 곳입니다. (*)
(*) 위 [1], [2]를 살필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이제 관십자하(觀卌字河)가 갑문(閘門)을 통해서 ①초하(草河)와 ②팔도하(八道河)를 절취(截取: cut-off)해서
<남묘장산자(南廟長山子)-서(耳亇)>를 통해서 동류(東流)(→)해 왔기 때문에,
③의 애하(靉河)를 절취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순서가 됩니다.
그런데,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를 보면,
[1] <남묘장산자(南廟長山子)-서(耳亇)>를 통해서 동류(東流)(→)한 [①초하(草河)+②팔도하(八道河)+하협하
(下夾河)]의 물은 서(耳亇)의 끝은 경도(經度)표시선 6(2) 선상(線上)에 있는 (Han-chia-p'u-tzu)까지 - 이를
<한가보자(韓家堡子)>로 추측합니다.- 입니다.
왜냐하면, 이 <한가보자(韓家堡子)>를 지나서는 애하(靉河)의 지류(支流)들이 워낙 많이 합류되기 때문입니다.
[2] 합류(合流)되는 애하(靉河)의 지류(支流)를 살펴보자면,
① 경도(經度)표시 6(1)~6(2)사이에서 ‘윗 지도’로 부터 와이(Y)자 모양의 애하(靉河)원류(源流)가 동남류(↘)해 나오
는데, 이는 서남류(↙)하는 용도구(龍道溝)와 다시 만나서 와이(Y)자 모양으로 합수(合水)되어 6(2) 경도(經度)표시
선을 바로 우측으로 남류(↓)해 장가보자(張家堡子)를 지나서 <한가보자(韓家堡子)>를 거치면서 <남묘장산자(南廟
長山子)-서(耳亇)>를 통해 동류(東流)한 [①초하(草河)+②팔도하(八道河)+하협하(下夾河)]의 물(水)을 안고 약 3Km
정도 남류(南流)하게 됩니다.
② 이 3Km되는 지점에서 서남(西南)쪽에서 길게 동북류(東北流)(↗)하면서 오는 대황구(大黃溝)와 합류해서 또다시
동류(東流)(→)를 약 4.5Km 하게 되는데, 동북(東北)쪽에서 영어의 소문자 와이(y)처럼 내려오는 소변구(小邊溝)와
합류해서 마지막으로 이런(U+∩)태극(太極)문양으로 돌면서 동류(東流)됩니다.
③ 이곳에서는 꼭 <장구(=장고(長鼓))>모양 - 즉 이런 ( >--< )모양으로 강들이 합치게 되는데, 서남류(西南流)(↙)
하는 것이 바로 애하(靉河)인 것입니다.
또 이곳에서 동남류(東南流)(↘)하는 곳이 바로 포석하(蒲石河)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곳을 “장구(長鼓)처럼 물이 갈라지는(=차수(岔水)) 지역”이란 의미로 <장구(長鼓)차수(岔水)지대
(地帶)>라고 이름 붙일 수가 있습니다.
[3] 이 <장구(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에서 애하(靉河)쪽으로 흐르는 물을 절취(截取: cut-off)하는 갑문을 치려면,
이 서남류(西南流)(↙)하는 애하(靉河)의 <애하(靉河)>라는 글자를 쓴 곳의 서북(西北)쪽에 보면 왼쪽으로 기울린
경(冂)자 같은 ‘Wu-tao-ling(642m-500m-400m)’가 있고, - 이를 우도령(牛道岺)으로 추측합니다. - 애하(愛河) 맞은 편
에는 가운데에 시옷(ㅅ)자 모양을 하천(河川)을 서북류(西北流)(↖)시키기 위해서 왼쪽으로 기울린 (↖) 와묘자-산
(瓦廟子-山:644m-500m-400m)로 있는데, 이 우도령(牛道岺)(冂)과 와묘자-산(瓦廟子-山)(凵)의 팔의 거리는 대략 4Km
정도가 됩니다.
따라서 이곳이 애하(愛河)를 절취시키는 웅반(雄盤)갑문과 자반(雌盤)갑문을 쳐주되, 갑문(閘門)의 높이는 520m로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모자라는 산세(山勢)는 산상보(山上堡)를 세워서 520m의 높이를 보장해야합니다.)
(*) <장구(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는 [경도(經度)표시: 6(3)~6(4), 위도(緯度)표시: 2~1]로써 차구(岔溝)가 서류
(西流)(←)해 들어가는 곳입니다. (*)
(*) 위 [1], [2],[3]를 살필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이제 애하(靉河)까지 갑문(閘門)을 설치해서 절취(截取: cut-off)한 물이 정령회하(井嶺回河)에 합류해서
이런 ( >--< )모양의 <장구(-장고(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를 지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2가지의 흐름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첫째의 흐름이 <장구(-장고(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를 지나서 “동남류(東南流)하는 포석하(蒲石河)에 어찌
갑문을 설치해야 한반도(韓半島)에서 왕강(王江)수구(水口)를 통해서 포석하(蒲石河)로 올라온 선박이 정령(井嶺)을
넘어갈 수 있는 갑문을 세우는가?”하는 것이 해결해야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포석하(蒲石河)의 흐름을 어찌 절취(截取: cut-off)하는 갑문을 웅반(雄盤)과 자반(雌盤)을 설치해야 선박
이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한가?”하는 것과 동일한 질문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관십자하(觀卌字河)가 이 포석하(蒲石河)까지 절취(截取: cut-off)해서 ①초하(草河)+②팔도하(八道河)+
③애하(靉河)+④포석하(蒲石河)에다 이미 확보한 하협하(下夾河)의 물을 이런 ( >--< )의 <장구(-장고(長鼓)-차수
(岔水)-지대(地帶)>의 동북(東北)(↗)쪽의 수로(水路)에서 과연 북고하(北古河)를 통해서 혼강(渾江)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서(耳亇)는 있겠는가?”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 두 지 질문 가운데 우선 먼저 관십자하(觀卌字河)가 북고하(北古河)(↘)와 남고하(南古河)(↗)와 연결되어서 정령
(井嶺: 1325m)가 인터체인지(Interchange)를 지닌 해자(垓字)로써 박작호(泊汋湖) 아래의 혼강(渾江)이 꼭지(<)를
내민 곳에 연결됨으로써 완성되는 것부터 살피기로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정령회하(井嶺回河)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에서
[1] [장구(長鼓)-차수(岔水)-지역(地域)]에서 포석하(蒲石河)의 원류(源流)인 우모생하(牛毛生河)(↙)가 내려오는
곳에, 반납영자구(半拉嶺子溝)가 서류(西流)(←)하는 곳이 있습니다.
반납영자구(半拉嶺子溝)의 뜻이 “반(半)은 데려온 것과 같은(=납(拉)) 연산(連山)(=령(嶺))에서 흐르는 봇도랑”이란
뜻이어서 시사(示唆)해주는 바가 큽니다.
이는 “시작(始作)이 반(半)이다.”라는 우리 말 속담(俗談)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정령(井嶺) 인터체인지(Interchange) 해자(垓字)를 틀기 위해서는 이런(>-<)모양의 ‘장구(長鼓)-차수(岔水)
-지대(地帶)’에서 선박을 타고 동북(東北)(↗)쪽으로 가야하는데, 이 때, 처음 넘는 서(耳亇)가 바로 ‘반납영자구(半拉
嶺子溝)’이기 때문입니다.
관십자하(觀卌字河)는 결국 이런(↘↗)식으로 흐르는 북고하(北古河)-남고하(南古河) 즉 고하(古河)로 해서 혼강
(渾江)이 꺽쇠(<)모양 흐르게 되는 ‘꼭지’에 접속이 되는데, 이 ‘꼭지’에서 남고하(南古河)쪽으로 접근할 때에,
북류(北流)하는 강이 반납강(半拉江)이 있습니다.
이 반납강(半拉江)의 수원(水源)을 바탕으로 갑문을 쳐서, 수위(水位)를 올려서 ‘정령(井嶺) 인터체인지(Interchange)
해자(垓字)’으로 선박이 올라가는 첫 계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납강(半拉江)의 뜻은 “반(半)은 데려오는 강(江)”입니다.
이런 명칭은 반납영자구(半拉嶺子溝)와 ‘짝’이 되는 명칭인 것이지요.
둘다 모두 ‘정령(井嶺) 인터체인지(Interchange) 해자(垓字)’로 순항(巡航)을 시작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조선조(朝鮮朝)때 정령산맥을 넘어가는 포석하(蒲石河)의 흐름과 ‘정령(井嶺)인터체인지
(Interchange)해자(垓字)’를 구분해서 불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반납영자구(半拉嶺子溝)-서(耳亇)가 “ ‘정령(井嶺)인터체인지(Interchange)해자(垓字)’의 시작이 되는 까닭은 이런
(>-<)모양의 ‘장구(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오른쪽 꺽쇠(<)에서 동남으로(↘) 가면
포석하(蒲石河)가 되고, 동북(↗)으로 가면, ‘정령(井嶺)인터체인지(Interchange)해자(垓字)’를 완성하는 수로(水路)
가 되기 때문에, ”시작(始作)이 반(半)이다.“라는 의미에서 반납영자구(半拉嶺子溝)란 명칭이 붙게 된 것입니다.
(*)참고: 이 반납영자구(半拉嶺子溝)는 지도(地圖) 상단(上端)의 경도(經度)표시선 6(4)에 이르기까지 6Km에 이르는
동서(東西)로 난 서(耳亇)를 통해서 흐릅니다. (*)
그런데, 이 서류(西流)하는 반납영자구(半拉嶺子溝) 남쪽에서 향수구(响水溝)가 동류(東流)하면서 이윽고 북고하
(北古河)에 이어지게 됩니다.
향수구(响水溝)의 향(响)은 “울린다(=명(鳴)”, “진동(震動)하다.”는 뜻입니다.
이 향수구(响水溝)는 동북류(東北流)하다가 동류(東流)하는 (↗→) 흐름을 처음 갖는데, 꺽어지는 곳에서 반납영자구
(半拉嶺子溝)와의 불(乀)모양의 거리가 2Km밖에 안되고, ‘턱’ 높이는 해발 500m입니다.
향수구(响水溝)에서 “울린다.”는 의미의 향(响)을 붙이게 된 까닭은 수위(水位)를 점차 올린 물(水)이 해발 500m의
‘턱’을 2Km나 동남류(東南流)해서 처음에 폭포(瀑布)처럼 떨어질 때의 ‘소리’가 나게 하는 하천(河川)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2] 이런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고 나면, 이런 ( >--< ) 모양으로 된 [장구(長鼓)-차수(岔水)-지역(地域)]의 특성상,
방향을 우모생하(牛毛生河)쪽으로 방향을 동북(↗)쪽으로 틀게 하는 <웅반(雄盤)-갑문>을 쳐줄 곳은 포석하(蒲石河)
(↘)쪽으로 수류(水流)가 내려가는 곳임이 자명(自明)해집니다.
웅반(雄盤)은 갑문을 닫았을 때에 수위(水位)가 올라가게(↑)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갑문을 칭하는 것이며, 자반(雌盤)
은 수위(水位)가 올라갔을 때에 서(耳亇)를 통해서 원래의 흐름과 다르게 하천(河川)이 흐르거나 서로 등(背)진 하천
(← →)이 하나로 이어지게 흐르게 하는 역할을 담당할 때 쓰는 ‘우리 민족 고유의 운하학(運河學)의 전문 용어’입니다.
(*)참고: 이런 용어가 있음을 기록으로 남긴 분은 바로 ‘대동여지도’를 만드신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선생
이십니다. 고산자(古山子)선생은 ‘대동여지도’에서 오늘날 압록강과 두만강을 한계로 한 지도를 만드셨는데, 운하학
(運河學) 전문용어를 아는 사람이 보면, 조선(朝鮮)의 영토(領土)가 오늘날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지 않음
을 노골적(露骨的)으로 드러나게 그린 특이한 화법(畵法)을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무튼, 이런 ( >--< ) 모양의 <장구(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에서 하단(下端) 중앙 (丿--乀)을 보면, 간구자
(干溝子)마을이 표시된 (ㅇ)곳 바로 위에 남북(南北)으로 500m되면서 길게 뻗은 산맥에 ‘Ho-t'ou-ch'uan’이라고 적혀
있는 곳이 있습니다.
이를 “하천(河川)을 이끄는 ‘에너지(energy)를 끌어올리는 곳(=춘(春))’이란 의미의 <하도춘(河導春)>의 중국음가가
영어로 표기된 것으로 봅니다.
이 하도춘(河導春)(Ho-t'ou-ch'uan) 오른편에는 포석하(蒲石河)의 동안(東岸)에 ‘Erh-tao-ho-tzu’라느 마을이 있는데,
이는 이도하자(二道河子)를 영어로 옮겨놓은 것으로 봅니다.
이도하자(二道河子)의 뜻은 “두번 째 강(江)이 있는 곳” 혹은 “두 갈래로 하천(河川)을 나누는 곳”이란 의미입니다.
이 <이도하자(二道河子)>란 마을 ‘뒷편’을-동편(東便)입니다.-보면, 이도하자(二道河子)쪽으로 산맥-팔을 내밀고
있는 산(山)이 있는데, 이름이 적혀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산을 이도하자산(二道河子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의미는 “두 갈래로 흐르는 하천(河川)의 산(山)”
입니다.
이는 이런(>-<)모양의 ‘장구(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에서 수로(水路)가 (1) (↘__↗) 혹은 (↖__↙)로 흘러
정령(井嶺)인터체인지(Interchange)해자(垓字)- 즉 정령회하(井嶺回河)가 북고하(北古河)-남고하(南古河)와 연결도어
회하(回河)로써 완성시키는 길과 (2) 이와는 다르게 이런(↘--↘)혹은 (↖--↖)로 흘러 포석하(蒲石河)와 정령산맥
서록(西麓)을 타고 흐르는 어떤 수로(水路)를 구분해주었음을 뜻합니다.
이 수로(水路)의 이름이 위원하(威遠河)입니다.
어찌해서 위원하(威遠河)인가?
‘양계만리도’를 보면, ‘향백산대맥(向白山大脉)’이 오늘날 요녕성과 길림성 경계의 분수령(分水岺)이 되는 부분
- 다시말해서 정령(井嶺)산맥의 서북(西北) 끝에 보면, 동요하(東遼河)와 이통하(伊通河)가 이런(∩ ∩)모양으로 갈라
지는 것을 하나로 한 ‘거대한 보(堡)’가 <개원(開元)>의 북(北)쪽에 있고 개원(開元)은 그 남(南)쪽의 ‘갑문(閘門)’ 밑
에 있음을 의미하는 <위원보(威遠堡)문(門)>아래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원보(威遠堡)는 서(西)쪽에도 갑문 문(門)이 있고, 또 다른 지도에는 이 서문(西門)쪽에 개원(開元)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조(朝鮮朝)의 <개원(開元)>은 ①서(西)-개원(開元)과 ②남(南)-개원(開元) 둘이 있었음이
나중에 상세하게 검토하민 입증이 됩니다.
그런데, 이 <서(西)-개원(開元)>으로 부터 위원보(威遠堡)의 물(水)이 수로(水路)를 통해서 정령(井嶺)산맥의 불(乀)
자로 난 서록(西麓)으로 흐르게 해서 결국 정령회하(井嶺回河)에 이어지고, <장구(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
(>--<)에 와서 동남류(東南流)하면서 관전호(寬甸湖)를 형성하고, 이윽고 포석하(蒲石河)와 이어지는 것을 통털어서
말하자면 이 수명(水名)을 위원하(威遠河)라고 함이 당연하다 할것입니다.
(*) ‘양계만리도’에서 <개원(開元)>의 북(北)쪽의 <위원보(威遠堡)문(門)>을 볼수 있는 곳.
(*) 1/3 축소본이 확인하기 효과적임 (*)
http://blog.daum.net/sabul358/13171237
즉 이도하자산(二道河子山)이란 지명 자체가 이곳에서 정령회하(井嶺回河)와 위원하(威遠河)자 분리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도하자산(二道河子山)은 묘(妙)하게도 한글의 어(ㅓ)자 모양으로 해발 500m로 산맥-팔을 뻗치고 있지만,
올라가는 것은 에스(S)자형으로 길게 구불거리면서 길게 내뻗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산(山)이 꼭 [장구(長鼓)-차수(岔水)-지역(地域)]을 지나서 하천(河川)의 흐름을 ①포석하(蒲石河)-위원하
(威遠河)로 흐르는 하천과 ②관십자하(觀卌字河)-북고하(北古河)-남고하(南古河)로 정령(井嶺) 해자(垓字)로 흐르는
정령회하(井嶺回河)와 포석하(蒲石河)쪽으로 흐르는 위원하(威遠河)를 나누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도하자산(二道
河子山)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아무튼 웅반(雄盤)-갑문을 쳐줄 곳은
어(ㅓ)자 모양의 이도하자산(二道河子山) (Ear-tao-ho-tzu-shan)이 포석하(蒲石河)를 향해 팔을 뻗는 곳입니다.
(<干溝子>라고 ‘붉은 글씨’로 쓴 곳 바로 위)
[3] 자반(雌盤)갑문을 쳐줄 곳은 이도하자산(二道河子山)이 어(ㅓ)자의 곤(丨)자 부분을 반납영자구(半拉嶺子溝)가
서류(西流)(←)하면서 서남류(西南流)(↙)하는 우모생하(牛毛生河)와 만나는 입구에 해발 500m 고도(高度)로 내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모생하(牛毛生河)의 불(乀)자로 건너간 맞은 편에 역시 해발 500m의 고지(高地)의 산이 발견이 됩니다.
이 산은 별(丿)자 방향으로 2개의 연산(連山) 봉오리를 지니기 때문에 쌍산(雙山)으로 칭해지는데, 쌍산(雙山) 가운데
북산(北山)과 이어지는 자반(雌盤)-갑문을 설치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 갑문과 제방의 높이는 520m이고, 자연적인 산세(山勢)의 등고선이 500m이하인 곳에서는 산상보(山上堡)
를 설치하여서 물이 벗어나는 것을 방지하게 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 (1) 이도하자산(二道河子山) (Ear-tao-ho-tzu-shan)이 어(ㅓ)자처럼 팔을 내민 곳.
: 경도(經度)표시 6(3)~6(4) 위도(緯度)표시: 3~2
(2) 반납영자구(半拉嶺子溝)가 우모생하(牛毛生河)와 만나는 곳
: 지도 상단(上端), 경도(經度)표시선 6(4)
(*) 위 [1],[2],[3]을 추정할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향수구(响水溝)는 구불거리면서 동류(東流)하게 되는데, 직선거리로 6Km 정도되는 곳에서 남류(南流)하는 북고하
(北古河)의 원류(源流)가 흘러나오는 흥륭욕수(興隆峪水)를 만나게 됩니다. ‘흥륭욕수’는 흥륭욕(興隆峪)에서 흘러
나오는 물(水)이기 때문에, 이름붙인 것인데, 흥륭욕(興隆峪)의 뜻은 “골짜기(=욕(峪))를 흥(興)하게 하고, 풍성
(豊盛)하게 높힌다(=융(隆).”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군사지도(1950년도)를 참고로 해서 정령(井嶺)-해자(垓字)에 쳐진 갑문을 검토할 때에, 북고하(北古河)의
원류(源流)가 되는 흥륭욕수(興隆峪水)를 ‘빠트리고’ 독도(讀圖)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아래 지도에서 도로(道路)표시인 점선(點線)(----)과 수로(水路) 표시인 ‘파란선(___)’이 바싹 붙여서라도
그려야하는데, 이를 빠트려 그렸기 때문입니다.
윗 지도를 보면, 북고하(北古河)의 원류가 지도 하단(下端)의 경도(經度)표시선 6(5) 바로 우측에서 흥륭욕수(興隆
峪水)가 남류(南流)해나가고, 6(6) 우측에서는 홍석납자구(紅石磖子泃)가 남류해나가는 것이 뚜렷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또 ‘윗지도’ 에는 흥륭욕수(興隆峪水)가 북고하(北古河) 원류(源流)로 되어 있는데, ‘아랫 지도’에서는 홍석납자구
(紅石磖子泃)가 북고하(北古河) 원류(源流)로 되어 있습니다.
미군사지도(1950년대)는 매우 상세(詳細)하며 오류가 없는데, 지도(地圖)를 옮기는 과정에서 ‘약간의 착오(錯誤)’가
발생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 지도’를 보면, 흥륭욕수(興隆峪水)가 내려오는 곳(빠트림)을 받쳐주는 산(山)이 약 5Km정도 이런(乀___)
모양으로 500m 고도(高度)로 있는데, 이 산(山)의 밑에 ‘문중차(門中岔)’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이 ‘문중차(門中岔)’의 의미는 “갑문(閘門) 가운데(=중(中))의 분수령(分水岺)(=차(岔))”이란 의미입니다.
이는 이곳에서 갑문을 쳐주었음을 나타내는 ‘역시적 기억’이 있는 명칭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乀___)모양의 산(山)을 <문중차-산(門中岔-山)>이라고 이름할 수가 있습니다.
(*) <윗 지도>6(5) 바로 우측에서 흥륭욕수(興隆峪水), 6(6) 우측에서는 홍석납자구(紅石磖子泃)가 남류(南流)함을
볼 수 있는 지도(地圖) 하단(下端)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 <아래 지도>
① 6(5) 바로 우측에 흥륭욕수(興隆峪水)가 나오는 ‘강(江)표시’가 빠트려지고, 북고하(北古河)가 6(6) 우측의 홍석
납자구(紅石磖子泃) 쪽에 그려져 있음.
② <문중차-산(門中岔-山)>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따라서 이런 (乀___)모양 <문중차-산(門中岔-山)>이 향수구(响水溝)(→)와 흥륭욕수(興隆峪水)(↘)가 합수(合水)되는
곳 처음부터 있기 때문에 불(乀)자 모양으로 서북(西北)끝과 이 합수된 물의 건너편 산(山)인 홍석납자산(紅石磖子山:
800m-700m)를 연결하는 자반(自反)-갑문을 설치하고, <문중차-산(門中岔-山)>이 이런(___)모양으로 동행(東行)한
끝에 역시 맞은 편의 홍석납자산(紅石磖子山: 800m-700m)과 연결하는 자반(雌盤)-갑문을 갑문과 제방의 높이 520m
로써 쳐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 해발(海拔) 520m라는 것은 반납영자구(半拉嶺子溝)-서(耳亇)의 ‘턱’을 넘는 고도(高度)가 해발 500m이고, 선박이
통과하려면 10m를 더해주어야하고, 또 이런 해발 510m의 물(水)이 넘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갑문과 산상보(山上堡)
의 높이가 해발 520m가 되어야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점차 갑문의 높이가 줄어들어서 마치 물(水)을 계단 오르듯이 오르게 구성되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갑문을 세우는 곳이 수원(水源)이 합수(合水)되어 공급 되는 바로 밑이 되어야 계단오르듯이 수위(水位)
를 올리기 편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전래(傳來)의 운하학(運河學) 용어와 관련해서 정리해야 되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반(雌盤)이 수위(水位)를 올릴 때에, 서(耳亇)를 통해서 물줄기가 원래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하거나,
또 서로 등(背)진 강을(← →)하나로 이어지게 하거나, 호수(湖水)를 형성할 때에만 쓰고, 나머지는 웅반(雄盤)으로
칭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갑문이 고도(高度)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계속 중첩하며 세울 때에, ‘홀수’ 차(次) 갑문은 갑문(閘門)을
닫았을 때에, 수위(水位)를 올리는(↑) 역할을 하고, ‘짝수’ 차 갑문은 갑문을 닫았을 때에, ‘올린 수위(水位)’를 유지
하게 하는 특성이 저절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面)에서 보면 오늘날의 혼강(渾江) - 즉 조선조(朝鮮朝)의 파저강(波猪江)이 꺽쇠(<)모양으로 박작호(泊汋湖)
남(南)쪽에서 꺽어지는 곳으로 고하(古河)가 이런(↘↗)식으로 합류하는 곳에서 부터 1차(次), 2차(次) 하는 식으로
번호를 붙여나가야 하는데, 해발 110m 수위(水位)를 올리는 것을 1차(次)로 하고, 이를 유지시키는 것을 2차(次)로
하는 것으로 ‘번호 붙이기(=넘버링(numbering))’을 하면, 결국 510m 수위(水位)를 유지하게 하는 <문중차-산(門中岔-
山)>에 쳐진 자반(雌盤)-갑문(閘門)은 <10차(次) 갑문>이 되고, 이 <문중차-산(門中岔-山)>에 쳐진 웅반(雄盤)-갑문
(閘門)은 <9차(次)-갑문>이 된다는 것입니다.
(*)<문중차-산(門中岔-山: 500m)>는 지도(地圖)상단(上端) 경도표시선 6(5)~6(6) 사이에 있읍니다.
(*) <10차(次) 갑문>과 <9차(次)-갑문>이 설치되는 위치를 볼 수 있는 곳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이제부터는 수위(水位)가 내리막길이 되는 셈인데, 수위(水位)를 해발 410m로 올리는 7차(次)갑문과 이 410m의 수위
(水位)를 유지하게 하는 8차(次)갑문을 쳐주는 곳의 위치를 챂기로 합니다.
아래 지도에서 홍석납자구(紅石磖子泃)가 남류(南流)하는 곳(↓)에 보면, 이 흐름을 영어의 유(U)자처럼 유-턴(U-tern)
하게 강제하면서 동북(東北)(↗)쪽으로 (500m-400m)로 산줄기를 밀어올리는 산(山)이 있습니다.
이 산은 맞은 편의 소홍석납자산(小紅石拉子山: 701m-500m)이 남행(南行)하면서 북고하(北古河)가 유(U)자로 돌아
가도록 뻗은 것을 그 남(南)쪽에서 양책자령(樣冊子嶺: 981m)이 북류(北流)하는 북고하(北古河)를 돕도록 팔(手)을
뻗은 산(山)인 것입니다.
즉 양책자령(樣冊子嶺: 981m)이 동북(東北)쪽이 영어의 유(U)자처럼 된 곳에 소홍석납자산(小紅石拉子山) 지맥
(支脈)이 가운데로 곤(丨)자로 400m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북고하(北古河)가 유-턴(U-tern)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8차(次)-갑문은 양책자령(樣冊子嶺: 981m)의 유(U)자 처럼 팔(手)을 내면 왼쪽과 맞은 편의 소홍석납자산
(小紅石拉子山)을 연결시키고, 또 7차(次)-갑문은 유(U)자의 오른 쪽 팔(手)을 내민 곳과 맞은 편의 소홍석납자산
(小紅石拉子山: 701m-500m)을 연결하도록 갑문을 쳐주면 될 것입니다.
이 때의 갑문과 제방(堤防)의 높이는 420m인데, 7차, 8차 갑문을 설치한 곳 사이로 들어온 소홍석납자산(小紅石拉子山)
가 남행(南行)하면서 곤(丨)자로 팔(手)을 뻗은 400m 고도의 산에는 20m 높이의 산상보(山上堡)를 설치하였음 또한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결국 7차, 8차의 갑문은 양책자령(樣冊子嶺: 981m)이 영어의 유(U)자 처럼 팔(手)을 뻗은 곳에 설치되는 셈인데,
우리는 여기서 이 양책자령(樣冊子嶺)이란 산(山)이름을 유의(有意)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책(冊)을 보기 위해 두 팔(手)을 뻗은 모양(=양(樣))을 하는 산(山)”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조선조(朝鮮朝) 때까지 우리 민족이 ‘큰 갑문(閘門)’을 칭하는 용어가 이상하게도 목책(木柵)입니다.
이는 갑문을 조감도(鳥瞰圖)로 보았을 때에, “물(水)에 잘녹슬지 않는 청동(靑銅)외피(外皮)를 입힌 것을 마치 깍지
끼듯 이런(--ㅌ ⊃--)모양으로 끼게 합니다.
(*) 참고: 깍지끼는 갑문의 모습은 <--ㅌ> 안에 ,<⊃-->이 들어가며, <⊃-->은 밖에 이런(⊃)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관계로 <--ㅌ>이 다시 (⊃)의 안(內)쪽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따라서 접촉하는 가지(=지(枝))는 <--ㅌ>가 3개가 되며,
[(⊃--)+(⊃)]은 4개가 됩니다. 총 7개의 가지가 서로 깍지를 끼게 됩니다. (*)
그런데 이런 깍지 끼는 가지(=지(枝))의 최외곽(最外廓)은 접촉하는 <청동(靑桐)-면(面)>이 없기 때문에, 목책(木柵)
으로 그 외형(外形)을 만듭니다.
다시말해, 갑문을 열고 닫는 것을 밖에서 보면, 목책(木柵)이 서로 이런(→ ←)식으로 가까이 오고, 또 흩어지는 것
(← →)으로 보이지, 서로 접촉하는 면이 청동(靑銅)으로 되어있는지, 또 깍지를 끼는 구조인지를 세심(細心)한 관찰
력이 없이는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책(木柵)의 <책(柵)과 책(冊)>은 발음도 같고, 또 모양도 비슷하기 때문에, 이곳 지형(地形)에서 두 손
(手)을 내밀어서 ‘목책(木柵)끼리 깍지 끼는 것’을 “책(冊)을 잡았군!” 또 목책(木柵)이 깍지끼는 것을 푸는 것을 “책
(冊)을 놓았군!” 하는 식으로 조선조(朝鮮朝)때까지 은어(隱語)로 사용하였음을 우리는 눈치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책(冊)은 소홍석납자산(小紅石拉子山)이 되는 것입니다.
‘홍석납자(紅石拉子)’의 뜻은 ‘붉은 돌(石)들이 데려오다’라는 의미인데, 이는 경면주사(鏡面朱沙)와- 황화수은(HgS)
으로 유리(琉璃) 뒷면에 발라서 거울 면(面)이 되게 하는 ‘붉은 글씨’의 안료(顔料)를 뜻합니다. - 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입니다.
흥미있는 것은 이 경면주사(鏡面朱沙)를 사용할 때에는 독성(毒性)이 있기 때문에, 경면주사(鏡面朱砂)를 갈아서
물(水)에 타서 뜨는 것만을 사용하는데, 이를 수비(水飛)라고 칭합니다.
(*) 경면주사(鏡面朱砂)와 수비(水飛)
http://blog.naver.com/aabb65cc/40044280
따라서 관십자하(觀卌字河) 라는 물 위에 수비(水飛)한 (= 물 위에 떠있는) 소홍석납자산(小紅石拉子山)은 마치 경면
주사(鏡面朱砂)를 먹으로 갈아서 써놓은 <소학(小學)>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고, 또 문중차산(門中岔山)이 깍지
끼듯 책(柵)을 잡고 있는 홍석납자산(紅石磖子山: 800m-700m)은 역시 경면주사(鏡面朱砂)로 쓰여진 <대학(大學)>과
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는 조선조(朝鮮朝) 때까지 이곳 정령(井嶺) 해자(垓字)로 박작호(泊汋湖)를 지키기 위해서 매영(梅營)의 군선(軍船)
이 오르내릴 때에, 서로 보고를 하는 방식이 “몇 월 몇 일에 소학(小學)을 놓고, 대학(大學)을 잡았습니다.”라는 식
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좀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이곳의 웅반(雄盤) 갑문들이 쳐져있는 곳을 재구(再構)해보면, 항상적으로 영어의 유(U)자
처럼 산세(山勢)가 두 팔(手: Arm)을 내민 곳에 갑문을 쳐주었음이 확인이 되기 때문에, 그 첫 견본(見本)이 등장한
다는 면에서 기억하면 효과적인 산세(山勢)인 것입니다.
(*) 이런 면에서 소학(小學)을 잡았다 놓는 위치는 지도(地圖) 상단(上端) 경도표시선 6(6)~6(7) 사이입니다
(*) 소학(小學)을 보는 양책자령(樣冊子嶺: 981m) - 8차(次) 및 7차(次) 갑문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1] 6차(次)갑문은 수위(水位)를 해발 310m로 올리고, 5차(次)갑문은 이 310m의 수위(水位)를 유지하는 갑문이 될 것
입니다.
그런데, 소홍석납자산(小紅石拉子山)의 남록(南麓)을 지날 때에는 북고하(北古河)는 구불거리면서 동류(東流)하게
됩니다.
소홍석납자산(小紅石拉子山)을 지나면, 이 산의 오른쪽에서 동남류(東南流)(↘)하는 삼도구(三道泃)의 진행방향(↘)
에 따라서 남고하(南古河)를 만날 때까지 계속 동남류(東南流)(↘)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에서 유입(流入)하는 하천
(河川)은 동남류(東南流)로 방향을 꺽은 곳에서 약 3Km정도 되는 곳에서 ‘왼쪽으로 눕힌 니은(ㄴ)자 모양’으로 합류
하는 대록권자구(大鹿圈子泃) 밖에 없습니다.
이 대록권자구(大鹿圈子泃)는 “큰 사슴들을 우리(=圈)를 치는 여울물”이란 뜻인데, 이는 니은(ㄴ)자 모양의 하천(河川)
북(北)쪽에 ‘큰 사슴’을 키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은(ㄴ)자 모양의 대록권자구(大鹿圈子泃)의 동남(東南)(↘)쪽이 ‘우리(=권(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하천(河川)
이름이 붙게 된 것입니다.
즉 북고하(北古河)가 동남류(↘)하는 것과 평행되게 동남류(↘)하는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남류(↘↘)하는 2개의 하천의 서북(西北)쪽에 ‘왼쪽으로 눕힌 니은(ㄴ)자 모양’의 대록권자구(大鹿圈子泃)가 있으니,
병목(=bottle neck)이 생기는 것이고, 따라서 ‘큰 사슴’은 북고하(北古河)와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가 두 동남류(東南
流)(↘↘)하는 해자(垓字)가 되고, 그 밑은 남고하(南古河)가 동북류(↗)하면서 폐쇄시키기 때문에, ‘큰 사슴을 가두는
우리’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의 <적(吊)>은 “조상(弔喪)하다.”의 ‘조(弔)’와 혼용(混用)이 될 정도로 같은 의미
로 쓰이지만, 원래의 뜻은 “단애(斷崖)를 밧줄로 매단 다리(=교(橋))를 통해서 건너가 이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적교(吊橋)라는 말에서 아직도 그 말이 살아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적(吊)은 “험(險)한 지형을 넘어서 이르다”라는 개념을 띠고 있는데,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의 황(幌)은 휘장
(揮帳) - 즉 군기(軍旗)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는 “휘장(揮帳)을 들고 북(北)쪽으로 이르게 하는 봇도랑”이란 이상한 의미를 지닌
하천(河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북고하(北古河)가 남고하(南古河)를 만나기 직전에 동북류(東北流)(↗)하는 작은 하천(河川)이 하나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에 있는데, 영어로 ‘Wai-yang-tzu-kou’로 적혀 있습니다.
이는 왜양자구(倭樣子泃)로 볼수 있습니다. 왜(倭)의 뜻에 “빙돌아가다”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는 “빙돌아가게
하는 개울”이란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와 북고하(北古河)가 평행하면서 동남류(↘↘)하고 왜양자구(倭樣子泃)(↗)가 동북류하는
관계로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와 왜양자구(倭樣子泃) ‘사이’는 2.5Km밖에 안되고, 또 이를 가로막는 ‘턱’은 300m
고도(高度)로써 1Km 밖에 안됩니다.
이는 5차, 6차 갑문이 수위(水位)를 310m로 올리고, 유지하는 역할이 있음을 고려하면, 결국 왜양자구(倭樣子泃)는
북고하(北古河)와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가 서로 통(通)하게 하는 서(耳亇)가 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큰 사슴에 우리를 치는’ 지역 - 즉 대록권(大鹿圈) 지역에는 교정산(轎貞山:813m)가 진산(鎭山)인데,
<교(轎)>는 ‘가마’, ‘두 사람이 타는 수레’를 의미합니다.
즉 <교(轎)>는 산중(山中)에서 달리는 전차(電車)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 대록권(大鹿圈) 지역이 ‘숨어있는 군사(軍事) 요충(要衝)’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숨어있는 군사(軍事) 요충(要衝)’임이 들어나는 것이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가 동남류(東南流)하는 도중(途中)
에 북적황자(北吊幌子)란 -이는 “북(北)쪽으로 이르는 군기(軍旗)가 있는 곳”이란 의미입니다. - 이름을 지닌 진(鎭)이
상중하(上中下)로 무려 3개가 분포되어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참고: 교정산(轎貞山:813m)은 대록권자구(大鹿圈子泃)에서 동남(東南)쪽에 직선거리로 2Km 되는 곳에 있습니다 (*)
아무튼 <왜양자구(倭樣子泃)-서(耳亇)>가 있는 바로 동남(東南)쪽에 보면, 교정산(轎貞山:813m) 산세(山勢)가 동남류
(東南流)하다가 영어의 유(U)자처럼 팔(手)을 내밀고 있고, 또 그 사이로 조어대산(吊魚台山)이 곤(丨)자로 끼어들고
있습니다. 이 때 끼어드는 조어대산(吊魚台山)의 높이는 300m 이지만, 유(U)자로 둘러싸는 산(山)의 높이는 400m입
니다.
따라서 이 북고하(北古河)는 유(U)자 모양으로 돌아갈수 밖에 없는데, 유(U)자의 오른쪽 어께로 서남류(↙)하는 하천
(河川)이 ‘Kua-p'ai-kou’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는 자신(自信)이 없지만 괘파구(掛坡泃) - 즉 “제방(堤防)에 거는(=괘(掛)) 개울”이란 의미의 한자(漢字)로 영어
음가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런 지리(地理)에서는 이 괘파구(掛坡泃)가 서남류(西南流)(↙) 하는 오른 쪽에 유(U)자의 오른 쪽 팔(手: 400m)와
이곳에 서남류(西南流)하는 괘망자-산(掛望子-山)(Kua-wang-tzu) :500m-300m))을 연결하고, 수위(水位)를 310m로
올리는 5차 갑문을 쳐주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괘파구(掛坡泃)가 유(U)자 처럼 된 5차 갑문과 6차 갑문 사이에서 수원(水源)을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6차 갑문은 당연히 유(U)자의 왼쪽 팔(手)이 되는 산(山: 400m)과 그 맞은 편 조어대산(吊魚台山: 300m)를 연결시키면
될 것입니다.
[3]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북고하(北古河)와 나란히 동남류(↘↘)하는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가 남고하(南古河)와
만나는 하구(河口)쪽에도 똑같이 310m로 수위(水位)를 올리는 갑문과 310m의 수위(水位)를 유지시키는 갑문을 두
어야 북고하(北古河)와 물(水)이 넘나들게 하는 <왜양자구(倭樣子泃)-서(耳亇)>가 서(耳亇)로써 작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가 남고하(南古河)와 만나는 하구(河口)을 미군사지도(1950년대)를 통해서 살펴
보면, 좀 독특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가 이런(↘↗)식으로 꺽여서 약 1Km진행인 된 곳에서 남고하(南古河)가 북류(北流)(↑)
하면서 합류하는 것입니다.
이런 지형(地形)에서는 남고하(南古河)전체를 갑문으로 막아서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의 수위(水位)를 해발 310m로
올려줌은 물론, <왜양자구(倭樣子泃)-서(耳亇)>를 통해서 이 물이 북고하(北古河)의 수위(水位)를 310m로 올려질 수
있도록 갑문을 설치하는 것이 유리(有利)할 것입니다.
따라서 남고하(南古河) 쪽에는 북고하(北古河)의 수위(水位)를 310m로 올리는 ‘동반(同伴)6차(次)갑문’ ‘동반(同伴)5차
갑문’이 쳐지는 것입니다.
먼저 6차 갑문이 쳐질 곳은 갑문을 쳐주는 곳이 산세(山勢)가 팔(手)을 내민 곳이 가장 좋은데, 남고하(南古河)는 2개
의 요령(腰岺) 사이로 해서 북류(北流)합니다.
즉 서(西)쪽 요령(腰岺)은 해발 800m이고 동(東)쪽 요령(腰岺)은 해발 744m인데, 이 동(東)-요령(腰岺)이 북행(北行)
하는 팔(手) 끝의 산(山: 400m)과 - ‘붉은 글씨’로 남고하(南古河)의 <남(南)>자가 적혀있는 곳입니다.
- 그 맞은 편 산(山: 400m)을 - 이는 대록권(大鹿圈) 지역의 동남(東南)-단(端)입니다. - 연결하도록 갑문을 쳐주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東)-요령(腰岺: 744m)>는 북행(北行)하면서 영어의 유(U)자처럼 두 팔(手)을 내밀고 있는데, 그 사이로
북류(北流)하는 하천이 ‘Hsia-ch'a-t'iao-kou’로 되어 있습니다.
자신(自信)은 없지만, 이는 소차퇴구(小岔腿泃)의 - “넓적다리(=腿를 나누는 작은 개울”이란 의미이고, 허리(=요(腰))
다음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퇴(腿)로 한듯 합니다. - 음가(音價)를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동반(同伴) 5차(次) 갑문’을 쳐줄 곳은 이 소차퇴구(小岔腿泃)의 우측에 있는 ‘넓적다리’ 산(山: 515m-300m)과
- 이곳에 ‘붉은 글씨’로 된 남고하(南古河)의 <하(河)>자가 적혀 있습니다. - 바로 북(北)에서 튀어나온 산(山: 400m-
300m)를 연결하면 될 것입니다.
주의(注意)할 점은 이 소차퇴구(小岔腿泃)의 오른쪽 ‘넓적다리’에 ‘동반(同伴) 5차(次) 갑문’을 설치해서 남고하(南古河)
를 막는 곳의 동북(東北)쪽으로 계속 <동(東)-요령(腰岺)>이 북행(北行)하면서 진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동(東)-요령(腰岺:744m)>의 ‘북단(北端) 가지 끝’바로 좌측에 남고하(南古河)가 동남류(東南流)하면서 접속되기
때문에, 결국 이런(∧)으로 <동(東)-요령(腰岺:744m)>의 첨단(尖端)이 있기 때문에, 북고하(北古河)는 브이(V)자 즉
이런(↘↗)식으로 꺽어져 올라가게 됩니다.
이는 쉽게 말해서 <동(東)-요령(腰岺:744m)>의 첨단(尖端)(∧)이 ‘북고하(北古河)를 가로막은 갑문’을 칠 여유를 계속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5차 갑문을 쳐줄 곳과 이 <동(東)-요령(腰岺:744m)>의 첨단(尖端)(∧)까지의 거리는 별(丿)자 방향으로 3Km나 됩니다.
(*) 5차(次), 6차(次) 갑문을 설치하는 곳
: 경도(經度)표시선 6(8)선상(線上), 위도(緯度)표시: 3~2 ‘사이’
(*) 동반(同伴) 5차(次), 6차(次) 갑문을 설치하는 곳.
: 경도(經度)표시선 6(8)선상(線上), 위도(緯度)표시선 2의 교점(交點) 주변
(*) 위 [1], [2],[3]을 살필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그런데, 북고하(北古河)(↘)와 남고하(南古河)(↗)가 합쳐서 결국 이런(↘↗)식으로 흐르기 때문에, 이를 통칭(通稱)
할 때에는 고하(古河)로 불렀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고하(古河)는 “옛 하천(河川)”이란 의미여서 하천(河川)이름치고는 매우 특이하다는 점을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고조선의 부루(扶婁)태자께서 이 정령(井嶺) 인터체인지(Interchange)해자(垓字)를 태자(太子)시절 때
부터 개척하였던 기억을 후세(後世)에 “아주 옛날부터 박작호(泊汋湖)를 통해서 중국 천자(天子)로 부터 투자(投資)
를 받는 투자-조정 배달화백이 벌어지는 성호(聖湖)를 지키는 해자(垓字)-강(江)으로 있었던 하천(河川)”을 약술
(略述)해서 고하(古河)로 칭하였다고 보면, 이곳 지리(地理)의 지명(地名)에 담긴 <지리(地理)-서사(敍事: narrative)>
가 명료해집니다.
즉 부루(扶婁) 태자(太子)께서는 “언젠가는 중화(中華)의 천자(天子)들이 해외(海外)를 정복(征服)하기보다는 순방
(淳庬)체제를 운용하면서 이 세상을 민주적(民主的)으로 통합하는 삼한(三韓) 사람들에게 투자(投資)하며서 그 ‘프리
미엄’으로 제국(帝國)을 운용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임을 까달을 것이다.”라는 차원에서 박작호(泊汋湖)와 그 주변을
보호하는 정령(井嶺)의 인터체인지(interchange)해자(垓字) 수로(水路)를 개척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한자(漢字)로 나타내자면 <각화(覺華)-주의(主義)>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루(扶婁)-태자(太子)의 뜻은 드디어 통일신라-발해(渤海) 때부터 이 박작호(泊汋湖)가 중국 천자(天子)가
투자하는 성호(聖湖)로써 개발되었기 때문에, 예언(豫言)이 성취된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각화(覺華)-주의(主義)>는 계속 내려와서 이윽고 조선조(朝鮮朝) 영조(英祖) 때, “천하(天下)로부터
수로(水路)를 통해서 조공(朝貢)을 받는 섬(島)”인 각화도(覺華島)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각화도(覺華島)는 오늘날 대능하(大陵河)를 갑문으로 막아서 만든 차(叉)-용만(龍灣)에서의 ‘투자(投資)조정 배달
화백’의 접수처(接受處)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비정(比定)할 수 있습니다.
- 각설(却說)하고.
이제 해발 210m의 수위(水位)를 올리고 유지하는 3차(次)및 4차(次) 갑문을 설치할 곳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북고하(北古河)(↘)와 남고하(南古河)(↗)가 합수되면 당연히 그 이름을 고하(古河)로 바꾸어서 진행이 되는데,
묘(妙)하게도 고하(古河)는 대번 영어의 유(U)자처럼 일단 돌아서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유(U)자로 돌아나가는 곳에 남(南)쪽으로 곤(丨)자로 곶(串)을 내밀고 있는 지역의 명칭이 바로 태평초
(太平哨)입니다. 이는 ‘태평(太平)을 가져오는 초소(哨所)’라는 뜻인데, 이곳에 군(軍)이 지키는 ‘거대한 진(鎭)’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흥미있는 것은 이 태평초(太平哨)를 행해서 북류(北流)하는 하천(河川)은 수많은 하천을 방사선(放射線)식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태평구(太平溝)라 칭하고, 이것이 하나의 하천(河川)으로 북류(北流)하는 것을 소가구(蕭家溝)라고
칭하는데, 합쳐서 반납강(半拉江)으로 칭합니다.
따라서 고하(古河)가 유-턴(U-tern)하는 한 가운데에 북류(北流)하는 반납강(半拉江)이 있기 때문에, 물(水) 모양이
영어의 와이(Y)자 비슷해 집니다.
따라서 이곳에 해발(海拔) 210m의 수위(水位)를 유지시키는 이른바 4차(次) 갑문을 쳐줄 위치는 고하(古河)가 유-턴
(U-tern)하면서 <동(東)-요령(腰岺:744m)>의 첨단(尖端)(∧)을 내민 곳(400m-300m)와 그 맞은 편의 산(山: 500m-300m)
이 되는 것입니다.
4차 갑문을 쳐주는 맞은 편의 산(山)은 바로 괘망자-산(掛望子-山:500m-300m)인데, 이 산은 괘파구(掛坡泃)(Kua-p'
ai-kou)가 남류(南流)하는 우측(右側)에서 남고하(南古河)하고 합수(合水)되기 전의 북고하(北古河)에 대해서 한번
갑문을 쳐주는 ‘오목한 살골찌’를 내밀고, 또 고하(古河)가 태평초(太平哨)를 지나서 돌아나가기 직전 브이(V)로
꺽이는 곳에 역시 ‘오목한 살골짜기’를 내밀어서 갑문을 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3차 갑문을 쳐주는 곳은 태평구(太平溝)-소가구(蕭家溝)로 이어진 반납강(半拉江)이 북류(北流)해서 유-턴(U-tern)
한 고하(古河)가 북류(北流)하는 것을 우측에서 바싹 조여주면서 북류하는 산맥(山脈)입니다.
이 산맥은 관문납자령(關門磖子岺: 900m)이 동남(東南)쪽에서 멀리 서북류(西北流)(↖)하면서 올라온 것입니다.
결국 해발 210m로 올리고 유지하게 하는 3차 갑문과 4차 갑문을 쳐주는 곳에는 태평초(太平哨)가 곤(丨)자로 남행
(南行)하는 좌우(左右)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태평초(太平哨)라는 군사(軍事) 진(鎭)이 설치된 곶(串)은 단단한 암반(巖盤)으로 되어 있는 곳으로 추측
됩니다. 왜냐하면, 고하(古河)가 유-턴(U-tern)해 나가고, 또 반납강(半拉江)이 북류(北流)하는 곳에서 곤(丨)자
모양의 곶(串)을 수 천년 동안 유지하려면, 단단한 암반(巖盤)이 아니면 곶(串)의 모양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 암반 <태평초(太平哨)-곶(串)>과 관련해서 생각할수 있는 것은 이를 향해서 북류(北流)하는 반납강(半拉江)에 갑문
과 경첩-갑문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군사(軍事)-지리학(地理學) 적으로 볼 때에, 당연시 되는 지형입니다.
즉 방사선(放射線)식으로 모이는 태평구(太平溝 )입구에 자반(雌盤) 갑문을 치고, 소가구(蕭家溝)에 웅반(雄盤)-갑문
을 치되, 그 ‘사이’에 경첩-갑문을 치는 것입니다.
정령(井嶺)-해자(垓字)에로 접근하는 적선(賊船)이 들어올 때에는 웅반(雄盤) 갑문(閘門)을 열어서 1차 폭류(瀑流)를
내보내고, 그다음에 경첩-갑문을 세운 상태에서 자반(雌盤) 갑문을 연 상태에서 갑자기 경첩-갑문을 젖히면, 2차 폭류
(瀑流)가 나갈 수 있는 지형(地形)인 것입니다.
이 곳 지형은 등고선 높이로 볼 때에 해발 300m 까지 수위(水位)를 높힐 수가 있습니다.
즉 3차, 4차 갑문이 올려주고 유지하는 210m보다 무려 90m를 더 올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 천자(天子)로 부터 투자를 받는 박작호(泊汋湖) 투자-조정-배달화백을 그 왼쪽에서 철통같이 지키는
정령(井嶺)-해자(垓字)를 적선(敵船)이 공격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대(遠大)한 구상을 부루(扶婁)태자(太子)께서 고조선 초기(初期)에 이미했었고, 시설이 이미 고조선 초기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 해발 210m로 수위(水位)를 올리고 유지하게 하는 3차, 4차 갑문을 쳐주는 위치:
경도(經度)표시: 6(8)~6(9), 위도(緯度)표시: 3~2 사이, 태평소(太平哨)가 곤(丨)자로 남행(南行)한 좌우(左右)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령(井嶺) 인터체인지(interchange)해자(垓字)로 선박이 올라갈 때에 마지막으로 수위
(水位)를 110m로 올리는 1차(次), 2차(次) 갑문을 쳐주는 곳만 살피면, 정령(井嶺)해자(垓字) 수로(水路)는 전체적
으로 일별(一瞥)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고하(古河)는 반납강(半拉江)과 합류해서 동북류(↗)해서 혼강(渾江)이 꺽쇠(<)모양으로 꼭지를 내민 곳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고하(古河)의 혼강(渾江) 하구(河口)에 오른쪽에 괘망자-산(掛望子-山) (ua-wang-tzu :500m-300m))이
자리잡고 있는데, 고하(古河)를 건너 맞은 편 동(東)쪽에 보면, 이름없는 산(山)이 500m-300m 고도(高度)로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이름없는 산의 이름은 바로 관문산(關門山)임이 자명해집니다.
왜냐하면, 이 산(山)의 서(西)쪽의 고하(古河)에로 서북북(西北北)방향으로 길게 오는 하천(河川)이름이 관문납자령
(關門磖子岺: 900m) 동록(東麓)에서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이 하천의 이름 역시 당연히 관문납자하(關門磖子河)입니다.
이 관문산(關門山: 500m`~ 300m)과 괘망자-산(掛望子-山)(Kua-wang-tzu)
(500m-300m))사이에서 ① 고하(古河)의 혼강(渾江) 하구(河口)와 ② 고하(古河)와 관문납자하(關門磖子河)의 합수처
(合水處)가 되는 곳까지의 거리는 남북(南北)으로 2Km가 됩니다.
따라서 1차(次) 갑문은 혼강(渾江)의 하구(河口)쪽에 설치하고, 2차 갑문은 관문납자하(關門磖子河)의 합수처(合水處)
가 되는 곳에 쳐주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혼강(渾江)에의 고하(古河) 하구(河口)가 있는 곳의 수면(水面)이 해발(海拔)50m 내외(內外)는 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차 갑문이 해발 110m 수위(水位)를 올린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수위(水位)를 (110m-50m=60m)로 계산
되기 때문에, 약 60m 내외로 수위를 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강(渾江)이 꺽쇠(<)처럼 꺽이는 바로 그곳에 갑문이 설치되어 있고, 그 갑문이 열리면 무려 60m 높이의 폭류(瀑流)
가 흘러나올 때에, “저 것은 무서운 관문(關門)이다.”라고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이곳은 한글의 리을(ㄹ)자, 영어의 에스(S)자 처럼 혼강(渾江)이 심하게 돌아가는 곳입니다.
따라서 관문산(關門山)이나 괘망자-산(掛望子-山)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봉화(烽火)나 깃발로써 할 때
굽어진 혼강(渾江)속에서 피신하고 있던 선박이 보고서 들어오면 안전한 곳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괘망자-산(掛望子-山) - “수위(水位)를 높히 걸어두는 것을 바라보는 산(山)”이라고 지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정령회하(井嶺回河)는 실제로 있었던 것입니다.
아래 ‘솟대님의 요녕성(遼寧省)수계(水系) 지도’를 보면서 정령회하(井嶺回河)가 가운데 정령(井嶺: 1325m)를 두고,
얼마나 크게 ‘둘레’를 치는가를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또 그리고 이런 정령회하(井嶺回河)가 결국 오른쪽에 있는 박작호(泊汋湖)를 보호(保護)하기 위해서 있음을 상기
(想起)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시설을 고조선의 단군왕검(檀君王儉)의 태자(太子)이신 부루(扶婁)태자(太子)가 구상하고 이런 까마
득한 옛날에서 부터 정령회하(井嶺回河)가 놓여져 있어서 갑문을 타고 수위(水位) 510m가 되는 태자하(太子河)까지
계단 오르듯이 설계되어 있었을 역시 부루(扶婁)태자(太子)때 부터 설계되고, 이미 고조선(古朝鮮)때 “언젠가는
중국(中國)으로 부터 ‘투자(投資)-조정-배달화백‘을 하는 박작호(泊汋湖)를 지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라는 수(數)
천년(千年)을 뛰어넘는 시설(施設)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이는 백년대계(百年大計)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천년(千年)대계(大計)인 것입니다.
(*) 정령회하(井嶺回河)를 가늠할 수 있는 ‘솟대 님의 요녕성 수계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조선(朝鮮)은 고조선(古朝鮮)과 동명(同名)을 써도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던 나라였던 것입니다.
정령회하(井嶺回河)는 <장구(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에서 위원하(威遠河)와 갈려지게 됩니다.
우리는 따라서 이 이 “위원하(威遠河)로 넘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포석하(蒲石河)에 어찌 갑문이 설치되어있는가?”
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
지금의 압록강은 위원하(威遠河)를 통해서 대능하(大陵河)에 있는 압록강(鴨綠江)과 연결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좌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