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의 문화적 변방, 북구
우리나라 도시 중 가장 부유한 도시, 산업의 도시, 중공업의 도시로 첫 번째로 손꼽는 울산, 하지만 이곳에는 공공공연장이 3곳에 불과하다. 한 곳은 울산시가 직접 관리하는 울산문예회관이고, 다른 두 곳은 북구문화예술회관과 울주군의 문화예술회관으로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그중에서도 북구는 농촌지역, 공단지역, 수산업지역이 혼재하고 임야가 전체 면적의 절반이 넘으며, 도농이 혼재된 지역이다. 최근 몇 년간 공단지역 유입 인구의 증가로 특히, 구청 청사가 위치한 연암동과 호계 지역을 중심으로 젊은 세대들이 많이 모여들면서 도시의 모습이 크게 활기를 띄고 있다.
2003년 9월, 울산 북구문화예술회관(482석 규모 중극장) 개관으로 문화예술을 통한 향기 나는 삶에 대한 꿈과 기대가 지역민들에게 크게 생겨났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은 법. 덜렁 공연장 하나 생긴다고 단기간에 한 지역의 문화예술이 확 달라질 수는 없다. 그 공연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술단체가 생겨나고 문화 수용자 층이 형성되고 아울러 두 집단을 연결시켜주는 다양한 매개체가 존재해야 비로소 그 지역 문화예술의 꽃이 활짝 필 수 있는 것이다. 울산문화예술회관이 위치한 남구지역으로 문화예술적인 혜택이 편중되어 있었고 문화예술단체나 울산시민들도 ‘제대로 된 공연을 하고, 본다는 건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라는 생각이 굳어져 북구문화예술회관은 그저 변방의 외로운 섬에 불과했다. 개관 당시의 의욕적인 ‘종합문화예술공연장’이라는 위상에 무색하게 인근의 유치원이나 학원의 재롱잔치나 발표회장으로 전락하여 문화예술회관 취지 자체조차 흐지부지해진 상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방향타 잃은 채 망망대해를 떠도는 난파선과 다름없는 절망적 상황이었다고 한다.
| 척박한 땅에 연극의 뿌리를 내리다
2010년, 불리한 환경 속에서 북구문화예술회관과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몇몇 예술단체들이 중앙의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사업 확대를 계기로 질적인 발전을 시도했다. 미래를 선점하는 것이 성장과 발전을 위한 최고의 전략이라고 했던가. 북구문화예술회관과 3개 예술단체들이 상주협약을 맺으며 울산 그중에서도 낙후된 북구를 문화예술도시로 바꾸기 위한 힘찬 시동을 걸었다.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 사업계획이 발표되자, 북구문화예술회관은 명맥만 이어오던 회관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호기라 판단하고, 울산지역의 여러 예술단체들에게 이 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였으나, 북구의 열악한 환경, 단체들의 미온적인 반응 등 여러 가지 이유로 3개 단체와 어렵사리 상주협약을 맺고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극단세소래도 3개 상주단체 중 하나였다.
북구문화예술회관 이미정 기획운영팀장에 따르면 당시 북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연극공연은 회관 자체기획으로 서울의 작품을 초청하여 연간 1~2회 정도만 공연되었고 연극공연에 대한 순수 대관은 전무했을 정도로 북구지역은 연극적으로 척박한 땅이었다.
극단세소래 박태환 대표는 “북구 지역에 연극을 즐기는 관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분석하자면 북구문화예술회관에서의 연극 관극이 주민들의 일상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라며 “그런 현실인식에 근거해 ‘지역민과 함께 만드는 연극 공동체’를 2010년의 목표로 정하고 6개월 간 무려 4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고 말했다.
상주단체로 활동하기 이전부터 극단세소래는 꾸준히 작품의 레파토리화를 추구해 왔고,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이라는 사업이 1회성 공연지원이 아니라, 2년간 지원, 그리고 단체의 운영 지원 특히 전체 지원금의 30% 이내에서는 인건비로 사용이 가능했기에 연간 안정적으로 공연을 준비하고, 각 공연마다 색깔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정 팀장은 “상주예술단체로서 극단의 활동을 통해 북구문화예술회관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이 점점 바뀌는 것을 현장에서 피부로 직접 느꼈으며, 극단세소래가 북구지역에 새로운 문화 활력소로 등장하면서 다분히 관성적이고 관습적인 지역민들의 문화생활에 연극 관극이라는 새로운 자극을 던져주었다.”고 평가한다. “첫해 4개 연극작품을 1,630명이 관람했고, 한 번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은 북구의 다른 상주단체 공연의 소식을 접하게 되고, 몇 사람씩 소모임으로 자연스럽게 다음 공연에도 참여하기 시작하여 상주예술단체지원제도가 지역민들의 삶속에 자연스레 녹아들며 성공적으로 연착륙하는 것을 보며 매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첫 테이프를 끊은 <행복한 가족>은 현대사회를 풍자한 극으로, 제삿날 아들, 며느리, 손녀 역을 인력 파견업체에서 보낸 사람들이 ‘가족인 척’ 하는 것을 보여주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연극적인 재미를 느끼게 했다. 이러한 유쾌한 관극 경험이야말로 관객이 다시 공연장을 찾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9월에 공연한 <선착장에서>는 지역의 대표 예술축제인 무룡예술제의 성공적인 피날레를 장식하며 지역 예술계의 중심역할을 맡을 수 있음을 실력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또한 이 작품의 공연을 계기로 울산 지역에서 연극을 전업으로 하는, 실력과 경험을 갖춘 베테랑 배우들이 극단세소래로 모여들며 상주단체지원제도라는 예술지원시스템의 또 다른 긍정적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박태환 씨는 귀띔했다. 삶의 진정성과 가족의 소중함을 감동적으로 풀어냈던 마지막 공연 <두동 이야기>는 잘 알려진 ‘양덕원 이야기’를 ‘두동’으로 각색한 것으로, 극단세소래는 2008년 아르코 소극장에서 이 작품을 서울 관객에게 소개했었다. 관객들에게 극단세소래의 연극은 재미있고 믿을 만하다는 등식을 확실하게 심어주었고, 이후 공연에 관객들이 꽉 차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 대박을 터트리다
2010년의 성과와 성공을 바탕으로 박태환 대표는 연극 관극이 보다 쉽고 편해져 자연스런 일상이 될 수 있도록 작품과 일정들을 계획하며, 2011년에는 ‘누구나 즐길 권리, 문화는 생활이다.’를 내세웠다. <의자는 잘못 없다>는 북구문화예술회관에서 개관이래 가장 길게 한 실험적인 기획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관객들이 안 오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이미정 팀장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5일간 자그마치 2천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다. 객석의 반응도 뜨거웠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연극이 이렇게 재미있구나!’ 하며 행복해하는 표정이었다. 배우들도 커튼콜을 마치고 공연장 로비로 뛰어나가서 관객들에게 화답하며 어울렸다. 상주예술단체로서의 극단세소래가 딱 1년 여섯 작품 만에 올린 그야말로 대박, 쾌거였다.
마지막 토요일 공연은 인근의 고등학교에서 한 학년 전체가 작품을 보러왔다. 입장료도 오천 원으로 착하게 받았다. 관극을 하고 나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연장 바깥 계단 앞에서 또 다른 상주예술단체인 ‘동해누리’가 즉석 야외 공연을 펼쳐 보이며 큰 박수를 받았다. 하나의 공연장에 복수의 단체가 모여 있는 집적의 장점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그밖에 <돼지사냥>은 극단세소래의 장점이 잘 드러난 블랙코미디 작품이었고, <늙은 도둑 이야기>는 기획 단계부터 철저하게 관객층을 겨냥하고 그들에게 맞는 작품과 일정을 선택한, 마케팅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는 맞춤형 제작공연으로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수능을 마친 청소년들에게 연극을 통해 문화적인 충전의 기회를 주었고 아울러 그들을 자연스럽게 미래의 연극 관객으로 개발하고자 하는 좋은 시도였는데, 상주예술단체 활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냈다고 할 만 했다.
이렇게 2011년, 북구문화예술회관에서 3,858명의 연극관객이 극단세소래와 함께 했다.
| 극단세소래 마니아들, 사고를 치다
극단세소래는 작년 11월 <늙은 도둑 이야기>를 끝으로 상주예술단체로서의 작품 활동을 마감했다. 그런데 1년 6개월 동안 8개의 작품을 공연하면서 만난 관객들 중에서 극단세소래를 후원하고 극단세소래의 팬을 자처하는 단체와 관객들의 요구로, 2010년 겨울에 올린 <두동 이야기>를 2012년 2월 10일 ~ 19일, 20일간 토마토 소극장에서 다시 공연을 했다. 뒤늦은 앵콜 공연인 셈이었다. 하루라는 공연 일정 때문에 못 본 사람들이 많다는, 봤지만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좀 더 가까이에서 배우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관객들의 요구로 만들어진 공연! 극단세소래의 2백여 명 팬들이 제작비 일체를 부담하고 직접 홍보를 하고 티켓 판매를 했고 관객들을 모았다. 새로이 서술되고 있는 훈훈한 울산의 연극사였다.
상주단체육성지원이라는 지원시스템이 공연장과 예술단체가 제대로 만나 일을 벌이면 얼마나 많은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는지를 극단세소래는 2년간의 활동을 통해 확실히 보여주었다. 상주예술단체지원제도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케 해준 극단세소래와 북구문화예술회관이 2012년도 이후에는 어떤 활동을 펼칠지 궁금해진다. 지역의 주민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발적인 팬들의 결속을 이끌어내어 공연 비수기에도 팬들의 요청과, 팬들의 제작으로 막이 올라가는 놀라운 현상이 울산에 널리 퍼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