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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하얀색으로 표시된 나라, 즉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3개국이 바로 발트 3국. 발트는 왼편에 씌여진 Baltic Sea를 말한다.
이 3개국은 왼쪽으로 폴랜드와 면해있고 폴랜드에서 조금 더 왼쪽으로 가면 덴마크가 나온다 리투아니아에서 불과 80Km정도 가면 덴마크라고 했다.
Baltic Sea의 윗쪽으로 가면 스웨덴, 핀랜드가 나오고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의 오른쪽에는 러시아가 있다. 에스토이나 윗쪽의 바다를 Gulf of Finland라고 부르는데 그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St. Petersburg(상트페테르부르그)가 있다.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남동쪽으로는 벨라루스라는 생소한 이름의 나라가 있고.(벨라는 white의 의미. 예전의 백러시아)
요즘 이 발트 3국이 관심이 가는 중이다. 그 이유는 한 여름에도 기온이 20도까지 오르지 않는 선선한 나라라는 점. St. Petersburg에서 차량으로 이동할 만한 가까운 지역이라는 점. 숨겨진 진주, 보물이라고 불리운다
에스토니아(에스토니아어로 Eesti 에스티)는 북쪽과 서쪽은 발트해, 동쪽은 러시아, 남쪽은 라트비아와 면해 있다. 수도는 탈린(Talin). 공식 명칭 에스토니아 공화국(에스토니아어 Eesti Vabariik 에스티 바바리크). 1940년 소련에 편입되었다가, 1991년 노래혁명(Singing Revolution) 후 독립을 인정받았다.
발트 3국의 최북부에 있으며, 빙하작용을 받은 토지는 낮고 평평하다. 기후는 습윤하며, 삼림·습지·목초지는 매우 넓다. 인구중 65%가 에스토니아인. 공용어로 에스토니아어를 사용.
의회는 단원제로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5년. 1995년 경제성장률은 3%로 소련 15개 공화국 중 가장 안정적이며 러시아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발트해를 통해서 핀란드, 스웨덴에 국경을 접한다. 핀란드에서는 에스토니아를 "Viro" 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에스토니아(에스토니아어로 Eesti 에스티)는 북쪽과 서쪽은 발트해, 동쪽은 러시아, 남쪽은 라트비아와 면해 있다. 수도는 탈린(Talin). 공식 명칭 에스토니아 공화국(에스토니아어 Eesti Vabariik 에스티 바바리크). 1940년 소련에 편입되었다가, 1991년 노래혁명(Singing Revolution) 후 독립을 인정받았다. 발트 3국의 최북부에 있으며, 빙하작용을 받은 토지는 낮고 평평하다. 기후는 습윤하며, 삼림·습지·목초지는 매우 넓다. 인구중 65%가 에스토니아인. 공용어로 에스토니아어를 사용. 의회는 단원제로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5년. 1995년 경제성장률은 3%로 소련 15개 공화국 중 가장 안정적이며 러시아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발트해를 통해서 핀란드, 스웨덴에 국경을 접한다. 핀란드에서는 에스토니아를 "Viro" 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1. 에스토니아의 역사 현재 에스토니아 지역은 BC 8000년경 거주한 수렵어로인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으나 BC 3000년경 동부에서 이주한 빗살무늬토기 사용 종족(Finno-Ugric)이 정착하여, 에스토니아인의 조상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1154년 아랍 탐험가 알-이드리시(al-Idrisi)의 ‘지구에 대한 묘사(Description of Earth)’에 의해 최초로 문명권에 소개되었다. 13세기 초 독일과 덴마크 등이 주도한 발틱해 선교원정대(crusade)가 진출하기 전까지 에스토니아 토착민들은 지역공동체 단위로 생활했다. 1201년 리가(Riga)에 발틱해 선교 활동 기지를 확보한 독일 브레멘 주교 알베르트(Albert) 세력이 덴마크와 연합하여, 1208년부터 에스토니아 지역에 대한 진출을 추진하였다. 1219년 덴마크가 에스토니아 북부 지역에 진출하여 덴마크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탈린(Tallinn)을 건설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러시아의 세력 확장으로 시작된 리보니아 전쟁(Livonian War, 1558~1583) 결과로 에스토니아 중동부는 덴마크에, 북부는 스웨덴에, 남부는 폴란드에 분할 지배되었다. 리보니아 전쟁에 뒤이어 발발한 스웨덴-폴란드 전쟁(1600~1629)에서 스웨덴이 승리하여, 1629년 아르트마르크 평화 조약(Altmark Peace Treaty)이 체결되었고 이에 따라 에스토니아는 1710년까지 80여 년간 스웨덴에 복속된다. 스웨덴 지배 기간 중 오늘날 북부 에스토니아 지역은 탈린이 주도(州都)가 되는 에스토니아(Estonia) 주와 남부 에스토니아 지역은 리가(Riga)가 주도가 되는 라트비아(Latvia) 주로 편성되어 1917년까지 이 행정 구역을 유지했다. 18세기 초 러시아의 피에르(Peter) 대제가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폴란드, 덴마크와 연합하여 스웨덴에 대항하여 일으킨 북방전쟁(the Great Northern War, 1700~1721) 결과로, 에스토니아는 1710년 스웨덴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에스토니아는 1721년에 체결된 우사카우풍키(Uusikaupunki) 평화조약에 의해 러시아에 합병된다.
1917년 3월 에스토니아인의 요구로 에스토니아 주와 리보니아(Livonia) 주의 북부 지역 및 세인트 상트 페테르스베르그(St. Petersberg) 주의 일부로 속했던 나르바(Narva)가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통합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붕괴되고 새로 수립된 볼세비키 정권이 독일군에 밀려 퇴각하던 1918년 2월 24일 에스토니아는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곧이어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독일의 1차 대전 패전으로 1918년 11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40년 6월 18일 대규모의 소련군이 에스토니아에 진주하였다. 1940년 8월 6일 에스토니아는 소련의 16번째 공화국으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가 정착되었다. 1941년 6월 14일에는 발트 3국에서 대규모의 시베리아 추방이 시행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의 공격으로 에스토니아는 오스트란트(Ostland)의 일부가 되었으며, 억압 체제하의 수용소에서 5,500여 명이 사망했다. ***노래 혁명(Singing Revolution)이란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에서 벌어진 평화적 반소비에트 혁명이다. 이 사건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빠르게 독립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몰려든 2백여만 명이 넘는 군중이 빌뉴스-탈린 사이의 가도를 점거한 채 손을 맞잡고 노래했는데, 그 행렬은 600km 이상 이어졌다. 에스토니아의 마지막 소련 군대가 떠난 1994년 8월 31일 이후 에스토니아는 서유럽과의 관계 정상화에 노력을 기울여 2004년 3월 29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2004년 5월 1일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 에스토니아는 세계에서 최초로 휴대폰으로 투표를 치르게 되는 방식을 2012년에 도입하였다. 2011년 1월 1일부터 유로를 공식화폐로 도입했다. 2. 에스토니아의 지리 에스토니아는 국토 전체가 빙하침식에 의한 평야 지대이다. 러시아의 겨예에 추드스코예 호가 있다. 발트해와 핀란드 만을 끼고 있기도 하다. 평균 해발고도가 50m에 불과하고 가장 높은 지대라고 해도 318m에 지나지 않는다. 유혈암(오일셰일)과 석회석 그리고 전체 국토의 7%에 해당하는 삼림이 국가 경제의 주 원동력이 되고 있다. 에스토니아에는 1,400여 개나 되는 작고 큰 호수가 있다. 대부분은 작지만 가장 큰 호수는 3,555㎢에 이르는 페이푸스(Lake Peipus)이다. 강 줄기도 많아서 162km의 지류인 보한두 강(Võhandu), 파르누 강(Pärnu) 등이 있다. 에스토니아 인근의 도서 지역은 1,500여 개 이상인 것으로 추측되며 가장 큰 두 섬은 사레마(Saaremaa)와 히우마(Hiiumaa)이다. 3. 에스토니아의 자원 자원이 부족한 국가로 알려져있지만, 곳곳에서 소규모의 자원이 발견되어 사용하고 있다. 유혈암과 석회석이 주를 이루며 이 국가의 48%를 덮고 있는 숲도 이에 포함된다. 유혈암과 석회석 외에도 에스토니아는 인회암, 우라늄과 화강암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채굴하지 않고 있고, 그나마 채굴 하고 있는 곳도 소규모에 불과하다. 최근에, 에스토니아 여론은 원자력발전소를 짓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이는 동쪽 나르바에 있는 발전소들이 노후화 되어 전기 공급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2016년까지 재건되지 않으면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다고 한다. 식품 제조업, 건설업 그리고 전기 산업이 에스토니아의 산업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2007년 조사에 따르면 이 산업에 종사하는 종사자 수가 8만 여명이고 이는 에스토니아 노동 인구 중 12%를 차지 한다고 한다. 또 이 나라의 주요 산업은 제조업과 화학 산업인데, 이다비루 주와 탈린에 많이 있다고 한다. 에스토니아는 첨단 산업의 중심지라고도 불리며 정보 산업으로 크게 발전한 국가이다. 이는 90년대 중반, 정부에서 실시한 트리그리후페 프로젝트 때문이다. 덕분에 에스토니아는 전 세계 국가 중 인터넷 속도 1위(2010년 기준)를 차지했으며, 수도 탈린 중심지의 건물은 거의 대부분 와이파이 설비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또한 스카이프가 바로 에스토니아에서 만들어졌는데, 창설자가 에스토니아인이고 본사가 탈린에 있다고 한다. 4. 기타. 전체 인구는 대략 131만으로 추산되고 수도 탈린은 39만여명이 살고 있다. 냉량습윤한 대륙성기후이며, 평균기온은 1월 -5.9℃, 7월 16.8℃이고, 연강수량은 600~750㎜이다. 라트비아도 여타 발트 국가와 마찬가지로 전략적 요충지인 발트해에 인접해 있어, 부동항 진출을 위한 강대국들의 야욕에 의해 13세기 이후 독일,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 등 줄곧 이민족 지배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수도는 리가(Riga). 민족구성은 라트비아인이 58%이며,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국민소득의 48.6%를 서비스업이 23.9%를 제조업이 22.8%를 농업이 차지하고 있다 기원전 2000년 경부터 핀우그르계의 리브인들과 레트족이라고 불리는 발트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1201년 독일 무역상과 선교사들이 라트비아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도시 리가(Riga)가 건립되었다. 1285년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에 가입하였으며, 1500년대 리보니아 전쟁(Livonian War, 1558년~1583년) 결과로 라트비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복속하게 되었다. 리보니아 전쟁은 발트해 진출을 목적으로 당시 라트비아의 지명이었던 리보니아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및 스웨덴 제국 간의 전쟁이었다. 1905년~1907년 라트비아 혁명이 일어나고, 1918년 11월 라트비아 국가평의회에 의해 라트비아의 독립국가 선포가 단행된다. 1920년 8월 러시아-라트비아 평화조약 체결로 러시아는 라트비아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1987년 6일~8일 수도 리가에서 최초로 반(反)소련 대규모 집회가 개최되었다. 1991년 8월 최고평의회는 완전 독립을 선언했다. 이어 1991년 9월 라트비아는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에 가입했다. 1994년 8월 드디어 소련군의 완전 철군이 이루어졌다. 1999년에는 동유럽권 최초의 여성 대통령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Vaira Vike-Freiberga)가 취임했다. 2001년에는 수도 리가(Riga)의 도시 건립 80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2004년 라트비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 및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2008년은 독립 90주년이었으며, 2011년은 재독립 20주년이었다.(역사 끝) 라트비아는 동유럽 평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국토 전체가 매우 평탄한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저지대로, 비옥하며 숲이 우겨져 있다. 주위에는 다우가바 강, 리에루페 강, 가우야 강이 있다. 해안선의 길이는 총 531km이다. 기후는 습윤한 대륙성 기후.. 그러나 발트해 와 접하고 있어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띤다. 여름에는 따뜻하고 봄과 가을에는 아주 온화하지만 겨울은 북쪽에 있어 다소 춥다. 강수량은 8월에 가장 많다. 러시아 일대의 북쪽 기압골의 영향으로 겨울이 되면 칼바람이 몰아치거나 눈보라가 치는 일도 많으나, 북위 60도에 가까운 위도를 감안하면 상당히 기온이 높은 편으로 같은 위도의 러시아 내륙에 비하면 훨씬 따뜻하다. 라트비아 이민국에 의하면, 라트비아인구는 약 230만명이지만, 라트비아 국적자는 약 180만명, 외국 국적 보유자가 3〜4만명이다. 그리고 나머지 약 45〜50만명의 소련 시절부터 귀화하지 않고 영주해 온 이민은 무국적자로 취급되고 있다. 그들은 문자그대로 국적이 어느 나라인지도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 시절의 라트비아에서 태어나서 1번도 외국으로 나간 적이 없는 경우에도, 귀화하지 않는 한 라트비아 국적자가 될 수가 없고, 다른 나라의 국적보유조건이 충족되어 있는 것도 아닌 것 또는 생활의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을 희망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나라에게나 국민으로서의 취급을 받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선거권을 시작으로 한 다양한 시민권행사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며, 인도적인 관점에서 라트비아에서 가장 중대한 정치문제의 하나로 해결을 갈망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러시아(무국적자의 대부분은 러시아계 주민)뿐만 아니라 유럽의 인권담당기관으로부터도 여러 번에 걸쳐서 개선을 재촉받고 있지만, 비라트비아계 주민의 라트비아 사회로의 귀화에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라트비아 당국은 아직까지도 해결책을 보이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으로 무비자로 러시아 방문이 가능하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역사적 사실로서는, 1991년에 라트비아가 소련으로 독립한 때에 소련으로의 병합(1940년)이전의 국민과, 그 직계자손으로만 자동적으로 라트비아국적의 여권이 수여되었다. 그 이외의 소련 시절에 라트비아로 이민온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한 러시아인에게 수여되지 않았지만,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러시아인자녀에게는 한쪽 부모의 요청만으로 국적이 부여되어 있다. 그들은 귀화하지 않고 계속 영주해서 소련 정부가 발급한 여권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1997년부터 라트비아 정부가 발급한 Alien Passport(무국적 여권)으로의 전환이 의무로 지게 되어 무국적자라고 정의되게 되었다 리투아니아(리투아니아어: Lietuva 리에투바)의 공식 명칭은 리투아니아 공화국이다. 동쪽과 남쪽에 벨라루스, 서쪽은 발트해, 남서쪽은 러시아와 폴란드, 북쪽은 라트비아와 닿아있다. 발트 3국중에서 인구와 영토가 가장 많고 넓다. 수도는 빌뉴스(과거에는 카우나스). 민족구성은 리투아니아인이 83%이다. 전체산업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식품 및 담배가 29.6%, 기계장비가 18.3%, 섬유의복·가죽제품이 17%이다. 6세부터 11년간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1990년 종교교육을 도입하는 등 교육개혁을 단행했다. 로마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리투아니아가 제일 북쪽에 위치한다. 1009년에 ‘리투아니아’라는 국명이 기록물(Annales Quedlinburgenses)에 최초로 등장했다. 1253년 민다우가스(Mindaugas) 국왕이 즉위하면서 최초의 리투아니아 통일 국가가 건설되었다. 1385년 야가일라(Jogaila) 대공이 세례를 받고 폴란드 여왕과 결혼하여, 폴란드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왕조연합 결성(Act of Kreva)이 이루어졌다. 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제3차 분할 이후 리투아니아는 러시아령으로 귀속되었으며, 자국어 출판이 금지되는 등 엄격한 러시아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1905년 반(反)러시아 민족운동이 고양되면서 자치권을 획득했다. 리투아니아는 1990년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어 리투아니아는 1991년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에 가입했으며,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와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에 가입했다. 2009년은 리투아니아 국명이 부여된 지 1,000주년이 되는 해로 다채로운 국가적 행사가 거행되었다.(외교부 자료 2011.6) 리투아니아는 빙하로 조각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높은 곳은 서부와 동부의 고지대인데, 300m 이상인 곳은 없어서 가장 높은 아우토자스(Aukštojas Hill) 언덕으로 294m 정도이다. 많은 습지와 호수가 있어서 삼림을 포함하여 전체 국토의 30%가 숲이다. 리투아니아에서 제일 추운 1월의 평균 온도는 약 영하 25도에서 31도 가량, 제일 더운 7월에는 24도에서 33도 가량인 편이다. 하지만 최근 2011년 1월에는 영하 10도에서 0도 사이를 기록하였다 지구여행 발트 3개국 여행기엔 한결같이 숨겨진 보물과 같고 아름답다는 말 뿐 일것이라고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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