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법원 이사관으로 근무하는 저자의 법원 생활 객담客談. 법원에서 37년을 근무하면서 느꼈던 점과 일상을 담았다. 평소 법조지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작품 활동을 해온 저자의 다양한 심정이 시와 산문으로 엮였다. 1985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 2022년 12월 수원고등법원에서 정년퇴직하기까지의 시간은 근무라기보다는 저자의 삶 자체이다. 37년 5개월, 법원 공무원으로 살아온 저자의 삶을 반추해 본다.
목차
책을 내며_하나의 계속된 삶
첫째 마당 삶의 여유
01 | 향기
02 | 담배, 그 쓸쓸함에 대하여
03 | 제주 오름 여행기
둘째 마당 살며 일하며
01 | 나는 춘천이 좋다
02 | 관내 산 탐방
03 | 국어문화학교 수료기
셋째 마당 개혁을 꿈꾸며
01 |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
02 | 가덕도신공항의 문제점과 그 대안
03 | 국민 통합을 위한 방안
넷째 마당 근무한다는 것
01 | 불량 민원인
02 | 나는 누구일까요?
03 | 의정부법원에 오고 나서
임용발령사항
책 속으로
1985. 8. 1. 대구지방법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한 이래, 이번 연말 수원고등법원 정년퇴직에 이르기까지 37년 5개월을 근무하게 된다. 어찌 보면 근무라고 하기보다 그냥 하나의 계속된 삶이었다. 직장을 벗어난 삶을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다가오는 정년은 불안하다. 새로운 삶에 대한 걱정, 기대, 두려움이 사람의 마음을 야릇하고 들뜨게 만든다. 어쨌든 삶은 계속돼야 하니까.
---「머리말」중에서
부산에 오면서 지난 세월 부족했던 것이 다 채워졌다. 우선 법원 마당에도 한창 겨울인 1월부터 동백꽃이 피어 있었고, 산책길에도 있으며, 관사 뒤편에 있는 화지산에도 간간이 동백이 피어 있었다. 해운대 동백섬은 동백으로 덮여있고 거제 지심도는 섬 전체가 동백이었다. 피는 시기도 12월부터 4월까지 다양하였다. 피고 지고하면서.
그러던 4월 어느 날, 경남 남해군 독일마을 도로 아래쪽에 위치한 물건마을 어느 빈집에서 동백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였다. 그 집 붉은 함석지붕은 일부가 벗겨지고 마루는 퇴색하였으며, 주위는 돌담과 무성한 숲으로 둘러져 있었다. 그 돌담 가장자리에 선 동백나무는 지붕보다 높았고 꽃이 만개하여 바닥에도 떨어져 수북이 쌓여 있었다. 멀리서 보니 그 떨어진 꽃송이들이 가을날 말리려고 마당에 널어놓은 붉은 고추 같았다. 순간 봄과 가을을 한꺼번에 느꼈고, 그 고요함과 평안함에 전율했다. 최고의 동백을 본 것이다.
---「첫째 마당_향기」중에서
올해 98세의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는 여전히 골초다. 금연이 엄격한 독일에서 그는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는 엄청난 특혜를 누린다. ‘지혜로운 슈미트 할아버지의 담배 연기는 공해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우리로서는 매우 부러운 현상이다. 연전年前에 어떤 의학전문기자가 강연을 왔을 때 들은 이야기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담배를 피워서 행복하고 스트레스도 잘 해소된다면 어떨까.
하지만 담배 피우는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도 더욱 살피게 된다. 그래서 인사이동 시 흡연자는 같은 사무실에 담배 피우는 사람이 오는 걸 아주 좋아하고 환영하고 있다. 한때 강 국장은 그 사무실 사법 보좌관 6명 중 혼자서 담배를 피우다가 흡연자 두 분이 한꺼번에 오는 바람에 3명이 되어, 이번 인사의 최대 수혜자는 자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 3월 국장 연수 갔을 때의 얘기다. 마두역 뒷골목을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밤늦게까지 강 국장과 소주를 마시다가 그가 두리번거리면서 또 담배를 꺼내 물기에,
“강 국장님, 왜 담배를 피우세요?”
“…”
대답이 없기에 다시 물었더니, 귀찮다는 듯이
“국가 재정을 위해서요….”
---「첫째 마당_담배, 그 쓸쓸함에 대하여」중에서
제주 사람들은 진정 강 과장님을 잊지 못해 하는 것 같았다. 부모가 오셔도 어찌 이렇게까지 반가워할 수 있겠는가. 밤마다 찾아오고 낮에도 동행하고. 지난해 강 과장님이 중앙법원에 부임해 와서 점심 식사하러 밖에 나가면, 직원들이 멀리서 보고서도 달려와 ‘강 과장님~’ 하면서 곧 자지러지면서 반가워하는 장면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는 그 상황에 적응이 잘 되지 않았었다.
---「첫째 마당_제주 오름 여행기」중에서
10여 년 전 대구법원 소속 청송등기소 근무 시절, 낙동정맥을 오르내리다가 주왕산국립공원 뒤편인 영덕군 달산면 어느 오지 마을에서 ‘양반탈’을 덮어쓴 듯이 똑같은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놀랍고도 기뻐 쳐다보고 또 쳐다본 적이 있다. 그때는 아예 그 할아버지 댁까지 따라 들어갔다. 들어갔더니 며느리 되는 분이 손님 대접한다고 옥수수를 내어 왔다. 그 할아버지는 이마에 보기 좋은 주름이 여러 줄 겹쳐지고 붉은 혈색에 웃고 계셨다. 아니 웃음을 웃기보다 그냥 얼굴 자체가 웃는 표정이었다. 마치 전화戰禍도 겪지 않고 늙은 사람처럼.
---「둘째 마당_국어문화학교 수료기」중에서
세종 10년, 영남의 강주에서 김화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큰 충격에 빠지고, 스스로의 부덕함을 여러 번이나 자책하고 어전 회의를 열었다. 거듭된 논의 끝에 백성들의 교육에서 그 해법을 찾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한다. 김화가 삼강오륜을 알았더라면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이 인륜이 무엇이고 도덕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집현전 부제학 설순에게 명하여 고금의 충신, 효자, 열녀 중에서 뛰어나게 본받을 만한 인물의 이야기를 뽑아서 글로 써서 그들을 칭송하고,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서는 글 외에 그들의 행적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림을 그려서 책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이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비록 그림으로 보아서 그들의 행적을 과연 얼마만큼 깊이 이해할 수 있을지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이러한 왕의 고민은 살부殺父 사건이 발생한 지 18년 후에야 결실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곧 한글의 발명이다.
---「둘째 마당_국어문화학교 수료기」중에서
사람은 일처리를 효율적으로 잘 해냄으로써 성취감을 맛볼 수 있으며, 구성원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을 때 보람이 있게 된다. 그렇지 못하고 불량 민원인을 만난다든지, 민원 처리 과정에서 진정을 받거나 불친절 카드를 받는 직원들은 무력감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것이 가장 큰 걱정이다. 이 무력감이 직원들을 소극적으로 일처리를 하게 만들고 심지어 우울증에 걸리게 하며 사무실을 침울한 분위기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진정을 받아도 가능한 직원들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 격려하려고 애써 본다. 또 여유를 가지고 민원인을 맞을 수 있도록 민원 부서 업무를 조금이라도 줄여 주기 위해 노력해 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 고민은 깊어지기만 한다.
---「넷째 마당_불량 민원인」중에서
속기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글자 하나하나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단어나 어절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기술입니다.
대개 10음절 이상을 듣고 난 이후에
그 뒤를 따라가면서 속기를 하게 되며,
가장 표기하기 쉬운 방법으로 기록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소란 등 외부 충격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그 10~20음절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사람이 그런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오전부터 저녁까지 때로는 한밤중까지, 또 몇 날 며칠
사무실과 법정을 오가면서 계속 속기업무에 매달릴 때
그 집중력을 한결같이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런 어느 날,
재판이 밤 11시가 넘어갈 무렵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졌답니다.
---「넷째 마당_나는 누구일까요」중에서
출판사 리뷰
내 이름은 속기사,
대한민국 법원의 속기 실무관이랍니다
‘발언 속도가 빠르다. 이해할 수 없다.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고통과 정면으로 부딪쳐 ‘속기록’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낸다. 매일, 매주, 매월, 매년 끊임없이. 법원에서 속기 실무관으로 일했던 정준호 법원 이사관의 경험담이다.
속기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록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로 단어나 어절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기술이다. 대개 10음절 이상을 듣고 나서 그 뒤를 따라가면서 속기 문자로 기록한다. 소란이 일어나거나 해서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10~20음절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쏟아지는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사무실에서 문장 만드는 작업을 하다 보면 법정 신문 시간의 3배 이상 걸리기 일쑤다.
법원 공무원은 평생직장이라 할 정도로 이직률이 낮지만 근무 여건과 대우는 열악하다. 업무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 어깨, 손목 통증은 직업병이다. 휴일 사무실은 난방도 되지 않는다. 그 겨울에 언 손을 겨우 녹여가며 밤늦게까지 녹음을 듣고 문장을 만들었다. 법정에서 돌멩이를 던지거나, 민원 업무를 보는 창구 직원에게 느닷없이 폭행을 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판에서 너무 오래 속기를 하다 쓰러져 재판이 중단되고 119에 실려 간 날은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는 불평불만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일이 바빠도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동료를 소중히 여기며 가장 잘하는 것을 찾아 가꾸어 나가려 했다. 삶의 여유를 찾아 여행도 떠나고, 살며 일하며 법원 사람들과 함께 산을 탐방하면서 마음도 나누었다. 개혁을 꿈꾸며 사회 문제에 대해 목소리 높여 개선 방안을 내놓고, 근무한다는 것의 의미를 고찰하기도 했다. 그렇게 직원들과 부대끼며 틈틈이 쓴 글을 신문에 기고하고, 법조지나 코트넷에 게시하였다.
그중 선별한 12편의 글과 시, 사진이 어우러진 이번 수필집은 그간의 법원 공무원 생활을 훑어 나간다. 37년 5개월, 저자는 청년과 중년 시절을 바친 직장에서 벗어난 삶을 상상해 보지 못했다. 불안하고 걱정되지만 한편으로 기대로 들뜬다. 대구지방법원에서 대법원까지, 법원에서의 만남과 경험은 새로운 시작의 토대가 된다.
때론 타인의 길에서 내 삶의 이정표를 발견하기도 한다. 은퇴에 막연한 두려움이 느껴진다면, 저자의 직장생활을 따라가며 그간의 생활을 돌아보라. 지금까지 해낸 것처럼 앞으로의 삶도 잘 흘러가리란 걸 알게 될 것이다. 시간은 한숨 바람처럼 지나가 어느덧 정년퇴직을 맞이하지만, 어쨌든 삶은 계속된다.
첫댓글 그간의 이야기에 가슴 먹먹합니다.
37년 5개월간의 고단함과 단단함이
인생 2막을 펼쳐갈 힘이 되었겠지요.
의미있는 책입니다.
앞으로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정준호 선생님, 출간 축하드립니다.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에세이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
축하드립니다, 정준호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