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금강굴은 지금은 그리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데요.
철계단이 막 놓이던 시절엔 달랐습니다. 국민의 절벽, 국민의 석굴이었죠.
아래는 철난간이 놓이던 1966년 전후의 긴박^^했던 이야기입니다.
"강원산악회 40년"(1998년, 189p)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설악을 중심으로 한 강원산악계를 담은 귀중한 자료입니다. 대부분의 산악회사(山岳會史)가 1인이 정리하는 방식임에 비해 이 책은 회원들의 회고로 이루어져 있어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전 강원연맹 회장을 맡았던 김종수는 '초기 설악산 등반 시절'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기고 있는데요.
지금 사진은 1964년 7월 26일(책에서는 3월 25일이라 하는데 스캐너의 힘을 빌려보니 오기(誤記임이 드러남) 당시 속초산악회장인 이기섭 박사를 주례로 신랑 이정희군과 신부 김동숙양이 비선대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고, 이게 산악결혼식의 효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름철 설악산 금강굴 '답사'를 했다며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등골이 오싹하는 소름이 끼쳤다. 지금은 그곳에 철책계단을 따라 오르면 금강굴에 오를 수 있으나, 당시에는 아무런 시설물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금강굴에 오른 사람도 없었다...
암벽을 타고 올라야 하는데.....
참으로 힘겹게 오르니 이곳은 어느 때인가 피난처였는지 깨진 항아리 조각들이 있었다.
지금 당연히 철책계단을 오르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고등학교 수학여행때 저곳을 오르면서도 어질어질하던게 엊그제 같은데요.
그렇다면 철난간은 과연 언제 세워졌을까요?
저시절 금강굴에 대한 기록은 그런데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성대산악부 50년사"를 보면 '1959년 비선대 위의 금강굴은 현재와 같은 철사다리가 없었으므로 암벽으로만 오르내렸다'라고 적고 있는게 눈에 띱니다.
금강굴에 철난단이 설치된 건 1966년입니다. 1966년 6월 5일, 비선대에서 금강굴간 유료도로 개통식 및 명명식을 했다고 합니다. 이때 입장료를 받은 곳은 금강굴로 오르는 계단 출발점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1966년 이전에 금강굴을 오른 사람들은 극히 드물고, 사실을 말하면 전문산악인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낸 셈입니다.
1966년 겨울의 모습이니 따끈따끈한 사진입니다.
'유료'라는 데에 의아할 분 많을텐데요. 당시 시민들은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고(故) 손경석 선생님의 "설악산"(성문각 1971)에 의하면, 설악산의 명승지와 인공구조물은 모두 수익자 부담원칙이 냉정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신흥사, 울산암 철계단, 금강굴 철계단, 권금성(도보시), 비룡교 등은 각각 입장료 20원(학생 10원) 였습니다.
1973년 주부잡지인 "주부생활"의 8월호 별책부록인 "바캉스에의 초대"에 의하면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일주문을 새로 세운 신흥사가 40원(학생 20원), 비룡교, 울산암 사도(私道), 금강굴 사도, 권금성 사도 등이 30원(학생과 단체 20원)으로 인상되었습니다. 사도(私道)라는 말에서 보듯이, 돈과 시간이 드는 다리와 철계단 건설은 민자사업인 셈이죠.
국립공원 입산료는 1974년부터인데, 여기에는 "한국백명산"의 김장호 교수 등 산악인들이 신문에 '산이 동대문 운동장이냐!'하며 반대를 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부분은 글이 길어지니 여기서 그만둘까 합니다.
대구의 청산회는 "청산"(창간호, 1970)에서 1969년 제4회 설악제 등반 참관기를 싣고 있는데요. 대구에서 설악산까지 지금은 상상도 못할 드라마틱한 노정(路程)을 보여줍니다. 가리방으로 긁은 이 창간호를 찾지 못해 그 이야기를 보여주지 못해 아쉽습니다.
참고로 "대구학생산악연맹 50년사"에도 이 책이 없는 걸 보면, 지금 한국에는 몇권 남아 있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책을 찾는대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중에 금강굴 관련해서 이런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1969년 10월 5일, 금강굴 입구 일인당 입장료 20원, 굴 자체보다 내려다보는 조망이 좋다"라고요. 불과 그 몇년전 강원산악회의 김종수가 목숨을 걸고금강굴의 절벽을 올라야 할 때의 이야기하고는 완전히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철난간이 없었을 시절은 아무도 꿈꾸지 못하던 조망입니다.
그리고 금강굴 정상인 장군봉에서 보는 조망하고, 인공 계단에 서서 보는 조망하고는 전혀 다르죠.
사람들은 계단 난간에서, 금강굴에서 스릴을 느끼며 바라본 조망이 오래도록 기억되었을 겁니다.
이만희감독에 당대 최고 배우인 신성일과 문희 주연의 '원점'은 설악산 올로케로 꼭 보셔야 합니다.
영화를 보시려면 --> 여기를
이 영화의 압권 중 하나는 홍콩영화인양 철난간에 왼손을 묶어두고 악당과 싸우는 장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곳이 바로 금강굴이라는 것입니다. 악당이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은 저 위가 막다른 끝으로 금강굴이 있다는 건 알기 어려웠습니다.
왜 울산바위의 철계단이 아니었을까요? 그건 울산바위의 철난간이 놓여진건 1967년이니, 이 영화가 방영되고 난 다음에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1966년 전후이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1967년에 신성일은 자그마치 51편에서 주인공을 맡습니다. 그해 한국영화는 총 185편이 제작되었으니 신성일의 비중을 알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살인적인 그의 스케줄 때문에 신성일이 이 영화를 본 건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07년이었다고 합니다.
이상, 설악산 금강굴의 철계단이 세워지기 전후의 이야기 그리고 공짜가 아니었다는 사실, 어쩌면 그래서 더 좋은 조망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한번 해보았습니다.
첫댓글 재미있어요 !
말씀 감사드립니다...~~~
@모자이크-등산박물관 프랑스 산악회 ㅡ 샤모니 본점
@모자이크-등산박물관 뮤지 알핀
@모자이크-등산박물관 알핀 뮤지 홍보물 5개 가져왔시유 !
@아름다운길 작고 소박하고 그리고 산세하고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네요...~
선배님, 얼굴 건강하고, 공기좋은데서 있어서 그런지 더 좋아 보입니다...
매일 이어졌을 와인^^의 아로마 덕분일까요~~
@아름다운길 배낭에 넣고 다녔을 그 헤아림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샤모니 산악박물관