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군 ‘글로스터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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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0월 북진 도중에 만난 영국군 병사 두 명(가운데 치마 차림)이 미군 장병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영국의 군대는 강인한 군인정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미 육군부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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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 내 시야에 두 전투가 들어왔다. 같은 적, 중공군을 상대로 벌인 국군과 영국군 두 나라 군대의 서로 다른 싸움 방식이 내 눈을 붙잡은 것이다. 중공군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춘계 공세를 벌이면서 아군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우선 춘천 서북쪽 사창리(史倉里)에서는 국군 6사단(사단장 장도영)이 뚫렸다. 그곳은 비록 미 9군단에 속한 지역이었지만 그에 배속된 국군 6사단이 방어를 맡았던 지역이다. 한국 전선으로 뛰어든 중공군은 늘 그랬듯이 화력과 병력이 비교적 약한 국군을 노리고 들어온 것이다.
국군 6사단은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춘천 북방 지역을 사흘 동안 사수함으로써 북한 침략군의 진격 속도를 크게 지연시킨 용감한 사단이었다. 그러나 개전 때의 그 기백과는 다르게 이때의 6사단은 하룻밤 사이에 무너지고 말았다. 한꺼번에 방어 지역 전면을 내주고 큰물에 휩쓸린 작은 흙담처럼 붕괴하고 만 것이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야음(夜陰)을 틈타 밀고 내려온 중공군에 맥없이 사단 병력이 무너짐으로써 6사단이 보유하고 있던 화력과 장비 등을 일거에 날려 버리고 말았다. 충격적인 패배였다. 더구나 6사단 방어 지역은 벌판이 아니라 산악 지역이었다. 밤새 사단이 무너지면서 나름대로 건제를 유지하며 병력과 장비 등이 질서 있게 물러서지 못했다.
사창리가 무너지면서 그 남쪽이 흔들거리게 됐다. 사창리를 뚫었던 적은 그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이어 가평을 돌파했다. 아주 위험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 해병사단과 3사단, 영국군 27여단이 그 뒤를 메우고 나섰다. 며칠 동안 이들이 필사적으로 전선을 지키면서 가까스로 중공군의 공세를 막았다.
미 9군단장 윌리엄 호그 중장의 호통이 이어졌다. 휘하의 국군 6사단장에게 심한 질책을 서슴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쉽게 전선에서 물러난 국군 지휘관에게 그만큼 큰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6사단과 비슷한 시기에 서부 전선에서는 영국군 29여단이 중공군을 맞고 있었다. 경기도 문산 동쪽 정면 미 1군단 방어 지역이었다. 그 미 1군단에 배속됐던 부대가 영국군 29여단이다. 6·25에 참전한 영국 여단은 두 개다. 27여단과 29여단이다. 27여단은 전쟁이 터질 때 홍콩에 주둔해 있다가 한국으로 급파됐고, 29여단은 그 뒤 영국 본토를 떠나 한국에 왔다.
영국군 29여단 휘하 글로스터 연대 제1대대는 불굴의 감투정신(敢鬪精神)을 보여 줬다. 제임스 카니 중령이 지휘했다. 이 대대는 중공군 2만7000여 명에 의해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의 235고지에 고립됐다. 그러나 이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고지에 포위돼 있던 시간은 60시간, 사흘이 채 안 되지만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지에서 점차 바닥이 드러나는 탄약과 식량을 보면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 생명의 마지막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용기를 내서 적과 싸운다는 일, 그것은 잘 훈련된 군대가 아니면 절대 치르지 못하는 사투(死鬪)일 것이다.
글로스터 부대원들은 정말 훌륭하게 전투를 치렀다. 특히 고지에 이들만 남겨 놓고 주변의 연합군 병력이 모두 철수한 상황에서 고립된 영국군이 보인 용기와 희생은 실로 대단했다. 영국 자료에 따르면 당시 글로스터 연대 1대대원 800여 명 가운데 59명이 전사하고 522명이 최후까지 물러서지 않고 버티다 포로로 잡혔으며 217명만 전투 막바지 후퇴 명령에 따라 탈출했다.
이들이 사흘간 온갖 불리한 여건 속에 끝까지 분전(奮戰)하며 버틴 덕분에 서부 전선에서 중공군이 야심만만하게 벌였던 대규모 공세(1951년 춘계 공세)는 힘이 빠져 버렸다. 의정부로 향하는 축선에 중공군 병력이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되면서 아군은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중공군이 머뭇거리는 틈을 타 미 1군단의 주력 부대들은 서울과 수도권을 지킬 수 있도록 방어선을 더욱 다지고 힘을 확보했다. 고립된 글로스터 부대가 필사적으로 적군의 진격을 지연시킴으로써 아군에 벌어 준 시간적 여유가 지니는 전략적인 의미는 대단했다.
헌편에서는 국군 6사단이 공세에 밀려 전선을 하룻밤 사이에 적에게 내주는 일이 벌어졌고, 다른 쪽에서는 영국군 글로스터 부대가 사투를 벌여 끝까지 전선을 지켰다. 물론 51년 중공군 춘계 공세 때 나는 영국군의 분투를 즉각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 전투가 끝난 뒤 좀 더 자세히 그들의 전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뒤 두 나라 군대의 전투 방식을 두고 곰곰이 따져 봤다. 영국군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우수한 군대였다. 그들은 조직력이 강했다. 싸움에 임하는 태도가 진지했다. 영국은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한국의 전선에 보냈다(영국 자료에 따르면 연인원 6만3000명이 참전해 1100여 명이 전사). 그들의 다양한 면모는 내 눈에 많이 띄었다. 50년 10월 평양을 넘어 북진하던 청천강 지역 전투에서도 그랬고, 그전의 낙동강 전선에서 보여 준 전투력도 그랬다. 그들은 용감하게 잘 싸웠고, 열심히 싸웠다. 특히 싸움터에서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무엇인가 달랐다.
백선엽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